깨달음 너머
우리가 깨닫는다고 하는 것은 자기의 인생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깨닫는다고 하는 게 공을 아는 것이어서 자성이 없어 무아와 법이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뭔가 나름의 지적인 성취가 있다고 해도 그것이 인생을 이해하는 것이지 별 다른 게 있을 수 없습니다. 어차피 이 세상의 지식이고 그건 자기 삶의 문제입니다. 우리 삶을 이해하는데 공의 방법으로 해석할 수 있는 관점을 본 것이 됩니다. 하지만 공의 관점만이 있는 게 아니라 실의 관점도 있습니다. 공에 대한 것도 집착이어서 뭐든지 공으로만 해석하려는 것도 병이 됩니다.
우린 존재하지 않는 공이기도 하지만 존재하는 실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어떤 의미와 기준으로 보느냐로 그러한 갈림이 있는 것이지 본래 공이거나 공이 아니거나 식의 실체가 뭐냐는 사실에 대한 관심은 아닙니다. 이런 실체가 뭐냐에 대한 관심일 거라고 오해하는 것은 서구인들의 사고에 우리가 물들어서 입니다.
공이라고 깨달은 사람도 세상이 또는 자아가 공이라고 원래 공으로 구성된 것이라고 이해하려는 서구적인 실체가, 즉 자아가 있는 것이냐 없는 것이냐 식의 이해를 하려고 합니다. 사실은 꼭 서구적인 것이라고만 할 순 없습니다. 성향에 따른 관점도 있어서 사물로 또는 원자화해서 존재적인 측면을 이해하려고 하는 사람도 있고 이런 것이 좀 더 희박해서 쉽게 무아나 공으로 볼 수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서양이 동양보다는 좀 더 원자화하고 사물화하면서 보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서쪽인 인도 쪽에서 공에 대한 논의가 있었는지 모릅니다. 우리 동쪽으로 올수록 흐름이나 배경이나 활동적인 것으로 보거나 자아를 내세우지 않기도 합니다.
이러면 애초의 접근방법이 다른 것이 됩니다. 이 다름이 있다는 것을 알면 전혀 다른 세상 이해가 됩니다. 세상을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따위의 관심에서 세상과 함께하는 방법을 고민하는 전환이 있어야 하며 내 자아가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관심에서 어떻게 세상과 살아가야 할지 남과 어떤 관계를 가져야 할지 행위에 대한 고민으로 전환합니다. 이제 그만 자아의 유무만을 문제 삼지 말아야 합니다. 너무 구태의연합니다.
공이라는 것도 존재라는 것에 대한 분별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존재방식에 대한 이해가 달라진다고 나을 것은 없습니다. 그보다 존재이고자 하지 않는 전혀 다른 의미의 흐름을 이해하라고 하고 싶지만 이해라는 것으로 될 것이 아니니 역시 어려운 것입니다. 이걸 공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아닙니다. 내가 연기로 이루어진 것이고 자성이 없고 하는 식의 공이니 존재가 아니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논의 자체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깨달음이라는 것이 옳은 건 아닐지 모릅니다. 깨달음이라는 것이 사고체계를 구성하는 것인데 세상이 어떤 방법으로 존재하는지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하는 식의 관념 체계를 구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 근원적인 욕망은 그러한 깨달음의 포섭을 벗어나려고 하고 빠져 나가려고만 하는데 이건 애초부터 그러한 것으로 해석되고 이해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틀 지울 수 없고 이해될 수 없는 내 본래의 무언가를 이름 짓고 관념 형성시키고 정의하고 규제해가면서 깨달음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그건 오히려 자기의 무한한 자유를 억압하고 구속하는 것이 될지 모릅니다. 깨달음이라는 게 뭔가 본 것이 아닌가요? 본 것이란 나름의 지적인 견해가 생긴 것이 아닌가요? 뭔가 알았다고 하는 것이니까 사실 이런 뭔가 조금 아는 게 생겼다고 수행하는 곳에선 깨달음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학문하는 곳에선 그런 건 깨달음이 아니라 학문의 진전이 있는 것입니다. 같은 것을 어디에 서 있느냐로 다른 평가를 받는 건 웃깁니다. 물론 불교에서도 해오라고 구분하기도 합니다.
아무리 대각이라고 파천황의 깨달음을 했다고 해봐야 지적인 이해를 넘어가지 못합니다. 그런 것마저도 넘어가는 대, 대, 대각을 했다고 해도 그런 대각을 해야 한다는 그것 자체가 이미 관념입니다. 이걸 알고 넘어간 것이 증오라고 하는데 증오도 견해입니다. 다만 지적인 것이 아니라 마음이 만든 견해인 거죠. 이건 대각했다고, 깨달았다고 하는 생각이나 말이나 욕구를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지 이런 말을 하려는 그것이 이미 자기를 포섭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원하는 것이 이미 처음부터 잘못된 길을 들어가는 것입니다. 시작부터 엉뚱한 짓인데 이걸 말해줄 방법이 없습니다. 지적인 추구와 마음의 추구를 이해해야 합니다. 이걸 구분해야 진짜가 되어갑니다. 이걸 이해하면 이미 된 거 아닌가요?나는 이런 것을 했다고 말하거나 생각하는 순간 이미 자기를 틀 지운 것입니다. 또 이런 걸 저런 걸 해야지 하면서 선망하고 목적으로 삼고 발심하는 그것부터 억압된 것이고 통제된 것이며 지배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건 자기의 지식으로 자기를 얽어매는 것이죠.
진짜 본래는 그렇게 틀이 되지 않고 언어화 되지 않고 관념화 되지 않으며 뭐라고 할 수 없는 그 무엇입니다. 그런데 우린 거꾸로 그것을 언어화 하고 틀 만들고 지식으로 구성하며 관념화 합니다. 게다가 이걸 잘하면 머리가 좋다고 하거나 깨달았다고 말하기도 하면서 교만에 빠져갑니다. 우린 자유를 꿈꿉니다. 무한자유, 절대적인 자유 말입니다. 그러니 깨달았다고, 뭔가 알았다고, 득도했다고 말하지 말아야죠. 애초에 이런 걸 하려고도 말아야죠. 자기가 원하는 환상에 빠져 있을 뿐입니다. 그대가 원하는 그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건 자기가 자기를 지배해서는 안 되는 것을 지배하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뭔가 깨닫고 이해하고 성취가 있다는 것이 자기의 무한자유를 길들였다는 것 밖에 안 됩니다. 자기 억압하는 본태라는 것입니다.(이거 내 말이네 ㅠㅠ) 앞글의 비법에서 지식으로 마음을 달래려고 하지만 결국 마음의 아쉬움으로 또다시 지식추구는 일어나야 한다고 했는데 이것의 이유를 설명한 것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개목걸이처럼 목에 직접 걸어놓지 않으니까 조금은 아니면 많이 자유로움을 느낄지 모르지만, 방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한계를 인식 못하는 지적 수준이며, 방에서 나오면 집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이며, 집을 나와도 주인의 시야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주인을 벗어나도 마을을 벗어나선 굶어 죽으며, 마을을 벗어나면 들개가 되어 자기 생존의 처절함에 놓입니다. 이런 들개가 된 자들은 비참해도 자기의 무한 야성으로 자유롭습니다. 이렇게 우린 들개가 되고 싶어 합니다. 탈출을 꿈꾸고 이탈을 욕망합니다.
하지만 따뜻하고 먹을 것이 있는 주인의 곁을 떠나려는 자는 본적이 없습니다. 어쩌다가 버려지거나 길을 잃어서 들개가 되긴 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