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발하기도 힘들다.
미발, 이발을 동정으로 말할 경우 난 고요한 미발이 더 크고 광대하다고 생각하고 이발의 움직임은 미발 중에 나타나는 일부라고 봅니다. 또 이발이 하나의 움직임이 아니라 여러 이발의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의식, 감정은 하나씩이 아니라 한 번에 다양한 의식들과 감정들입니다. 미발도 하나의 전체가 고요하게 있는 게 아니라 다양한 미발이 고요하게 있으며 고요함의 정도도 역시 모두 다릅니다. 더 고요하고 덜 고요하고의 차이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미발이라고 하는 게 틀리고 양자요동처럼 미세한 요동들이 무수히 많다고 해야 합니다. 그래서 미발이 발하기 전이 아니라 작은 발이어서 미발입니다.
未發이 아니라 微發입니다.
동의 움직임도 마찬가지입니다. 고요함은 의식의 움직임의 입장에서 또는 감정의 움직이는 입장에서의 상대적인 고요함입니다. 또는 외부 사물과의 접촉을 하는지 안하는지의 차이로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대상이 있어야 움직임이 있고 대상이 모호하면 상대적으로 고요해집니다. 그런데 대상이 모호하거나 멀 수는 있어도 없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래서 고요함이란 것이 상대적인 고요이지 절대고요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감정이 발하지 않은 때는 없습니다. 발한 것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있을 뿐입니다. 이걸 감정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만약 진짜 고요함을 가진다고 한다면 그런 고요함은 없다고 해도 됩니다. 인식할 수가 없고 도달할 수가 없습니다. 움직이는 것은 멈추고 고요해질 거라고 볼지 모르지만 움직이는 것은 결코 멈추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멈춘다는 것은 자기의 존재를 포기하는 것이고 소멸하는 것이며 무화된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멈춤은 다시는 움직이지 못합니다. 멈추고 고요한 것은 있는 것이 아니어서 없는 것이 있는 것이 되지 못합니다. 외부의 영향도 받지 못합니다. 서로 전혀 다른 것인데 상대하며 대립시킨 것은 절대 고요와 절대 움직임을 말하는 게 아니라 움직임의 상대적 덜 움직임과 빠른 것의 차이를 말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말로 인한 오해인 거지 멈춤과 움직임, 동정은 서로 대립되는 개념이 아닙니다. 말하기 위한 설정입니다.
사람들은 추측으로 가보지 못하고 알지 못한 것을 설정하기도 하는데 진이나 무나 정이나 하는 궁극의 그 무엇입니다. 또 완전함이나 절대나 순수나 이런 것도 그렇습니다. 본체개념들은 대개가 이러한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것을 설정하고 사고 진행을 하고 싶어 합니다.그래서 미발이라는 것도 잘못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발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발하고 있지만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인지한 것과 못한 것이지 미발과 이발이 아닙니다.
미발이라는 말자체가 전혀 우리가 말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미발된 것을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알면 이미 발한 것이 아니던가요? 이미 발한 것을 상대로 발하지 않는 것을 만든 추측입니다. 이건 근거 없는 논리입니다. 논리는 되어도 실재가 되지는 못합니다.하지만 자천은 논리가 아니고 실재이니 분명 감정이 발해 느끼기 전의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앞에선 그렇게 말했죠. 미발과 이발이 위아래로 있기도 하고 앞뒤로 있기도 하고 함께 뒤섞여 있기도 합니다. 진여나 생멸이나 평상심이나 부동심이나 열반이나 멸진정, 도덕, 선, 신성, 본성, 우주의식, 순수의식 등 모든 형이상학적인 본체론의 경우도 이렇게 이해합니다.
위아래일 땐 일없이 조용히 있을 때 자신의 내면을 관조할 때 이렇게 느끼기가 쉬우며, 앞뒤는 몸을 움직이고 일하며 행동하며 일상에서 좀 더 여유 있게 관찰하며 자신의 불선과 사욕을 보고 좀 더 현명한 방법을 심사숙고할 때 등이고, 함께 할 땐 성실히 일에 임하고 일상에 처하며 혼연일체로 살아가는 경우입니다. 대개의 경우 위아래 앞뒤 함께 하기의 순으로 공부가 익어갑니다.
우리에겐 대상을 삼고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외부의 무엇에 상대하는 움직이는 내부의 무엇이 있다면 눈앞에 있는 사물이나 사람에게 향하는 마음이 있고 아직 오지 않거나 멀리 떨어져 있는 사물에 상대하고 있는 마음도 있습니다. 시간은 현재만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삼세가 함께 있으며 공간도 여기만이 아니라 연장시켜 가면 무한하게 뻗어갑니다. 그래서 멀리는 우주와도 상대하고 있는 내 마음의 무엇이 있을 것입니다. 우주 너머에도 있고 이런 식이면 우리 안엔 무한함이 있을지 모릅니다.
내가 우리 내면에 상대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했기 때문에 이런 논의가 진행되는 것인데 이 전제가 맞는지는 더 생각해 봐야 하는데 우선 그렇다고 하고 논의를 진행해 봅니다. 내 생각엔 분명 사람마다 국한된 경계가 있다고 봅니다. 내 안이지만 안이 아니라 밖이 되어 서로 전일해지는 경계가 있을 것입니다.
아무튼 우린 어디까지인지 모르는 그 무한과 상대하고 있습니다. 다만 너무 멀면 나와 무관하고 내 안의 그 상대도 안에 있다고 다 내 것은 아닌 게 됩니다. 내가 확충하고 내가 인지하지 못한 것은 내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심층도 내가 인지한 거기까지가 내 심층입니다. 요즘은 무의식이 있다면서 이제는 인간의 문명에서 무의식의 존재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러면 무의식만큼 인간의 존재는 깊어진 것이 됩니다. 그전엔 무의식이 있어도 무의식은 인간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동양의 소수들만이 인지하고 있던 것입니다. 그들에겐 무의식도 제어하고 다루는 전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던 것인데 이젠 문명적인 다룸이 있는 영역이 되었습니다. 이런 보편적인 이해가 또 다른 한계를 만드는 것이고 아직 자기 무의식의 의미도 이해 못하는 상황이지만 그래서 인류가 무의식을 안 것이지 개개인이 아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아직 개개인에겐 무의식이 없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무의식은 외부에서 가르쳐 준 것이라 자기가 자각한 게 아닌 주입된 사고가 됩니다. 주입된 사고는 습관이고 안다고 착각한 것이라 자기 것으로 인정할 수가 없습니다.즉, 내 안에 있어도 없다고 말하는 것은, 내가 알고 사유하며 자기가 일부러 함양시키지 않은 것은 있어도 없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식이면 있다고 다 있는 게 아니고 반대로 하면 없다고 무조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분명 있다 하지만 그건 자기 것이 아닙니다. 또 없다고 해서 언제까지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건 의미가 있느냐 입니다. 즉 의미의 존재이어야 존재가 되는 것이지 그저 존재한다고 존재가 되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내 안에서 얼마나 멀고 얼마나 깊고 얼마나 많은 것이 의미를 가지는지 그것을 말합니다.
내 완주가 있는지 또 겨우 신체정도인지 마을인지 국가인지 등등 그 넓이가 있는데 이건 존재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미세한 것이 의미를 가지고 나타날 것이며 그것이 내가 행동하는 이유가 될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본의이며 홍익의 의미가 됩니다. 외부가 나를 요동시키고 난 행동합니다. 시공을 넘어 미래에서, 사람들의 깊은 심층에서 뭔가를 요구해 옵니다. 수직적인 성장은 있어야 존재하는 것이고 수평적인 능력들은 의미에 의해 존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수직은 계제이며 수평은 일상의 다양한 기술이나 능력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