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념無念, 무상無相, 무주無住, 무수無修
무념無念은 생각하면서 생각이 아니라는 것이고, 망념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며, 이것은 외경外境에 대한 집착을 안 한다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이것도 외경이라는 것이 내 심층의 발현이라서, 외와 내가 구분이 없는 경지가 4선정인데 무념이라는 것이 좀 초보자에게나 사용되는 말이다.
파조선을 넘어가면 내외 구분이나 생각이나 생각 안 하는 것이나 잡념이나 망상이나 번뇌나 보리나 이러한 구분이 되지 않는다. 이런 것은 이 이하의 수준에서 하는 구분이다. 그래서 무념을 말하는 사람은 나는 공부가 파조선 이하라고 생각한다.
무상無相은 상이면서 상이 아니라는 것으로, 위의 무념이 외경에 대한 집착을 안 하는 것도 상이 되어 이것도 상이 아니라는 것이 되어야 하며 무념이면서 무념이 아니라고도 된다. 그래서 속세와 출세의 구분이나 번뇌와 보리의 구분도 없앤다. 그러니 출세에서 돌아와 속세의 변혁에 참여 했어야 한다. 중생을 가르치는데 산속 사찰에서 편하게 사람 기다리고 먹고 살며 수행만 하는 안정은 게으름이다.
상이 무엇인지, 즉 자기 안에서 나오는 상을 알아내는 것은 죽기보다 힘든 경우가 있다.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 불성을 논한다면 이미 옆길로 새고 있어서 그 공부의 진위가 뻔하다.
그래서 진짜 상과의 싸움은 파조선 이후부터가 되는데 이것을 해내야 일차적인 공부의 성과가 있다고 본다.
무주無住는 생각마다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하며 멈추지 않는다는 것으로, 선정에 머물거나 깨우침에 머무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무주는 어느 정도 공부해서 경지나 체험이나 수증이나 나름의 돈오가 있을 경우나 확연히 대오했다고 할수록 더욱 문제가 된다.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은 머무를 때와 머무르지 않아야 할 때를 아는 것부터인데, 이 시작부터 힘들어해서 무주를 한다고 하면 내가 조금은 인정하는 경지로 오른 것이다. 일반인이나 종교 단체나 가끔 드물게 보인다.
무수無修는 닦음 없는 닦음이라고 한다.
인위적이고 작위적인 수행을 거부하는 것이다. 수행의 방법적인 집착이 지금도 각종 단체에 만연되어 있고 전혀 이러한 무수를 알지 못하는 상황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나라 수련 단체의 수준이 아직은 걸음마 단계라고 본다. 자기 단체의 수련법을 버리거나 놓지 못한다면 그 갈 길은 뻔하지 않은가? 그들은 어디로 사람들을 이끌고 가는 걸까?
이것은 무상이나 무주로 종합할 수 있는 것인데 가르치기는 쉬운 것이 아니라서 변견邊見으로 받아들이기 쉬운 것이다. 무無만 말하고 유有는 말하지 않아서 그 위험이 이후에 참 크게 된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수기접인授記接引28)의 가르침인 것이지 이것이 보편적 가르침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그때그때 만나는 사람마다 다르게 말하거나 알려줄 것이니, 무수無修일 수도 유수有修일 수도 있다. 이것은 그 사람을 보고 말해야 한다.
28) 스승이 제자를 가까이에서 직접 가르침을 주며 이끌어 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