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생각하는 무지
내가 생각하는 몇 가지 무지를 설명해 보겠다.
하나는 근원, 본체에 대한 오해로 의지하려는 본능에 얽매여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홀로 있지 못하는 두려움, 무언가에 속해 있으려는 소속감, 이렇게 홀로 있기와 함께 있기를 자유자재하지 못하는 불안한 자기 태도이다. 이것이 얼마나 힘든가 하면 세상에 신이나 절대적인 것이나 인간을 초월하는 것에, 또는 이런 관념들에 의지하는 삶과 신앙과 학문과 관념체계가 너무 많다. 뿐만 아니라 스승이나 가르침 같은 것에도 의지하면서 스스로 가지 못하고 무언가에 기대려는 습성이 있다.
하나의 거대한 기둥을 세우고 모든 것을 거기에 종속적으로 만들면서 사는 것인데, 그 기둥이 신이나 숭배할 무엇이 되기도 하고 형이상학의 관념체계이기도 하다. 즉 본체 관념 같은 것으로 모든 것을 하나의 근원적 무언가를 설정하고 사유를 전개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 사람의 사유나 행동을 보면 그 근원적 사유의 형태를 알 수 있는데 이런 종속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신에 종속할 뿐만 아니라 관념에도 종속한다. 우리나라의 사대주의도 이런 심리의 하나이다. 강하고 절대적인 힘을 추구하며 그것을 따르고 숭상하는 것이다. 태극이나 무극이나 도라는 것이나 깨우침이라는 것이나 어떤 경전이나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지 그것에 커다란 의미를 두고 그것으로 모든 해석을 하며 그것으로 기준으로 삼고 다른 것은 전혀 돌아보지 않는 것이 된다. 자문해 봐야 한다. 나는 무엇에 기대어 사고를 전개하고 행동을 하며 삶의 의미를 두고 있는지 말이다.
두 번째는 시간적 자아의지(계획)를 가지지 못함이다. 공간적으로는 이 사회, 이 시대에, 가정에, 자기의 입지를 정할 수 있다.
남자, 여자, 어머니, 아버지, 딸, 아들, 사람, 직장에서는 대리나 과장이나 사장, 노인, 학생,…….
하지만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통합하는 자아의 설립이 안 되는 것이 있다. 지금 나는 집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이렇게 있고 이렇게 행동하며 이런 식으로 살면 된다. 하지만 십 년, 백 년, 천 년 후에도, 한 생, 두 생, 삼 생, 사 생 후에 이렇게 살면 될까?
내가 거꾸로 과거로 이렇게 진행하며 마음을 거슬러가고 다시 미래로 거슬러가면서 자기의 위치를 정하면서 사는 것이다. 어떻게 살지, 무엇을 위해 살지, 그로 인해 지금 내가 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런 고민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 지금 이 순간만을 위해서, 또는 현생에서만 해야 할 것을 위해서 생각하고 행동한다면 어리석다고 하는 것이다.
시간의 안목이 다른 자가 신神이라고 했다. 신과 나의 차이는 어디까지 내다보면서 사는가이다. 미래를 투시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설계하는 것이고 의지를 갖는 것이다. 부처나 신이 각종 종교의 위대한 존재들이 신성하고 대단하다고 말해 봐야 다 쓸데없는 소리다. 정말 중요하고 봐야 할 것이 바로 이 전체적이고 원만하며 확대한 시각이다. 이것이 그들이 위대한 부분이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필요 없다.
부처가 열반하고, 해탈하고, 정등각하고, 뭐라고 아무리 수식해도 그런 것은 쓸데없다. 정말로 그 분이 이룬 것은 그 분의 거대한 자아의 크기이다. 이것이 얼마나 큰가가 바로 위대함의 기준이다. 다른 단체나 종교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을 봐야 한다. ‘마하라’라고 한 이 자아의 창조와 이룸과 그 일관적인 통찰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자천해야 하고 이렇게 공부해야 하는 그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불생불멸하고 영생하며 신이 되고 우주를 넘나들어야 한다면 바로 이러한 마하라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우주도 이러한 마하라로 이룬 몸이고 세계이다. 물질적인 것이나 정신적인 것이나 그런 것으로 우주를 논할 수 없다. 이 우주의 의지를 알아야 한다.
우주는 스스로 있기 위해서 있는 것이다. 빅뱅도 아니고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스스로 있어야 하는 의지를 갖고 있는 것이다. 이 마하라가 없으면 있는 것이 아니다. 있어도 금방 사라지는 스쳐가는 세월이다.
세 번째는 일종의 허무이다. 지금 사회가 일종의 허무에 빠져 있다고 본다. 나는 별것 아니다, 항상 손해보고 있다라고 생각하고, 빈부 격차나 사회적인 좌절로 인해 노력해도 지금보다 나아질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인과적 삶이 의미 있는가? 공부하고 노력하고 선을 쌓으면 그만한 보답이 정말로 있는가? 내가 정말로 노력이 부족해서 지금 이 정도일 뿐인가? 내가 변할 수 있는가? 나는 깨달을 수 있는가?
개인의 자신감을 떨어뜨리고, 있던 자신감마저 박탈하는 사회는 아닌지 모르겠다. 사회적 불평등과 자신의 처지에 대한 비관이 얼마나 많은가? ‘내가 그렇지 뭐…….’ 하면서 얼마나 자위自慰를 했는가?
자신을 존귀하게 느끼고 존엄성이 있다고 하루에 얼마나 느껴지는가? 우리는 한 인간으로서 얼마나 인정받고 대우받으면서 살고 또 남을 대우하고 있던가? 내가 존엄해 보이지 않는데 남까지 챙겨 줄 여력이 없는 것은 아닌가?
나, 나, 나로서 오직 나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인정받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며, 살고 있고 생명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더 이상 다른 어떤 것도 필요 없이 대접받을 수 있을까?
네 번째는 두 번째의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모르는 무지이다. 진정으로 우리가 이 세계가, 자연이, 우주가 존재하는 목적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보편적 존재의 목적과 생명존재의 근원적 뜻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우리가 목적적인 존재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지금의 합리적인 이해일지 모르지만 나는, 우리는, 모든 만물은 목적이 있고 그 목적을 내가 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전체의 목적과 내 목적이 같을 필요는 없다. 이런 것을 알 수 있고 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에게 목적이 있고 그리고 그 목적을 내가 정할 수 있다는 것을 모른다. 더 쉽게 말하면 자천의 중요성을 모르는 것이다. 왜 해야 하고 왜 이것이 중요한지를 모른다. 더 나은 목적을 정하고 원대한 꿈을 꾸는 자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두 번째의 무지는 뜻을 가져야 하는데 갖지 못한 것이고, 이 네 번째 무지는 이 뜻을 가져야 한다는 것 자체를 모르는 무지이다.
다섯 번째는 나, 바로 나였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그 누가 뭐라 해도 내가 있어서이고 내가 있었기 때문이고 나임을 알아야 한다.
내가 나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껴야 무아로 간다. 처음부터 무아가 아니라 나이기 때문에 무아가 됨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또 그 다음에 무아이면서 아我라는 나 아닌 나가 된다.
최소한 여기까지는 와야 공부한 것이고 그 전에 나라는 것만이라도 알아야 하지 않을까?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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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明化. 작성시간 19.04.23 감사합니다.
책을 읽는것만으로는 안될 것이고
수련도 혼자는 어려울것 같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환공(桓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9.04.24 성찰과 의식과 마음에 대한 이해를 잘 하시고 나를 관리하시면 공부되는 원리가 일부라도 해결되고 업무 중에도 얼마든지 공부가 될 수 있습니다.
수련도 정좌해서 안하더라도 하는 법이 있으니 이론이해 공부좀 해 보십시오.반드시 수련을 조건을 만들어서 안해도 되는 공부법들이 있지 않습니까?
마음먹기 나름입니다.
공부원리를 모두 말씀드릴 수도 없고...다시 한 번 더 말씀드리면 첫 번째.두 번째 글에 기본공부법이 들어 있습니다. -
작성자아녜스 작성시간 19.04.24 공감입니다!
나가 없다면
아무것도 없는것임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