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방식에서 나오는 앎의 체계
<온바하을 20170422 강의> 중에서...
육신통이 이런 건지는 저도 몰라요. 그냥 생각나서 썼을 뿐이에요. 한순간의 아이디어 일수도 있는 건데 이게.. 이걸 안지는 20대 후반이에요. 저도 이거 아는데 꽤 오래 걸린 거에요. 이런 식으로 생각 하는게요. 저도 인제 공부를.. 판타지를 원했어요. 판타지적인 초월능력을 원했었는데 그걸 원해서 열심히 하다가 결국 그게 아니라 이런 식으로 생각이 나기 시작한게 이제 20대 후반에 넘어서야 인제 그게 아닐지 모른다 생각으로 정리한게 이래요. 근데 지금까지 아직도 여기서 못 벗어난 거 보면 역시나 그다지.. 생각이 변화가 ...
그래서 천안통도 그니까 초월적인 능력으로 하면 투시나 뭐 원상법 같은거 그런거 해보겠다고 바둥바둥 댔었는데. 근데 보긴 보는 거죠. 보는 건데 보여야 되는 게 있어요. 이 세상에 보여야 될게 있다구요. 진짜 보여야 될게 뭐거나 아니면 진짜 볼 수 있어야 되는 거요. 볼 수 있어야 되는 거. 또 봐야 되는거 라고 해야 되나? 그게 있다는 거요. 그걸 보지 못하면 투시능력이나 초월능력 식으로 말하는 영안은 그 그거는 그 다음 문제에요.
보여 져야 될게 신기한 세계가 아니라 이 세상인데 이 세상에서 봐야 될 건 생각보다 복잡하다는 거요. 그렇게 단순하게 투시능력이나 어떤 능력으로 시각화해서 보여 지는 것만 가지고 생각하기에는 세상은 그렇게 낭만적이지 않았다는 거요.
그니까 나이 들어가면서 그런 단순한거에서 철든 거죠. 철든 건가 나이 들은건가 노숙해진건가 그런거 같아요.
그래서 봐야 될게..
보는 거요. 보는 게 똑같이 보는 거잖아요. 똑같이 보는 건데 자꾸 이 오감을 넘었단 얘기는 앞에서부터 그전부터 계속 얘기했는데 오감과 관계된 거요. 관계되지 않아야 되거나 오감을 초월하거나 그런 식의 얘기를 했는데도 투시나 육신통을 얘기 한다는 게 논리적으로 앞뒤가 안 맞아요. 쉽게 말하면 오감을 넘었잖아요.
오감을 넘었는데 왜 투시냐구요. 왜 천안이 되어버리냐구요..
그런 어쩌면 단순한 논리인 듯 하면서도 왜 이게 단순한 논리처럼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거나 찾아가지 못했냐고 하는게 좀...그렇긴 하는데.
우선 단순하게 논리적으로 맞을지 안 맞을지 모르지만, 우선은 오감에서 초월하거나 오감에 해당하는 것에 벗어날 수 있거나 그 유혹? 아니면 그런 식의 방법에서 좀 거리를 둘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죠. 그래서 육신통이 여기 자광신도법에 있는 거에요. 앞에 있는게 아니라.. 그냥 이 부분이 되지는 않거든요.
그렇다고 해서 꼭 이런게 이런 식의 능력.. 자천을 꼭 고단자까지 와야지 아니면 엄청 와야지만 관법이 되냐면 그건 아니잖아요. 이 세상 이데올로기가 다 관법인데 그걸 만든 사람들이 이런 뭐 능력있는 사람들이 아니에요. 어느 한 부분 분야에서 자기 나름대로 열심히 그 개인적으로는 부단한 노력에 의해서 온거겠죠.
근데 그런 부분을 우리가 옛날 사람들이라거나 옛날 전통이라고 해야 되나. 특히 옛날 전통 조선시대 유교에서는 터부시 여겼어요. 자기가 노력해서 어느 관법을 가진다는 것 자체를 ‘못된 놈’ 이라고.. 역적으로 때려잡았어요. ‘결코 넌 니 생각을 가지면 안 된다’는 식의 그런 식의 개념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식의 탄압이라고 해야 되나 그 뭐라고 해야 되나 그, 그런 게 있었어요. 그래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불가능했던 거죠.
그래서 더더욱 이런 이렇게 생각하는 것을 어려워했어요. 다른 나라들은 모르겠는데 우리나라는 그래요. 지금도 자기 관점으로 자기 관법 방법적인 방법론을 만들어 내는거. 철학에서 방법론 만들어 내는 거를 힘들어해요. 안 하려고 하거나 쉽게 철학하려고 하거든요. 그래서 서양인들이 만들어 놓은 방법론대로 사고를 하려고 하죠. 그대로 철학 하려고 하고...
자기가 방법론 만들거나 자기가 어느 한 부분을 개척해 내는 그런 관념을 개척해 내거나 그런걸 하지는 않아요. 하긴 하는 사람도 있을 텐데, 우선 그렇게 가르치거나 그런 게 학계의 주류가 되지 않는 거라서 혼자 개인적으로 하는 것도 너무 어려워요. 그게 우리나라의 전통이에요. 없어져야 될, 좀 바뀌어야 될 전통중의 하나에요.
그래서 이 천안통은 상당히 중요해요.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더더욱 중요한 부분이에요. 그게 너무 오랜 세월 이 부분이 없었어 가지고 지금 우리가 내세울 수 있는 관점이 없잖아요. (우리나라 것이라고 출처를 대고서, ).. 그래도 우리식 사고, 우리가 세상을 보는 방법이라고 해야 되나. 우리가 세상을 보는 방법, 사람을 보는 방법, 문화를 보는 방법을 말해주는 게 몇 가지가 있어요.
우리 사상사? 우리 사상사를 쭉 보면 알겠지만 나오는 사람이 딱 그 사람들 몇 명 이에요.뭐 신라 삼국시대 해봐야 원효부터 시작 해가지고 지눌, 아니면 뭐 조선시대 몇 명 이게 다에요.게다가 그들이 하는 학문도 불교 아니면 유교에요. 우리껀 아무것도 없어요.그니까 그게 우리나라는 관점이 없다는 거잖아요. 이 세상을 보는 관점이 없잖아요.
전혀 없어요 전혀. 전혀 없다고도 할 수 있어요. 그리고 지금 그런 부분을 문제시 여기거나 문제화 되는 거요.
왜 없냐고 질문하는 사람도 없어요. 그런 질문을 할 수 있는 시대적인 환경도 아직 아니에요. 왜 우리는 우리가 보는 것이 없냐고 말하는 거요. 그래서 질문도 못 하고 의문 제기도 못하고 문제시 여기지도 못 해요. 의미파악도 안 되가지고 이게 의미가 있다는 것 자체조차도 이해를 못 해요. 상당히 이게...
이것도 관법이거든요. 제가 지금 말하는 식으로 세상을 보는 거요. 우리나라를 보는 거요. 이게 자세에요 자세. 어떤 자세를 취하느냐가 있어요. 아니면 들뢰즈 식으로 말하면 어떤 기능을 하느냐 인데, 니가 생각하는게 이 사회에 어떤 기능을 할 수 있냐고 하는 거요. 어따 써 먹을려고?
어떻게 쓰일 수 있냐는 거요. 그래서 음... 심하게 얘기하면 그 항상 얘기지만 한글로 된 철학이, 아직 우리가 언어가 없다고 하는 거요. 한글이 없다는 게 한글로 보는 관점이 없어서, 한글로 만들어 놓은 세상을 보는 그 개념이요. 한글이 구축해 낸 개념이 아직 없어요. 그래서 우리 아직 글이 없어요. 의사소통 하는 정도로만 쓰고 있는 중이에요 이 한글을. 우리끼리만 의사소통 하고 있는 거죠. 그 단계를 넘어서 한글로 철학하는 건 아직 못 하고 있는 중이에요. 그걸 지나갈려고 지금 ...
그래서 지금 사람들은 의무감으로라도 책을 내야 되요.. 무조건 책을 내야 되요.
책을 낼 수 있을 만큼 생각을 해야 되고 남의 철학을 번역을 하든 아님 뭘 하든 자기 생각이라 하든 뭐든 간에 무조건 책을 내야 되요. 원래 그렇게 인문발달이 그렇게 진행되는 거잖아요. 우선 누적을 시켜야 되거든요. 이것저것 뭐 맞든 틀리든 그런거 따지는게 아니라 우선 누적 시켜야 되요. 인문자료를. 그래야 그거 가지고 이후에 사람들이 공부, 자료삼아 공부.. 쓸거니까요. 텍스트로 쓸거라구요.
텍스트가 있어야 된다구요. 지금 우리가 어떤 철학을 하려면 텍스트가 있어야 되잖아요. 자료요. 근데 우리껀 지금 자료가 다 기본적으로 한문이에요. 다산껄 다산이 우리나라 뭐 학문사에 중요하다고 하는데 그래봐야 외국인이에요. 외국어에요 이 한문이. 한문이 우리가 만들었다 고대에. 이런 식으로 얘기 하자는 게 아니라 번역이 필요하다구요. 번역이 필요한걸 가지고 어떻게 우리꺼라고 그래요. 그리고 다산을 공부하려면 다산이 쓴 그 한문으로 만들어 진 것을 번역을 해야 되잖아요. 외국어 번역하는거 하고 뭐가 틀려요. 전혀 일관성을 가질 수도 없고 콘텍스트처럼 맥락도 없어요. 그럼 이게 지금, 지금 우리가 처절하게 느껴야 될 고민이에요. 우리는 백년 이전에 문화와는 단절됐어요. 서로 쓰는 언어도 다르고.. 정치체제 다르고 같은 게 없어요. 그냥 핏줄만 비슷하게 내려왔겠죠. 그 핏줄이 그 핏줄이라고. 혈통만 같을 뿐이지 역사도 다르고 사회도 다르고 사상도 다르고 가치기준 다르고 말도 다르고 뭐가 같은 게 있나..
그래서 우리는 다 시작해야 된다니까요? 다시! 무조건 새로 해야 되요. 그래서 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다 새로 해야 되서. 과거가 있으면 오히려 그거에서 벗어나려고 애써야 되기 땜에 힘들 수도 있는데. 뭐 두 가지가 있겠죠. 있어서 그거 가지고 다시 써 먹는 것이 편하냐, 없어서 새롭게 무조건 만들면 되는 게 편하냐 인건데.
뭐가 편할지는 뭐 하기 나름이겠죠.
어쨌든 지금은 한글로 해야 될 시대이기 때문에 과거의 외국어처럼 되어버린 상황에서 무조건 책을 내야 되요 .글을 써야 되고 문헌화 할 수 있어야 되고 이론화 할 수 있어야 되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열심히 떠들었잖아요. 수련에 대해서 엄청 떠들고 있잖아요. 이게 맞든 틀리든 그건 상관없어요. 이후에 제 글 가지고 맞다고 아니면 비판하거나 비난하거나 아니면 맞다고 좋다고 하거나 이런 식으로 차라리 욕이라도 할 수 있을 정도로 사람들한테 읽혀졌으면 차라리 좋겠어요. 그걸 각오하고 써놓은 거거든요. 좀 어거지도 있고 안 되는걸 글로 쓰겠다고 막 억지적으로 개념 만들고 말 만들고 하는 게 있잖아요. 그게 일부러 그랬죠. 먼저 지식을 선점해야 되거든요. 지식선점도 있어요. 이 수련쪽에서는 지식 선점이 하기가 쉬워요. 아무도 안 했거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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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런거라도 그런 자료가 있는게 부러웠죠. 처음에 저도 부러웠기 때문에. 불경도 있고 도경도 있고 다 있어요. 다 사고전서처럼 유경도 .. 유교적인 아니면 사고전서 자체가 있잖아요. 중국에는 차이나에는.. 근데 우리는 음... 없어요. 아무것도 없어요.
그래서 해결방법은 제가 생각한 건 그거에요. 지금 써 놓으라구요. 그럼 백년 후에 우리가 지금 써놓은 것이 자료가 된다구요. 우리가 써놓은 그거 가지고 학문을 할 거 아니에요. 그래서 지금 쓰라구요. 그래서 이론 만들고 개념 만들고 지식 만들고 그래서 내가 느끼고 체험한 걸, 이러 이러한걸 체험했고 이러 이러한걸 느꼈는데 이게 이러 이러한 것 같고 저게 저런 의미인 것 같고, 과거에 말했던 이게 이거인거 같고. 과거에 말했던 여러 깨우침에서 쓴 것 들이 내가 경험한 게 이게 있는데 이거와 비슷한 거 같고 저거 같고 이런 식으로 갖다 붙였다구요.
일종의 다 의도적인 거에요. 제 글들은....사람 가르치려고 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람 가르친다는 전제? 전제가 아니라 그런 설정, 설정 하에 사실은 개념 만들고 있는 거에요. 억지로 만든거에요 다. 다 의도적인 거라구요. 싹 다. 인생이 설정이라고 얘기했는데 제 인생은 일종의 설정이에요. 어디가 본심이냐 이렇게 말하면 나도 모르겠어요. 어디가 진짜인건지. 카멜레온 같아요. 지 색깔이 없는 거 같아요. 지 본질성이 뭔지 알 수가 없어요.
그래서 이렇게 천안통이 중요해요. 지금은 더더욱 중요해요. 너무 너무 중요하다구요. 만들어야 된다니까요. 남이 보여준 거 남이 말한 거 가지고 따라 하기에는 너무 자존심 상하거나 짜증나요. 더 지금 우리가 해야 될 것 중 하나가 우리가 보는 방법을 찾는 그 과정에 지금 있다구요. 역사적으로. 역사적으로 지금 그런 식 그런 사명이 있는 시대에 살고 있는 거라구요. 지금 우리가. 이런 시대적인 사명을 모르면 음... 아니 알면 뭘 할 수 있는 건지 알 수 있잖아요.
그래서 해야 되요. 없어서 해야 되요. 그래서 열심히 했던 거죠. 그중에 하나가 이런 것들 인거죠.그래서 항상 삐딱하게 아니면 남이 안 쓰는거. 다른, 남이 이렇다하면 나는 저렇게. 남이 저렇다 하면 난 이렇게 계속 글을 써 놓은 거죠 .맞고 틀리고가 아니라, 이렇게 글을 써 놓으면 누군가는 그걸 가지고 다른 식의 사고를 또 할 수 있잖아요.
헐리웃 영화를 보다보면, 그들이 하는 말이 있어요. 어떤 영감을 주냐구요. 그 <종의 기원>이란 책을 다윈이 썼는데 그게 맞고 틀리고가 아니라 그들 얘기로는 그래요. 사람들한테 영감을 준다구요. 어떤 영감을 줄 수 있냐는 거죠. 책을 볼 때 마다 뭔가 하나씩 알아가는 거, 뭔가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에 도움을 주는 영감을 떠올리게 할 수 있는 그런 책들이요.
맞고 틀린 건 중요하지 않는다니까요. 자꾸 맞는 얘기 옳은 얘기를 쓰려고 그러고 진리를 추구한다고 그런 얘기 하는데 그런 건 부차적이에요. 중요한 거는 사람들한테 어떤 이바지 어떤 식으로 기능하고 있느냐가 된다구요. 기능은 들뢰즈 말인데, 어떻게 쓰여질 수 있고 그것이 지금 이 사회에 어떤 식으로 기능할 수 있냐구요. 그 기능 할 수 있는 것을 생각 한다면, 진리를 말하고 있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한테 쓰여지길 바라는, 쓰여 지는 목적을 보고서 글을 쓴다구요. 행동도 하고. 뭘 하든지 간에. 그게 어떤 파급을 일으킬 수 있는가를 염두에 두면서 행동 한다구요. 그런 의미로 쓴 거죠.
관법만 얘기하면 또 관법만 할까봐 뒤에 또 관법이 다가 아니라
이게 삶에서 우러나와야 되고 그냥 삶이어야 된다고 말하고 싶어서 또 이렇게 뒤에 이렇게 썼어요.
제 글쓰는 거에요 이게. 내 성향이 이래요..
보는게 다는 아니라는 거죠 또. 보는게 아니라 행동해야 되는 것이고 그게 니 삶이어야 된다는 거죠. 그러는 것도 있고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라 또 뒤에 몇 줄 있는거 더요. 이게 삶의 방식에서 나오는 앎의 체계라는게 있는데. 이게... 이 부분은 좀 이해시키기가 좀 어려울 수도 있겠는데.
내가 어떤 관점을 가진다는 건 억지로 그런 관점을 가지고 싶어서가 아니라 내가 그렇게 살고있기 때문이에요. 이게 좀 헷갈릴 수가 있는데 뭐가 먼저인건지. 아는 게 내가 그런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게 먼저인건지, 내가 그렇게 살고 있어서 그런 지식을 가지게 되는 건지 이게 헷갈리기는 하는데. 이 두 가지가 헷갈리든 안 헷갈리든 영향을 주고 받는 다구요.
니가 그렇게 생각하는 건 니가 그렇게 살 것이기 때문이거나 니가 그런 식의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거나 그걸 원하기 때문이거나 그런 지식, 욕망, 그리고 삶 이런 것들이 다 같이 움직인다는 거요.. 진짜 그래요. 사람들은 그런 지식을 알게 된거는 그런 지식을 알게 만들어진 삶이 있어서 그래요. 그래서 그 사람이 살아가는 거 하고 그 사람의 지식하고 어떻게 비슷한 건지. 저 사람은 저렇게 살 것이기 때문에 아니면 저렇게 사는 것이기 땜에 그런 지식을 추구하게 된다는 거 그런 걸 볼 수도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