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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종합자천공부법

철학과 굴뚝청소부

작성자환공(桓公)|작성시간26.06.15|조회수5 목록 댓글 1

 

 

 

철학과 굴뚝청소부

 

 

 

지은이 이진경

 

 

자천을 할 때 단순히 개인의 수도하는 측면을 말한다면 

과거의 화두를 붙잡고 공부하든 호흡을 하든 만년전 주문을 외든 

아무런 상관 없이 수도의 성과는 나온다.

 

하지만 이건 개인적인 애고이즘일 뿐으로 

그렇게 수도해서 자신은 뭔가 경지를 이룰지 모르지만 

다시 자기의 경지를 누군가에게 설명한다면 

언어를 사용해야하고 언어는 지금의 문명에 맞는 개념을 사용해야 한다.

 

사람과의 소통을 하기위해선 

사람과 같은 생각과 감정과 사회적 실천속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지금의 문명과 사회의 가치체계를 알아야 하며 

그래야 자기가 이 문화속에서 하나의 개체가 즉, 존재로서 인정받고 활동할 수 있는 것이다.

 

맑스의 실천속에서 규정되고 

비트켄슈타인의 생활형태속에서 그때그때의 의미를 가져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의 들뢰즈식 차이를 만들지 못하고 안주하고 과거의 것에서만 머문다면 이미 이 세상에선 지금의 현대(모던)에서 무의미한 수도자일 뿐이다.

 

신의 깨우침을 

지금 시대의 관념에 맞게 해석하고 번역하는 것이 그리 쉬운게 아니다.

그럴려면 지금의 이데올로기나 지식의 흐름을 알아야 하는데 역시 만만하지 않다.

 

지은이가 뒤에 쓴거 처럼 

[뇌과학의 성과를 모른 채 인식이 무언지를 철학적으로 논변하는 것이나,분자생물학이나 인공생명 연구의 성과를 모르면서 인간이나 생명에 대해 사유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미 역사학은 인류학의 방법론을 사용하고 있으며,경제학이나 사회학은 카오스나 복잡계 과학의 연구방법을 통해 갱신되어야 합니다. 문학은 생물과 기계의 변화된 경계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삶에 대해 다룰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모든 지식은 

분과의 형태로 존재하는 지식의 낡은 영토에서 벗어나 

다양한 영역을 횡단하는 탈영토성을 강화해야 하며, 

분과가 요구하는 낡은 연구의 규칙등에서 탈코드화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것을 우리 자천자는 힘들어도 

어느정도 노력해서 공부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지금 이 시대에 살아야 하고 미래를 창출해야하는데 

배우고 알아야 할 것이 너무도 많고 책임도 큽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단순히 수련지식이나 공부하고 

구태의연한 과거의 반복적 정보암기나 하면서 

자천하는 것은 곤란하며 자기 개인의 도의 증진외에는 관심없는 

그 애꾸같은 견해의 미천함은 저에겐 화를 돋구는 일이지요

 

과거 조선의 퇴계만해도 그 당시의 조선지식인의 첨단에 있었습니다.

그 도학이 맞든 틀리든 그러한 엄밀한 학문을 했지요

그런데 지금 자천자들이 그만한 학문적 성취를 하고 

논의의 엄밀성이 있는지 되묻고 싶습니다.

호흡이나 하고 명상이나 하면서 결코 그러한 학문적 성취를 이룰 수 없을 것입니다.영안이나 투시로 자기의 덜떨어진 지식을 해소하려는 

비뚤어진 욕망이 있는 것은 아니지요? 아마 여기는 그런 사람이 없겠지요 ..

지은이가 각각의 철학자의 문제설정을 얘기하는데 아마 지은이의 문제설정일 겁니다.그 철학자가 그러한 문제설정으로 철학한 것과는 상관없이 이 지은이의 문제설정입니다.

 

그리고 철학자들을 잘보면 

그 당시엔 근대적 한계로 인해 신이나 주체나 실체를 내세우지만 

그들의 철학하는 자세는 근대라기보다 탈근대라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철학과 학문을 만들려는 그들의 욕망은 니체의 권력의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의 입장에선 데카르트나 칸트들이 한계를 보인다고 하지만 

그들의 욕망은 그들의 이론과는 상관없이 탈근대적 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도 이 지은이가 쓴 이 책을 위주로해서 하는 말입니다.

역사적으로 철학의 변천을 말하는데 

들뢰즈식의 차이의 반복을 방법적인 것으로 설명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식이면 철학은 차이화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는가 봅니다. 

그리고 이건 진보한다고 말하기도 하는 듯합니다.

 

포스트모던이즘이 나올때까지 진보한듯이 말하니까요 

그리고 여기서 또 다른 것이 어떻게 차이화 할까요? ㅎㅎ 

끝에 동양에서 할지 서양인이 동양을 이용해 할지 얼버무리는데 

새로운 대상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대상설정방식이 있어야 하구요.아무튼 책이 재미 있습니다.

 

지은이가 우리의 사고진행과정을 역사적인 철학자들을 이용해 잘설명하고 있습니다.서양인들의 철학사라기보다 우리가 자기 성찰을 통해 사유하고 사고하면서 성장하는 그러한 과정을 설명하는 듯도 합니다.내가 생각하는지, 생각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아는게 뭔지, 알 수 있는 것인지, 누가 아는 것인지...

이러한 의문들에 대한 철학자들의 고민과 해결 그리고 그 해결에 나타난 오류들과 한계를 통해서 우리들 각자가 비판에 비판을 거듭하며 결국은 자기자신을 알아가는 사고의 모험 같습니다.

 

맑스의 실천을 통한 지각의 설명을 보셨나요?

수도 역시 앉아서 이런 선정 상태에 들어가서 하루 몇시간, 

몇년의 수행을 하는게 실천없는 유물화된 박제가 아닐까요?

그렇게 수련법 필요없다고,생각이나 감정으로 살아가는 삶이 수련이라고 해도 이해하기가 너무 힘들죠?

 

이 책에서 설명하는 것처럼 부시맨에게 콜라병의 용도와 의미를 설명하는거 같습니다. 의미이해의 맥락과 실천적 현실이해가 많은 수련자들이 저와는 다릅니다.

 

제가 보기엔 

수련법의 이론과 체계가 구태의연한 관념에 빠져 있지요 

그리고 책이나 이론은 실천도 없고 현실성도 없는 죽은 내용들이기도 하고 

사람에 따른 응용력과 적용성의 방법도 모릅니다.

그래서 더 독서하고 이론을 배우라고 합니다. 

제대로 이론을 천착해서 그 비판능력을 기르고 문제점을 찾으라고요

과거 선불교는 무조건 아니라고 깨부수라고 거칠게 했지만 

이미 선禪도 고리타분해진 화석이 된지 오래입니다.

어떤 방법도 소용없습니다. 자신이 알아듣지 못한다면요

 

프로이드는 우리 자천자들이 엉성한 윤리의식에 빠져 있는 것을 비판하는 것이지요.내면에 다양하고 흉칙한 무의식이 있는데 억지로 자신을 순수하고 착하게 되어야 한다고 억압하고 상처입히며 착한척 할려고 합니다. 

착한아이 신드롬인지 히스테리인지 인격장애인지...

 

이런 자천자들이 많아요 

착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힘들어하는 무지몽매한 사람들...

 

니체가 자신의 욕망을 긍정하고 그것을 똑바로 보라고 합니다. 

권력의지는 내가 무언가를 원하고 가치평가 한다면 그것을 관찰하면서 

그 솔직함과 욕망에 떳떳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이 진리이고 아름답다고 한다면 

그것이 진리이고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그러한 것을 

내가 진리이고 아름답다고 욕망한다고 하는 것을 이해하라는 것이죠

니체가 이성을 넘어 감성의 경계로 들어가는 문을 열지만 

아직도 이성주의는 사라지지 않고 

사람들은 뇌로 또는 환원적이고 존재적이고 요소적인 사고를 하지요 

아마 앞으로 수백년이 흘러도 그럴겁니다.

 

자기관찰하고 위빠사나한다는 사람은 많아도 

이렇게 자기의 욕구를 이해하고 보면서 그러한 것에서 해방되는 사람은 없습니다.오히려 보이는 자기욕구를 억누르고 정화하고 깨끗하게 해야한다는 억압과 통제로서 착한아이 히스테리를 부리는게 다죠


언어학적으로 말하면

난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이기도 하다.

있다와 이다가 같이 사용하는 것이 한국말이니 존재하고, 존재다. 이게 다 된다.근데 하이데거나 서양철학자들은 이걸 이해못한다. 

그건 그들이 환원적인 근대철학의 망령을 벗어나기가 

얼마나 힘겨운지 보여주는 단적이 예라고 하고 싶다.

 

우리식 욕으로는 [씨는 못속인다.] 입니다. 우히히히

 

난 나이니 존재이고 존재하고 있는 중으로 존재하기 위해 애쓰고 있기도 하다.활동과 정지를 같이본다.

운동과 의미를 같이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이게 양자역학에 나오지 않는가?

빛은 파동이고 입자라는..

나아가 어느정도 존재하는지, 어느정도 존재인지도 있다고 난 생각한다.

경향성이 매순간 마다 개체마다 다르다고 생각한다.

 

여긴 더 설명이 있어야 한다.

서양은 있다와 이다가 구분안되고 한단어로 되어 있다.

우린 구분되는 이유는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으로, 뭘 하면서, 어떤 목적과 의도로서 존재하는 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냥 있는 것보다 어떤 목적으로 있는가를 중시하기 때문에 

이것이 구분되어 사용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왜 다른 것은 서양은 구분과 분별을 하면서 자르는데 

이건 잘라서 구분하지 않고 하나로 합쳐져서 사용하는걸까? 

신앞에 존재하기만 하면되어서 일까? 

우린 신앞서 있기보다 내가 뭔가 의미가 있기를 바라는 것이 될까?

언어이든 철학이든 보편적 규칙으로 인간과 세계를 설명하려는 것이 

근대적이거나 지금의 많은 사람이 고정되고 일반화하며 선입견을 가진 사람의 성향입니다.견해가 바르지 못하다고 봅니다.

 

이걸 무조건 틀리다고 할 순 없고 가설로 허용되는 한계를 정하고 사용하며 용도가 지나면 폐기하고 다른 것으로 대체하면서 융통성있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보편은 있다. 다만 유효기간과 허용장소가 있다고 생각한다.

언어가 있는 것도 아니고 

형이상학이 있는 것도 아니고 

로고스가 있는 것도 아니며 

진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본체나 신이 있는 것도 아니라 

그것을 원하는 욕망이 있는 것이다.

 

더 자세하게 쓸 수도 있는데 너무 장황하면 

더 어려울거 같아 스스로 읽고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별 내용은 아니지만 대단히 중요한 내용들입니다.

난 차이를 초월과 비슷하게 보며 자천의 차이화는 도의 증진으로 계제의 상승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에서 도의 초월보다 덕의 초월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이건 당연한 것이니 더 설명할 필요 없겠죠

새로움과 창조로 일상생황과 사회생활과 하루의 사소한 일과를 

과거의 내 기억과 고정된 관념으로 보지 않고 

이 순간을 영원으로 순간의 절실함으로 살고 사물을 봐야 합니다.

 

이걸 일념삼천이라는 천태지관의 경구나 

성자자성의 중용의 경구로 말할 필요는 없겠죠 

주일무적의 경敬까지 설명하는 차이誠와 동일성敬의 개념은 이미 과거부터 있었습니다.다만 제대로 이해를 못한 후손들의 어리석음이 있을 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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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빛몸 | 작성시간 26.06.15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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