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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철학

근대와 탈근대의 대립을 넘어 : 氣철학과 현상학의 대화

작성자환공(桓公)|작성시간19.07.26|조회수611 목록 댓글 0

 

근대와 탈근대의 대립을 넘어 : 氣철학과 현상학의 대화*

 

 


연구책임자 : 장윤수 (대구교육대학교)
공동연구원 : 김영필 (아시아대학교)
신상형 (안동대학교)
신인섭 (강남대학교)
劉長林 (中國社會科學院)
C.O. Schrag (Purdue University)

[한글요약]

이 논문에서 우리는, 근대와 탈근대의 대립을 넘어 하나의 화해의 지평을 마련하려는 계기를 현상학의 몸(살)과 張載哲學의 氣槪念을 중심으로 시도해 보았다. 특히 장재 기철학이 갖는 현상학적 메타포를 읽어냄으로써, 東아시아적 사유와 서양사상 사이의 橫斷的 의사소통의 장을 마련해 보고자 한 것이다. 장재의 기가 인간 자신과 그리고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세계를 力動的․相關的으로 이해하기 위한 고유한 개념이듯이 후설의 ‘생활세계’라는 근원적 현사실(Urfaktum)은 모든 자아와 세계의 선험적 근거로 이미 주어져 있는 생생한 경험의 場이다. 따라서 이 생활 세계적 주체는 이미 세계와 지향적으로 얽혀 있는 몸-주체이다. 현상학적 의미의 ‘몸’은 전통적인 의식과 세계로 이원화되기 이전부터 수동적으로 기능하는 지향성의 채널이다. 이 몸-일원론은 바로 장재의 氣一元論으로 연결될 수 있는 현상학적 키워드이다.

 

그러나 장재의 기철학에 보다 가까이 다가서 있는 철학자는 후설보다 메를로-퐁티이다. 메를로-퐁티가 보기에, 후설에 있어서 몸은 어디까지나 의식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기에, 여전히 의식이 몸에 비해 특권적 지위를 가질 수밖에 없는 선험적 주관론의 형태를 띠게 된다. 그러므로 후설의 몸의 지향성(leibliche Intentionalität)이 아무리 강조된다고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의식의 지향성이란 도식을 벗어날 수 없으며, 그러한 점에서 후설을 중심으로 진행된 현상학적 사유가 전통적 이원론을 극복할 수 있는 역동적 대안이 되기에는 아직 선험성으로부터 자유로워지지 못하고 있다. 반면, 메를로-퐁티는 주체와 타자 사이의 지향적 짜임새를 ‘살’이란 채널을 통해 강하게 장치해둔다. 따라서 메를로-퐁티의 살에 관한 담론을 분석하는 것은 현상학적 사유와 장재 사유의 연대성을 확인하고 이것을 통해 근대/탈근대를 넘어서는 지평을 마련하기 위해 지향성의 폭과 넓이를 더욱 더 확장하기 위해 필요한 작업이다. 우리는 메를로-퐁티의 살의 개념이 갖는 ‘애매성’과 장재철학의 기의 개념이 갖는 ‘이중성’ 사이의 연대성을 제대로 읽어낼 필요가 있다. 근대와 탈근대를 넘어서고 화해시킬 수 있는 역동적 고리가 바로 여기에서 발견될 수 있기 때문이다.


주제분야 : 동서비교철학, 기철학, 현상학
주 제 어 : 氣, 神化, 陰陽, 이중구조, 張載, 體用, 太和, 太虛 / 메를로-퐁티, 몸, 살, 살의 존재론, 생활세계, 순수경험, 순수자아, 에드문트 후설, 윌리암 제임스, 이야기주의, 현상학, 횡단적 의사소통


Ⅰ. 들어가는 말

본 연구의 일차적 과제는 근대와 탈근대의 대립을 넘어 설 수 있는 의사소통적 지평을 현상학적 전략을 통해 마련하는 것이다. 근대성에 대한 탈근대의 도전이 스스로 남긴 추스르지 못할 태생적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현상학적 관점에서 마련하는 것이다. 특히 고전적 현상학자인 에드문트 후설의 현상학적 입장을 중심으로 문제에 접근할 것이다. 그리고 프랑스 현상학자인 메를로-퐁티와 미국의 현상학을 대변할 수 있는 윌리암 제임스의 입장을 통해 그 대안을 마련하고자 한다. 본 연구는 칼빈 슈라그에 의해 제시된 현상학적 대안을 논의의 출발점으로 취하면서, 후설과 메를로-퐁티 그리고 윌리암 제임스의 현상학적 전략을 제시할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현상학이라는 서양철학적 대안의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서양의 근대와 탈근대를 화해시킬 수 있는 역동적 대안을 동아시아의 氣哲學 특히 張載(1020-1077)의 氣論的 입장을 통해 마련하는 작업으로 나갈 것이다.


장재 철학에 있어서는 우선 그 ‘이중적’ 구조를 확인한다. 서구 전통철학의 이원론적 도식, 즉 유물론과 관념론이라는 고정된 도식으로 裁斷되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장재 철학의 역동성은 바로 이 낡은 이분법을 넘어서는 지점에서 마련된다. 장재 철학이 가지는 역동성은 모든 유형의 이원론에 대한 극단적 해체를 겨냥하는 탈근대적 전략 자체가 허물어지는 바로 그 지점에서 살아난다는 사실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전략은 장재 기철학의 이중구조를 유물론과 관념론 ‘사이의’ 철학으로 읽어냄으로써, 근대와 탈근대의 의사소통적 실천의 장을 마련하는 데 있다.

 

말하자면 장재의 기일원론이 가지는 이중적 역동성을 일원론으로 환원하려는 태도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우리의 주제는 하나의 방식을 택하고는 있지만, 어느 하나의 고정된 틀에서 자유로워지려는 장재의 사유흔적을 통해 근대와 탈근대의 교차점에서 새로운 사유지평을 확인하는 데 목표를 둔다. 특히 장재 기철학이 함의하는 현상학적 메타포를 읽어냄으로써, 아시아적 사유와 서양사상 사이의 횡단적 의사소통의 장을 마련하고자 한다. 따라서 서양의 현상학적 대안과 동양의 기철학적 에토스 사이에서 가능한 횡단적 의사소통의 장을 확인하는 것이 주된 연구 목표이다. 본 연구는 이러한 작업을 통해 다른 문화 권역들 사이에서 읽어낼 수 있는 사유의 보편적 양식을 확인하고 정리하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특히 본 연구는 칼빈 슈라그의 탈근대에 대한 현상학적 應戰을 제시한 연구성과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슈라그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후설이 경험의 충만성을 閉塞시킨 추상화된 경험론과 싸워야 했던 것처럼, 우리는 모든 것을 텍스트주의, 기호학 그리고 이야기주의로 용해시켜 버린 탈근대(postmodernism) 이후 경험을 복원하는 데 온 힘을 쏟아야 한다.

슈라그는 탈근대의 극단적 텍스트주의가 가지는 한계를 극복하고 근대와 탈근대의 대립을 넘어 양자를 가로지르는 의사소통적 장을 마련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탈근대의 개념적 도구로 사용되는 “텍스트-유비(text-analogue)는 인간행동과 사회적 실천의 조직에 새겨진 세계의 생생한 의미와 함의를 제시하기에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Ⅱ. 현상학과 <근대주의 대 탈근대주의>의 논쟁

현상학이 근대주의자와 탈근대주의자들 사이의 대결에 대응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답하려면 우선 근대성의 성과를 강조하는 자들과 그것에 대해 반대하는 자들 사이에 있는 이 논쟁의 현안이 무엇인가에 대해 어떤 명료성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현안을 전개하기에는 공간적 제약이 있으므로 아주 간단한 소묘가 필요하다. 우리는 여기에서 이러한 주제에 대한 극도로 축약된 형태의 소묘를 해볼 것이다. 즉 철학적 프로그램으로서의 특징적인 세 가지 측면만으로 근대성을 그려볼 것이다. 그러고 나서, 현상학적 시각이 그 차이를 어떻게 부각시킬 수 있는가 하는 점을 제안해보고자 한다.


근대주의는 인간합리성에 대한 계몽의 신앙을 향해 지배적인 목소리를 제공한다. 그것은 자기 이해와 사회의 발전이라는 양자를 위한 근원으로서 인간 이성의 잠재력을 강조한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이성적 존재로 정의된다. 명료한 사고를 하는 실체로 마음을 정의하는 데카르트의 이론에 근거한 근대주의는, 추정되는 인식 대상들을 엄정하게 대표하는 마음의 수용성에서 인식론적 토대를 찾는다. 탈근대주의는 인간 이성의 잠재력에 대한 근대주의자들의 시각에 대해 회의적이며, 이를 극단적으로 표현한 나머지 로고스의 파산을 소리 높여 주장하며, 인간사에서 욕망과 권력 관계의 역할을 강조한다. 여기에서 인식이란 온통 세부적 실천에서 시민 사회의 온갖 기구들에로 확장되는 권력 관계로 뒤죽박죽 연루된 것 같이 보인다. 탈근대주의는 근대주의의 인식론적 토대주의와 의식의 영점 기원 이론을 공격하고, 그 반동으로 전통적인 인식론 주체의 아주 저돌적인 탈바꿈을 추천한다. 데카르트의 에고적인 코기토, 칸트의 선험적 자아, 영국경험론의 감각적 주체 및 헤겔의 주재하는 역사 주체는 모두 늠름한 탈구조로 성숙된다.


마음에 대한 근대의 철학적 틀의 둘째 형식은 아주 직접적으로는 계몽의 합리성을 함축하고 있는데, 곧 필연성과 보편성의 추구이다. 근대주의자는 ‘반드시 그렇다’(필연적)와 ‘항상 그렇다’(보편적)는 합리적 주장들을 원한다. 그런 고상한 진리를 성취하려는 이유로, 그것이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조건 지움을 밝혀 비역사적인 통찰력에 도달한다는 것은 필수적이다. 탈근대주의는 이런 근대주의의 탐구에서 성취된 추정 결과들을 문제시할뿐더러, 그 기획 자체를 문제시한다. 인간 이성의 역사적 조건 지움과 모든 합리적 주장들의 사회적 맥락성을 강조하면서, 탈근대주의자는 심원한 인식론적 실망으로 향한 근대성의 측면에서 확실성에 대한 바로 그 탐색을 본다. 어느 곳에서든 자아와 세상에 대한 견해란 없는 것으로 탈근대주의자는 말한다. 자아와 세상에 대한 모든 견해들은 어디선가 - 나타난 언어적․사회적 실체에서 맥락이 생긴 - 로부터 있다. 우리는 항상 역사상 어떤 아주 특정한 시간과 장소로부터 생각하고 말하며, 이것은 우리가 진술하는 주장들을 피할 수 없는 비결정성으로 도색해 버리고 만다.

근대주의 대 탈근대주의 시나리오에서 셋째 쟁점은 통일성과 총체성에 관련이 있다. 확실성과 보편성을 추구하면서 근대주의자들은 통일시키고 총체화하는 것에 주목한다. 이리하여, 그들은 공통적인 지시물과 기원 및 목적(아르케arche와 텔로스(telos)의 결속에 대한 메타이야기들(metanarratives)을 쉽사리 구성한다. 이것으로 그들의 역사철학에 대한 견해에 직접적인 파생물들이 생기는데, 그것은 결정적으로 진보적이고 낙관적인 종류의 것이다. 인류의 합리적 원천에 대한 그들의 강조된 신념이 주어진다면, 그들은 인간의 본성과 사회 공학에서의 무제약적 진보의 지속적인 완벽가능성에 대한 희망을 피력한다. 반면에, 탈근대주의자들은 통일과 총체성 대신에 차이와 다양성을 강조한다. 그들은 상이한 사회의 관습과 모든 사고와 행동이 문제가 되는 다양한 형식의 담론을 강조한다. 이것은 사회 조직과 역사 이해에 관한 그들 견해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다양성과 다원성에 대한 그들의 강조는 그것이 세속적이든 비세속적이든 간에 지배를 주장하는 통솔적 지배를 향한 기질에 맞서는 최후의 보루를 제공한다. 그것은 또한 역사의 총체화 견해 즉 역사를 통일된 세계 질서를 향한 진보적 이동으로 보는 근대주의적 신념의 낙관론을 빼앗고 만다.


그렇다면 현상학이 탈근대주의의 반동에 대항하다가 상처 입은 근대성의 지지자들의 내적 갈등에 어떻게 대응할 수 있는가? 여기서도 우리는 아주 짧게 설명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만 현상학 전통에서 선험적, 존재론적, 해석학적 표현을 통한 다양한 발전을 고려하여 설명하고자 한다면 이러한 짧은 설명으로는 대단히 힘들 것이다. 우선 20세기 현상학의 기초자인 에드문트 후설, 특히 합리성의 근원과 관계된 첫 주제로 시작하는 것이 좋다. 이 기회에 후설을 말하는 것은 적절한데, 그는 근대성의 끝자락에 서 있기 때문이다. 최후이자 사후 출간물인 󰡔유럽 학문의 위기와 선험적 현상학󰡕에서 후설은 18세기의 소박하다 못해 ‘어설픈 합리론’에 대적하기 위해 ‘합리론의 진짜 의미’를 위한 요구를 제기한다. 분명히 우리는 이러한 요구에서 합리성 자체의 요구는 버리지 않으면서도 근대성의 합리성에 대한 고발을 볼 수 있다. 따라서 후설의 현상학은 근대성의 합리성을 객관화하는 것과 순수한 반동적 탈근대주의의 반로고스주의를 화해시킬 수 있는 의미가 있다. 이성은 폐기되는 것이 아니라, 넓어지고 재생되며, 보편수학(mathesis universalis)의 구속으로부터 해방되며, 후설이 구체적 생활세계라고 부르게 되었던 것의 밀집 속으로 재투입된다.

계속되는 현상학의 진보들은, 현상학이 존재론적이고 해석학적 국면으로 이동해 감에 따라 필연성과 보편성 대 우연성과 비결정성과 관계가 있는 근대성/탈근대성의 둘째 측면을 주장할 가능성을 열었다. 후설의 생활세계에로 귀환을 통해 이성이 우리의 일상 언어 및 사회적 실천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다시 언급할 수 있게 되었다. 생활세계는 결국 우리가 다같이 느끼도록 시도하는 우리의 일상적 이야기와 행동의 모든 서식지이다. 따라서 최후 보루 객관성에서의 확실성의 갈구는 결국 후설의 표현을 빌리자면 ‘깨어진 꿈’이다. 다시 말해, 이것은 이성이란 바람에 흩어진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사변적 이론 의식의 객관화하는 ‘작용 지향성’을 선행하는 ‘기능하는 지향성’이 있다는 의미이다. 하이데거 및 메를로-퐁티적 線(stripe)을 가진 존재론적 현상학자들은 특히 자아와 세계에 대해 우리의 先-이론적 이해를 강조하는데 공통적이다.


우리가 근대와 탈근대 사이의 분리에서 구별했던 셋째 쟁점은 통일성과 총체성의 문제를 수반하고 있다. 여기서도 또한 존재론적 해석학적 현상학의 목소리를 들을 필요가 있다. 사실은, 이 목소리들은 근대적 마음을 통해 통일성과 총체성의 지나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데서 탈근대주의의 목소리들과 잘 논쟁을 하며, 그들은 역사의 始終을 선포하는 장대한 敍事들의 장점에 대해 어떤 회의심을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현상학적 관점은 역사로 하여금 부풀려서 상대주의적이고, 역사적으로 특정한 개별자들을 우연적인 생성이도록 만들지는 않는다. 그것은 자아와 사회적 이해를 통일시키나 총체성을 위한 독단적 주장으로 경색되지 않는 원동력을 찾는다. 그리하여 우리는 여기서 다시 우리가 떼어내었던 셋째 주제에 대해 현상학은 총체화를 위해 주장하는 근대주의자들의 실라(Sylla)의 암초와 통제 불가능한 다원성의 탈근대주의의 무정부의 카립디스(Charybdis)의 늪 사이에서 길을 터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다.


이것이 근대주의자와 너무나 많은 오늘날의 철학적 뉴스가 되는 탈근대주의자들 사이의 격론을 제시할 때 현상학의 역할과 책임에 대한 아주 약술된 설명이다. 다양하게 표현된 현상학은 우리가 새로운 천년으로 옮길 때 영원한 철학적 문제들에 대해 자료와 조망을 줄 수 있을 것이다.


Ⅲ. 근대와 탈근대의 대립을 넘어: 에드문트 후설의 지향적 일원론

1. 횡단적 의사소통의 가능성

근대성에 대한 극단적 거부반응을 표출한 탈근대적 상황에 의해 흩어진 삶의 편린들을 추스를 수 있는 대안은 무엇인가? 근대/탈근대라는 또 하나의 이원론적 스캔들을 야기한 탈근대적 도전은 극단적 상대주의라는 또 하나의 사유굴레를 주조해내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근대와 탈근대를 가로지르는 '횡단적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철학적 장치는 무엇인가? 우리는 현상학적 역동성을 통해 이 장치를 재구성하려고 한다. 우리는 이러한 역동성을 후기 현상학에서 확인할 수 있다. 현상학은 근대적 의미의 이원론에 대한 불신에서 시작하였다. 하지만 현상학은 모든 유형의 이원론 자체에 대한 불신을 표명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주-객 혹은 정신-물질 사이의 관계를 지향적 성층관계 혹은 정초관계로 해명한다. 현상학자는 모든 경험의 지향적 성격을 강조함으로써, 근대적 의미의 이원론과는 다른 의미의 역동적 이원론은 인정한다. 이러한 사실은 이원론 자체에 대한 극단적 불신을 표출하는 탈근대주의자들과도 궤를 달리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근대와 탈근대 사이의 의사소통적 장이 마련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는다.


인식론적 기점에 대한 근대의 과도한 집착은 통일성에 대한 극단적인 열정으로 나타나고, 인식론적 기점에 대한 과도한 불신을 표출한 탈근대의 해체론적 접근은 차이성에 대한 근거없는 맹신으로 나타난다. 우리의 주된 목표가 탈근대를 넘어 근대성에로 다시 되돌아가지 않으면서 건강한 맥락주의의 관점에서 근대/탈근대의 의사소통의 장을 역동적으로 읽어내는 것이다. 이러한 의도에 가장 부합한 개념으로 슈라그는 샤르트르로부터 횡단성의 메타포를 차용한다. 인식의 통일성을 담보해주는 기점으로서 그 자체 무시간적 초월자로서의 의식이 아니라, 스스로 시간적 흐름에 따라 흘러가면서 그 흐름의 다양성들을 가로질러 통일성을 유지하는 의식의 횡단적 지향성을 강조한다. 이 의식의 횡단적 기능은 바로 특정 순간의 동일성으로 응결됨이 없이 과거의 순간들을 가로질러 확장되며 그 순간들을 다시 가져옴으로써 통일성을 달성한다. 이 횡단적 통일성은 근대의 인식론적 근거로 설정된 통일성과는 전적으로 다르다.

 

왜냐하면 횡단적 통일성을 다수성과 차이성과의 적대적 관계를 유지하기보다는 그것들을 가로질러 포용하는 확장된 통일성이기 때문이다. 슈라그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언급 속에서도 횡단성의 메타포를 확인한다. 특히 들뢰즈는 프루스트를 플라톤과 대조시키면서 플라톤적 본질 통일성과는 다른 생성하는 혹은 과정 중에 있는 통일성의 개념을 강조한다. 들뢰즈는 프루스트적 회상은 플라톤적 상기와는 달리 과정과 흐름 속에서 통일성을 창조적으로 형성하는 횡단적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강조한다. 이미 만들어진 통일성이 아니라 불변적 일치에로 수렴되지 않고 다양한 관점들을 가로 질러 성취되는 통일성을 강조한다. 우리는 횡단성의 메타포를 통해 불변적 일치에로 수렴됨이 없이 그러면서도 다양성의 구름들 속으로 사라지지도 않는 불변적 흐름의 양상을 근대/탈근대의 화해지평으로 읽을 수 있다. 이 횡단성은 ‘순수한 수직선의 막다른 골목’(근대의 정초주의)과 ‘단순한 수평선의 막다른 골목’(탈근대의 맥락주의)을 함께 극복하려고 시도할 수 있는 역동적 메타포이다. 동시에 보편성 대 개별성 동일성 대 차이성이라는 형이상학적 대립을 넘어설 수 있다.

 

왜냐하면 “횡단적 합리성과 횡단적 의사소통을 타진하는 것은 침투불가능한 통일성에 대한 근대인의 요구와 침투가능한 다원성의 허망함에 대한 탈근대인의 요구를 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질성과 통일성, 차이성과 동일성, 특히 개별성과 보편성 사이의 이분법을 극복할 수 있는 역동성이 이 ‘횡단적 합리성’에 있다. 왜냐하면 이 합리성은 패권적인 통일성에 안주하지 않으면서 차이성이란 배경을 가로 지를 수 있는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현상학적 정초주의가 근대와 탈근대가 교차하는 지점에 서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현상학은 근대와 탈근대 사이에 어중간히 자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근대와 탈근대를 가로질러 넘어갈 수 있는 횡단성을 함의하고 있다. 심리학주의와 대적하면서 논리적 법칙의 타당성을 정당화하려 했던 초기 정적 현상학에서는 근대성을 드러낸다. 동시에 모든 의미의 발생적 기원을 물어가는 후기 발생적 현상학에서는 의미와 존재의 맥락성을 강조한다. 현상학적 정초주의는 근대의 ‘정초-메타포’(foundation-metaphor)를 넘어 탈근대의 텍스트-유비에로 이르는 길을 열어준다. 그러므로 현상학적 정초주의는 근대의 인식론적 정초주의와 탈근대의 극단적인 맥락주의를 가로지르는 횡단적 의사소통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자아와 세계와 의미의 지향적 연관성을 텍스트성으로 환원하려는 탈근대의 텍스트주의(textualism)는 생활세계가 지닌 역동적 구조를 탈맥락화시킬 위험성이 있다. “텍스트 바깥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텍스트주의는 텍스트 안/팎의 지향적 연관성을 성급하게 차단할 위험성이 있다. 모든 경험은 텍스트 안/팎의 경계에서 그 생생한 근거를 확인하지 않을 수 없다.


생생한 ‘현전’으로서의 주체가 지닌 충만한 경험을 추상화시켜버린 근대와 그 충만한 경험을 기호의 그물 속에 폐색시켜버린 탈근대의 극단적 맥락주의를 넘어 생활세계적 주체를 복권함으로써 근대/탈근대의 의사소통적 장을 마련하는 데 관심을 갖는다. 생생한 경험을 제물로 삼아 ‘객관적 합리성’이란 이름으로 연명해온 근대성의 해체를 겨냥한 탈근대적 기획은, 그것의 성공여부와는 별개로, 그것만으로도 참신한 메타포이다. 그러나 어떤 유형의 이원론도 해체의 祭物로 삼은 탈근대는 스스로 자신이 연출한 기호적 캡슐의 囚人으로 전락된 채 생생한 경험의 충만성을 토해낸 빈곤의 삶을 살아낼 수밖에 없다.

생활세계적 현상학과 장재의 기철학 사이의 대화적 구조를 확인하려는 본 연구의 목적에 비추어, 의미부여자로서의 ‘주체’와 주체에 의해 의미부여 되어야 할 ‘기호’ 사이의 놀라운 역동적인 지향적 함축관계를 읽어냄으로써, 氣의 충만성을 통해 그 지향적 관계를 드러낸 장재의 전략과 대비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2. 能記와 所記의 지향적 짜임새

본 연구가 의도하는 것은 근대와 탈근대의 횡단적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현상학적인 역동적 대안을 마련하는 것이다. 주체의 '의미지향'(노에시스)에 의해 기호는 '의미 지어진 것'(노에마)으로 구성된다는 현상학적 의미론에 대한 탈근대의 도전은 의미구성자인 주체의 죽임을 겨냥한다. 언어의 의미를 언어 이전의 의식적 삶으로 돌아가 그 근원을 해명하려는 현상학적 의미론은 모든 존재는, 그것이 세계이든 의식이든, 그 자체가 언어적 캡슐 속에 주어져 있는 것이기에 先-언어적 환원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은 것으로 규정한다. 그러므로 모든 기호의 의미는 기호 이전의 의식적 삶에 그 기원을 두고 있지 않다.

 

 기호의 의미는 바로 기호와 기호 사이의 맥락성, 즉 텍스트에 내재한다. 그러므로 탈근대주의자들은 텍스트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선언이 설득력을 갖는 것으로 주장한다. 탈근대주의자들은 의미는 주체와 기호 사이의 지향적 성취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무시해버렸다. 의미는 주체와 기호 사이의 상호맥락성에 의해 비로소 탄생한다. 그러므로 텍스트 바깥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선언은 의식의 동일성을 의미의 보편성의 근거로 정당화하려는 근대의 의미정초주의자들에 대한 극단적 도전일 뿐, 그 선언이 텍스트 바깥에서 일어나는 주체와 기호 사이의 지향적 공동작업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슈라그는 랑그(langue)와 빠롤(parole)의 구분은 잘못된 이분법에 근거하고 있으며, 경험적 언어활동과 기호체계로서의 언어 사이를 이분법적으로 物化하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으로 비판한다.


우리는 이런 점에서 후설의 입장을 근대 의미정초주의자들과는 구분해야 한다. 후설은 “세계에 대한 존재론적 이념, 즉 근저에 보편적․선천적 원리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 세계에 대한 객관적 보편학의 이념은 (…) 난센스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후설의 정초주의는 의미의 궁극적 근거를 논리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한 작업이다. 의미가 발생되는 지향적 연관성을 해명함으로써 의미는 주체와의 필연적 연관성 속에서 맥락지어진다는 사실을 해명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후설의 정초주의는 근대적 정초주의와는 달리 주체와 기호 사이의 상호맥락성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탈근대주의자들은 ‘능기’와 ‘소기’ 사이의 통약불가능성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술어적 층과 선술어적 층 사이의 지향성을 텍스트성으로 읽어내는 데 인색하다. 기호의 의미는 어떻게든 주체와의 흥정없이 살아날 수 없다.


주체가 언어의 의미를 부여한다는 후설의 의미론에 대해 하이데거는 오히려 “언어가 언어한다”는 언어의 卽自性을 강조한다. 하이데거의 언어관에 덕을 입고 있는 탈근대주의자들은, 언어는 주체와의 관계 속에서만 비로소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오래된 생각에 종지부를 찍고 주체도 의미도 실재도 모두가 언어적 텍스트 내 존재임을 강조한다. 그러나 탈근대주의자들의 기호학적 편견을 걷어내고 언어 현상 자체로 돌아간다면, 언어는 기호적 측면과 의미적 측면을 동시에 갖는다. 왜냐하면 언어는 다른 물리적 부호와는 달리 의미담지적 기호이기 때문이다. 언어는 바로 정신적 신체성을 가진다. 그러므로 언어의 기호적 측면과 의미적 측면을 구분하여 다루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언어의 질료적 측면과 형상적 측면에서의 접근은 당연한 것이다. 물론 의미의 보편성을 정초하려했던 초기 현상학에서는 질료-형상이라는 오래된 형이상학적 접근방식을 취한다.

 

하지만 의미발생에 대한 지향적 해명을 주제로 하는 후기 현상학에서는 이 접근방식은 별 의미가 없다. 질료-형상의 이원론적 접근보다는 이들 사이의 지향적 맥락성을 강조하는 일원론적 성격이 더 강하다. 우리가 후설의 지향성을 주체의 지향만으로 이해할 경우, 지향성과 선-지향적 층 사이의 상호맥락성을 놓치게 된다. 언어를 기호적으로 파악하는 지각 역시 일종의 지향작용이고, 이 작용을 토대로 의미지향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주체에 의한 능동적 의미부여가 기능하게 하기위해 기호적 측면에 대한 선-지향이 선행되어야 한다. 우리는 바로 주체와 기호 사이의 지향적 관계를 근대/탈근대를 넘어 설 수 있는 역동적 대안으로 강조한다. 탈근대의 탈주체는 바로 근대의 주체로부터의 자유를 겨냥한 행보이다.

 

따라서 탈근대의 탈주체가 모든 유형의 주체로부터의 자유를 겨냥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어떻든 의미의 지향적 구성자로서 주체는 되살아나야 하기 때문이다. 의미의 구성자이면서 스스로 언어내적 존재로 구성되는 주체로 살아나야 한다. 이 주체는 의미구성자로서는 근대적 얼굴을, 언어내적 존재로서 구성되는 자로서는 탈근대적 얼굴을 동시에 가진다. 우리는 바로 이 두 얼굴에서 근대/탈근대를 가로지르는 횡단적 지향성을 확인할 수 있다. 언어의 지평성, 즉 언어는 언어이전의 경험과 지향적으로 얽혀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탈근대적 상황에서 잘못 읽혀지거나 덜 읽혀진 지향성의 역동성을 드러냄으로써 장재의 기철학과 연결시키기 위해 가장 중요하게 제시되어야 할 문제는 후설의 지향성이 함의하고 있는 보편적 상관성을 꼼꼼히 읽는 것이다. 주체와 기호사이의 관계를 전통적인 질료-형상의 관계로 성급하게 읽어내는 것이 문제이다 주체의 의미부여작용에 의해 기호가 비로소 의미를 가진 것으로 구성된다는 오래된 인식론적 이분법의 가설로 지향성을 재단해 낸다면, 역동성이 손실되지 않을 수 없다. 언어는 ‘기호적’(질료적) 측면과 ‘의미적’(형상적) 측면을 동시에 가진다. 언어의 기호적 측면과 의미적 측면을 구분하여 언어를 기호로서 파악하는 작용과 의미를 가진 것으로 파악하는 작용을 구분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구분가능하다는 것은 원칙상의 구분일 뿐 실제로 이 둘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지향적 연관성으로 얽혀 있다. 기호와 의미는 단지 그 소여 방식에 있어서 하나는 ‘초월적 존재’(超在)로 다른 하나는 ‘체험적 존재’(內在)로 분리될 수 있을 뿐이다.


우리가 후설의 지향성의 메커니즘을 전통적인 질료-형상 혹은 이-기의 이분법적 도식으로 재단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이 점에 있다. 특히 후기 생활세계적 현상학에서는 더욱 두드러진다. 왜냐하면 생활세계는 주체와 객체라는 낡은 이분법적 분화가 일어나기 이전에 이미 근원적으로 주어져 있는 근원현사실(Urfaktum)이기 때문이다. 후설은 1931년 이후 미발간된 원고들 속에서 “에이도스로서의 선험적 자아는 현사실적 자아로서의 선험적 자아가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라고 쓰고 있다. 그러므로 생활세계를 살아가는 자아는 세계라는 객체와 맞대고 있는 자아가 아니다. 모든 주-객분열이 일어나기 이전에 이미 주어져 있는 근원적 사실이다. 이 근원 현사실은 자아와 세계 이전에 주어져 있으면서 모든 자아적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절대자의 기능을 한다.

3. 극단적 맥락주의에 대한 현상학적 대응

근대성에 대한 극단적 불신은 통시성/공시성이라는 또 하나의 이원적 대립을 끌어들이고 있다. 슈라그의 주장에 따라 본 글은 현상학적 정초주의를 통해 근대적 의미의 정초주의와 탈근대의 탈정초주의를 횡단할 수 있는 의사소통의 장을 마련하는 것이 목적이다. 탈근대주의자들은 성급하게 현상학의 공헌을 폐기시켰다. 그들은 현상학의 지향성을 작용-지향성으로 해석하여서 기능하는 지향성을 의도적으로 폐기시켜버렸다. 탈근대주의자들은 근대주의자들이 그들의 정당화의 논거로 삼은 규준들이 이미 역사적으로 특정한 맥락에 조건지어져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것으로 비판한다. 그러나 탈근대주의자들은 모든 토대가 역사적 맥락에 조건지어져 있다는 사실을 지나치게 맥락에 의해 결정되어 있는 것으로 규정해버린다. 그들은 ‘맥락-조건적’(context-conditioned)과 ‘맥락-결정적’(context- determined)을 혼동한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의 사유는 특수한 맥락에 조건지어져 있다는 사실 자체를 고려하지 않은 반역사주의적 근대주의자들이 보편적, 무조건적 및 탈맥락적 규범이나 원리에 호소하는 것 역시 동일한 과오를 범한다. 그러므로 通時性에 대한 지나친 共時性의 우위라는 전략으로 등장한 탈근대의 상대주의자들은 맥락화되고 우연적인 특수한 상황들에 대해서는 어떤 초월도 가능하지 않다는 잘못된 믿음에서 맥락성과 우연성을 포용하는 맥락-결정론자들인 반면에, 근대의 절대주의자들은 맥락-조건성조차도 보편성을 위협하는 요소로 단정하고 탈맥락적, 더 나아가서는 무맥락적(contextless) 토대주의자의 모습을 가진다.


우리는 후설의 현상학적 토대주의를 통해 근대와 탈근대란 이름으로 잘못 이분화되어버린 상대적인 것/절대적인 것, 보편적인 것/특수한 것, 필연적인 것/우연적인 것이라는 낡은 도식을 허물 의사소통적 지평을 확인할 수 있다. 인간의 알량한 이성에 의해 주조된 사이비 이분법을 넘어 의사소통적 지평을 현상학적으로 새롭게 토대지울 가능성이 이미 후설의 사유 속에 시사되어 있다. 우리가 “의식은 이미 무엇에 관한 의식”(Bewusstsein von Etwas)이라는 지향성의 특성을 단지 의식의 주도 하에서 이루어지는 의미지향이라는 정태적 관점에서보다는 의식의 지향은 ‘지향 이전에’(vor-intentional) 이미 주어져 있는 그 무엇으로부터 비로소 가능할 뿐인 것으로 발생적 관점에서 읽을 수 있을 때 지향성의 역동적 맥락성이 살아난다.

그러므로 후설의 선험적 현상학을 절대적 주관성에 호소하여 모든 역사적 의미를 거기로부터 추론해내었던 근대적 의미의 선험철학으로 혼동해서는 안 된다. 후설에 있어서 선험적 주관성은 객관과 대립해 있으면서 그 객관을 자신의 대상으로 정립하는 주관성이 아니다. 주관-객관 혹은 의식-대상이라는 인식론적 구도에 의해 분리되기 이전에 이미 생활세계 속에서 구체적으로 살아온 역사적 주관성인 ‘현사실적’(faktisch) 자아이다. 이 현사실적 자아는 모든 역사적 경험이 구성되는 근원적 토대이다. 이 현사실적 자아는 모든 역사적 사실(Tatsache)이 근원적으로 구축되는 근원적 현사실(Faktum)이며 근원적 사실이다. 이 현사실적 자아의 삶의 지반인 생활세계는 어떠한 역사적 추론에 의해서도 해체될 수 없는 역사적 아프리오리이다.

 

모든 역사적 사실이 아무리 보편성과 무관한 특수한 역사적 개체성과 고유성을 가진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역사적 사실로서의 고유한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은 바로 생활세계의 아프리오리에 근거해 있기 때문이다. 근원적 역사에 의해 상호주관적 연대성이 가능해지며, 역사적 공시성과 통시성을 가로 질러 횡단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에 의해 후설의 지향성을 공시성과 통시성을 의사소통적 실천을 통해 중재하는 ‘횡단 지향성’(transversal intentionality)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아무리 공시적 성격을 지닌 역사적 사실일지라도 그것은 이미 이 역사적 아프리오리를 전제함으로써 비로소 사실로서 타당성을 가질 수 있을 뿐이다. 모든 특수하고 우연적인 역사적 사실들을 넘어 보편적 지평을 마련할 수 있는 가능성은 바로 생활세계의 근원적 역사 때문이다. 따라서 탈맥락화/탈정당화란 이름으로 전개된 근대/탈근대의 싸움은 현상학의 역동적 토대주의를 통해 화해할 수 있다. 모든 유형의 근원적 혹은 시원적 사유를 탈맥락적 환원주의로 고발함으로써, 탈근대는 근원없는 사유가 주는 일시적 참신함과 자유에 체면당해 스스로 온갖 허무를 안으로 곱씹을 수밖에 없는 나르시시스트가 되고 만 것이다. ‘토대주의’란 이름 자체에 대한 지나친 불신으로 시작한 탈근대주의자들에게는 이제 최종 토대로부터의 자유가 토대상실에 대한 불안으로 되돌아온다. 탈근대주의자들 스스로 이 불안을 치유하기 위한 나름대로의 방편은 마련하지만, 그것은 이미 근대성에 대한 애착과 미련의 또 다른 제스추어일 것이다. 그것은 바로 현상학적 사유만이 품어낼 수 있는 건강한 토대주의에 대한 향수 달래기임이 분명하다.


“텍스트 바깥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탈근대의 텍스트주의는 근대의 인식론적 정초주의에 대한 극단적 불신으로 출발한다. 객관적 실재에 대한 회의는 진리 자체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지면서 진리 정초주의에 대한 거부로 나타난다. 텍스트주의자들은 아무 것도 ‘準-神的인 것’으로 숭배하지 않는다. 전통적 형이상학자들에게 위안을 주었던 영원한 본질은 뿌리 깊은 형이상학적 열망이 주조해 낸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텍스트 바깥에 ‘진리’(Truth)란 이름으로 구축해 놓은 전통 형이상학의 안식처는 객관성에 대한 열정을 만족시켜 주기에 충분하였다. 모든 유형의 환원주의, 즉 영원한 진리에로 돌아가려는 열망은 텍스트주의자들에게는 한갓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텍스트주의자들에게는 의미나 진리는 텍스트 바깥의 것과의 관계가 아니라, 다른 텍스트와의 관계에 의해 구성된다는 공통적인 생각을 갖기 때문이다.

자아의 동일성을 인식론적 지평 위에서 구축하려 한 것이 근대의 동일성-스캔들이라면, 한편 탈근대는 동일성에 대한 지나친 피해의식으로 인해 극단적 텍스트주의로 변신한다. 근대의 메타이론에 대한 지나친 불신은 진리와 의미를 극단적으로 맥락화한다. 근대 정초주의에 대한 성급한 포기는 텍스트성(textuality; 맥락성)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텍스트 이전에 주어져 있는 생활세계적 경험들의 지향성을 텍스트성으로 환원해 버린다. 탈근대의 극단적 텍스트주의(textualism)는 텍스트 밖에 존재하는 역동적이고 구체적인 세계보다는 오히려 텍스트 안에 존재하는 세계에 더욱 관심을 가진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즉 텍스트 안/밖의 지향적 짜임새(texture)를 텍스트성(textuality)으로 경색되게 읽는다. 물론 모든 실재의 텍스트성을 고려해야 하긴 하지만, 텍스트성을 보편적 방법론으로 지나치게 사용할 경우, 실재와 과정사이의 유기적 관계를 간과할 위험이 있다. 실재는 어느 정도 언어적 텍스트에 구속되어 있지만, 모든 언어적 텍스트를 가능하게 하는 선언어적 토대가 되기도 한다.


이런 관점에서 해체주의에 의해 차단되기 이전의 후기 현상학의 전통으로 돌아가 근대 구성주의와 탈근대의 해체주의를 넘어서려는 전략을 매우 정교하게 제시해 주는 슈라그의 입장이 매우 교훈적이다. 성급한 맥락주의는 언어가 실재를 지배하는 언어제국주의와 연결된다. 언어와 선언어적 실재 사이의 지향적 짜임새를 꼼꼼히 읽지 않는다면, 메타포 자체가 세계에 대한 제일 원리나 특권적 채널로 여겨지거나 나아가서는 세계 자체가 되어버릴 위험이 있다. 후기 현상학의 지향적 맥락주의를 근대적 정초주의로 고발하고 성급하게 텍스트 안으로 숨어든 탈근대주의자들은 모든 것을 텍스트성으로 환원해버릴 위험이 항존하고 있다. 모든 실재에는 메타포성(metaphoricity)이 편재한다는 생각 속에는 메타포 자체를 형이상학적 위안으로 삼을 위험이 있다. 모든 실재가 언어적 맥락에 의해 조건지어지지만 그렇다고 언어적 맥락에 의해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실재와 언어 사이의 지향적 관계를 확장해야 할 필요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 실재와 언어 사이의 맥락성을 선술어적 층과 술어적 층사이의 지향적 정초관계로 읽어야 할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리는 이러한 이유에서 슈라그의 관점에서 맥락성에 대한 현상학적 해명을 시도하는 ‘맥락성의 현상학’을 언급해야 할 필요가 있다.

4. 생활세계적 주체의 복권: 현전과 부재의 교차로에서

근대적 주체로부터의 탈근대의 탈주는 결국 주체없는 텍스트 속으로 무한질주한다. 그러나 이 무한질주는 결국 주체의 생생한 경험조차 언어적 캡슐로 탈생화(脫生化)시킨다. 근대와 탈근대를 가로질러 양자 사이의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새로운 주체를 자리잡게 하는 것이 중요한 작업이다. 이것은 바로 경험적 자아와 선험적 자아라는 이분법적 경계짓기에 의해 초래된 자아에 대한 형이상학적 논쟁을 화해시키는 작업이며, 이를 통해 주체에 대한 근대와 탈근대의 논쟁도 화해시킬 수 있는 지평을 확보할 수 있다. 경험적-선험적 이분법적 도식을 넘어 스스로 경험적 삶을 살아가면서도 동시에 선험적 자기구성이 가능한 주체를 현상학 주체개념에서 확인하는 것이다.


경험적 자아와 등을 대고 마치 하나의 수학적 공리처럼 자리하고 있는 선험적 자아에 대한 탈근대주의자들의 불신은 ‘선험적’이란 꼬리표를 철학에서 영원히 추방할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선험적 자아는 바로 경험적 자아와 동일한 지평 안에서 얼굴을 맞대고 있는 동일자이다. 선험적 자아는 자연과학주의적 편견을 걷어 내고 들여다 본 자연적 삶을 살아가는 경험적 자아의 다른 이름이다. 경험적 자아와 등을 대고 있는 선험적 자아는 근대 인식론자들의 요청에 의해 주조된 형이상학적 원리에 지나지 않는다. 탈근대주의자들의 성급한 해체에 의해 분산된 주체 대신에, 새롭게 자리잡아야 할 주체는 선-인식적 차원에서 이미 경험적 삶을 살아오면서 스스로 역사적 주체로서 형성되어 온 자아이다. 그러므로 선험적 자아는 경험적 자아와 별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자아는 아니다. 다만 경험적 태도로 읽는가 혹은 선험적 태도로 읽는가에 따라 그때그때 다르게 읽혀진 자아의 두 얼굴일 뿐이다. 우리는 이 이중적 얼굴의 자아를 생활세계적 자아로 읽을 수 있다.


후설은 초기 인식론적 수준에서 행한 환원이 가진 한계를 넘어 후기 생활세계 자체로의 환원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생활세계는 선-인식적으로 이미 주어져 있는 존재의 지반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경험적 세계를 구성하는 자로서는 선험적 자아의 얼굴을 갖지만 스스로 경험적 세계 속에 살고 있는 역사적 존재란 점에서는 경험적 자아의 얼굴을 갖는다. 그러므로 이 생활세계적 자아는 경험적인 것-선험적인 것이라는 오래된 인식론적-형이상학적 구도 속에서 읽혀지기 이전의 본래의 자아 모습이다. 이 본래의 자아의 모습은 신체적 자아이다. 구체적인 신체를 가지고 살아간다는 점에서는 경험적 얼굴을 갖는다. 하지만 동시에 모든 경험적 세계를 구성하는 신체는 경험 이전의 선험적 얼굴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자아가 갖는 특이한 이중성, 경험성과 선험성, 시간성과 영원성, 국소성과 보편성, 대상성과 주체성 등을 사태에 따라 있는 그대로 읽어야 한다. 모든 형이상학적 인식론적 추론을 괄호치고 자아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 볼 경우, 자아는 생활세계적 주체로서 살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현상학적 자아의 이중성 즉 주체성과 객체성을 동시에 가지는 성격을 근대/탈근대를 자유자재로 횡단할 수 있는 역동성으로 재해석하고자 한다. 횡단적 지향성의 담지자로서의 자아의 얼굴을 확인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신체는 선험적 경험, 경험적 선험이라는 이중성을 가장 잘 상징해주는 횡단성의 메타포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후설의 현상학적 자아론을 근대와 탈근대의 대립을 넘어설 수 있는 역동적 대안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통상적으로 후설을 근대성의 대부로 읽은 근본적인 이유는 현전의 형이상학자로 읽기 때문이다. 모든 존재의 권리를 현전으로 끌어와 그 알리바이를 검증하는 현전중심의 이데올로기라는 점이다. 주체의 지향적 성취작용에 의해 주체의 표상으로 배열되어야만 비로소 타자는 그 타자성을 담보받을 수 있다는 현상학적 사유에로는 타자의 절대성이 들어 설 공간이 따로 없다. 주체의 지향적 상관자로 알리바이를 검증받기 이전 현전 속으로 들어서기를 거부하는 타자의 이질적 근성을 설명할 수 있는 여지가 현상학의 표상적 사유 속에는 없다. 탈근대주의자들의 공통된 생각은 바로 현전중심의 자아론은 타자성을 중심으로 다시 배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주체는 다만 한갓 이름에 지나지 않을 뿐 타자의 타자성 속에서 비로소 주체로서의 자리를 공증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다. 타자는 나와는 공간적으로 거리를 두고 있는 완전한 타자이기에 자아의 시간적 구성에 의해 주체의 상관자로 구성될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과연 후설을 근대적 표상주의자로 혹은 근대적 자아론의 대변인으로 고발할 수 있는가? 만약 들뢰즈처럼 주체개념에 대한 극단적 거부반응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어떻게든 주체는 타자를 통해서든 아니면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후설은 주체가 아닌 모든 다른 것들은 어쨌든 주체와의 지향적 거래관계 없이는 그 존재근거를 담보받을 수 없다는 기본 전제에 서 있다. 주체의 알리바이를 타자에서 확인하려는 탈근대주의자들에게는 선험적 현상학을 타자의 현상학으로 읽어낼 가능한 실마리조차 성급하게 차단시켰다. 근대의 인식론적 단초로 - 객관적 경험의 가능조건으로 - 요청된 선험적 통각으로서의 주체 이전의 생활세계적 주체인 몸은 주체성과 타자성이 교차하는 채널이다. 후설의 지향성을 성급하게 표상활동으로 읽을 만큼 지향성의 두께가 그리 얇은 것은 아니다. 후설의 현상학적 환원은 타자의 타자성을 구성하는 주체성에로의 데카르트적 환원이 아니다. 주체에 대립해 있는 타자의 지평을 넘어 현전의 밝음 뒤로 비스듬히 음영진 채 늘어 서 있는 타자의 얼굴을 확인하려는 환원이다. 주체의 지향적 상관자로서만이 아니라 레비나스의 말처럼 ‘타자를 위한 주체’를 넘어 주체를 위한 타자로 이미 주어져 있음을 단적으로 읽어내기 위한 타자지향적 환원이다. 즉 타자의 현상학이다. 따라서 어쩌면 주체는 이제 타자 앞에 ‘근대’란 이름의 지난 역사를 고해성사해야 할 운명이 환원에 의해 예고된 것이다.

근대적 의미의 주체에 대한 탈근대의 해체는 결국 자아론적 허무주의를 수반한다. 인식론적으로 요청된 주체에 대한 탈근대의 해체작업은 철저하다. 주체에 대한 ‘거대 서사’(meta-narrative)에 대한 불신은 결국 어떠한 형태의 주체도 이야기의 구조 속으로 유폐시킨다. 그러나 어떠한 방식으로라도 주체가 거명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극단적인 ‘이야기주의’(narratology)와 맥락주의는 모든 형태의 주체를 철학적 사생아로 만들어버린다. 근대적 의미의 주체를 해체시킨 후 다시 거명되어야 할 주체는 누구인가? 만약 주체가 단순히 야야기의 구조 속으로 완전히 해체될 수 없고 또한 해체되어서도 안 된다면, 어떠한 방식으로라도 ‘이야기하는 자’(homo narrans)로서 새롭게 살아나야 한다. 슈라그는 근대적 주체에 대한 극단적 불신을 넘어 새롭게 거명되어야 할 이야기하는 주체를 현상학적으로 새롭게 부활시키기 위해 현상학적 ‘시간성’개념을 차용한다.


만약 이야기가 누구에 의한 이야기이고 누구에 대한 이야기라면 그리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관한 이야기라면, 이야기의 시간성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야기하는 주체는 이야기를 통해 스스로 시간화되면서 지속적으로 형성된다. 이야기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해야 하면서 스스로 이야기하는 자기-동일성을 형성한다. 물론 이렇게 형성된 주체는 근대적 의미의 자기-동일성과는 다르다.


생활세계적 주체를 데카르트적 주체로 잘못 읽은 데서 비롯된 탈근대의 극단적 해체가 남긴 수렴없는 분산을 현상학적으로 수렴하는 데 의미를 둔다. 후설의 생생한 현전으로서의 주체를 근대적 의미의 주체로 읽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생생한 현전에로의 환원은 결국 그 현전의 지평으로 이미 주어져 있는 아직은 현전화되지 않은 채 그 현전과 함께 현전하고 있는 비현전, 즉 부재를 해명하기 위한 방법적 조처일 뿐이다. ‘지금’의 시간흐름에는 ‘이미 지나간 지금’과 ‘아직은 오지 않은 지금’의 지평들이 지향적 층을 이루어 시간두께를 이루고 있다. 현전의 배경으로 이미 주어져 있는 비현전인 부재는 현전을 가능하게 하는 선시간적 지평이다. 밝음과 어두움은 서로 지향적 층을 이루고 있다.

 

현전의 텍스트는 부재에 의해 조건지어진다. 부재는 지속적으로 굳어진 현전으로서의 주체를 탈중심화하면서 현전의 공간으로 침입해 들어간다. 데리다는 현전과 부재의 상호작용을 ‘차연’개념으로 설명한다. 하지만 데리다는 그라마톨로지컬 한 구조로 환원함으로써 현전과 부재의 지향적 상호관계를 지나치게 맥락화해 버린다. 근대의 현전의 형이상학에 대한 탈근대의 극단적 도전은 결국 현전과 부재의 지향적 상호관계를 지나치게 맥락화해 버린다. 탈근대주의자들에 의해 성급하게 구조화된 현전과 부재 사이의 지향적 상호관계를 회복함으로써 근대/탈근대 너머에 의사소통적 공간을 마련할 수 있다.


현전으로서의 자아의 동일성의 구조에는 비현전이긴 하지만 함께 현전하는 타-자아와 지향적으로 함축되어 있다. 자아는 이미 타-자아와 지향적으로 얽혀 있다. 자아는 그 자체가 탈중심적 지향성을 지닌다. 타-자아는 자아에로 수렴될 수 없는 어두운 지평으로 주어져 있으면서 자아에로 지향적으로 뻗어 있다. 자아와 타-자아는 이미 선시간적으로 엉클어져 동시에 존재한다. 후설은 지향적 구조로 엉클어져 있는 자아를 생활세계적 주체로 읽는다. 이 주체는 타-자아에 대립하고 있는 자아가 아니라 이미 타-자아와 엉클어져 있으면서 타-자아에 의해 비로소 자아성을 담보받아야 할 주체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해 자아의 동일성은 이미 주어진 것이 아니라 타-자아와의 관계 속에서 성취되는 것이다. 탈근대주의자들에 의해 탈중심화된 주체는 바로 현상학적 신체-주체이다.

데카르트적 주체로 잘못 읽혀진 생활세계적 주체인 신체-주체를 복원함으로써 탈근대의 극단적 해체를 구성적 해체 혹은 해체적 구성으로 다시 읽어야 한다. 왜냐하면 현전은 비현전에 의해 채색되고 채워지기를 기다리는 백색 공간이기 때문이다.


근대적 의미의 죽음 이후 어떤 형태로든지 주체가 새로운 얼굴로 되살아나야 한다면, 그 주체는 현상학적 자아로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데리다나 로티로 대변되는 해체주의자들의 근성은 자아를 회복하는 의도 자체까지도 성급하게 포기한다. 데리다는 후설 역시 현전의 향수를 달래며 살아가는 데카르트의 후계자로 읽는다. 물론 후설은 현전의 동일성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현전을 형이상학적으로 다시 구축하는 데카르트적 길을 간다. 그러나 후설이 진정으로 가려는 길은 탈-데카르트적이다.


그러므로 후설의 현전으로서의 자아는 형이상학이나 인식론적 토대구축을 위한 정초자가 아니다. 데리다에 의해 잘못(?) 혹은 덜 읽혀진 후설의 현전은 이미 지향성을 함축하고 있는 채널이다. 즉 현전은 이미 부재와의 상호 관련 속에 있다. 데리다는 “현전을 부재의 특별한 사례”로 취급함으로써 현전과 부재 간의 지향적 얽힘을 의도적으로 피해 간다. 특히 하이데거의 현존재 해석학보다는 전회 이후의 존재 해석학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중시하면서 현전의 형이상학의 해체를 강조한다. 그러나 데리다는 하이데거에게 여전히 남아 있는 존재와 존재자의 차이, 즉 존재론적 차이조차도 형이상학적 전통 속에 포함시켜 해체한 후 그 자신은 그라마톨로지의 지평으로 물러난다. 현전이든 존재든 그것이 인식론이나 존재론적 우선권을 가지는 한, 전통적인 로고스 중심의 형이상학으로 고발한다. 즉 데리다는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차이는 이미 동일성을 전제로 한 차이, 즉 존재의 동일성을 전제로 한 차이이기에 진정한 차이의 구조를 드러낼 수 없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는 본래적 의미의 차이를 차연으로 명명하면서 자아 역시 차이성과 이질성의 혼합물이고 항상 흔적으로 사라져 버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극단적인 해체적 전략은 자아에 대한 처형만을 위안으로 삼는, 그러면서도 자신은 처형을 집행하는 자로서 버티고 있어야 하는 딜레마에 빠져 있다. 그러므로 어떤 방식으로든지 자아는 소생되어야 한다.

후설의 현전은 결코 근대적 의미의 형이상학적 주체가 아니다. 이 현전은 이미 부재와 얽혀져 있는 탈중심화된 현전이다. 시간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동일성을 간직하는 자아가 아니라 시간흐름과 함께 흘러가면서 스스로 시간화된 자아이며, 시간화되는 가운데 상호 주관적 자아로서 형성된다. 현전의 동일성은 이미 부재의 차이성들을 자신 속에 지향적으로 함축하고 있다. 부재와 이질성 그리고 차이성들 역시 현전과 동질성과 동일성에 지향적으로 얽혀 있음으로 비로소 가능하다는 현상학적 상황이 탈근대적 상황에서는 일찍 차단되어 버렸다. 부재는 안정적으로 자리잡으려는 현전의 자아를 탈중심화하면서 현전의 영역에 침투해 들어간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부재는 현전의 지평을 통해서 비로소 부재적 경험으로 가능하게 된다.


그러므로 현상학적 자아는 신체화된 정신이기에 신체의 외피 속에 묻혀 있는 마치 기계 속의 유령도 아니고, 단지 신체적 외피만으로 짜여진 그물도 아니다. 그러므로 자아나 저자의 정신은 항상 그의 말이나 행동이나 텍스트 속에서 여러 가지 방식으로 구현되어 있다. 텍스트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데리다의 극단적 맥락주의는 ‘의도확대의 오류’에 대한 지나치게 민감한 태도이다. 저자의 죽임 이후에 텍스트에 무엇이 남는가? 텍스트의 의미를 지배하는 근대적 의미의 저자나 자아가 텍스트로 해체되고 난 이후에 우리는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가? 텍스트의 안/밖을 구분함으로써 또 다시 등장한 현상/실재 사이의 이분법적 논쟁이 끝나야 한다면, 우리는 자아와 행동, 자아와 언어, 저자와 텍스트 사이의 지향성의 채널을 다시 회복하는 일이 시급히 요청된다. 의식의 지향성을 글쓰기의 지향성으로 성급하게 옮겨와서 후설의 현상학적 패러다임을 그라마톨로지로 주조한 데리다는 글쓰기와 글씨기를 넘어서 있는 지평의 지향적 짜임새를 역동적으로 읽는 데는 실패하였다. 텍스트의 의미는 이미 저자의 주권 하에 있다. 저자와 텍스트는 이미 분리될 수 없을 정도로 지향적으로 서로 짜여져 있다. 물론 저자는 근대적 주체란 의미로 그의 저서를 지배하는 독재자일 수는 없다. 이럴 경우 저자와 독자 사이의 입벌림이 연출되고 텍스트의 의미는 뒤로 자꾸 밀려간다. 이 입벌림을 처음부터 텍스트-메타포로 차단한 포스트모더니즘은 텍스트 이전의 저자의 죽음을 성급하게 선언하고 말았다.


이제 이 죽음 이후 되살아나야 할 저자는 그의 몸체(corpus)인 저서 속에서 신체화된 정신으로 혹은 정신화된 신체로서 항상 되살아난다. 이렇게 되살아난 새로운 주체에 의해 독재자로서 주도권을 오래 유지해 온 근대적 주체도 다시 맥락화(민주화)되고, 동시에 탈근대의 흐름 속에 단지 언어적 외피의 복합물로 실종당한 상호 주관적 주체도 되살아나야 한다. 그러므로 현상학적 의미의 현전은 모든 흐름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버티고 서 있어야 하는 실체가 아니다. 그 시간적 흐름과 함께 흘러가면서 그리고 그 흐름 속에서도 자신의 동일성을 확인하면서 흘러가는 살아있는 생생한 현전이고 구체적으로 기능하는 신체적 지향성의 담지자이다. 지향성을 의식의 지향성으로만 묶어 두려는 포스트-후설리안들에게는 이와 같은 역동성이 읽혀질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현상학적 자아는 생성과 불변의 얼굴을 함께 지니고 전(全)시간적이면서도 동시에 초시간적인 자아이다. 흐름과 불변의 모습을 동시에 지닌 이 자아는 어쩌면 생멸과 진여의 관점에서 달리 읽혀진 동일한 얼굴일지도 모른다. 진정으로 해탈한 자에게는 이 생멸과 진여가 다른 두 얼굴이 아니었듯이(一心二門), 현상학적 자아는 근대성과 탈근대성을 자유롭게 건너다니면서 화해시켜줄 수 있는 진정으로 자유로운 자아일지도 모른다.

데리다에 의해 ‘말하는 주체’로 읽혀진 현상학적 주체는 근대적 의미의 동일성을 가진 탈문맥적 주체는 아니다. 현상학적 자아는 부재와 대립된 현전의 주체가 아니다. 근대적 주체는 부재와 대립된 자기동일성의 주체로 규정될 수 있지만, 현상학적 주체는 근대적 의미의 모든 현전(presence)과 부재(absence) 이전의 보다 근원적인 흐름으로 존재한다. 이 근원적 흐름은 스스로 이름을 갖지 않으면서도 모든 현전과 부재의 가능성을 간직하고 있는 익명적 흐름이다. 이 흐름 속에서 자아는 비로소 현전하는 것으로 존재할 수 있을 뿐이다. 후설이 말하는 절대적 자아로서의 흐름은 모든 현전과 부재를 다 포괄하는 절대자란 의미에서 데리다의 차연과 다를 바 없다. 이 절대적 흐름은 근대성의 유산인 현전/비현전의 대립을 넘어 그리고 그것들을 자신 속에 함축하면서 끊임없이 흩어져버리는 생생한 흐름이다. 어떠한 이름도 갖지 않으면서 동시에 모든 이름, 즉 현전과 부재를 다 가질 수 있기에 굳이 말한다면, 익명성의 주체이다. 이 익명성의 주체를 데리다는 전통적 표현을 거부하면서 ‘차연’이란 자기만의 언어로 읽은 것이다. 차연은 모든 현전인 동시에 현전의 부재이다.

 

즉 차연은 현전의 부재이면서 동시에 모든 현전의 가능 근거이기도 하다. 따라서 차연은 현전의 완전한 부재는 아니다. 이 차연은 결국 절대적 흐름인 현상학적 주체를 다른 파일로 다시 읽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grammatology)는 후설 현상학의 방법론을 글쓰기에 그대로 옮겨 놓은 글쓰기의 현상학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주체 없는 선험적 장’(subjectless transzendental field)으로서의 글쓰기는 결국 생생한 현전의 보다 철저화된 선험적 얼굴이다. 그러므로 데리다는 후설과의 정면 대결을 의식적으로 피하면서도 ‘사태 자체’라는 현상학적 지상명령에 충실한 진정한 현상학자의 모습을 지닌다. 버네트(Bernet)의 말처럼, 데리다와 후설사상을 엄격히 갈라놓으려는 것은 승산 없는 짓일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데리다는 차연을 가장 최초의 가장 최후의 현전이라 부른다. 데리다는 현상학적 자아론을 스스로 현전의 형이상학으로 고발하면서도 자신은 아직 현전에 대한 향수를 담아내는 현전의 형이상학을 포기할 수 없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실지로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기원과 최종 토대에 대해 계속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는 한, 그 역시 현전에 대한 향수는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데리다는 니체와 하이데거의 극단적 가치전도는 결국 또다른 독단주의를 초래한다는 사실을 주시하면서, 현전의 열정을 포기하고서는 어떤 철학함도 가능하지 않음을 인지하고 있다. 그러므로 데리다의 차연의 형이상학은 잠자고 있는 부재, 차이, 외면성의 악령들을 현전의 지평으로 환원하여 일깨우는 현상학적 전략과 다른 것이 아니다. 데리다의 ‘해체적 구성’(Dekonstruktion)는 결국 ‘현상학적 구성’과 궤를 같이 한다. 다만 데리다는 기형적 이원구조에서 시작한 전통적인 현전의 형이상학은 현전과 부재의 근원적 입벌림에서 비롯된 형이상학이기에, 이 입벌림 이전의 가장 원초적 현전을 복권하는 형이상학으로 극복하려고 할 뿐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묻는 것이 그가 그를 괴롭히려는 ‘악마적 근성’이라고 불평하겠지만, 어쩔 수 없이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결국 무엇에 대해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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