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철학의 원류와 불교 - 반야로서의 지혜
8강. 김종욱 교수 반야로서의 지혜 강론 중에서 지혜를 서양은 Sophia 불교는 반야라 한다. 이번 시간은 Sophia와 반야를 비교해 보고 그 중 반야를 집중 설명하겠다. 통상적으로 지혜란 말 많이 쓰지만 지혜는 불교 전문용어로 반야라 한다. 반야는 한자다. 인도어로 Prajna 다. 인도 말은 음을 따는 경우와 뜻을 따는 경우가 있다. Prajna를 빨리 읽으면 반야가 된다. 따라서 반야는 음역이다. 그런데 뜻을 따면 어떻게 될까? 지혜다. 물론 불교만 지혜를 쓰는 것은 아니지만 불교에서 지혜란 말을 너무 많이 쓰기 때문에 불교의 고유용어가 되었다. 어원 Prajna의 jna는 앎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Pra는 뛰어오른다는 뜻이 있다. 일상적 앎을 뛰어넘는 그런 앎으로 그게 지혜다. Vijnana의 jna도 앎이다. Vi란 둘로 나눈다는 뜻이다. 둘로 나누어 아니 분별이 된다. 주객 능소 인식을 하는 그 자 서양식으로 Subject가 능이고 그것에 의해 인식된 것이 소다. Vijnana의 분별조차 뛰어넘었으니 무분별이 된다. 불교에 관한 지혜1 無分別智 일상의 지식과 분별에서 뛰어올라 사물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것 無分別智는 반야의 기본 내용이다. Vijnana와 대비돼 쓸 수 있는 말에 Vijnapti란 말이 있다. Vijnana는 의식작용이다. Vijnana가 주관적 의식활동의 작용을 뜻한다면 그런 의식작용에 의해 의식된 것 수동화시킨 것이 Vijnapti다. 따라서 vijnapti는 의식내용이 된다. 그런데 서양철학 식으로 보면 의식작용은 관념작용이며 의식내용은 의미로 볼 수 있다. 의미가 인식된 것이다. Vijnana를 한자로 번역하면 識이 된다. 그런데 Vijnapti도 識이 된다. 한자 상으로 구별할 수 없어 다 識이라 번역했다. 唯識의 識 자는 어떤 識 자일까? Vijnapti의 識이다. 그런데 대부분 Vijnana의 識으로 생각한다. 왜냐하면 識하면 의식작용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유식의 識은 의미란 뜻이다. 만약 유식의 식을 관념작용으로 읽으면 유식사상은 관념론이 된다. 실제로 상당히 많은 영어권 불교학자들이 식을 Idealism으로 생각하며 누구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분명 잘못된 점이다. Vijnapti의 識으로 보면 유식은 관념론이 아니라 의미론이 된다. 만약 유식이 관념론이 되면 이는 주관주의가 돼 버린다. 주관의 자아를 절대 정립하는 것이 관념론이다. 그러면 불교인가? 유식이든 어떤 불교든 무아는 기본이다. 무아를 인정하지 않으면 그것은 더 이상 불교가 아니다. 자아를 정립하는 것이 아니라 해체하는 것이 유식이고 불교라면 의미론으로 읽어야 한다. 萬法唯識 이 세상 모든 것은 식이다. 그런데 식이 뭐냐? 전자로 읽으면 이 세상 모든 것은 주관적 관념작용에 불과해! 이러면 분명 Idealism 관념론이 된다. 그러나 후자로 읽으면 이 세상 모든 것은 인간에 의해 의미가 부여된 것뿐이다 이렇게 된다. 다른 말로 하면 이 세상은 의미로 넘쳐난다는 뜻이다. 실제 그렇다. 그러나 의미는 주관만도 아니고 객관만도 아니다. 이렇게 보면 불교의 유식은 주관주의도 객관주의도 아니고 의미론일 뿐이다. 그러니 만법유식은 세상은 의미로 넘쳐난다는 뜻이지 주관적 관념주의가 아니다. 관념론이 아니고 의미화이기 때문에 의미를 달리 부여할 수 있다. 의미의 전환을 지향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지난 시간 뭘 안다는 것을 지식이라 하기도 하고 지혜라고도 하는데 좀 다르다 했다. 뭘 안다는 점은 지식이나 지혜나 다 마찬가지이지만 Know-How는 지식 Know-Why는 지혜라 했다. 생명체가 어떻게 살아가는가? 신진대사 생식작용 진화하는 것 그렇게 말하면 과학과 기술이 된다. 그런데 그런 식의 지식이 추구하는 것은 유용성이다. 왜냐하면 방법과 수단에 대한 지식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Know-Why가 되면 생명체는 왜 사는가? 가 된다. 왜 살고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상당히 주제가 묵직하다. 이것은 철학과 종교의 문제가 된다. 총체성에 대한 문제다. 왜 사는가에 대해 답하려면 인생을 총체적으로 봐야 한다. 그때 그때의 문제가 아니다. 인생 전체의 문제다. 내 인생 몇 십 년 살지 모르지만 인생을 전체로 놓고 봐야 한다. 그렇게 보면 우주 전반에 대한 이치가 된다. 이런 세상이치를 서양은 Logos 중국은 도 불교는 Dharma라 한다고 말했다. 이렇게 보면 서양식 지혜는 Logos에 대한 분명한 앎이다. 이에 반해 불교의 앎은 Dharma에 대한 앎이다. Dharma는 음을 따면 달마 뜻을 따면 法이 된다. 따라서 불교식 지혜는 법에 대한 앎이다. 바로 法所依智다. 불교에 관한 지혜2 法所依智 세상의 이치를 연기로서 받아들이는 지혜가 곧 법에 의지하는 지혜. 법에 의지하는 지혜는 법에 대한 관찰에 의해 이루어지는데 무상 고 무아의 원리에 대한 지관적 통찰을 의미 불교가 보는 세상이치는 연기다. 연기하니 無常이고 무상하니 무아이고 고란 것이다. 3법인 떠오른다. 도장은 대표한다는 뜻이다. 뭘? 법을 대표한다. 연기법을 대표하는 본질적 특징이 無常 無我 苦다. 그래서 3법인이다. 연기 무상 무아 고에 의지한 지혜가 바로 불교적 지혜라 할 수 있다. 먼저 연기=무상이란 데 맞춰 설명해 보자. 정말 연기=무상은 세상의 지혜인가? 연기란 무수히 많은 조건들이 상호의존작용을 해 세상 모든 것은 이뤄진다는 뜻이다. 緣起이므로 無常. 이 세상 모든 것은 상호의존적으로 화합해 일어난다. 이 말이 맞다면 지금 이 순간에도 수 많은 조건들이 계속 개입될 것이다. 그러니 계속 변화해 간다. 매 찰나마다 계속 변한다. 그러니 영원불변한 것은 없다. 불교는 이를 체계적으로 설명한다. 이 세상을 보면 일단 물질적인 것이 있다. 이런 끝없는 물질적 변화를 불교는 成住壞空 4자로 표현한다. 우주를 보면 성간물질이 모여 별이 성립된다. 지구 같으면 45억 년쯤 머물러 있다. 하지만 머물러 있다는 말은 동시에 부서져가고 있다는 뜻도 된다. 이를 가장 잘 반영한 말이 Rupa다. 무너지고 파괴돼 가고 있다는 뜻이다. 불교는 Rupa=色으로 번역한다. 색깔이 아니고 물질이란 뜻이다. 견고하게 보이지만 부서지고 있다. 이렇게 어느 별도 붕괴되다 언젠가는 폭발하게 되고 그러면 다시 공간상으로 흩어질 것이다. 별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모든 물체가 다 그렇다. 이 분필만 해도 어느 정도 유지되지만 순간순간 파괴돼 간다. 그러다 완전 해체되면 공간상에 흩어질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다시 중력의 법칙에 의해 또 成이 돼 머물다 괴하다 공간으로 또 흩어진다. 그러면 또 성주괴공 성주괴공 계속 그렇게 돼 간다. 끝없는 반복이다. 무상하다. 영원한 것은 없다. 身 우리 신체는 生老病死 태어나 늙는다. 그러나 늙는 것 모두 싫어한다. 오히려 서양사람들이 더 잘 안다. How old are you? 3 years old. 3살이 뭐 늙었다고? 사람은 일단 태어나면 이렇게 늙는다. 60~70 되어야 만 늙은 것이 아니다. 3~4살도 Old다. 태어나는 그 순간 사실은 늙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그냥 늙지 않는다. 병들어 가면서 늙는다. 그러다 죽는다. 그런데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또 생노병사가 이어진다. 그게 바로 윤회다. 心 마음도 그렇다. 生住異滅 한 생각이 일어나 住한다. 이 Tv 보는 사람들이 아 볼만하네 그런 생각이 생기고 잠시 유지된다. 그러다 시계 보고 연속극 하는데 하고 채널을 돌린다. 이렇게 딴 생각이 들면 재미있던 생각이 소멸된다. 그러다 뉴스 시간이네 그러면서 채널을 또 돌린다. 불교는 이 마음이 주하는 기간을 찰나<0.15초 정도>라 말한다. 사실 住하는 기간이 있다. 어떤 것은 찰나고 어떤 것은 몇 십억 년 간다. 그런데 사람들은 계속 이렇게 돈다면 불안해 한다. 空死滅 흩어지고 죽고 사멸하는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하니 싫다. 그러니 住에 계속 남으려 한다. 공사멸은 보고 싶은 것이 아니다. 그러나 실상 차원에서 보면 모두 無住다. 머물 데가 어디 있나? 찰나적으로 언젠가는 空死滅로 갈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또 시작이 된다. 주가 있다. 하지만 결국 끝나니 무주다. 계속 도니까. 그러나 우린 심정적으로 공사멸을 수용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계속 남고자 한다. 결국 無住와 住 사이의 싸움이 된다. 실상은 無住지만 우리의 심정은 계속 남고 싶은 것이다. 머물 수 없는 것이 실상이지만 우리는 머물고자 하는 마음이다. 하나는 실상 하나는 무지다. 무지를 불교는 무명이라 한다. 그러니 어리석음이다. 조만간 공사멸의 단계로 간다는 것이 실상임에도 불구하고 계속 부정한다. 住하고 있어! 그러나 그것은 어리석음일 뿐이다. 이렇게 어리석으니 住하는 것에 지나친 욕망을 일으킨다. 이 금덩어리 내 것이야. 이런 소유와 집착을 통한 탐욕으로 간다. 그런데 이 탐욕이 채워질까? 안 채워진다. 그냥 住에 머문다면 채울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공사멸로 이어지기 때문에 그러니 채울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면 기분 나쁘다. 이 기분 나쁜 것이 분노 痴다. 열 받는 것이다. 왜 채울 수 없어? 내 것인데 왜 가져가? 결국은 치가 탐으로 탐이 진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소위 탐진치가 인생을 말아먹는 3가지 독소라 볼 수 있다. 그래서 이 3독을 번뇌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 실상에 대한 완벽한 자각이 뭘까? 그게 바로 반야이고 지혜다. 그러므로 불교적 지혜의 반대말은 한 마디로 말하면 번뇌다. 서양식 지혜를 말할 때 고대의 지혜는 Episteme라 말했다. 이데아와 같은 원형을 인식하는 놈이 Episteme이고 Doxa는 억측 감각적 억측이라 했다. 굳이 말하자면 Doxa가 감성이라면 Episteme는 이후 이성이 된다. 감각이 지각작용을 할 때 억측을 할 수 있다. 중세가 되면 인간의 지혜 Episteme는 세상의 지혜라 낮춰 잡고 진정한 지혜는 신의 지혜가 된다. 그 신의 지혜를 Sapientia라 했다. 이런 신의 지혜와 세상의 지혜 사이의 충돌. 그런데 신의 지혜 입장에서 보면 이 세상의 지혜는 이성<Ratio>의 것이란 것이다. 즉 세상은 합리적 이성에 불과하고 신 자신이 가진 초월적 전지전능한 지혜는 아니란 것이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에 대한 신앙<Fides>뿐이다. 그래서 중세는 이성과 신앙이 갈등 관계에 놓인다. 중세는 카톨릭이 지배했기 때문에 당연히 신앙이 위이지만 이성의 가치도 인정했다. 상당히 카톨릭은 주지주의적이고 이성주의적인 신학이라 볼 수 있다. 그에 대해 반기를 든 것이 개신교였다. 개신교 입장에서 보면 신앙 범위 내의 이성이라 해도 너무 이성화 되니 이성을 가진 자들이 지배한다. 천 년을 지배한 카톨릭 사제들이 마음에 안 드니 평신도 위주의 개별 신도들이 권한을 갖는 쪽으로 간다. 따라서 개인적 신앙이 중요해진다. 이제는 이성과의 긴장이 아니라 이성을 거의 무시하는 쪽으로 간다. 상당히 신앙 위주의 기독교가 된다. 근대가 되면 인간이 신처럼 세상을 지배하고 싶어 한다. 하나님이 지배하는 것은 창조능력 인간이 자연을 지배할 수 있는 것은 사유능력 때문이니까 그렇다면 인간의 이성을 통해 나온 것이 Knowledge라면 지식은 Power 권력과 연관된다. 그래서 지식은 곧 권력이다 그런 말 했다. 이렇게 보면 서양고대 지혜의 핵심은 분별이다. Episteme를 통해서 Idea와 그것의 복사물 본체와 현상 보편적인 것과 특수한 것 그리고 영원히 존재하는 실재의 것과 결국 환각처럼 사라지는 가상의 것으로 나누어 식별할 줄 아는 능력이다. 분명히 분별력이다. 중세가 되면 이성과 신앙에 대한 긴장이다. 그러나 모든 것은 신의 존재를 통해 나온다. 신이 피조물에 주는 것이 은총인데 그것은 바로 지배라 볼 수 있다. 그러다 근대가 되면 Power 게임이 된다. 모든 지식은 권력을 향해 가는 식이 된다. 그 중 정점이 과학기술이다. 따라서 분별 지배 권력이 서구적 지혜에 함축된 의미라 볼 수 있다. 사람은 분별을 하면 그 중 하나를 선별해야 한다. 선악으로 나누고 그 중 하나를 배제하는 식으로 갈 수밖에 없다. 이런 식의 분별은 상당히 권력화 되고 폭력이 수반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이성적 식별력이라 해도 불교식으로 보면 어리석음 치라 볼 수 있다. 왜? 불교는 실상에 있어선 무분별이기 때문이다. 연기이므로 고정불변한 실체가 없다. 즉 자성이 없다. 자성이 없다는 말은 비어 있다 즉 연기이므로 공이란 말이다. 공이 맞다면 어떤 것도 실체가 없으므로 집착할 만한 것이 없고 둘로 나눌 수 없다는 말이 된다. 그래서 연기 공은 무분별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런 실상을 모르는 것이 어리석음이라 볼 수 있다. 서양의 이 분별이 무분별로 가지 않고 어리석음 치로 갈 가능성이 높다. 기독교는 은총이라 설명하지만 결국 다스림이란 점에선 다 지배다. 특히 이런 지배를 인간이 수용해 극단화시키면 탐의 문제로 간다. 지나치게 과도한 욕망이 된다. 채워지지도 않으면서 갈등을 유발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하나님이 탐욕하다는 말이 아니고 인간에게 주어졌을 때 탐욕화될 가능성이 분명 있다는 뜻이다. 또한 Power의 문제가 지나치게 극단화 되면 분노를 유발한다. 왜? 권력과 권력이 충돌하면 분노밖에 나올 것이 없다. 그 분노가 진이다. 서양에 대한 지나친 해석일 수 있지만 불교적으로 보면 전혀 불가능한 해석만도 아니다. 서양적 지혜는 분별 지배 권력이 함축돼 있는데 이것이 과도화되고 지나칠 경우엔 치탐진으로 화할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불교는 치탐진을 번뇌라 말한다. 결국 이런 것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이렇게 번뇌가 사라진 것을 열반이라 한다. 이렇게 번뇌가 열반으로 가는 지혜를 유식학적으로 말하면 轉識得智라 할 수 있다. 우리의 통상적인 의식을 돌려 지혜를 얻는 것이다. 불교에 관한 지혜3 轉識得智 의식을 보리와 열반으로 전환해서 얻어진 지혜 식을 아뢰야식 폭 넓게 말라식 의식 모두 말할 수 있는데 여기선 우리의 통상적인 의식으로 보면 된다. 이 의식이 번뇌로 지혜로 넘어가 열반의 경지에 간 것이 전식득지다. 탐진치가 지혜의 단계로 넘어간 것이다. 전식득지의 지를 반야사상에서 보면 반야로 표현되지만 결국 無分別智다. 번뇌가 소멸돼 열반으로 간다는 말은 分別智가 무분별지로 넘어간다는 소리다. 통상적으로 보면 우린 분별하며 산다. 그런데 번뇌를 유발하니 수행을 통해 반야 무분별의 단계로 돌리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끝나나? 여기서 끝나면 불교가 아니다. 무분별에서 끝나면 무분별일 뿐이다. 여기서 후득지란 것이 나온다. 불교에 관한 지혜 4 後得智 진정한 보살은 중생구제를 위해 훌륭한 방편을 내면서 어쩔 수 없이 그들을 위해 평소와 같이 분별하는 자비로운 지혜 후득지는 불교적 지혜의 완성판 결정판이다. 득도 이후의 지혜다. 처음 번뇌 망상 속에서 분별하며 사는 분별지가 있다. 그 다음 득도했다는 말은 무분별지로 갔다는 말이다. 그런데 득도 후에도 분별지가 있다. 有分別智 말이 이상하다. 불교는 분별을 타파해야 할 것 같은데 오히려 마지막에 가면 다시 분별한다. 그러나 이 분별은 득도 이후의 분별이다. 득도 이전의 중생의 분별이 아니다. 이 분별은 득도 이후 보살과 부처의 분별이다. 중생의 고통과 아픔을 분별해 듣는 것이다. 아픈 사람의 것을 들으려면 분별이 있어야 한다. 무분별이면 아프든 안 아프든 모른다. 누군가의 아픔을 같이 느끼고 해소해주려면 분별할 수 밖에 없다. 득도 이후의 분별은 자비를 가르킨다. 有分別은 중생이 하는 번뇌의 찌꺼기다. 득도는 지혜의 단계를 갔다는 말이다. 그러나 거기 머물지 않고 후득지가 나온다. 그것은 자비다. 이렇게 말하면 불교 얘기 다하는 셈이다. 중생이 번뇌에 살지만 지혜를 통해 자비가 되면 이것이 불교다. 그래서 대승은 지혜와 자비가 대승의 모든 것이라 말한다. 이것이야 말로 불교의 모든 것을 다 보여준다. 중생의 번뇌로 본 산은 산이다. 물이 아니다. 그러나 지혜를 얻으면 산은 산이 아니다. 득도 한 것이다. 산문에 들어 선을 안 것이다. 그런데 有分別智에 가면 산은 역시 산이 된다. 그 역시엔 중생과 출세간이 자비를 통해 다 들어가 있다. 應無所住 而生其心 – 마땅히 머무른바 없이 마음을 내라<금강경> 아무 설명 없이 응무소주 이생기심 하면 말 장난 같이 보인다.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러면서도 그 마음은 일어난다. 무주면 生하지 말아야지 그런데 뒤에 또 生한다? 앞 뒤가 안 맞는 말 같다. 住하니 번뇌 망상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득도를 하면 마땅히 머무는 바가 없다. 그런데도 마음은 낸다. 어떻게? 자비의 그 마음이다. 기심은 따라서 자비심이다. 단순한 지혜의 마음이 아니다. 따라서 반야란 지혜가 자비를 만나지 않으면 그 지혜는 완성되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지혜의 완성 반야바라밀의 뜻이다. 반야바라밀은 그 자체가 지혜를 함축한 말이다. 다시 한 번 보자. 불교식으로 하면 應無所住 하는 그 마음이다. 無住心이다. 무주심을 줄이면 무심이다. 그런데 그 마음이 든다. 그 마음은 진심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무심이 진심이다. 무심은 자비란 매개가 없으면 절대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진심은 바로 자비심을 뜻한다. 따라서 무나 무분별의 無住心에 머무는 이상 불교는 완성되지 않는다. 그런 뜻이 바로 응무소주 이생기심이다. 중간에 자비가 매개될 경우만 무심이 진심이 될 수 있다. 이상 정리하면 서구식 지혜가 가진 문제 분별 지배 권력이 과도화 되면 치탐진의 문제를 유발할 수 있다. 오늘날 Knowledge based society는 지혜기반사회로 바뀌어야 한다. 그 지혜가 어떤 지혜냐? 바로 무분별지 법소의지 전식득지 후득지를 말한다. 특히 후득지의 지혜는 언제나 자비를 수반한 지혜다. 자비를 수반한 지혜란 그 어떤 지배나 권력도 잠복되지 않은 진짜 지혜다. 그것은 분별을 내려 놓을 때 가능하다. 결국 지혜기반사회의 지혜는 지배와 권력을 내려놓고 자비를 드러낼 수 있는 그런 지혜로 지식기반사회의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대안적 지혜가 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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