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 몸짓 · 바른 마음 6 (앉는 자세)
어떻게 앉을 것인가? - 단좌법端坐法
어떻게 앉을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위해서는, 먼저 왜 앉으려고 하는지에 대해 묻고 답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일상의 앉는 일이라면 거기에 어울리는 답이 있고, 수행처럼, 일상이 아닌 특별하게 앉는 일이라면 역시 거기에 어울리는 답이 있기 때문이다.
왜 앉는가? 그리고 어떻게 앉을 것인가?
이에 대한 답에는 철저한 사리事理 연구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수많은 경험들이 보편 타당성을 얻은 다음, 우리 시대의 수행법으로 이야기되어야 한다. 수행이란 자신의 몸을 대상으로 노老와 병病, 그리고 삶과 죽음의 문제를 풀어가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행자를 위해 옛 어른들은 이런 말씀을 하셨을 것이다. “수행할 때, 몸으로는 돌다리를 두드려 가는 심정으로 하고, 마음으로는 백척간두에서 진일보하는 심정으로 하라!”
밝음을 지향하는 공부에서 몸 공부는 마음 공부와 짝이 되면서 전제가 된다. 물론 공부의 여러 단계는 어느 때는 병행되기도 한다. 그 가운데 우유식과 같은 기초 공부가 되면서 고급 식사에 해당하는 공부법이 있다. 그것이 바로 ‘숨법’에 대한 ‘중추기학’中樞氣學이다. 이 중추기학을 뿌리가 되는 공부라 하여 ‘본공’本功이라 하고, ‘본공’의 공부는 다른 자세보다도 앉아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좌법본공’이라 부른다.
왜 앉아서 하는 본공이 공부의 뿌리가 되는 것일까?
선가의 옛 수행 지침이 되었던 《용호비결龍虎秘訣》과 《현관비결타좌식玄關秘訣打坐式》에 그에 대한 답과 구체적인 자세에 대한 설명이 들어있다. 여기서는 바른 몸짓에 대한 자세 설명에 국한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용호비결》에서는 밝음으로 가기 위한 “수단지도”修丹之道의 요체를 “폐기”閉氣라는 단 한 마디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폐기를 위한 방법론을 다음과 같이 들고 있다.
“(폐기를 하고자 하는 자는) 먼저 마음을 고요하게 하고, 다리를 포개어 단아하게 앉아, 눈섶 위의 안광이 띄우는 여러 색채를 아래로 떨어뜨리고, 그 안광이 코끝에 미칠 때 코의 흰 부분을 내려보며, 그 안광이 배꼽 부위에 이르면 배꼽 밖에서 원이 이루어져야 한다.”
좌방 선가의 수행 지침이 되는 《현관비결타좌식》에도 신법身法에 대한 구결을 말하고 있다.
(사진1) 단좌端坐: 단아하게 앉기 위한 기준은 몸 안에 있다.
상·중·하 세 단전을 올곧게 이어주는 자세를 일러 단좌라 한다.
“양 발은 십자로 뒤집어 놓고, 양 발의 중심은 하늘을 향하도록 하라. 머리는 바르게 두고, 허리는 곧게 하며, 가슴은 편안하게 하고, 시선은 평지를 향하여 내리며, 손은 합하되 몸은 바르게 하라.”
여기에 세부적인 설명이 추가되고 있다. 손은 어떻게 합할 것인가는 왼손이 바른손을 합하는 용탄호龍呑虎를 이야기하고, 몸을 바르게 한다는 기준으로 “몸이 지나치게 내려 가라앉아도 안 되고, 위로 올려 보아도 안 되며, 몸이 좌나 우로 쏠려서도 안 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바름의 기준을 알 수 없다. 《용호비결》에서 말하는 ‘단좌’端坐가 겉으로 보이는 단아함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발과 허리와 가슴과 머리와 팔을 어떻게 두어야 하는가에 대한 《현관비결》의 이야기도 겉모습이 그 기준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진2) 명상이나 감각수행을 할 때, 앉는 자세를 이와 같이 변용할 수 있다.
양 발을 십자로 하거나, 포개어 앉는다는 것은 반가부좌 이상을 말한다(사진1). 책상다리라고 하는 일반적인 자세는 수행에 적합한 자세는 아니다. 물론 이 자세는 ‘호흡’이라는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 그렇고, 명상이나 감각수행에서는 (사진2)와 같은 자세를 변용할 수 있다.
(사진1)처럼 다리를 포개어 앉을 때는 양 무릎과 꼬리뼈가 정삼각형을 이루어야 한다. 세 꼭지점이 이루는 각도도 60°로 일정해야 하고, 각각의 무게 중심도 일정해야 한다. 특히 무릎이 들리거나 좌우가 불균형이면 몸 내부의 균형이 쉽게 무너진다.
“단아하게 앉는다”는 것은, 밖으로는 허리가 곧고 가슴은 편안하고 머리가 바른 것을 말하고, 안으로는 상·중·하의 세 단전이 제대로 얹혀있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단아한 모습을 위해서는 (사진1)의 동작에서 엉덩이를 들어 뒤로 밀어서 꼬리뼈가 들리게 한 다음 허리를 천천히 세워주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사진3, 사진4). 허리를 ‘곧게’(直) 세우기 위해서는 꼬리뼈에서 배꼽으로 무게 중심선이 잡혀야 한다. 이런 상태에서 허리는 태극의 회도리처럼 앞으로 나가게 되고, 그 모습은 활처럼 팽팽하게 당겨져 있는 상태가 되며, 항문은 들려서 뒤쪽으로 45°정도 향하게 된다. 여기서 허리가 뒤로 빠지거나, 항문이 바닥에 닿는다면 정좌나 단좌가 될 수 없다.
(사진3) 바르게 앉기 1단계
손을 바닥에 고정시키고 엉덩이를 들어 뒤로 쭉 밀어준 다음, 천천히 상체를 세운다.
(사진4) 바르게 앉기 2단계 점선은 내부의 기운 흐름을 나타내고, 실선은 척추의 태극 흐름을 나타낸다. “가슴은 편안하게 하라”는 것은 팽팽하게 당겨놓은 허리 부위에 상대하여 말하는 것이다. 이째 중심성은 배꼽에서 흉추 6~7번 사이인 영대로 이어진다. 옆에서 보았을 때 허리는 태극이나 수레바퀴처럼 원만한 모습이어야 한다. 이럴 때 가슴은 긴장돼서는 안 된다. 어깨는 재봉선의 흐름을 타듯이 약간 앞으로 두고, 목은 지난번에 언급한 것처럼 이마를 축으로 뒤로 젖혔다가 턱을 축으로 당겨주도록 한다. 당기는 정도는 시선이 전방 2m를 볼 수 있는 범위까지 당겨준다. 그러면 머리도 자연히 가슴과 편안하게 연결되는 ‘두정’頭正의 상태가 된다. “머리가 바르다”는 기준은 하단전에서 중단전을 거쳐 상단전으로 연결되는 길의 바름을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그 역으로 상단전으로부터 들어오는 외기外氣가 길 따라 하단전으로 제대로 연결되는 자세를 말하기도 한다. (사진4)에서 실선이 외양이라면, 점선은 내부에서 흐르는 기운의 중심점을 나타낸 것이다. 이 두 흐름이 조화를 이루게 앉는 것이 단좌법이다. 손을 두는 방법도 중요하다. 과거 수행자들이나, 고분에서 볼 수 있는 신장들이 취하는 손 자세(印)의 모습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인 맺는 방법에는 해당 이유가 있고, 그에 따라 몸에서는 각각의 감각이 다르게 일어난다. 어떤 손 자세를 취할까? 어느 손을 밑에 두고, 어느 손을 위에 둘 것인가? 이는 그 반대ㅇ와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현관비결》에서는 왜 왼손으로 바른손을 감싸라고 했을까? 그것은 왼손과 바른손이 음양으로 서로 다른 기능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왼손이 나가는 맥이라면, 바른손은 들어오는 맥이다. 그 흐름을 고려한 배치가 ‘용탄호’龍呑虎라는 합수법이다. 보통은 (사진5)와 같이 결인을 맺지만, 이 자세의 기초가 되는 결인법은 (사진6)과 같다. (사진6)의 결인법은 몸의 중심 곧 하단전의 중심을 가리키는 자세로, 이를 ‘지중세’指中勢라 한다. 가만히 주먹을 쥔 상태에서 검지를 곧게 펴서 그 끝이 서로 살짝 닿게 하고, 엄지는 펴서 중지 위에 실은 다음 서로 끝을 바라보게 한다. 이 결인이 오래되면 저절로 (사진5)의 흐름으로 이어진다. 지금까지 살펴본 자세를 운영하는 내부의 문제도 중요한데,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눈의 처리와, 생각은 어떻게 두고, 숨은 어떻게 쉴 것인가의 문제가 있다.
(사진5) 용탄호龍呑虎 합수법合手法 왼손이 바른손을 감싸도록 결인한다.
(사진6) 지중세指中勢 몸의 중심, 곧 하단전의 중심을 가리키는 자세이다.
이 결인법을 취하면 단중丹中으로 감각이 집중된다.
수행할 때, 눈은 감아야 되는가? 떠야 되는가? 이 문제를 편의적으로 답할 수 없다. 시선의 처리는 기氣의 운용과 직결된다. 명상할 때는 눈을 감아도 되지만, 호흡을 위한 좌법일 때는 눈을 감아서는 안 된다.
시선의 문제는, 눈쎂을 아래로 내려 눈은 절반만 뜨고, 시선은 코끝을 향하게 하여 안광이 아래로 드리우게 한다. 아래로 드리워진 안광은 코끝에서 하얀 테가 보일 수 있도록 한다. 그리고 생각은 언제나 배꼽 한 치 반 아래에 두되, 이것이 늘 그렇게 있게 한다.
시선을 아래에 내려야 하는 이유와 코끝이 왜 하얗게 보여야 되는지! 왜 의념은 배꼽 아래에 두어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가 있다.
사리 연구를 바탕으로 하지 않는 무식한 버티기는 수행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것이 수행의 초기에 넘어야 할 자신의 육체적 한계를 극복하는데는 도움이 될지라도, 일정기간이 지나 수행의 근본목표인 ‘정심’正心과 ‘정각’正覺에 이르는데는 오히려 장애가 된다. 그렇게 무식하게 몰아붙이는 수행문화도 문제이지만, 자연스러움을 근거 삼아 편리한 자세와 방법을 쫓게 하는 편향된 수행문화도 문제다.
모울도뷔 준비 제6호 1999년 09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