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이야기- 없고서 있게 하는
2017년 4월 20일 20:38
주체라는 것이 무엇이라고 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쉽게 드러나는 것도 아니고 드러나야 하는 것도 아닐지도 모르고 드러내서는 안 되는 것일지도 모르고요.
주체가 없다거나 해체시키지만 그게 주체를 정말 제거하고 소멸시키려고 하는 것은 아닐 겁니다. 다른 그만한 이유가 있거나 어떤 의미를 드러내보려고 하는데 그것을 위해 주체를 먼저 논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백척간두 갱진일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매순간의 첨단의 시점에서 살게 됩니다. 매순간 처음이고 첫 경험인데 그래서 두렵고 불안하며 그 두려움과 불안함이 고정적이고 단단한 지대를 원하고 확실성을 요구하는지도 모릅니다. 그게 신일 수도 있고 권력일 수도 있는데 우리 사고하는 방식도 이렇게 고집스럽고 고정관념에 매어지게 되는 것이기도 할 거 같습니다. 우린 살아갑니다. 주체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살아갑니다. 살아가기 위해서 자아라는 것이 있고 의식이라는 것도 있고 감정이라는 것도 있고 신체라는 것도 있습니다. 지식이 있고 기술도 있고 학력도 있고 조직도 있고 사회나 국가도 있고 직장도 있고 돈도 있고 모든 사회에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복잡하고 무한한 듯한 외부 사물들에 항상 냉정하든 감정적이든 어떤 종합을 하면서 행동하는 것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종합하고 분별하고 이해하는 것이 있어야 더 나은 행동을 할 것인데 그게 역시 배운 대로 남 하는 대로 시키는 대로 알던 대로가 됩니다.
새롭게 보거나 내 맘대로 보는 것이 그다지 남들이나 사회에 인정도 안 되고 이득도 안 되고 그러면 결국 포기하거나 외골수가 되거나 별난 사람이 될 뿐입니다. 하지만 이런 외부 평가나 흐름과는 상관없이 우린 분명 매순간 신선한 한 걸음이고 첫 행동이 됩니다.
천보를 걸어 왔거나 만보를 걸어 왔어도 우린 이다음 한 발은 처음 하는 한 걸음이 됩니다. 지나온 천 걸음이나 만 걸음은 지금 한 걸음과는 다른 것이고 지금 한 걸음이 내가 절실하게 느껴지는 그 한 걸음입니다. 우린 매 순간의 걸음이 이런 의미가 있습니다. 그전의 만 걸음은 지나간 것이고 기억입니다. 그것이 지금의 한 걸음에 지속적인 힘을 주고 그것이 모여 어딘가로 가는 걸음이 되기도 하지만 굳이 그것에 고집하거나 집착 할 수는 없습니다. 이 한 걸음을 위해 모든 내 능력을 집중해야 하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지나온 만 걸음이 자꾸 이렇게 저렇게 걸어야 한다고 고집합니다. 물론 그 걸어온 방향대로 걸어 갈 것이고 걸어온 방식으로 걸을 것이지만 꼭 그런 것도 아닙니다. 방향은 매순간 바뀌는 것에서 정하는 방향이고 걷는 방식도 매순간 바뀌는 방식에서 정한 걸음입니다.
같은 것만 보고서 자꾸 같아지라고 하면서 같은 거라고 강요하지만 분명 달라지는 것을 위해 걷고 있습니다. 걸어가는 그것이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이고 달라지는 것이며 이미 걸어왔으니 다른 공간이고 걷는 방식도 한 걸음 전과 한 걸음 후는 다른 신체조건이며 다른 사고 중이며 다른 공간과의 합쳐짐이며 다른 상태로의 진입이 있는 것인데 자꾸 그전 것과 같은 거로만 보는 것은 집요함이지 지금 걷는 한 걸음을 보려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이 한 걸음에 충실하기 위해 그전 것을 없음으로 하고 지금 생성되는 것에 집중하는 전일함이 있게 됩니다.
만 걸음이나 지금 한 걸음이나 전체적으로 주체가 됩니다.
자꾸 만 걸음의 걸어온 것을 고집하면서 과거의 그대로 자기를 정초하려고만 하면서 그것을 주체나 자아나 그렇게 정의하면 안 될 것입니다. 주체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는데 이 만과 한 걸음 거기에 걸어가야 할 목적지까지의 전체가 다 주체입니다. 어느 한 부분에만 집중하면서 주체를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린 지금의 의식만 주체라고 생각하며 전체를 보는 것이 익숙하지 않습니다.
만 걸음을 생각해야 하거나 그것이 필요하면 그것을 보고, 살아가는 지금의 한 걸음은 지금으로만 봅니다. 어느 것도 주체는 아니고 주체는 전체인데 그중에 나누어서 보는 게 또 우리 습관이라서 지금은 지금만 보고 과거는 과거만 보면서 서로 자기가 옳다고 합니다.
한 걸음은 의식처럼 순간적인 생함을 주로 하는데 이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한 순간에 모든 것을 걸고 판단하며 행동하는 자입니다. 지금에서만 우린 살게 되는 것이니 자꾸 과거의 것으로 지금을 논하거나 분별하려고 하거나 정의하려고 하거나 강요하려고 하거나 행동한다고 말하거나 행동하라고 하거나 하면 곤란합니다. 언제나 지금 이 순간만이 사는 것입니다. 지금은 지금으로 정해가는 것임을 알고 살아야 합니다. 이 누구에게도 양보하지 않고 무엇에게도 영향 받지 않으면서 스스로 행동하는 것에서 우리의 무한자유가 있습니다.
언제나 무에서 시작한다는 것은 언제나 무한한 자유 속에서 순간의 판단을 하는 것이어서 입니다. 순간순간이 무에서의 뛰어오름 입니다. 오직 이러합니다.
자아처럼 만 걸음을 걸어온 과거의 누적에 의한 것이 있는데 우리가 살아온 과거를 부정할 순 없습니다. 살아온 것을 아니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또 이것이 없으면 삶 자체가 안 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엔 선을 그을게 있는데 그건 다음 한 발을 나가는 그것을 방해하거나 그것을 제어하려는 의도를 가지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음의 첨단을 가는 것을 위해서 내던지고 몰입하는 것이 아니라면 살아가는 것을 뒤로 댕기면서 방해하는 것일지 모릅니다.
밀고 더욱 철저하게 무에서 솟아오르는 냉정함을 가지고 한 발을 나아가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체는 어떤 지향이 있습니다. 이것을 알 수도 모를 수도 있는데 대개의 자아는 이걸 모릅니다. 이걸 알기 위해 과거엔 도를 닦았지만 지금은 그런 전통은 사라진 거 같습니다.
도가 건강이나 취미이거나 영적인 유희나 소일거리가 된 듯 합니다. 대개는 자기의 권력을 해소하기 위한 배출구로 쓰고 있는 듯도 합니다.
그래서 도덕을 말한 것이죠. 도덕은 뜻이 있어야 하는데 자기가 뭘 하려고 하는지 그 내적인 욕망을 알지 못하면 즉 왜 태어났는지 그것을 모르면 도덕이 되지 않습니다. 자기의 존재목적도 모르고 남의 존재에 영향을 주려는 것은 어설픈 것이니까요. 여기에 자기의 목적으로 타인의 목적으로 강요하는 것이나 자기가 안다고 남도 아는 것처럼 하거나 그러면 역시 반푼이겠죠. 하나만 아는 거요.
과거엔 자기를 아는 것부터였는데 지금은 이것도 역시 웃기는 말장난이 되었습니다. 시간적인 것으로 주체를 말했는데 이것도 하나의 말하는 방법이지 이렇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 의도된 게 있어서 이런 말을 하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