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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종합자천공부법

관점

작성자환공(桓公)|작성시간26.06.16|조회수3 목록 댓글 1

 

 

관점

 

 

 

 

일. 일심이나 일기, 일원성, 일신

이. 음양이나 이원성, 이문(진여문, 생멸문)

삼. 삼신, 삼극, 삼재, 삼계

사. 사상, 사신수, 사방

오. 오음, 오행, 오륜

육. 육입, 육극, 육합, 육기

칠. 북두칠성, 칠각지

팔. 팔식, 팔방, 팔괘

구. 구궁, 구주, 구천

십. 십방(불교: 시방), 십지, 십간

 

이런 건 세상 사물을 해석하고 이해하며 내가 주체성을 가지면서 판단하기 위해 필요한 관념정리를 위해 가지는 범주들입니다. 동일성처럼 같은 점을 보면서 범주를 나열하고 그 안에 집어 넣으면서 사고의 편의를 위한 것입니다. 이러한 것에 들지 않거나 헷갈리면 불안해하고 참지 못하기도 합니다.

일종의 사물들의 내적이든 외적이든 그 비슷한 것을 모아서 하나의 원리나 몇 가지의 원리로 환원시키는 것입니다. 관념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들의 패턴을 알아내는 것입니다.

 

가장 단순한 것이 1,2,3,5,7,11,13,17,19.......이런 식으로 나열한 후 공통점 찾는 겁니다. 이게 소수의 나열인데 이걸 소수의 나열이라고 알아보는 것이 능력입니다. 이런 걸 일상에서 역사에서 다양한 지식에서 사물들에서 찾아내면 됩니다. 그리고 그 찾아낸 것들을 모아 다시 더 큰 상위에서 또 찾아내고 이런 식으로 메타지식과 메타의 메타지식으로 쭉 가는 것입니다. 근데 이건 소수를 미리 알아야 하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기억으로 소수임을 알 수도 있지만 그게 아니라도 소수의 원리를 알면 되겠죠.

 

위에 나열한 것은 지금 당장 물을 경우 과거부터 유명한 관념 나누기 중에 쉽게 대답할 수 있는 간단하고 쉬운 것만 쓴 것입니다.

원효의 금강삼매경론에 이러한 것을 이용해 금강삼매경을 이해하는 틀로서 설명하는데 그러고 보면 원효는 이러한 패턴을 알아내는 비상함이 있나봅니다. 물론 범주를 만든 게 목적이 아니라 정리를 위한 거지만, 그의 이 책을 읽으면 현란한 글과 방대한 지식과 설명의 집요함과 세밀한 분석력에 질릴 지경입니다. 아! 머리가 이렇게까지 좋을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안 할 수 없습니다.

 

숫자라는 게 용이함이 있어서 사고정리에 많이 이용합니다. 사물의 이치들을 통찰하고 나름의 패턴인식을 하며 분류하면서 상위의 원리로 올라갈 겁니다. 원리의 상위와 하위로 나누거나 몇 가지의 이치로 분류하면서 보는 건 누구나 합니다.이제마도 동무유고나 체질학을 봐도 사상으로 구태여 나누면서 학문을 정리한 듯이 보입니다. 오행이나 음양이나 한두 가지로 자기의 사상을 체계화하기도 하는데 이제마가 저렇게 했다고 그의 사상이 거기에 다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설명할 수 있는 것만 한 것이니 제외한 것이 얼마나 있고 뭘 제외 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환원하면서 궁극적으로 하나의 통일적인 설명을 하는 형이상학을 원합니다. 물리학계 같은 곳에서도 결국은 대통일이론처럼 하나를 원합니다. 과거의 무극이나 도나 혼원이나 뭐나 이런 하나의 관념으로 수렴되기를 바랍니다. 누구나 이렇게 동일성을 추구하면서 간략화하며 쉽고 간단하게 생각하며 일이관지하기를 바라는데 이런 것도 잘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 머리가 비상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반대로 다양하게 나누는 것도 있어서 다르고 차이나며 새로운 의미를 만들고 찾아내며 발전시키고 개선하는 능력도 있습니다.이 역시 잘하면 남다른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비판할 때 동일성으로 뭔가를 설명하려고 하면 분석하며 나누어서 차이와 해체를 시키고, 해체와 다른 점으로 설명하려고 하면 동일성과 합쳐지는 원리로 말하면서 묶어서 말해버립니다. 이건 일종의 장난 같기도 한데 이런 양쪽방향으로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게 가능합니다. 어떤 것도 하나로 통일시키기가 어렵고 그렇다고 발산시켜서 다양성으로만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물론 자천은 이러한 동일성으로의 수렴을 머리로만이 아니라 마음과 자기 자체까지 시키는 것이 됩니다. 이론적인 견해가 몸적인 변화로 되지 않는다면 주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 다음은 어떤 관념을 동일성에서 생각해야 할 것을 다양성으로 생각하고 다양성으로 생각해야 할 걸 동일성으로 생각하는 서로 교란되어 어긋난 게 많습니다. 그래서 동일성으로 해야 하는 건지 차이성으로 생각해야 하는 것인지를 알아내는 그것이 남다른 재주입니다. 이건 의미이해가 되어야 하는 것으로 가치기준을 정하고 관념정리 해야 합니다.

 

사람마다 동일성을 보려는 범주가 다르고 방법도 달라서 정해진 규칙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우선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을 배우고 흉내 내면서 자기 것을 찾아가야 하겠죠. 대화하거나 가르칠 때 서로 의미를 가지는 범주나 개념이 다르면 참 답답한 것이 됩니다.

 

내가 열개를 설명하면 그 설명하던 것 중에 하나에 꽂혀서 나머지 아홉 개는 입 아프게 설명하고 피곤해진거지, 상대는 하나만 기억하고 나머지는 기억도 못하며 다음에 다시 그전에 설명한 다른 아홉 가지 중에 하나를 또 묻게 됩니다. 상대의 동일성의 범주를 알아봐야 합니다. 자기 생각만 하고 있으면 안 되며 남의 일관성의 맥락이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을 연습하고 공부해야 합니다.

 

우리는 동일성을 추구하고 차이성도 추구합니다. 이중에 동일성만을 원하며 강요하게 되면 역시 서로 어렵게 되고 차이성만 추구하면 그것도 역시 어려운 상황으로 갑니다. 이상한 건 사람들은 하나만 추구하는 듯합니다. 이건 어떤 관념에 동일성이든지 차이성이든지 둘 중의 하나로 이해한 것이라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다른 이해의 관점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누구나 동양철학을 한 사람들은 음양으로 나누면서 두 가지로 분류하길 좋아합니다.

 

흔히 남여, 위아래, 밤낮, 동정, 물질과 비물질.......하지만 음양이 뭘 말하는지 이해하는 것은 또 다릅니다. 음양에 대한 개념은 불분명할 거 같지만 막상 세상사물을 다 이런 음양으로 구분합니다. 다들 이럽니다. 사고하고 말하면서 이거 저거, 이런 거 저런 거 말들 하지만 그 기준 자체에 대한 설명은 입 닫습니다. 세상을 음양으로 나누는 건 사례를 알려주면 대개 따라 합니다. 그 다음에 생각의 방향을 돌려 음양 자체에 대한 설명은 또 잘 못하는데 이건 다른 사고입니다.

앞의 음양으로 세상을 분류하는 건 객관사물을 관심 갖는 것이고 음양이 뭔지 알려는 것은 내가 어떻게 음양으로 세상 사물을 구분하는지, 왜 음양으로 나누려고 하는지, 이런 구분이 가능한지, 그래서 의도하는 건 뭔지, 또 그런 것으로 내가 뭘 알 수 있는지, 뭘 할 수 있는지 등은 외부로 향한 내 마음의 빛을 안으로, 내면으로 돌리는 회광이며 내관이고 자기관찰입니다. 이 두 가지의 방향의 다름을 꼭 이해해야 합니다. 지식을 공부하는데 이런 나가는 방향과 들어오는 방향, 이 두 방향에 대한 인지를 확실히 해야 합니다. 이것도 두 가지로 나누는 방법을 쓰네. ^^

 

또 해야 할 게 자기가 해보는 것입니다. 내가 말한 위의 두 가지 방향에 대한 건 내가 만든 건 아닙니다. 과거부터 유교나 불교나 도교나 이러한 방법으로 공부를 했습니다. 명확히 나누면서 구분해서 설명하는 것에 대한 논란이 있기도 해서 하나로 통합해서 하려는 부류도 있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있었던 것을 더 명확하게 구분시키면서 정리할 수도 있고 전혀 없던 것을 새롭게 만들어서도 하는데, 대개는 어딘가에 비슷한 사고가 있습니다. 찾지 못하거나 약간씩 다른 점이 있을 뿐입니다. 그래도 좋습니다. 이런 건 지적소유권 같은 누구 것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사고와 주체성을 세우고 깨우침을 위한 것이고 자본주의적인 이해로 들이대는 곳이 아니니 상관없습니다.

 

남의 학문을 베낀다는 것은 명예나 권력적인 이득을 위하고 학문의 자료 같은 문자에 대한 시비이며 학자의 양심의 문제인데, 학문을 자기의 성장과 자천의 이룸으로 볼 땐 결코 베끼거나 따라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도의 이룸은 흉내도 모방도 아니라 자기 세움이기 때문입니다. 거짓 또는 어설픈 학문은 자천에선 먹히지 않는 것입니다.

 

학문을 세상 사물에 대한 지식과 그 지식에 대한 메타학문 같은 이치분석을 하는 것과 그것을 자기함양으로 하는 것의 차이를 알면서 해야 합니다. 이런 나가는 방향으로 하는 공부와 안으로 수렴하는 공부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자천은 나가서 하는 학문의 지식확장을 자기의 내면의 확장으로 되돌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걸 머리로 하면 우방이고 생활 속에서나 활동, 행동으로 하면서 한다면 좌방이 됩니다. 즉 이치추구로 통일성과 지식을 늘려가는 것을 자기 성장으로 한다면 우방이고, 평소의 일상에서 경제활동과 사회활동하면서 대인관계 같은 주위에서 겪으며 경험을 자기 것으로 함양하면 좌방입니다.

 

원래는 이 두 가지도 함께 해야 합니다. 머리로만 아는 것하고 경험으로 해보는 것하고 분명 다른 점이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통합하고 같이 공부한다면 역시 이로움이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론과 현실의 차이를 말하는데 이러한 머리와 체험의 차이를 중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거 역시 통일성을 찾고 자기 안으로 획득시키는 것입니다.

 

이러면 세 가지가 됩니다. 머리로 하는 거, 경험으로 하는 거, 그리고 그것을 통합하는 거, 아까 말한 나가는 방향과 들어오는 방향도 이 두 가지 외에 이러한 것을 알아야 한다고 했으니 이것을 알고 잘 해야 하는 것까지 하면 세 가지입니다. 여기에 또 네 가지, 다섯 가지 확장시키면서 이론을 덧붙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네 가지로 하면 사물지식과 그 지식에 대한 메타지식과 그것을 함양하는 것과 이 함양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렇게 하면 넷입니다. 다섯은 여기에 경험을 넣으면 됩니다. 이렇게 얼마든지 범주를 나열할 수 있고 나름의 관점을 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론은 만들기 나름이고 없는 것도 틈을 만들고 부풀려서 있게 한다면 있는 것입니다.

 

관념 속에서 무가 유가 되고 또 유가 무가 됩니다. 얼마든지 전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재로 이걸 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자신에게 없던 개념을 새롭게 가진다는 게 얼마나 힘들던가요? 새로운 것을 배워 익힌다는 건 만만치 않습니다. 게다가 자기만의 개념창출이라는 것은 또 다른 어려움입니다. 또 있는 것을 없는 것으로 한다는 건 역시나 무척 힘듭니다. 나에게 있는 것이 왜 있고 이게 맞는 것이어서 있는 건지 틀린데도 나도 모르게 알고 있는 것처럼 된 건지 출처와 원인과 이것의 효용성과 따질게 많습니다. 이런 걸 보면서 자기관념을 색출하고 분석하고 비판하면서 재구성하기란 힘겨움이 큽니다. 그리고 이건 습관된 것인데 습관된 것을 없게 만든다는 것도 또 다른 어려움입니다. 나아가 다른 것으로 다시 습관 들여야 하는데 이러면 할 게 너무 많습니다.

 

이렇게 있던 관념을 더 확실하게 하고 또 확장시키면서 다른 것으로 발전시키는 것도 되고 이러다가 기존의 단어만으로 내가 확장시킨 개념을 다 담을 수 없을 거 같으면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 고유명사를 취해도 됩니다. 그리고 기존에 없던 새로운 개념창조를 해도 되는데 그건 하기 나름입니다. 하다 보니 과거의 설명이나 단어가 있으면 써도 되고 있던 단어에 다른 정의를 해서 다른 의미로 써도 될 것입니다.

 

서구인들은 이런 것을 너무 남발해서 철학자마다 다른 단어와 의미를 말해서 읽기가 난감한 경우가 많고 우린 너무 과거의 것에서 확장하고 다른 의미를 발전시키고 새로운 명사를 만들기를 두려워해서 오히려 더 읽기가 힘듭니다. 단어가 같아서 같은 의미 일 거 같은데 읽다보면 그게 아닙니다. 좀 비겁한 건지 같은 듯 하면서 다르니 별납니다. 처음부터 자기 얘기를 하는 것을 좀 꺼려하다 보니 그렇기도 하고 주자학이나 권위 있는 것을 거역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소심함도 있는 거 같고 억압이나 강제도 작용한 거 같습니다. 과거의 사고를 넘기 위해서 그들의 단어를 알고 거기서 자기의 것을 찾아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선 조금은 비판적인 접근이 필요합니다. 위에 나열한 것처럼 동일성에서 분류를 한 게 많은데 거기에 차이성이나 해체를 해보는 것도 재미납니다.

 

음양을 말하면 우선 둘로 보려는 것에서 둘로 볼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해 봅니다. 여자와 남자라고 한다면 정말 우리가 여자와 남자로만 나누어지는지 여자와 남자로 나눔으로 억압당하거나 부정당하고 있는 것이나 소홀하게 된 것은 없는지 또 나누는 목적이 정당한지도 있는데 남자는 남자여서 뭐든 할 수 있다는 것이 되고 여자는 여자여서 뭐든 맘대로 해선 안 된다는 식으로 하는 것을 보면 나누는 목적도 불순할지 모릅니다. 그런 의도가 없다고 할지 모르지만 음양, 남여로 나눈 그 안에 이미 그 씨앗이 배태되어 있어서 어쩔 수 없지 않을까요. 남여로 나눈 것에 남자가 여자를 억압하는 것은 없다고 할지 모르지만 물론 음이 양이 되고 양이 음이 되는 현상을 말하기는 합니다.

 

하지만 남자가 여자가 되고 여자가 남자가 되지는 않습니다. 이러면 음양론과 남여의 나눔과는 상관없는 것으로 근거가 없는 나눔이 됩니다. 이걸 남자가 여자를 이기는 시대에서 이젠 여자가 남자를 이기는 시대로 간다고 할지 모르지만 여자가 남자를 이긴다는 사고자체가 남자의 사고습관입니다. 뭘 이기고 말고 하는가요? 여자가 그렇게 승부욕과 억압과 부정하거나 제어하고 통제하길 좋아한다는 전제가 있는데 이걸 어찌 아나요? 음양을 이기고 지는 방법으로 보려는 그 사고의 편협이 있는 것일지 모릅니다. 음이 양으로 변해가는 것하고 이겨 가는 것은 다릅니다. 이긴다는 건 양보가 없습니다. 겸손도 없고 오직 이기고 지는 승부만이 있습니다.

 

이런 저질사상이 수 천 년을 내려온 걸 보면 참 어지간합니다. 심하게 하면 음양은 자연에서 온 추상적인 설명인데 이기고 지는 건 감정적인 것입니다. 서로 범주가 다른 것으로 뒤섞인 혼란함입니다.

또 음양론이나 오행론이나 불교의 유식이나 어떤 관점으로 세상을 보든지 그렇게 보면서 나름의 관법을 가지는 건 되지만 그런 방식으로 세상이나 내가 이루어져 있다고 하는 건 또 다른 것입니다. 관점과 그것의 세상대응은 다른 범주입니다.

 

남여의 나눔은 화장실 갈 때, 목욕탕 갈 때, 아니면 더 세세하고 정밀한 배려나 이로움을 줄 수 있을 때 하는 것이지 성적이거나 억압하려는 불순한 의도로 나누는 건 조심해야 합니다. 또 그 나눔을 바꿀 수 없는 진리인양 알거나 이거 외에는 다른 관점으로 볼 생각을 안 하거나 못하게 하는 작용을 한다면 이걸 문제 삼을 수 있습니다. 음양으로 나누는 건 결국은 우리의 인식을 넓히고 거기에 도교에서 나온 것이든 유교에서 나온 것이든 수양과 관계된 것입니다.지금처럼 그저 사변적인 목적으로 한 것은 아닙니다. 자기수양이 안된다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요?

과거엔 그랬습니다. 뭐든 수도와 관계된 것입니다.

근데 그것을 사회적인 자기입지나 자기변명이나 타인을 억압하고 제어하기 위해 쓴다면 역시 범주오류가 됩니다. 지금은 자본주의의 상술에 의해 나누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성도 상품일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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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빛몸 | 작성시간 26.06.16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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