眞理的 知識과 現象的 知識
鄭 良 殷
大韓民國學術院 會員
국 문 초 록
心理學은 인간에 관한 모든 情報를 연구 검토하여 인간을 이해하려는 학문이다. 그런 정보는 終局的으로는 인간이 意識하는 知識이다. 인간이 얻는 지식의 출처는 동질적인 단일 차원이 아니다. 지식은 (1) 個人의 信念體系에서 얻어지거나 (2) 理性의 批判的인 思考의 結果로 産出될 수도 있고 또 단지 (3) 意識에 나타나 보이는(appearing) 現像에서 얻거나 (4) 偏見과 誤謬와 같이 非合理的 지식일 수도 있다. 이들 지식 출처들은 각기 차원이 다른 異質的인 것들이며 그들 원천에서 나오는 지식들은 모두 심리학의 자료가 된다. 왜냐하면 이런 지식들은 의식되는 사실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심리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현재 취급하고 있는 지식이 이들 여러 知識 源泉 중 어떤 차원의 원천에서 제공되었고 사용되는 槪念이나 用語들이 어떤 限界를 지니며 또 그것들이 어떤 意味를 지칭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철저하게 검토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잘못된 용어의 사용으로 심리학의 지식이 인간 이해에 오히려 혼잡만 增大시겨 생활에 弊端을 초래할 수도 있고 또 다른 학문에서 심리학이 잘못 이해되는 경우도 생길 수 있을 것이다.
이 논문은 차원을 달리하는 지식 원천들을 엄격하게 구별하여 규정함으로서 동일한 용어로 표현되고 있지만 지식의 원천에 따라 사용된 용어들이 意味를 달라하는데서 야기되는 혼란을 止揚해 보려는 노력의 一端이다.
1. 序 論
現象的 事實을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공부를 하고 있어 철학엔 門外漢인 本人은 眞理나 現象이나 知識論과 같은 深奧한 철학 원리를 여기서 소개하거나 批判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인간에 관한 지식을 수집하고 연구하려면 심리학 소재가 되는 이들 지식의 源泉에 관한 문제를 한번은 검토하여야할 대상으로 취급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되어 심리학을 공부하는 학도에게 필자가 알고 있거나 잘못 알고 있는 바를 전달하여 그들의 학문 발전을 도우려는 老婆心에서 이 논문을 엮으려 할 따름이다.
심리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겪는 어려운 문제의 하나가 심리학에서 사용되는 用語들이 難澁하고 生疎하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심리학이 쉬운 것을 어렵게 표현하는 학문이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심리학이 쉽다는 것은 심리학이 취급하는 연구대상이 대부분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누구나 경험하는 사실들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엄격한 統制가 이루어지는 條件에서 심리적 사실들에 關與되는 여러 變數들을 分離하고 그들 변수들 사이의 關係들을 찾아내는 작업을 하는 것이 심리학이란 학문이며 그런 작업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심리학에서 기술하는 인간심리에 관한 사실들은 단순한 思辨的 방법으로 記述한 것들과는 차이가 있다. 심리학과 다른 학문이 인간에 관한 사실을 동일한 용어로 표현하여도 그 용어가 지칭하는 槪念의 의미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게 마련이다. 동일한 용어를 사용하여도 철학논문으로 발표하는 경우 심리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한계가 모호한 것으로 들리고 심리학 논문으로 발표하는 경우에는 지나치게 細部的 穿鑿을 하는 것으로 철학자들에게 들릴 것이다. 그리하여 때로 심리학의 연구 결과가 철학자들에 의하여 지나치게 一般化되어 誤用될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심리학연구에서 얻은 결과가 적용될 수 있는 한계를 넘어 神學이나 哲學 또는 기타 다른 학문에서 정립된 이론을 實證的으로 證據하는 학문이 심리학인 것처럼 확대 해석되는 경우를 말하는 것이다.
2. 用語 意味의 混同
知識의 核心은 槪念(conception)이다. 동일 용어로 표현되는 개념도 지칭하는 의미가 달라지면 우리가 얻는 지식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개념의 의미의 혼동으로 말미암아 혼란에 빠진 많은 역사적 경험을 우리는 갖고 있다. 상대 국가들 간에서 한마디 용어 의미를 달리 해석함으로서 一國의 운명과 興亡盛衰가 좌우되는 一大 사건이 勃發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일찍이 서양에서는 意味論(semantics)이란 학문이 발달하였다.
심리학이란 後發 학문은 철학자들이 사색에 의하여 인간심리를 표현하기 위하여 사용한 용어들로 연구 결과를 기술하고 발표하지 않을 수 없어 철학과 심리학이 동일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생기는 혼란을 심리학은 甘受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혼란에서 脫皮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심리학 연구 결과를 記述하는 심리학 자체의 特有한 개념과 용어를 創出하여 철학의 개념체계와 완전히 구별되는 새로운 학문체계를 형성하는 것일 것이다. 이와 같은 심리학 용어 체계의 창조는 먼 장래에는 가능할 것이고 또 그런 시기가 올 것이 기대되기도 한다. 그러나 현재로는 그 일이 거의 無望하다. 왜냐하면 새로운 용어들로 엮은 심리학이 있다 하여도 현재는 일반 사람들이 그 용어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새로 만든 용어로 표현된 학문을 받아들이는 것이 어려운 예는 미국에서 Freud의 정신 분석학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여실히 엿볼 수 있다. 미국 대학들의 심리학 개론 강의에선 精神分析學이 반드시 읽어야 할 문헌이 되고 정신분석학 講義는 거기서 사용되는 용어를 풀이하고 例證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학생들은 同僚 학생이나 교수 또는 家族과 親知등 요컨대 모든 접촉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정신분석학 용어로 기술하는 연습을 하도록 되어 있다. 다방이나 카페에서 친구끼리 만나면 우리 학생들처럼 정치이야기가 話題로 채택되는 것이 아니라 정신분석학 용어로 사람들을 분석하여 기술하는 대화를 하는 것이 常例가 되도록 하였다. 이 같은 훈련은 정신분석학의 학문적 타당성을 인정하였기 때문이기보다 인간 심리를 분석하는 연습을 하는데 정신분석학이 적당하기 때문이다. 이런 분위기가 마침내 정신분석학을 미국사회가 받아들이게 된 결과를 가져왔다.
인간 심리가 아닌 객관 세계의 현상들을 연구하는 자연과학이 철학과 訣別하여 독자적인 용어로 自然 현상을 기술하기 시작한 것이 벌써 여러 세기를 지났지만 아직도 親和性(affinty)과 같은 철학 용어를 자연과학에서도 사용하는 것에 비추어 보면 年輪이 불과 百 餘年밖에 되지 않은 심리학이 철학과의 개념 혼동을 해결하는 것은 遙遠한 일이다.이제 개념의 의미혼동을 겪고 있는 몇 가지 중요한 실례를 들어보기로 하자.
2-1. 精神 또는 마음
우선 精神(Mind, Seele)이란 개념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神學에서는 정신을 靈魂과 同義語로 간주하여 육체가 死滅하여도 남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철학에선 정신을 延長이 없는 實體로서 연장이 있는 實體인 物質과 對立되는 개념으로 취급한다. 그러나 William James에 의하면 정신은 개인의 신체에 內屬하면서도 신체 생리 법칙에 지배되지 않는 존재로 槪念化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철학에서는 개인을 超越하고 個別性을 止揚한 普遍的 존재로서의 정신을 다루지만 심리학은 각 개인에게 內屬하고 있는 정신을 다룬다. 따라서 심리학에서는 정신을 複數 개념으로 취급한다. 방에 50명의 사람이 있다면 50개의 정신이 있는 것이다. 이 같은 개별 정신을 인정하고 그것을 연구 대상으로 하여야 정신은 實證的으로 연구될 수 있는 대상이 되는 것이다.
2-2. 意 識
다음은 意識이란 개념을 생각해 보기로 하자. 원래 의식이란 용어는 佛敎에서 나온 用語이다. 영어의 con-sciousness란 말은 共知者란 뜻을 가지고 있다. 공지자라는 말은 정신이 의식하여 아는 것은 대상만이 아니라 대상으로부터 지식을 얻게 하는 존재도 알고 있다는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대상에서 지식을 얻게 하는 그 존재는 先天的으로 (a priori) 의식에 주어지며 따라서 의식은 대상이 되는 존재와 선천적으로 주어진 존재라는 두 존재를 알고 있는 공지자인 것이다. 둥글다는 것을 감각을 통하여 直觀할 수 있기 위해선 선천적 직관 형식인 공간 개념에 따라 圓이란 原型을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즉 접시의 둥근 대상과 직관 형식으로 주어지는 원 개념을 모두 알고 있는 것이 의식(con-sciousness)인 것이다. 초록색이란 色感을 선천적으로 미리 알고 있기 때문에 나무 잎사귀를 보면 초록색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되고 선천적인 초록색과 나무 잎사귀의 초록색을 우리 정신이 의식한다는 생각이다. 만약 원의 개념이나 초록이란 개념이 선천적으로 주어지고 있지 않다면 어떻게 의식이 나무 잎이 초록색이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접시의 모양이 원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겠는가? 따라서 의식은 이 두 가지를 모두 알고 있기 때문에 나무 잎이란 대상이 초록색이고 접시 모양이 원이라는 것을 알게된다는 것이다.
이 같은 철학 견해와는 반대로 심리학에서는 의식을 知者(sciousness)로 취급한다. 의식은 단지 대상을 알뿐이다. 접시라는 대상에 접하면 경험하여 기억 속에 저장된 과거 경험의 映像을 參照하여 圓形이라는 것을 認知할 뿐이며 直觀 形式에 의하여 선천적으로 주어진 원이란 개념에 따라 접시가 원형이라고 인지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Africa 원주민 중에는 直角 立體라는 개념을 갖고 있지 않는 주민이 있다고 한다. 그들은 거주하는 가옥이나 생활 주변의 어떤 것에서도 직각으로 된 사물을 경험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어떤 파장의 光波에는 靑色을 다른 파장의 光波엔 赤色을 인지하는가 라고 반문하게 될 것이다. 神學에서는 그것이 신의 뜻이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것이고 進化論者들은 生命體가 그렇게 進化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해석이나 설명의 어느 것도 이 물음에 대한 올바른 해답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철학도 생물학도 해결할 수 없고 물론 심리학이 해결할 문제도 아니다. 심리학은 그 질문에 대해 그것은 해결할 수 없는 神秘(mystery)이며 인간 의식에 나타나는 경험적 사실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뿐이다.
2-3. Ego 또는 自我
Ego 또는 自我라는 개념도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로 의미를 달리하여 사용된다. Kant는 인식 주체로서 경험을 초월하는 존재를 Trnaszendental Ego(先驗的 自我)라 하였다. 우리가 통속적으로 "나" 또는 我라고 말하는 것이 Ego이다. 정신분석학에선 Id, Superego와 더불어 인간의 性格을 구성하는 요소의 하나로 사고와 인지와 감각 등의 知的(intellectual) 과정을 담당하는 성격 부분을 Ego라 한다. 심리학에서는 Ego를 한 개인의 同一性 또는 正體性(identity)을 의미하는 것으로 취급한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와 내일의 나는 동일하지 않은 부분도 있지만 동일한 부분도 있다. 동일 부분이 있기 때문에 동일한 이름으로 불리게 되는 것이다. 즉 변화 속에 있는 불변하는 (invariance in the flux of change) 것이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을 捨象하고 동일한 것만을 취하여 純粹自我(pure ego)라고 한다. 이와 같이 동일 용어라도 그들 용어가 지칭하는 개념의 의미는 출처에 따라 각기 달라져서 학자들 사이에서도 의사 소통이 斷絶될 수 있는 것이다.
2-4. 기타 개념들
이밖에도 인간의 심리적 사실을 지칭하는 수많은 개념들이 철학자에 따라 또는 사상가에 따라 또는 학파에 따라 서로 다른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최근 우리 교육의 敎育 理念이라고 간주되는 人性이란 용어가 유행되고 있다. 인성이란 말은 우리나라에서는 性格檢査(Personality Test)에 人性檢査란 이름을 붙여 발표한 다음부터 주목받기 시작한 개념인 것 같다. 그 개념은 儒敎 전통이 강한 우리 知性 사회에서는 孟子의 人性論과 맞물려서 광범하게 호응을 받게 된 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인성이란 바람직한 인간이란 모습의 價値觀的 屬性을 지닌 개념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심리학은 과학으로 인간심리에 관한 脫 價値的 사실들을 추구하는 학문이다. 따라서 심리학에서 사용되는 性格 (personality)이란 개념에는 價値 指向的인 내용이 포함될 수 없고 그런 내용이 포함되면 이젠 심리학 개념이 될 수 없다. 인성에 관하여 어떤 정의를 내리려면 많은 어려움이 있게 된다. 우선 性善說과 性惡說의 구별이 있다. 성선설의 입장을 취한다면 인성은 助長되어야하고 勸勉되어야 한다.
그러나 성선설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超自我(良心)가 肥大하여 현실에 적응할 수 없는 인간을 배출하게 될 것이다. 성악설을 취하면 인성은 制約되고 統制되어야한다. 原罪를 범하여 贖罪하는 존재가 인간이라면 그 罪 意識에서 脫皮하도록 하는 것이 잘못된 인성을 이 세상에서 矯正하는 救援일 것이다. 인성이 社會正義를 具顯하고 大義名分을 위하여 자기 犧牲을 하는 것이라면 학생들로 하여금 매일 鐘路 네거리에서 示威하도록 督勵하여야 할 것이다. 인성이 社會主義 이데올로기를 信奉하는 것이라면 平等과 分配正義를 위하여 富裕層을 공격하는 것이 正當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資本主義 倫理에 따르는 것이라면 인성은 人情事情없이 재물을 긁어 모으는 피도 눈물도 없는 守錢奴가 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그 어느 것이 진정한 인성인가 하는 것은 論者에 따라 달라 질 것이다. 이와 같은 복잡한 해석이 여러 갈래로 나뉘게 되는 이유는 인성이란 개념을 심리적 사실을 지칭하는 용어로 국한하지 않고 價値 指向的 當爲 개념으로 誤用하였기 때문이다. 심리학의 입장에서 보면 모든 가치 지향적 성향을 止揚하여야 한다. 다만 현실적으로 살고 있는 생활 장면에서 개인이 이용할 만한 환경 조건과 그렇지 못한 조건을 스스로 取捨 選擇하여 자신의 自我 正體性을 確立하고 擴張하는 것이며 그것을 돕는 것이 심리학의 교육적 意義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개념의 混同이나 誤用이 우리 지식세계에서 하루 속히 해소되어 보다 발전되고 强靭한 자기 정체성을 갖는 국민의 국가가 되기를 바란다.
3. 眞理的 知識과 現象的 知識의 特徵
우리의 日常用語에서뿐만 아니라 學術的 著述에서도 사용된 용어들이 지칭하는 의미의 혼동을 경험하게 되는 일이 적지 않다. 그런 혼동을 초래하는 이유의 하나는 진리적 지식과 현상적 지식의 경계를 무시하고 동일 용어로 기술하고 대화하는데 있는 것 같다. William James는 이 세상에서 가장 큰 틈새(gap)는 진리적 지식과 현상적 지식을 갈라놓는 간격이라고 說破하였다. 경험을 통하여 얻는 현상적 지식은 진리적 지식에 接近할 수는 있지만 아무리 정밀하여도 진리적 지식 자체가 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 생활에서뿐만 아니라 학문 저술에서도 마치 이 두 지식 사이에는 어떤 틈새도 없거나 안심하고 아무 거리낌도 없이 건너갈 수 있는 튼튼한 다리가 놓여 있는 것처럼 넘나들고 있다. 이제 이와 같은 개념 혼동을 초래한 경우를 검토하여 그 이유를 짐작하게 할 것이다.
3-1. 認識(Recognition)과 認知(Cognition)
진리적 지식과 현상적 지식의 구별과 더불어 인간이 지식을 얻는 방향도 두 가지로 구별될 수 있을 것 같다. 그 하나는 순수한 辨證의 원리에 따라 지식을 얻는 연구 방향이다. 이 방향의 학문 연구의 目標는 普遍妥當하고 必然的이며 絶對的인 眞理를 파악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목표를 지향하는 학문이 神學과 哲學이다. 그리고 철학에서 진리적 지식을 탐구하는 분야를 認識論(epistemology)이라 한다. 따라서 認識이란 말은 진리를 탐색하는 과정으로만 이해될 수 있을 뿐이다. 인식론에선 경험적 지식과 같이 진리에 도달하는 것과 상관이 없는 지식은 연구 대상으로 용납될 수 없으며 인식의 문제에서 가급적 배제되어야 한다.
진리적 지식을 얻는 것과 정 반대되는 또 다른 학문 연구 방향도 있을 수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같은 경험을 통하여 많은 지식을 얻는다. 설령 진리적 지식이 아니라 할지라도 인간 생활에 필수적이고 유용한 지식들은 무한히 많다. 우리는 진리 인식과 상관이 없다고 경험적 지식을 배척할 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경험에 따라 얻는 지식을 대상으로 하는 방향의 학문 연구도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같이 경험을 통하여 얻는 지식을 實證的 지식이라 하고 경험적 지식을 연구하는 학문을 通稱하여 科學이라고 한다. 따라서 과학은 인간 의식에 나타나 보이는 現象的 사실에 관한 학문이며 이들 현상적 사실에 관한 지식은 보편적 지식은 되지 못하며 可變的이고 相對的인 지식이다. 따라서 과학적 지식을 탐구하는 과정은 진리를 인식하는 과정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과학에서 지식을 얻는 과정은 認識(recognition)과정이라 하지 않고 認知(cognition) 과정이라 한다. 그리고 인간의 심리적 사실에 관한 과학적 지식을 탐구하는 학문이 바로 심리학이다. 따라서 심리학은 과학이며 자연과학이라고 주장되기도 한다. 인지는 진리탐구가 목적이 아님으로 인식과 구별되어야 하며 이들은 각기 방향을 달리하는 인간의 지적 노력이다.
철학의 인식론에서 다루는 정신적 내용들은 경험적인 성질의 것이 아님으로 선천적으로(a priori) 주어지는 普遍的(universal) 지식이어야 한다. 이런 선천적인 보편적 지식은 先驗的으로든 경험적으로든 후천적(a posteriori)으로 얻어진 槪念으로 형성된 지식과는 구별되어 觀念(idea)을 형성한다. 따라서 인식론에선 주로 觀念을 다루고 槪念은 그다지 중요하게 다루지 않는다. 관념들이 전개되는 과정을 法則에 따라 사고하여 모순 없는 진리를 확인하거나 관념들 상호간 관계에 관한 법칙을 찾는 것이 인식론이다. 순수한 보편적 진리를 표현하는 관념으로 이루어진 모순 없는 타당한 명제를 찾는 이론을 관념 철학이라 하고 관념과 관념 사이에서 일어나는 사실에 관한 원리를 경험적 사실에 견주어 탐색하는 이론을 경험 철학이라 한다. 경험과 견주기는 하지만 경험론은 관념이 형성되는 과정은 설명하지 않고 관념과 관념 사이에 있는 관계만을 설명하는 법칙을 제창한다. 즉 觀念 聯合(Association of Ideas)의 법칙이다. 따라서 관념이 형성되고 의식되는 과정은 다루지 않고 의식속에 미리 형성된 관념들을 지배하는 법칙을 탐구하는 이론은 관념론이던 경험론이던 철학의 인식 이론이며 과학적 심리학의 이론은 아니다.
서양에서는 Descartes 이래 정신과 육체라는 두 실체를 想定하는 二元論이 철학 사상의 主流를 이루었다. 그러나 정신 자체가 연장이 없는 존재이고 따라서 정신의 基質로 간주될 수 있는 의식도 사색의 대상은 될 수 있어도 자체 存在的 근거에서 관찰되는 대상이 되지 못한다. 따라서 서양 철학에서는 한동안 의식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는 唯物論이 대두되기도 하였다. 그 영향을 가장 심각하게 받은 학문이 심리학이다. 그러나 의식을 실체적 존재로 인정하지 않더라도 인간이 대상을 인지한다는 사실만은 부인할 수 없다고 William James는 주장한다. 의식에 관한 사색에서 생긴 이와 같은 葛藤은 의식을 단순히 대상을 아는 知者가 아니라 대상과 더불어 대상을 대상이게 하는 관념도 아는 共知者로 취급하는 학문적 견해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의식 자체에 관한 지식을 얻으려면 의식이 대상을 경험하는 과정에 대한 지식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인식론에선 대상에 대한 경험에서 얻는 지식은 진리를 탐색하는 학문적 연구에는 사용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하였음으로 의식 자체에 관한 연구는 서양 철학에서 오히려 동양의 불교 철학에서 보다 疎忽하게 다루어지게 된 것 같다. 따라서 의식 자체에 관한 과학적 연구는 Wundt의 감각 생리학 연구에 이르러 비로소 시작되었다 할 수 있다.
의식이 知者로서 대상을 경험하여 알게되는 과정은 인식과정이 아니라 인지과정이다. 인지과정을 실증적으로 관찰하고 분석하여야 의식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다. 여타의 관념론자와 달리 Kant는 경험적 지식이 인식의 端緖로 필수적이란 것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그는 의식이 知者로서 대상을 알게되는 구체적 사실은 무시하고 논리적으로 단순한 감각요소들을 우선적으로 悟性 範疇에 따라 의식이 받아들이고 그것들을 종합함으로서 경험적 요소를 배제한 다음 순수 理性에 의하여 진리적 지식이 사고된다고 주장하였다. 이 주장에 의하면 의식이 대상에서 우선 감각들을 수용하고 그 감각들을 종합함으로서 지각을 형성하여 具象的인 사물을 알게 되는 것이라고 이해된다.
그러나 의식에 관한 심리학적 분석에서는 의식이 대상에 접하면 그 속에 있는 감각요소를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우선 구체적인 사물로 대상을 지각하며 사물 속에 포함된 감각적 요소들을 수용하고 그 요소들을 종합하는 작용을 거쳐 사물을 알게되는 것은 아니란 것이 定說이다. 따라서 인지과정에서 의식의 역할은 종합만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사물을 인지하는 것은 단순히 요소들을 構成만 하는 것이 아니라 補完과 排除라는 복잡한 기능을 하는 과정을 거친다. 따라서 의식은 수동적으로 주어진 대상을 수용만 하는 기관이 아니다. 필요한 것은 첨가하고 필요 없는 것은 삭제하는 작용을 한다. 즉 의식은 加算과 減算을 하는 기관이다. 무엇을 감하고 무엇을 더하는가 하는 것이 인지과정의 최대 관심사이다.
3-2. 演繹과 歸納
진리적 지식과 현상적 지식의 또 다른 차이는 연역과 귀납이란 학문 연구의 방법론에서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심리학은 어떤 原理나 前提를 설정하고 그로부터 연역하여 지식을 얻는 학문이 아니다. 심리학은 인간에 관하여 경험적으로 얻는 사실들을 하나 하나 쌓아 올려 歸納的으로 인간 심리에 관한 지식을 體系化하고 심리적 사실들을 지배하는 경험적 원리를 찾으려고 노력하는 학문이다. 그러므로 경험적 사실에 근거를 두지 않은 지식은 인간에 관한 지식이라 할지라도 심리학의 지식은 될 수 없는 것이다. 철학자들은 경험적 지식은 인간 의식이 인위적으로 날조한 지식임으로 어떤 원리도 적용될 수 없는 虛構的 지식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심리는 동일한 조건에서도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어떤 법칙이던 법칙 적용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인간 심리에 적용할 수 있는 어떤 원리가 있어 그 원리가 심리적 사실을 지배한다면 동일한 조건에서는 항상 동일한 결과를 초래하여야 하며 그런 결과만이 학문을 형성하는 지식이 되며 그런 결과를 지배하는 원리를 찾는 것이 심리학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철학은 연역적 방법에 의존하게 되며 심리학은 귀납적 방법을 고수하게 된다.귀납적 방법에 의하여 인간 심리를 연구하는 심리학은 귀납적 방법을 사용하는 또 다른 학문인 자연과학보다 수세기 뒤질 수밖에 없었다. 자연과학의 대상이 되는 사물들이 인간 유기체의 외부에 주어지는 반면 심리학의 대상인 인간 심리는 인간 내부에 존재하는 사실들이라는 조건뿐만 아니라 인간 의식을 공지자로 간주하는 철학 사상이 오래도록 철학의 학문세계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현대 심리학이 탄생한 것은 1879년 Wilhelm Wundt가 Leipzig 대학 철학과에 심리학실험실을 설치하여 그가 소위 귀납 철학 교수(professor of inductive philosophy)로 취임하게 된 것이 계기가 되었으며 심리학의 역사는 불과 100 餘年을 조금 넘었을 뿐이다. 따라서 아직 인간 심리에 관한 철학자와 심리학자의 견해 사이엔 혼동과 오해의 소지가 있다. Wundt의 심리학은 意識을 분석하는 심리학이었다. 그는 생리학자로 Heidelberg대학의 生理學 교실에서 感覺 생리학을 연구하였다. 감각 연구에는 의식이란 指標가 不可缺하며 감각이 초래하는 의식적 사실들을 연구함에 따라 오히려 그는 意識 自體에 흥미를 갖기 시작하여 감각보다 의식을 연구하는데 몰두하게 되었다. Wundt의 초기 의식 연구는 철학과 생리학의 양쪽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이 두 분야에서는 Wundt의 주장을 학문의 正道에서 벗어난 것으로 취급하였다. 우선 생리학 교실에서는 그의 스승인 Helmholtz로부터 學問的 忌避人物로 취급되었다. 원래 Wundt는 생리학 교실의 序列로서는 Helmhltz의 뒤를 이어 생리학 교실 주임교수가 될 사람이다. 당시 생리학은 철저한 科學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實驗에 의하여 證明될 수 있고 歸納的으로 一般化될 수 있는 지식만을 생리학 지식이라고 확신하는 소위 科學主義 風潮가 강력하였다. 의식과 같이 경험할 수 있는 대상이 되지 못하고 과학적 개념이 되지 못하는 개념을 생리학에 導入한다는 것은 생리학의 과학적 근거를 파괴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절대로 용납될 수 없었다. 감각 생리학에서도 물리적인 자극에 대한 의식의 변화를 연구하지만 이때 얻는 의식 지표도 조만간 정신적 지표가 아닌 물리적 지표에 의해 전환되어 설명되어야 한다고 주장되었다. 따라서 Wundt는 Heidelberg를 떠나 Leipzig 대학으로 이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한편 神學이나 哲學에서는 전통적으로 경험적 지식이 虛構라는 確信이 강하였음으로 인간의 의식을 경험적으로 연구한다는 것은 진리를 탐구하는 학문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일종의 有用한 지식을 蒐集하는 작업에 지나지 않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런 사상의 표본을 우리는 Bacon의 逸話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하루는 老學者들이 한곳에 모여 말(馬)의 齒牙가 몇 개인가 하는 것을 討論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말의 치아가 몇 개라는 것을 연역해 낼 수 있는 원리를 찾기 위하여 온갖 文獻을 涉獵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찾고 있는 원리를 기록한 문헌은 발견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말의 치아가 몇 개인가 하는 것은 決定할 수 없는 未濟의 案件으로 치부하기로 하였다. 이때 그 토론에 참석한 어떤 젊은 사람이 "영감님들 말의 입을 열고 치아 수를 셈하면 해답이 나올 것이 아닙니까?"라고 發言하였다. 그 소리를 들은 노학자들은 모두 일제히 젊은이는 학문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詰責하였다고 한다. 오늘날은 이런 逸話는 우스개 소리로 다루어 질 것이지만 그 당시는 철학을 공부하는 학자들이 金科玉條로 신봉한 학문적 태도를 엿보게 한다. 이 같은 학문적 태도를 견지하는 신학과 철학의 風土에서는 말의 치아의 수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의식도 경험에 의하여 歸納的으로 연구될 수 있을지 모르나 演繹的으로 의식에 관한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 원리는 찾을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진리탐구를 하는 철학자들이 Wundt의 의식분석을 쉽사리 받아들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과학적 심리학이 구라파에서 시작되기는 하였지만 지식을 어떤 근본 원리로부터 연역하는 연구를 選好하는 구라파의 學風은 오늘날도 맥맥히 흘러 전통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말의 입을 열고 치아의 수를 셈하고, 피험자에게 어떤 자극을 주고 그의 의식을 설문하여 얻는 지식을 존중하는 미국의 實用主義에서 과학적 심리학이 더욱 번성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고 할 것이다. 미국이라는 新天地에 몰려간 開拓民들은 지식의 원천이 어디에 있든 開拓 目的에 이용될 수 있는 지식이면 어떤 것이나 존중되었다. 특히 職業과 身分이 世襲的으로 고정된 구라파 사회의 桎梏을 벗어난 신천지의 사람들은 심리학자인 Watson이 적절한 교육만 받으면 누구나 부자가 될 수 있고 과학자가 될 수 있고 대통령이 될 수 있고 예술가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 宣言이 그들의 心琴을 울렸고 광범하게 공감을 불러일으킨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3-3. 操作的 定議
우리는 여러 源泉에서 槪念과 知識을 얻는다. 개념은 우리의 지식을 형성하고 의식내용을 이룬다. 우리는 개념을 이해하기 위하여 그 개념에 定義를 내리는 일이 많다. 철학자들은 흔히 어떤 개념을 이해하기 위하여 그 개념에 정의를 내린다. 그들은 다른 개념들로 敷衍함으로써 개념을 정의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정의가 공감을 불러일으키면 개념이 이해된 것으로 간주하게 된다. 그러나 대개 정의에 의한 개념 규정은 모호할 뿐이다. 대개 정의되는 개념은 主槪念이고 정의하기 위하여 동원되는 개념은 從屬槪念이기 쉽다. 그러나 종속개념도 개념인 이상 제3의 또 다른 개념으로 정의가 내려져야 한다. 따라서 개념을 개념으로 정의하는 것은 끝없는 還元과정을 거치게 된다. 예를 들면 知能이란 개념을 다른 개념으로 부연하려면 學習能力이라 하거나 새로운 환경에 適應하는 능력이라 할 것이다. 그러면 다음은 학습능력과 적응능력을 또 다른 개념으로 정의하여야 할 것이다. 이때 학습능력과 적응능력을 정의한 개념들도 또 다시 다른 개념으로 정의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지능이란 학교 성적표의 점수이고 적응 능력은 사회에서의 成功 정도라는 결론에 이를 것이다. 심리학은 이런 迂廻的 戰略을 사용하지 않고 지능은 知能檢査 결과라고 정의한다. 즉 심리학에선 지능을 제3의 다른 개념으로 정의하지 않고 지능검사라는 道具의 操作으로 정의를 내린다. 물리학자 Bridgman(1927)은 이와 같은 개념의 정의를 操作的 定義(operational definition)라 命名하였으며 조작적 정의는 대표적인 과학적 정의가 되었다.
개념을 다른 개념으로 정의하는 경우에도 정의의 환원과정을 무한정 끌고 갈 수는 없다. 개념 정의의 환원 과정은 어디선가 斷絶되어야 한다. 여기에는 3가지 戰略이 있을 수 있다. 그 하나는 어떤 絶對者나 先知者를 想定하여 그 절대자에게 개념의 정의를 歸屬시키는 戰略이다. 이 전략은 개인들의 信念體系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宗敎나 神學에서 주로 사용하는 전략이다. 두 번째 전략은 정의의 환원과정을 開放해 두는 전략이다. 이 전략은 철학에서 不可知論이나 二律背反의 딜레마에 빠지는 전략이다. 그리고 제3의 전략이 심리학에서 취하는 조작적 정의로서 개념정의의 환원 과정을 斷絶하는 戰略이다. 즉 개념을 다른 개념으로 정의하지 않고 경험적 사실을 指稱(denomination)함으로서 정의로 삼는 전략이다. 따라서 첫째 전략에서는 개념의 정의를 절대적인 것으로 수용하지만 제3의 조작적 정의에서는 정의를 위하여 지칭된 심리적 사실들이 可變的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따라서 심리학의 정의는 절대적일 수 없으며 相對的이고 개방적으로 열려 있다. 제2의 전략에서는 결국 개인적 關心이나 개인적 信念에 의하여 二律背反의 한쪽 날개를 붙잡고 늘어 진다.
종교적 根本主義(fundamentalism) 信仰이 강하고 구라파의 철학적 學風이 강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위의 세 가지 전략 중에서 제1의 전략이 가장 잘 받아들여지는 것 같다. 조건의 변화에 따라 가변적이라는 留保條件 밑에서 규정되는 경험 사실을 근거로 하는 개념 정의보다 절대적이고 普遍的이라고 주장하고 豪言壯談하는 개념의 定議에 의하여 사람들은 쉽게 說得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교육장면에서도 절대적인 윤리적 道德律을 아동들에게 注入시키는 것이 유일한 敎育이라고 생각한다. 아동들의 能力과 性格을 啓發하는 것보다 보편적인 價値觀이 있다고 가정하여 그런 가치관을 모든 학생이 받아들여 內面化하도록 하는 것이 학교가 하여야 할 유일한 의무라 생각한다. 精神分析學의 창시자인 Freud는 凡性論(pan-sexism)을 주장하여 모든 인류에게 공통된 良心(超自我)이 있다고 생각했으나 그의 동료이자 제자인 Adler는 良心은 문화와 사회적 조건에 의하여 달라질 수 있으며 절대적인 진리적 준거가 되는 가치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이 같은 현실에서 時代錯誤的 절대주의 가치관에 우리 심리학이 回歸한다면 앞으로 무한하게 발전하고 변하게 될 우리의 사회적 與件에 심리학이 따라가지 못할 뿐만 아니라 모든 학문에 앞장서서 인간사회의 개척을 先導하여야 할 심리학의 학문적 사명은 이 땅에서 빛을 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
4. 知識의 形成과 그 源泉
Kant는 선천적으로 주어지는 관념이 인간 의식에 있다고 생각했지만 Locke는 출생 시엔 우리 의식이 白紙(tabula rasa)와 같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백지인 인간의 의식을 관념들이 착색하게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백지인 인간 의식에 착색하는 것은 경험뿐만이 아닐 것이다. 인간은 想像의 날개를 펼쳐 직접 경험하지 못하는 세계로 跳躍하여 허다한 개념을 만들어 내고 새로운 지식을 얻는 능력을 갖고 있는 것이라 想定할 수 있다. 그러므로 지식의 원천은 경험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경험될 수 없는 未到의 세계에도 있을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은 직접 경험에서 얻는 지식보다 더 풍부한 지식을 얻을 수 있고 또 지식의 원천은 單一한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소박하게 우리가 의식하여 알고 있는 것을 지식이라고 하자. 우리는 skate를 지치는 것을 알고 ski를 滑降하는 것도 알고 있다. Piano나 Violin을 켜는 것도 안다. 이런 모든 것들도 우리의 지식이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삼는 것은 관념을 형성하고 言語라는 象徵으로 표현될 수 있는 지식에 한정한다. 왜냐하면 신체적 능력에 관한 지식은 언어 상징으로 표현할 수 없으며 따라서 인간의 정신 발달을 다듬는데는 그다지 공헌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言語 象徵이 의미하는 것이 곧 우리가 경험하는 것과 일치하는 것도 아니다. 언어 상징은 동일 범주에 속하는 경험 내용들을 포괄하는 範疇名으로서 사회적 공인을 얻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사람"이란 언어 상징으로 지칭되는 관념은 경험적 근거가 없다. 金某 李某 朴某는 경험되는 대상이지만 사람은 이들 모두에서 추상된 결과에 지나지 않으며 직접경험의 대상은 아니다. 따라서 "사람"은 실존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경험하거나 상상하여 얻는 관념과 지식이 항상 명료하게 의식되는 것은 아니다. Leibniz는 우리 지각에는 明瞭하지 못한 지각(puttites perception)도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여 소위 의식되지 않는 의식(unbebusstes Bebusstsein) 즉 無意識의 존재를 주장하게 한 端初를 제공하였다. 그러나 Locke는 우리의 의식 범위를 넘어서면 한치도 알 수 없다고 하여 무의식의 존재를 부정하였다. 최근 精神分析學은 인간의 성격에 의식되는 부분이 있고 의식되지 않는 무의식의 부분이 있어 무의식의 動機가 개인 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분석하였다. 그러나 전통적인 심리학에서는 무의식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記憶과 忘却 과정에 의하여 인간 의식을 설명하려고 노력한다.
인간이 의식하여 얻는 지식을 검토 대상으로 삼으려면 우선 지식 종류를 구별해야 한다. Hegel은 인간 지식을 眞理-現象-誤謬(Wharheit-Phanomen-Irritum)의 3종으로 구분하였다. 인간이 의식하여 얻는 지식이 대상의 實存과 一致하면 인간은 진리적 지식을 얻었다고 할 수 있다. 현상적 지식은 대상의 실존과는 관계없이 인간의 의식에 나타난 대로의 事實(fact)에 관한 지식이라고 한다. 따라서 현상적 지식은 인간 의식이 만들어낸 普遍妥當性이나 必然性이 없는 지식이라고 간주 될 수 있다. 그러나 현상적 지식은 선천적으로 주어진 지식도 아니고 또 현상적 사실과도 일치하지 않고 거리가 있는 지식이다. 따라서 이때 심리학자는 언어로 표현되는 현상적 지식을 일정한 경험적 사실들을 包括하는 範疇名이라 주장한다. 誤謬 지식은 현상적 지식이지만 지식의 대상이 객관적으로는 존재하지 않고 다만 인간의 의식 속에만 있거나 그 대상이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증명되지 않거나 증명될 수 없고 다만 蓋然性만 지닌 지식이다.
有限한 인간은 주어진 능력범위에서만 사물에 관한 지식을 얻을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경험으로는 진리적 지식을 얻을 수 없다고 판단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은 想像을 비약시켜 假想的으로 진리의 세계를 구상하고 그 세계에서 진리적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된다. 神學者인 Thomas Aquinas는 인간이 순수한 정신 상태를 간직하면 全知全能한 神을 迎接할 수 있어 신과 더불어 진리적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Hoffstaeter에 의하면 신학자 Carvin은 아무리 순수한 정신을 갖는다고 하여도 有限한 인간은 肉身에 의하여 拘束되어 하나님을 직접 영접할 수는 없으며 따라서 진리적 지식을 인간은 얻을 수 없고 다만 간접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짐작할 수 있을 따름이라고 주장하였다고 안다. 상상력을 발휘하여 가정된 진리적 세계를 믿는 사람은 거기서 얻는 모든 지식이 진실한 진리적 지식이란 믿음을 갖는다. 어떻든 상상의 세계가 인간에게 풍부한 관념과 풍부한 지식을 제공하는 지식 원천의 하나라는 것은 인정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상상의 세계는 그런 세계를 신봉하는 개인의 信念體系를 형성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인간의 지식의 원천이 되는 것은 인간이 꾸민 상상의 세계뿐만이 아니다. 인간은 순수한 상상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경험을 바탕으로 하지만 경험을 넘어서는 사고를 진행시키는 능력도 가지고 있다. 이런 능력을 理性이라 한다. 인간의 이성이 엄격한 비판적 사고를 진행시킴으로서 또 다른 진리적 지식의 세계를 제공한다. 따라서 비판적 사고의 법칙이 타당하다면 그런 留保條件 밑에서 이성이 제공하는 지식도 진리적 지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비판적 사고의 결과로 얻는 체계는 타당한 법칙에 따르지 않는 경험되는 雜多를 統合하여 정리함으로서 體系를 구성하는 기준을 제공하기도 한다. 그런 예를 우리는 수학에서 찾을 수 있다. 自然數의 演算 法則에 따라 사고를 전개시킨 결과들은 물질세계에서 얻는 지식을 기술하여 정리하고 또 물질세계에서 장차 일어날 현상들을 예측하게 한다. 따라서 비판적 사고는 진리적 지식을 제공하는 원천의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에게 지식을 제공하는 원천은 인간이 대상을 경험할 수 있게 하는 신체기관들이다. 특히 감각기관에서 제공하는 지식은 인간이 얻는 경험적 지식의 원천이다. Kant는 경험적 지식이 인간에 필수적 지식이라 했다. 이 지식은 인간 의식에 나타나 보이는(appearing) 지식이기 때문에 現象的 지식이라 한다. 현상적 지식은 상상의 세계에서 얻는 소위 진리적 지식이나 이성의 비판적 사고에 따라 경험을 초월하여 얻어지는 지식과는 구별된다. 따라서 현상적 지식은 감각에서 제공하는 모든 정보와 그 정보들이 하나로 묶어지는 범주에 관한 지식이며 기억이란 심리 과정에서 처리되어 얻는 모든 사실들에 관한 지식을 말한다. 상상되는 세계에서 얻는 지식이나 이성의 비판적 사고에 따라 만들어지는 초월적 지식에서는 절대적 普遍妥當性과 必然性이 주장되지만 현상적 지식은 절대적이 아니라 가변적이고 상대적인 지식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따라서 神學徒나 철학자는 현상적 지식을 虛構라고 看做하였다. 그러나 인간 심리를 이해하려는 심리학의 목적에서는 어떤 의미에서는 實存이 의심스러운 진리적 지식보다 구체적 사실에 관한 지식인 현상적 지식을 연구 대상으로 삼는 것이 필요하고 또 유용하다고 하겠다.
誤謬 또는 錯覺이 인간에게 지식을 제공하는 원천이 될 수 있다. 誤謬 지식은 상상되는 세계에서도 또 이성적 사고에서도 또 감각 세계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 현상적 지식과 오류 지식은 인간의 의식 속에서 경험되지만 오류 지식은 오로지 인간 의식 속에만 있고 대상과 일치하지 않는 지식이다. 감각적 지식에서 생긴 오류 지식을 錯覺이라 한다. 우리는 다만 개연성만 있고 증명되지 않거나 증명될 수 없는 지식도 갖고 있다. 이런 지식은 실증되거나 변증될 수 없을 때까지는 誤謬(Irritum, Error)지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의 네 가지 지식의 원천과 그 변화 발달을 더듬는 것이 인간의 지식을 해명하는 捷徑이라 생각된다.
4-1. 信念體系와 眞理的 知識
오늘날의 文明 사회에 사는 개인 인간은 누구나 각자 개인적 信念體系를 갖고 살아간다. 개인의 신념체계를 발전시키는데 공헌하는 많은 이론 체계가 있다. 原始 信仰이나 洗鍊된 종교의 敎理나 바람직한 사회건설을 획책하는 유토피아 思想이나 여러 가지 사회적 이데올로기나 그 밖의 전해오는 모든 이론들은 그것들을 접한 사람에겐 個人的 신념체계를 형성하는데 直ㆍ間接으로 영향을 미친다. 원리적으로 말하자면 개인에 따라 신념체계가 각기 다름으로 인간의 수효만큼의 개인 신념체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개인은 대개 동일 運命 共同體 속에서 살고 있음으로 각 개인이 형성하는 신념체계엔 공통되는 부분이 많다. 한 개인(Ego)의 신념체계는 모든 다른 사람의 신념체계와 다르기 때문에 그 개인에게는 다른 사람(Alter-ego)의 신념체계는 不信體系(disbelief system)이다. 신념체계가 제공하는 지식은 주관적인 심리적 사실에 대한 지식이기 때문에 객관적으로는 그 지식의 진실성을 입증할 증거를 경험세계에서 찾을 수 없다. 따라서 개인 신념체계가 제공하는 지식의 진실성은 그 신념체계 자체 속에서 찾아야 한다.
개인이 신념체계를 형성하는 과정은 일종의 發達 過程이다. 우선 풍부한 상상력이 발휘될 수 있을 정도로 인간이 정신적 成熟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은 個體 發達의 문제이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사회 생활이 각 개인들의 상상력을 자극하여 신념체계 형성을 도울 수 있을 만큼 발달하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간이 집단생활을 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개인적 신념체계는 인간들이 서로 意思疏通을 하여 서로의 의견을 교환할 수 있는 관계에서만 조성되기 때문이다. 인간이 집단으로 정착생활을 하지 않고 떠돌아 다니는 遊牧생활을 하는 동안에는 각 개인이 갖는 신념체계란 의미가 없다. 개인은 다만 집단을 따라 행동하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 집단이 발달하여 직접 경험하여 얻는 지식을 넘어 상상력을 동원한 지식을 필요로 할 만큼 인간이 발달하여야 신념체계가 탄생된다. 환언하면 인류의 集團生活이 發達하여야 개인 신념체계도 형성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이 지구상에 나타나서 집단 생활이 변천한 자취를 더듬어야 오늘날의 문명 사회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의 개인적 신념체계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 신념체계는 상상력이 발휘되어 형성되는 것임으로 직접 경험에만 의존하는 지식 체계는 신념체계를 형성하는데 그다지 공헌할 수 없다. 원시인도 생활에 필요한 지식을 획득하여 체계를 이룬다. 그러나 그런 지식은 경험을 넘어선 신념체계를 구성하는 지식일 수 없다. 개인 신념체계를 구성하는 요소들은 경험으로부터 얻은 것들이 아니라 개인들이 집단 생활을 하면서 서로 의사소통을 통하여 얻는 추상적 지식들이다. 따라서 우리는 개인 신념체계를 이해하기 위하여서는 인간의 집단생활이 변화 발달한 역사적 사실을 더듬어 보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Time Machine을 타고 인류의 과거 생활로 되돌아가서 원시인들의 생활을 관찰할 수는 없다. 서양에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걸쳐 지구상에 현존하는 原始民族의 집단생활을 조사한 인류학자들의 보고가 많았다. 그러나 Morgan을 비롯한 대부분의 인류학자들의 자료는 다만, 각 민족의 생활 문화를 수집한 보고서일 뿐이다. Wundt는 한 거름 더 나아가 인류의 집단생활의 변천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가설을 제시하였다. 즉 현재 지구상에 水平으로 현존하는 각 원시 민족의 집단 생활을 進化 발달의 정도에 따라 年代順으로 垂直으로 배열하면 인류의 집단 생활이 발달한 역사적 經緯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假說에 따라 인류의 집단생활의 발전을 가늠하고 거기 따라 개인의 신념체계가 발달하기 시작한 시기를 짐작해 보려고 할 것이다.
인류가 이 지구에 homo sapiens로 처음 나타난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약 100만년 내지 150만년전이라고 推定하는 것 같다. 처음 인간이 땅 위에 나타났을 때엔 인간 생활도 현재 동물 생활과 흡사했을 것이다. 각 개인이 단독으로 또는 가족단위로 採集과 狩獵으로 食生活을 해결하면서 살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자식이 獨立的으로 생활할 능력이 생길 만큼 성장하면 自活하도록 가족으로부터 追放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homo sapiens도 동물과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단독 생활을 하였으며 집단생활을 하지 않은 것 같다. 이와 같은 단독생활은 인류가 나타난 다음 상당한 기간동안 지속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구가 증가하여 서로 접촉하는 인원수가 많아지고 또 접촉기회도 늘어나서 집단 생활이 편리하고 유익하다는 것을 인간은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인류는 집단생활을 시작하게 된 것으로 사료된다.
協力體(Co-operative Collectives) 集團 生活. 집단생활이라 하지만 처음에는 필요에 따라 一時的으로 協力하여 共同의 敵인 짐승들을 물리치거나 공동으로 채집하거나 수렵을 하였을 것이다. 원래 단독으로 생활하였을 때에는 食料를 찾아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며 살았었지만 협력체 양식의 집단생활이 시작되면서부터 각자 필요할 때 언제나 손쉽게 연락이 닿도록 거의 일정한 장소에 주거를 고정시켰을 것이다. 이런 협력체 집단 생활은 현재의 Africa에 거주하는 Hottenttot나 Bushman의 집단생활 또는 호주의 Aborigine의 생활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한다. 그들에게는 수렵이나 채집에 필요한 경험적 지식은 풍부하였고 道具 使用의 기술도 있었음이 발견되었다. 더욱이 타인과의 서로의 접촉이 빈번하게 되어 서로의 경험을 구두로 전달받았음으로 많은 代理學習도 하였을 것이다. 또 비바람이 불고 홍수가 나고 천둥이 우르릉거리고 벼락이 떨어지는 曠野에서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리기도 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와 같은 自然現象이 나타나는 원인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자연 현상의 배후에는 각각 별도의 神이 존재하여 그의 造化로 그와 같은 자연 현상이 일어난다는 해석을 하게 되었다.
또 태양은 光明과 溫氣를 주는 고마운 존재로 간주되어 태양 禮讚의 風習을 만들어 내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만물은 나름으로 어떤 작용을 하고 있음으로 그런 것들에도 생명이 있다는 物活論을 발전시키고 사물들의 작용을 擬人化하여 설명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協力體 집단생활은 많은 신의 존재를 가정한 多神 사상을 탄생하게 하였다. 그러나 신은 인간생활에 직접으로 영향을 주지는 않지만 노여움을 사게되면 천지를 진동하는 이변이 나타나게 하며 따라서 사람들은 신의 노여움을 사지 않도록 노력하여야 한다고 생각했을 따름이다.
群集 集團生活. 협력체 집단생활이 발전하고 다음으로는 Max Weber가 말하는 군집 (horde, Herde) 형태의 집단생활이 시작되었다. 협력체와는 달리 군집은 일정한 장소에 정착하지는 않지만 강력한 지도자가 있어 군집에 속하는 모든 사람들을 통솔하게 되었으며 사람들은 지도자의 지시에 따라 거주 장소를 옮기고 사냥이나 채집을 하는 형태의 집단생활을 하도록 인간의 생활 양식이 발달하였다. Weber는 군집의 예를 몽골의 遊牧生活에서 찾았다. 군집이 탄생한 계기는 다른 협력체들과의 摩擦과 葛藤이 시작한 것에 그 원인이 있는 것 같다. 어떤 협력체의 사냥터에 다른 협력체가 들어와 사냥한다면 거기 葛藤과 戰鬪가 없을 수 없다. 이런 전투에서 가장 강력하고 團結이 잘된 협력체가 승리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하여 느슨한 집단 조직인 협력체보다 강력한 힘을 갖는 지도자에 의하여 統率되는 조직이 바람직하게 된 것이다. 이제는 인간 집단 생활이 衣食住를 충족시키는 것 보다 다른 인간 집단으로부터 공격당하지 않도록 방어하는 것이 더욱 긴급한 문제가 되었다. 따라서 힘있고 용감하고 지혜롭고 희생정신이 왕성한 지도자가 군집을 통솔하게 되었다. 사정이 이와 같이 급변하게 됨에 따라 군집의 전투나 수렵과 같은 고된 노동을 요구하는 일에서 노약자는 거추장스러운 존재가 되었다. 그리하여 한때 노약자는 군집에서 추방되어 홀로 생을 끝마치기도 하였다. 이런 풍습은 Eskimo들이 노약자를 雪原에 遺棄하는 풍습이나 우리나라에도 있었다고 전해지는 高麗葬 풍습에서 찾을 수 있다. 군집의 시대에는 弱肉强食의 시대였으며 다른 군집의 침략을 효과적으로 격퇴하고 궤멸시키는 군집이 가장 융성한 군집이고 가장 위대한 지배자의 군집이 되었다.
部族 形成과 homo-politicus. 인간의 집단생활은 강력한 지도자에 의하여 통치되는 군집을 형성할 만치 발달하게 되었다. 군집의 초기에는 젊고 용감한 사람들이 군집의 지도자가 되고 나이를 먹은 사람들은 무용지물로 전락되었지만 차차 노인들이 담당할 役割이 나타나게 되었다. 청년들은 용감하여 앞장서 사냥하였지만 너무 지쳐 사냥다음에 捕獲物을 처리하는 일에는 참여할 수 없는 형편인 경우가 왕왕 일어나게 되었다. 여기서 먹을 것을 군집의 모든 사람들에게 골고루 분배하는 역할을 노인들이 떠맡게 되었다고 Weber는 지적하고 있다. 그리하여 때로는 분배를 맡은 노인들이 직접 사냥을 한 사람들보다 포획물이 더 많고 더 좋은 부분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군집의 누구도 거기에 불복해서는 아니된다. 그리하여 노인들이 젊은 사람들 보다 더 높은 권위를 갖는 시대가 되었다. Weber는 이를 노인 정치 시대라고 하였다. 老弱한 노인이 체력이 왕성하여 수렵에 직접 공이 큰 사람을 통제하려면 힘 이외에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런 방법은 노인들의 권위를 높이는 방법이어야 한다. 여기서 군집 내 정치가 시작되고 인간이 homo sapiens로부터 homo-politicus로 변질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군집은 인접하는 군집을 정복하여 점차 部族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수렵을 업으로 삼았던 군집시대에는 왕왕 노인들의 권위가 도전 받기도 하였지만 부족이 형성되면서 대부분 遊牧生活을 하지 않고 일정한 장소에 정착하여 農耕을 業으로 삼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지구상 四大江 流域에 부족들이 모여 살아 인류 문화의 發祥地가 되었다. 그러나 부족간 전쟁은 끝이 없이 계속되어 군집 시대보다 오히려 더 치열하였다. 부족은 농경을 할 토지가 필요하고 또 그 토지에서 농사를 경작할 사람이 필요하였다. 군집 시대엔 경작지 개념이 있을 수 없고 어떤 곳이나 사냥감이 있는 곳에 가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착생활을 하는 부족에게는 農土가 절대적 필수 조건이었다. 부족간의 戰爭에서 승리한 부족은 패배한 부족을 奴隸로 삼고 농토는 몰수하였다. 그리하여 부족의 지도자는 領主가 되고 여러 영주를 정복한 통치자는 帝王이 되어 일정한 영토를 지배하고 지배 조직과 지배 제도가 생겨 민족 국가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부족으로부터 민족 국가로 移行한 과정은 북미의 토인 부족인 슈族 집단 조직에서 엿볼 수 있다고 한다. 그들은 여러 부족이 대표자를 뽑아 부족 회의를 열어 부족의 정치적 문제를 논의하는 제도를 발전하였다. 이들 원시 부족의 집단 생활은 부족 사회가 어떻게 현대 문명 사회의 정치형태로 발전하였는가 하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集團 生活의 變遷과 信念體系의 發達. 인간이 부족사회를 형성하여 생활하게 됨에 따라 비로소 그 부족에 속하는 개인들의 신념체계가 형성되기 시작하고 그 체계가 발달되고 확대되었다. 신념체계를 인간이 상상력을 동원하여 만들어낸 人爲的(artifact) 구조라 한다면 인간이 부족집단을 형성하기 이전은 개인 신념체계가 형성될 土臺가 마련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이 부족을 형성하고 정치행위를 시작하기에 이르러 개인의 신념체계를 형성하게 하는 부족의 내외조건이 조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동안 부족간의 전쟁이 끝임 없이 일어나 농경을 할 영토를 확장하는데 모든 영주들이 汨沒하여 전쟁은 필연적이고 弱肉强食의 시대가 지속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영주나 제왕은 부족을 통치하기에 필요한 권위를 찾는 일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紀元前 數 世紀에 희랍에서는 벌써 정치제도의 개혁으로 理想鄕을 地上에 건설하려는 사상이 싹트고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영주나 제왕은 보다 이해하기 쉬운 방법으로 그들의 권위를 높이기를 원하였다. 이와 같은 요구를 充足하기 위해서는 모든 자연현상의 배후에 존재한다고 가정한 神을 끌어오는 것이 손쉬운 방법이다. 그러나 부족 시대 이전에는 모든 자연 현상 각각에 개별 신의 존재를 상정하였으므로 자연 多神 崇拜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부족이란 단일 조직을 지배하기 위해선 전체 조직 배후에 그 조직을 지배하는 唯一神을 가정하는 單一神 崇拜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多神 存在를 가정한다면 君主는 각각의 신에 봉사하고 統制하는 어려움을 겪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부족의 영주나 제왕은 유일신의 神託(oracle)을 받아 백성을 통치한다는 이론을 발전시켰다. 영주들이나 제왕은 부족의 유일신의 뜻에 따라 백성을 통치함으로 그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자는 神聖冒瀆의 죄과를 받아야 한다. 그만치 통치자의 권위가 절대적인 것이어야 했다.
권력자들은 상상력을 총동원하여 부족 단일신의 존재를 部族民들에게 설득하여 그들이 유일신의 존재를 내용으로 하는 개인 신념체계를 형성하게 하고 그 유일신이 갖는 절대적 속성들을 가정한 假說(postulate)들을 창안하였다. 이 가설들은 허다한 개념과 지식을 일반 민중에게 제공하였다. 그리고 부족 신에 대한 신앙심이 敦篤한 사람들은 각자 그 유일신에 관한 가설을 충족시키는 지식을 받아들여 자신의 신념체계를 형성하고 그 신념체계를 생활 準據로 삼게 되었다. 각자 신념체계를 형성한 개인은 자신의 신념체계가 절대적이며 거기서 제공하는 지식은 진리적 지식이라고 믿게된다. 인간이 얻는 지식이 存在의 實狀과 일치하는 경우 진리적 지식을 얻었다고 한다면 개인의 신념체계가 실존과 일치한다는 증거를 얻을 수 없으므로 진리적 지식이 될 수 없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그 지식이 진리적 지식이 아니라는 반론을 제기할 증거도 없음으로 소극적으로(negatively) 개인의 신념체계에 따라 그 개인이 얻는 지식을 진리적 지식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동양에서는 天이란 개념이 서양의 神개념을 대신하는 것 같다. 제왕은 天命에 따라 백성을 다스린다는 사상이다. 그리고 신은 造化의 근원이라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동양 사상에서는 天 개념에 관하여 서양에서 神 개념에 관하여 사색한 만큼 상상력을 동원하지 않았다. 서양에선 신의 속성에 관한 수많은 가설을 설정하였으며 그 가설에 사용된 관념을 열거하면 수없이 많을 것이다. 그 중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관념으로는 全知全能, 創造主, 主宰者, 永生不滅, 絶對的 存在, 自由意志의 根源, 攝理, 사랑과 같은 관념들을 열거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 관념은 그 관념을 신봉하는 개인들에게는 절대적인 진리적 지식이 된다. 따라서 이처럼 위대한 신의 의지를 委託받은 領主나 帝王은 그만큼 위대하다는 신념체계가 형성되지 않을 수 없다.
眞理的 知識의 源泉으로서의 宗敎. 서양에서 발달한 신에 관한 이론들은 영주나 제왕의 권위를 높이고 부족으로 하여금 공고하게 단결하게 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리하여 통치자의 권위가 높아질수록 부족간의 전쟁과 殺戮이 점점 더 심하게 되었으며 마침내는 로마 제국이라는 거대 국가가 형성되어 구라파 대부분과 소아시아(Asia Minor) 그리고 북 아프리카의 일부까지 정복하여 잡다한 민족을 통치하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정복자는 豪華로운 奢侈생활을 하지만 被 支配 부족은 蔑視와 賤待를 받는 노예 생활을 강요당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힘으로는 도저히 정복자에 대항할 수 없는 처지에 놓여 마음 속으로는 언제나 반항의 復讐心에 불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란 戰略은 로마라는 거대한 부족국가가 건설된 다음에는 소수 정복당한 부족이 지배 부족에 대항하는 효과를 거둘 수 없다. 로마 제국에 정복된 유태부족도 이런 처지에 놓여 있었다. 그리하여 전술을 바꾸어 '적을 사랑하라, 복수를 하지 말라, 한쪽 뺨을 맞으면 다른 쪽 뺨을 내주라' 등과 같은 無抵抗의 抗拒 주의를 그리스도가 說法하게 되니 漁民이나 農民과 같은 천민들의 공감을 얻었다. 그들은 전쟁에서 적을 屠戮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것으로 간주한 종전의 신념체계에 革新的 변화를 체험한 것이다.
로마 제국은 강력한 무력을 소유하고 있었음으로 무력으로 저항하는 적은 얼마든지 敗北시킬 수 있었지만 무저항으로 항거하는 자를 다루는 政治的 技巧는 마련하고 있지 못했다. 그리하여 로마는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교의 세력이 로마의 점령 지역에서 확대되는 것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고 경계하게 되었다. 다른 한편 유태 부족의 지도자들도 그들의 적인 로마를 사랑하라, 또는 복수하지 말라고 외치는 그리스도는 유대 민족의 自尊心을 損傷하고 敵인 로마에 생명을 구걸하는 사람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는 征服者와 同族 모두로부터 排斥되어 마침내 모든 고통받는 사람들을 대신하여 十字架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죽은 다음에도 信徒들은 解散하지 않고 救世主의 再臨과 復活을 믿어 더욱 鞏固한 단결을 하여 평화의 메시지를 전파하였다.
로마 제국으로서도 이젠 점령지 부족들을 무력으로 屈服시키는 戰鬪的인 政策에서 벗어나 평화적으로 통치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란 것을 알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로마 제국은 基督敎를 받아들이고 기독교가 로마의 국가적 종교가 되었다. 영어의 re-ligion이란 말의 어원은 라틴어에 있으며 무력에 의하여서가 아니라 信仰에 의하여 사람의 마음을 다시(re-)고쳐 묶는다(ligion)라는 말에서 나왔다고 한다. 그보다 앞선 희랍시대엔 religion이란 개념이 존재하지 않은 것 같다. 따라서 서양에서 사용하는 religion이란 개념은 위대한 가르침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전투적인 사람들의 마음을 기독교의 평화주의로 다시 묶는 다는 것을 뜻하는 말이라고 한다. 그 이후 계몽시대까지 基督敎神學이 발전하여 더욱 세련된 종교 체계를 형성하여 신도들의 신념체계에 종교가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우리는 신학이나 종교에서 상상력을 동원하여 제공하는 개념이나 지식이나 이론들이 진리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한가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이와 같은 상상적 이론 구성도 우리 의식에 없어서는 안될 지식을 전해준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심리학도인 우리는 인간의 의식 속에 있는 지식의 모든 원천을 고찰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며 어떤 지식은 단순한 상상임으로 虛構라고 배척해서는 아니 된다. 이는 경험적 지식이 실존에 대한 진실한 지식이 아니기 때문에 배척해야 한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순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4-2. 理性의 批判的 思考와 超越的 知識
可能性으로서는 인간의 심리 작용의 하나인 상상에 의하여 구성된 신념체계가 제공하는 진리적 지식 이외에도 인간 理性의 批判的 思考도 진리적 지식을 제공할 수 있다고 가정할 수 있다. Descartes는 인간과 동물과의 차이는 인간에게는 理性이 있지만 동물에게 이성이 없다는 것이라고 하여 二元論을 주장하였다. 理性의 비판적 사고는 경험을 초월하여 진행되는 사고이고 形式을 다루는 사고이다. 그런 사고의 예는 수학에서 찾을 수 있다. 수학은 自然數의 법칙에 따라 전개된 이성의 비판적 사고의 결과이며 자료가 주어지기 이전에는 공허한 형식뿐이다. 그리하여 수학은 자체 논리에 따라 수많은 개념과 지식을 제공한다. 이와 같은 개념과 지식들이 수학 公式을 이루고 공식과 공식 사이 또는 수학지식과 일반 지식 사이에 모순이 없는가 하는 것을 수학자들은 비판한다. 이때 그것들 사이에 모순이 없다는 것이 증명되면 그 지식들은 진리적 지식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 지식은 보편타당성 (Universalitaet)과 필연성 (Notwendigkeit)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학 演算의 변수에 실수가 대입되지 않으면 쓸모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성이 하는 비판적 사고의 형식도 경험 자료가 대입되지 않으면 우리는 어떤 지식도 실제 얻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Kant는 사물 자체는 알 수 없고 感性情報가 없으면 어떤 지식도 얻을 수 없다고 갈파하였다. 이 점에서는 인간의 감각 정보가 神과의 靈的 對話에 방해가 된다는 신학자들의 견해와 다르다. 그리하여 Kant는 감성 정보를 直觀하는 형식으로 空間과 時間이란 개념을 제시하였다. 그에 의하면 이 두 개념은 모두 경험에 의하여 얻어지는 개념이 아니라 인간에게 선천적(a priori)으로 주어진 개념이라 한다. 경험할 수는 없으나 우리는 공간과 시간이란 개념에 관한 지식을 선천적으로 갖고 있다는 것이다. 사물들의 존재에서 공간이라는 선천적 개념을 파악할 수 있고 사물의 형태나 운동 또는 색체등에 따라 시간이란 선천적 관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綜合判斷과 分析判斷. 인간이 얻는 지식은 이성의 비판적 사고가 내리는 判斷에 의하여 그 眞僞가 가려진다. 판단은 主語와 客語로 되는 문장을 완성하는 것이다. 分析判斷은 이미 주어 속에 포함된 것을 客語로 끄집어 내는 사고이다. 따라서 분석 판단은 어떤 새로운 지식도 얻게 할 수 없는 사고이다. 이에 반하여 綜合判斷은 주어 속에 없는 것을 客語로 첨가하는 사고이다. 따라서 종합판단은 주어에 새로운 지식을 첨가하게 하는 사고이다. Kant 이전 유럽 철학엔 관념론과 경험론의 대립이 있었다. 관념론의 대표는 Leibniz이고 경험론의 거장은 Hume이다. Leibniz는 인간의 모든 지식을 기록하는 것은 사고에 의해서만 가능하고 모든 판단은 분석 판단이라고 주장하였다. 감성정보를 얻게 하는 것도 사고이며 판단사고는 이미 주어 속에 있는 것을 단지 客語로 끄집어 내는 사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Hume은 사고는 경험적 사실을 정리하는 역할을 할 뿐 사고가 내리는 모든 판단은 종합 판단이라고 주장한다. 이 논쟁은 因果論에 관한 견해 차에서 극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관념론자들은 인과관계란 원인 속에 결과가 포함되는 관계라고 한다.
그러나 경험론은 인과관계의 원인 속에서는 결과가 될 수 있는 어떤 것도 찾을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즉 판단 명제의 주어와 객어 사이에는 어떤 필연적 연결 관계도 없고 다만 상호 상관관계만 관찰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모기가 많은 것이 풍년이 되는 원인이라는 판단명제가 있다고 하자. 모기 수와 풍년과는 어떤 필연적 연관도 있을 수 없다. 모기가 많은 것은 우량이 많다는 것이고 우량이 많은 것은 풍년이 드는 조건이라는 것이며 모기의 수와 풍년은 다만 상관관계가 있을 뿐이고 인과 관계의 연결이 아니라는 것이다. Kant는 갈등하는 이 두 견해를 해결하여야 했다. 그리하여 그는 새로운 개념을 도입하였다. 그것이 바로 自我 개념이다. 인간 개인에게는 각자에게 선천적으로 주어진 자아가 있어 모든 情報를 統合하는 작용을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자아의 통합작용을 統覺이라 하였다. 이로서 경험론과 관념론의 갈등은 해소된 것처럼 보이지만 다음에는 자아가 무엇이냐? 라는 물음이 제기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감각이나 지각 또는 기억과 같은 심리작용 이외에 통각이라는 새로운 심리 능력을 가정해야 하는가 하는 의문도 제기될 수 있다. 통각의 존재를 인정하기 위해서는 통각 자료가 되는 관념들로 된 雜多가 의식 속에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하여야 한다. 우리가 대상으로부터 잡다한 감각 관념들을 의식하고 그들 감각 관념들이 통각에 의하여 종합되어 대상을 의식하게 된다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은 우리의 직접 경험에서는 발견할 수 없고 가정으로만 가능한 통각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 된다.
悟性 範疇. 선천적으로 주어진 直觀形式으로서의 空間과 時間 개념에 의하여 수용된 감성 정보는 다음 悟性으로 넘어가야 한다. 오성은 감성자료에 판단을 내리는 역할을 한다. 그때 판단을 내리는 준거가 되는 것이 悟性 範疇이다. 오성은 인간 의식에 선천적으로 주어지고 따라서 오성범주도 선천적으로 주어진다. 처음 Aristoteles가 오성범주를 10개로 분류하였다. 그는 언어 분석에 의하여 이 10개 범주를 결정하였다. 그러나 Kant는 인간이 감각정보를 받아드릴 때 내리는 판단 종류에 따라 각기 3개의 하위 분류를 갖는 4개 영역으로 총 12개 하위 구조를 분리하였다. 그러나 선천적으로 주어진 오성 범주가 진리적 지식의 원천이 되지 못하는 감각 정보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우리는 五官을 동원하여 사물을 알게 된다고 한다. 오성범주는 이미 선천적으로 주어져 있음으로 오성범주가 사물에 작용하여 사물을 오성이 받아들이게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런 見解는 선천적 관념들이 경험 자료를 받아들이는 과정을 설명하지 못한다. 圓이란 선험적 개념이 원으로 보이지 않는 접시 모양을 어떻게 원으로 받아들이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해답을 제공하지 못한다. 따라서 Kant는 소위 Copernicus적 觀點 轉換을 한다. 선천적으로 주어진 오성범주가 감각정보에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감각정보가 적절한 오성범주를 찾아 들어간다는 생각이다. 따라서 作用源은 오성이나 오성 범주가 아니라 감각 정보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한 점에서 등거리에 있는 점들의 집합이 원이라는 선험적 판단이 접시에 작용하여 접시 모양이 경험적 허울을 벗어버리고 원형이 되는 것이 아니라 접시에서 얻는 감각자료가 오성의 선천적 범주에 작용함으로서 감각 자료가 보편성과 필연성을 갖춘 觀念이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관념은 감각자료 자체와는 반드시 相同일 수 없는 것이다.
理性的 公式化. 선험적 근거에서 설립되었던 경험적 결과에서 얻었던 演繹의 根據가 되는 공식을 우리는 理性 公式이라 부르기로 한다. 수학의 경우에는 微積分學이 그런 공식이 될 것이고 철학에서는 일반 논리 법칙이나 辨證法이 그 역할을 한다고 할 것이다. 이들 공식은 경험적 자료와는 관계없이 선험적으로 각 공식에 표현되는 변수들을 자체적 사고 논리에 의하여 창출된 공식들이다. 따라서 공식이 표현한 變數에 자료가 대입되지 않으면 형식에 지나지 않게 된다. 그러나 그 어떤 공식이라도 합당하게 자료가 대입되면 강력한 연역의 근거가 된다.
이에 반하여 物理學의 公式은 물리현상에 관한 사실을 근거로 수립된 공식이다. 따라서 경험에서 도출된 공식이므로 철저한 의미에서는 이성적 공식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경험적 공식도 일단 형성되면 그 공식이 적용되는 범위 내에서는 연역의 근거로서 강력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현대의 과학 문명은 이들 경험적 공식에 의하여 발전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공식의 대표로 우리는 落體에 관한 공식을 들 수 있다. 행동주의 심리학자인 Skinner는 고대 희랍 철학자들이 현대에 다시 와서 학문 세계를 돌아본다면 일반 논리나 변증법과 같은 것은 그들도 이해하고 있었지만 현대 물리학의 공식들은 이해할 수 없다고 할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공식이 어디서 산출되었던 타당한 공식은 인간이성의 비판적 사고의 도구 역할을 하기에 부족함이 없으며 그런 공식을 앞으로도 더욱 발전시키는 것이 인간의 지혜를 증진시키는 일에 도움이 될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三段論法. 이성의 비판적 사고가 진행되는 과정을 일반논리와 변증법적 논리로 나눈다면 일반논리는 기존의 지식을 확장하는 사고과정이고 변증법적 논리는 새로운 지식을 획득하는 과정이다. 따라서 수학적 사고는 일반논리에 근거한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반하여 전혀 새로운 지식을 획득하는 사고는 일반논리가 아니라 변증법적 논리이다. 이성의 비판적 사고에는 삼단논법과 Hegel의 l正反合 논리가 대표적이다. 삼단논법은 오성의 범주 판단을 통하여 얻어진 감각재료에 관한 관념을 이성이 비판하는 사고 형식이다. 따라서 삼단논법은 일반논리의 법칙인 동시에 변증법의 역할도 한다. 삼단논법의 大前提와 小前提 그리고 結論命題 사이엔 논리적 모순이 없어야 한다.
그리고 자료 개념들이 그들 전제의 항들에 대입되어 결론 명제를 도출한다. 그리고 결론명제는 새로운 지식을 획득하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인간은 기존 지식에 없고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지식을 抽出하는 놀라운 능력을 갖추고 있다. 이 능력이 바로 이성이고 삼단논법으로 그런 능력의 존재가 표현된다. 그리하여 철학자와 논리학자는 타당하고 필연성을 지닌 삼단논법의 공식을 찾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삼단논법에도 문제가 있다. 전제에 있는 변수들에 타당한 자료가 대입되고 모순 없는 삼단논법 논리에 따라 사고가 전개되어도 상반되는 결론 명제를 도출하게 될 수 있다. 宇宙는 限界가 있다는 결론과 우주는 한계가 없다는 결론 명제가 모두 타당한 삼단논법의 결론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神이 存在한다는 결론과 신이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결론도 둘이 똑 같은 타당한 삼단논법의 결론명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二律背反이라 한다. 이와 같은 이율배반을 해결하는 유일한 방도는 그 어느 쪽 진리를 믿느냐 하는데 달려있다. 신의 존재를 믿어 종교로 들어가거나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신념으로 無神論者가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결국은 이성의 논리가 아니라 믿음(Glaube)이란 인간 심리에 모든 것이 달려 있다는 것이다. 심리학자인 William James는 신의 존재를 가정하는 것이 불필요한 군더더기면 吝嗇의 法則을 존중하는 과학은 신의 존재를 가정할 필요가 없을 것이지만 신의 존재를 가정하는 것이 인간이해라는 심리학의 목적에 부합될 때에는 신의 존재를 인정하여도 무방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알고있지 못한 지식으로부터 새로운 지식을 얻기 위해선 그 새로운 지식의 가능성에 관한 가설을 설정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 가설의 현실성에 관하여 실증적으로 입증하기에 앞서 이론적 사변으로 증명하여야 한다. 이와 같이 사변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증명을 辨證이라 한다. 삼단논법도 강력한 변증의 일종이며 때로 오성 판단에서 넘어온 자료와의 관계를 고려에 넣지 않고 진행될 수 있다. 그리하여 결론 명제가 현실과 동떨어진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도 있게 된다. 이와 같이 辨證의 논리 과정은 타당하여도 실존과 일치하지 않는 이론을 詭辯이라 한다. 토끼는 영원히 거북이를 쫓아갈 수 없다거나 절반씩 끊어먹는 초콜렛 과자는 일생 먹어도 다 먹지 못한다는 것과 같은 詭辯이 생기게 된다. 그러나 변증법은 새로운 지식을 창출하는 도구로 아주 강력하다.
辨證法. 인간이 선험적으로 새로운 지식을 얻는 과정이 삼단논법뿐만이 아니고 역사 철학자인 Hegel의 제창하는 정반합 변증법이 유명하다. 미 변증법은 개념이나 관념이 스스로 변화하여 발전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리하여 인류 역사의 발전과정을 이 정반합 변증법으로 증명하려하였다. 관념은 종합판단이나 분석판단을 거치지 않고도 단지 그 관념 자체(正)를 부정하여 생기는 관념(反)과 종합됨으로서 새로운 관념(合)이 얻어진다는 것이다. 인류 역사의 한 시대의 시대정신도 단지 그 정신을 부정함으로서 종합된 새로운 시대정신이 얻어져 인류 역사는 스스로 발전한다고 설명한다. 이 이론은 사회주의 역사관을 정립하는데 많은 공헌을 하였다. 즉 사회의 역사적 변화는 기존 사회 속에 잉태된 모순에 의하여 새로운 역사가 창조되는 과정이라고 정반합의 변증법으로 설명되고 있다. 환언하면 사회변화는 변화의 원인이 그 사회 속에 있는 요인들에서 나타난 필연적인 결과라는 인과법칙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설명은 이론적으로나 논리적으로는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앞서 말한 바와 같은 궤변일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설명은 실증적으로는 입증할 수 없는 변증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심리학은 Hegel의 정반합 변증법의 이론적 근거가 되는 관념이 자체 변화 발전한다는 이론에 반대한다. 심리학에서는 개념은 일단 형성되면 의식 속에 남아 불변한다는 것을 입증하였다. 조건이 달라지면 기존 개념이 변화 발전하여 새로운 관념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달라진 조건에 따라 새로운 기존의 개념과는 상관이 없는 전혀 새로운 관념이 얻어진다고 해석한다. 레몬 즙은 레몬이란 개념이나 설탕이란 관념이 변화 발전하여 생기는 것이 아니라 레몬 즙이란 새로운 물리적 자극에 대응하는 새로운 관념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따라서 레몬이나 설탕이란 개념은 조금도 변하거나 발달하지 않고 레몬 즙이란 개념이 생기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사회가 잉태하고 있는 모순이 변화 발달하여 사회주의 사회의 사회이념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現象學 철학자 Merleau-ponty는 러시아의 9월 혁명에서 농민들이 봉기한 것은 그들의 곤궁한 생활에 시달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레닌이 주도하는 혁명세력이 귀족 계급의 착취라는 새로운 계급 투쟁의 선동 구호를 내걸어 농민으로 하여금 새로운 개념을 얻게 하였기 때문이라고 지적하였다.
즉 기존의 사회에 아무리 불만이 있더라도 그것만으로는 사회 변동을 일으키지 못하고 새로운 관념을 만들어 내게 하는 조건이 조성되어야 사회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이다.其他 理性的 모델. 고전적인 수학 공식은 우리의 사고를 촉진시키고 정리하는데 많은 공헌을 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특히 미적분 방정식의 발달이 천문학이나 기계공학을 괄목하게 발달하게 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최근에는 전산체계가 급속하게 발달하여 대량의 자료를 순식간에 처리할 뿐만 아니라 다수의 변수를 한꺼번에 처리할 수 있고 또 이질적인 측정척도로 측정된 변수들도 함께 처리하는 소위 Multivariate Analysis의 모델이 나타나 인간과 같이 많은 변수에 의하여 생활에 영향을 받는 존재를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되며 이런 방편이 발달하면 인간이해를 촉진할 것으로 기대된다.
이와 같이 경험을 초월한 사고 과정에서 제공하는 지식이 경험에서 얻는 지식의 표준이 되고 어느 정도는 현실의 實存을 反映하는 지식을 제공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선험적 지식을 진리적 지식의 모델이라고 하여도 大過가 없을 것 같다.
4-3. 現象的 知識
情報處理 體系로서의 人間心理. 심리학에서는 인간 심리를 정보처리 체계라고 간주한다. 정보가 入力(input)되면 內部處理(throughput)를 거쳐 出力(output)하는 체계라는 것이다. 외부 존재인 물리적 자극은 인간이라는 정보처리 체계를 통함으로서 비로소 의식되어 지식으로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예를 들면 산소와 수소가 H-O-H라는 특수한 위치로 결합되었을 때 인간이란 정보처리 체계에 물(水)이라는 액체로 의식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물리적으로는 산소 알맹이 하나와 수소 알맹이 두 개가 있을 뿐 달라진 것이 없다. 이들 원소 알맹이들이 특정 위치로 서로 결합되지 않았다면 인간은 물을 경험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렇게 얻어진 지식이 현상적 지식인 것이다. 따라서 현상적 지식은 인간의 의식에서 생긴 지식이다. 그러나 현상적 지식을 창출하는 원인의 일부는 개관적 대상에도 있다. 즉 산소와 수소 알맹이가 특수한 위치로 서로 연결했다는 조건이다. 그러므로 심리학은 어떤 외부 조건이 어떤 의식적 경험을 초래하는가 하는 것을 조사하여야 한다.
입력으로서의 자극은 잡다한 속성을 지닌 사물들이다. 따라서 감각주의자들이나 논리적 사고를 하는 사람들은 의식이 이들 각각의 속성을 분리하여 그 속성들을 再 統合 즉 統覺함으로서 出力이 마련되어 그 사물을 지각하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출력되는 知覺體(percept)는 사고 과정에 의하여 관념을 형성한다는 공식을 확립하였다. 여기서 의식이 대상에서 얻은 감각들을 어떻게 통합하느냐 하는 문제에서 관념론과 경험론이 갈라진다. 경험론은 감각들이 연합함으로서 통합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연합이란 신비로운 힘이 어디서 생기는가 하는 것을 경험론은 해명하지 못하고 있다. 관념론은 이 통합과정을 설명하기 위하여 또 다른 개념을 도입하였다. 즉 自我라는 개념이다. 사물로부터 입력된 감각들은 감각하는 자의 자아에 의하여 통합되어 지각된다는 것이다. 심리학은 인간의 심리과정에 연합이나 자아와 같은 개념을 첨부하여 사실을 설명하는 것을 배척한다. 가급적 새로운 개념 없이도 설명할 수 있다면 그런 설명을 선호한다. 사실 우리가 사물을 지각할 때 그 사물의 여러 속성을 분석하는 과정을 관찰하거나 찾아낼 수도 없고 또 경험할 수도 없다. 의식은 주어진 대상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며 분석하여 받아들인 다음 종합하여 지식을 얻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대상의 속성이 되는 감각은 대상이 지각된 다음 의식에 의하여 분석되어야 하는 성질의 것이다. 감각은 지각의 素材가 아니라 지각을 분석하여 얻는 情報이다.
대상에 대한 知覺體가 형성되면 기억 속에서 내부처리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때 대상의 지각체가 기억에 저장된 정보와 일치함으로서 지각이 형성되는 것이다. 관념론자들은 처음에는 이때 선천적 原形이 있어 그 원형이 지각체와 일치함으로서 지각이 형성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 원형이 지각체와 일치한다는 것을 어떻게 찾아낼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해결하여야 하였다. 그리하여 소위 관점의 전환이 이루어져 Kant는 지각체가 관념적 원형을 탐지하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즉 지각은 인간의 주관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객체가 스스로 의식되도록 하여 지각된다는 것이다. 지각은 주관적인 사건이 아니라 객체의 사건이라는 것이다. 지각이 주관에서 이루지는 것이 아니라 대상인 객체가 작용한 결과라는 것은 심리학도 인정한다.
그러나 지각체가 들어갈 原型이 선천적으로 주어진다는 것에 심리학이 承服하지 않는다. 도야지(豚) 밖에 본 일이 없는 토인이 처음 말(馬)을 보고 큰 도야지라고 했다고 한다. 그는 말에 해당하는 원형을 갖고 있지 않았으므로 기억 속에 있는 가장 가까운 원형인 도야지라고 지각한 것이다. 우리는 직각 사각형의 책상 상판을 보고 즉각 직각이라고 지각한다. 우리가 책상 상판을 볼 때에는 책상 상판의 각은 銳角이나 鈍角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나 그 책상의 상판이 직각이라는 것을 즉각 지각하게 된다. 혹자는 우리의 의식이 아주 빠른 속도로 무의식적으로 추정하여(unconscious inference) 그 책상의 상판이 직각이라는 것을 계산해 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런 설명보다는 인간이 경험으로 얻어 기억 속에 저장한 대상 전형에 우리의 경험자료가 적합했기 때문이란 설명이 더욱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경험에 의하여 얻어진 전형은 관념을 형성하며 따라서 보편 타당성과 필연성을 지니게 된다고 하여도 무방할 것이다. 따라서 Plato는 관념의 세계와 현상의 세계를 구별하여 현상의 세계는 관념 세계가 投映된 세계라고 주장하였다.
意識의 흐름. 철학자들은 자아와 같은 초월적인 존재가 있어 인간이 지식을 얻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지각이나 개념이나 지식을 받아들이는 주체가 없이 어떻게 우리가 지식을 얻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을 문제삼고 있다. William James는 자아와 같은 것이 인간심리에 존재한다는 것을 가정하지 않고 現行 意識(passing consciousness) 또는 현행 사고만으로도 인간이 대상에 대한 지식을 얻는데 충분하다고 주장한다. 우리의 의식은 흐르는 물과 같으며 조금 전에 있었던 의식은 흘러가서 쇠퇴하고 현행하는 의식이 가장 왕성하게 되며 다음에 나타날 의식의 前兆가 싹트는 과정을 되풀이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의식의 흐름은 시간에 대한 경험이다. 철학자 Kant는 시간과 공간을 직접 경험할 수는 없고 감각적 직관을 가능하게 하는 선천적 관념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James는 시간이나 공간은 경험할 수 있는 개념이라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의식의 흐름의 현행 사고(passing thought)가 모든 지식을 수용하고 가능하게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어떤 초월적 관념도 구태여 가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의식 흐름을 이루는 현행 사고에 외부나 내부에서 자극이 들어오면 그 현행 사고가 그 자극을 받아들여 정보 처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인간이 직접 경험하는 시간은 그가 同時라고 지각하는 시간이다. 현재란 단순히 과거와 미래를 분할하는 순간이 아니다.
우리는 현재를 어느 정도 폭이 있는 기간으로 경험한다. 시계가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를 들으면 의식하지 않고서도 5 내지 6번 종이 울렸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러나 11번 내지 12번 종이 울리면 우리는 주의하지 않으면 정학하게 시계 종이 울린 수를 셈할 수 없다. 여러 가지 기교를 사용하여 우리가 직접 경험하는 시간을 더 연장시킬 수도 있다. 직접 경험하는 시간을 넘는 물리적 시간은 인위적으로 만든 시간이며 따라서 심리학의 문제가 되지 못한다. 심리학에서는 공간에 관한 직접 경험도 가능한 것으로 간주한다. 소위 공간의 眺望視(perspective vision)나 遠近 眺望은 공간에 관한 직접 경험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심리학에서는 감각적 직관을 가능하게 하는 선험적 관념의 構圖를 필요 없는 것으로 취급한다.
知的 知識과 識的 知識. 우리는 내부나 외부에서 정보를 입력하면 그 정보를 처리하여 저장한다. 이때 어떤 정보도 다른 정보와 전혀 관계없는 독립적인 것으로 처리되는 것은 아니다. 새로 입력된 정보도 주위에 있는 기존 정보들에 의하여 둘러싸여진다. 이때 핵심이 되는 정보를 知的 지식이라 하고 核心 정보를 둘러싼 정보를 識的 지식이라 한다. 따라서 식적 지식은 周邊이고 擴散된 지식이다. 우리는 지적 지식만을 소중히 여기고 식적 지식을 소홀하게 취급하는 경우가 많다. 식적 지식을 무시하고 지적 지식만으로 인간을 이해한다는 것은 때로 필요한 많은 정보를 상실할 우려가 있다. 선험 철학자들은 우리가 받아들이는 정보가 오성 판단의 범주에 의하여 제약받는 다는 가정을 주장한다. 그러나 심리학은 받아들여진 정보들이 일정한 원리에 따라 정리되고 한곳에 糾合된다고 보는 것이 오히려 더 사실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입력 정보가 가장 손쉽게 인출될 수 있는 典型 정보를 찾아 갈 수 있게 되는 것이 인간의 심리 구조라고 한다. 오성의 판단 범주와는 관계없이 광물은 광물끼리 한데 뭉치고 식물 정보들은 그들끼리 기억 속에 한데 뭉치게 된다.
이 같이 현실적인 심리적 사실을 강조한다면 선천적 범주를 지배하는 오성을 전제로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입력 정보가 記憶의 정보처리 과정을 거치면서 정보가 더욱 보강될 수도 있지만 주변 정보에 의하여 가리워 오히려 식적 정보만 부각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지만 그에 관한 주변 정보들은 기억으로부터 솟아나는 경우이다. 이와 반대로 정보의 지적 지식만 기억에서 나타날 뿐 그 정보를 경험하였던 상황에 관한 지식인 식적 지식은 사라지는 경우도 생각 할 수 있다. 이런 경우는 주로 정보처리를 기계적으로 진행하는 경우 생기며 필요한 많은 정보를 상실할 우려가 있다.
觀念과 觀念의 不變性. 심리학은 오성 범주나 이성의 존재를 가정하는 것을 거부한다는 입장에서 Kant의 견해를 반박한다. 심리학에선 접시의 모양에 해당하는 관념이 선험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며 경험에 의하여 얻어지고 기억으로 의식 속에 저장된 전형에 작용함으로서 둥글다는 의식을 갖는다는 것이다. 요컨대 심리학은 인지과정에서 선천적으로 주어진 원형에 의하여 대상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에 의하여 기억 속에서 처리되어 저장된 典型에 따라 대상을 처리한다는 입장을 취한다. 이것이 모든 과학이 존중하는 인색의 법칙이다. 따라서 선천적 원형을 가정하는 것이 어느 정도 사실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가 하는 것을 심리학은 의심한다. 물론 수학 공식이나 물리학의 공식이 사물을 설명하고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모든 대상에 대한 이해가 수학 공식에 의하여 해결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은 수학에서 요구하는 것처럼 합리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관념은 일단 형성되면 변하지 않는다고 심리학에서는 말한다. Hegel은 관념이 자체 변화 발달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입력 정보가 들어오면 처리되어 관념으로 기억 속에 저장된다. 노란색과 푸른색을 합치면 초록색이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때 합쳐진 것은 노란색과 푸른색이란 색소이며 노란색의 개념과 푸른색의 개념이 합쳐진 것은 아니다.
따라서 심리학에서는 노란색과 푸른색을 합친 것은 노란색의 관념이나 푸른색의 관념이 변하여 초록색이란 개념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고 본다. 이들 두 색을 합친 물리적 자극은 초록색이란 새로운 개념을 지각하게 하는 전혀 새로운 색 자극이다. 사실 이때 초록색을 지각한다 하여도 노란색 개념이나 푸른색 개념은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어떤 정치적 관념을 갖고 있었으나 정치 상황이 달라져서 다른 정치적 관념이 생겼다면 앞서의 정치 관념이 변하고 발전하여 새로운 정치 관념이 생긴 것이 아니다. 정치 상황에 따라 새로운 정치 관념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심리학에서 보면 관념을 변화시킨다는 것은 있을 수 없으며 다만 새로운 정치 상황을 창출하여 새로운 정치적 개념을 조성할 수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세뇌 공작이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의 하나이다. 정치상황이 불리하면 새로운 정치 관념을 신봉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상황이 달라지면 그는 곧 예전의 정치 관념으로 복귀하게 된다. 이런 사실은 종교적 개종이나 생활 paradigm을 변경시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하는 사실에서 여실히 엿볼 수 있다.
推理와 心象. 선험적 철학자들은 인간의 이성을 인간에게 주어진 최고의 은총으로 간주한다. 인간의 모든 지식은 이성에 의하여 처리되고 조직되어 인간 생활의 발전을 초래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심리학은 이성과 같은 초월적 變數는 想定하지 않고 다만 인간의 사고 과정의 추리 작용과 심상작용만을 강조할 뿐이다. 추리는 정보를 내부적으로 처리하는 과정이다. 추리의 소재는 관념이나 개념이며 기존의 정보처리를 더한층 전진시키는 과정이다. 우리는 추리과정에 의하여 장차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예측하기도 한다. 그러나 추리에는 반드시 심상이 동반하는 것은 아니다. 한 동안은 추리라는 사고 과정에 심상이 필수적이라 간주되었지만 현재는 심상이 없는 사고가 가능하다고 생각되고 있다. 오히려 추리 사고를 하는 사람들은 심상을 만들어 내는 능력이 쇠퇴하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나이를 먹고 머리를 많이 쓰는 사람일 수록 마음의 눈에 映像을 그려내는 것이 어려운 경우가 있다. 또 어떤 사람은 심상을 그려낼 수 없으면 사고 할 수 없는 사람도 있다. 3차원의 공간은 심상을 만들어 낼 수 있음으로 사고할 수 있지만 그 이상의 차원에 관한 심상은 만들어낼 수 없어 多次元 空間에 관한 사고를 할 수 없는 사람도 있다.
추리는 많은 미지의 지식을 제공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지식도 현상적인 지식이며 초월적인 형식에 관한 지식일 수는 없다. 심리학은 어디까지나 경험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지식을 존중하며 그 이상의 지식을 가정하거나 또는 상정하지 않는다. 또한 심리학은 인간의 생리과정 특히 신경과 뇌 과정과 의식과의 관계에 특별한 관심을 갖는다. 현재 DNA나 RNA의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됨에 따라 그것들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인간의 심리작용과의 관계에 관한 연구가 성과를 거두게 되면 인간에 관한 이해는 괄목할 만큼 깊어지게 될 것은 믿어 의심되지 않는다.
4-4. 誤謬 知識 또는 非合理的 知識
인간이 얻는 지식 중에는 그 원인을 도저히 외부조건에서 찾을 수 없고 다만 인간의 의식 속에만 있는 지식이 있을 수 있다. 감각차원에서의 이런 지식을 錯覺이라 한다.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많은 착각 경험한다. 거리의 간판이 지나치게 축소되거나 지나치게 확대되어 보이기도 한다. 어떤 색이 다른 색의 보색으로 보이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착각이 잘못된 감각은 아니다. 즉 倒錯된 감각이 아니다. 단지 우리가 얻은 정보가 객관적 조건과 일치하지 않을 뿐이다. 그러므로 착각을 일으키는 조건이 주어지면 누구나 착각을 경험하게 된다.
객관 조건과 우리의 정보가 일치하지 않는 경우는 감각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객관적 조건과 일치하지 않는 지식을 얻을 수도 있다. 이런 지식은 誤謬 지식이라 한다. 심리학자는 被驗者의 의식을 의식 그대로 파악하여야 하지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심리학자 자신의 의식을 피험자에게 강요한다. 그럼으로 이때 심리학자가 관찰한 결과는 피험자의 심리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심리학자의 심리 상태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그 자료는 목적한 것과는 다른 지식을 얻은 것이 된다. 이것을 심리학에서는 心理學者 誤謬(psychologist fallacy)라고 한다. 우리는 여론 조사에 의하여 많은 정책을 결정한다. 그러나 면접자가 응답자의 응답에 직접 간접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그 여론 조사는 올바른 정보를 제공하지 못할 것이다. 그밖에도 심리상담을 하는 경우 내담자의 심리를 정확하게 반영하여 내담자로 하여금 자신의 심리상태를 자신이 정확하게 洞察하게 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상담자가 자신의 感情을 露呈함으로서 내담자의 자기 성찰을 방해한다면 그 결과는 잘못된 정보를 제공하게 될 뿐일 것이다.
論理가 不通하는 心性. 개인의 신념체계는 여러 정보를 통하여 개인이 스스로 구성한 상상 체계임으로 사회적 보강이나 학문적인 확신이 없다면 그 신념체계를 가능하게 하는 증거를 만들어 내어 스스로가 그 신념체계를 고수하는 방도를 찾아야 한다. 그리하여 불가능한 기적을 만들어 내던가 스스로의 사고 속에 埋沒되는 경우가 생기게 될 것이다. 광신적인(fanatism) 신념체계로 전락하여 자신의 신념체계 이외의 모든 이론을 배척하는 獨斷(dogmatism)을 일삼는 심리로 빠지는 경우를 말하는 것이다. 이런 심리를 논리가 불통하는 심성(logic-tight personality)이라 한다. 이것은 오류 지식이며 본인 자신뿐만 아니라 사회에 해독을 끼치는 지식이다.
Festinger는 "when prophecy failed"라는 논문에서 다음과 같은 관찰을 보고하였다. 모년 모월 모일에 救世主가 降臨한다는 것을 믿는 기독교 신도들이 그들 각자의 모든 家財를 淸算하고 구세주를 迎接하기 위하여 한곳에 모였다. 그러나 그 날짜에 구세주는 강림하지 않았다. 그는 신도들이 挫折하여 뿔뿔이 헤어져 집단이 해산될 것으로 예상하였다. 그러나 그 예상은 들어맞지 않았다. 오히려 신도들은 더 열심히 기도하여 그들의 신념체계를 더욱 공고하게 만드는 것이 관찰되었다고 한다.
대체로 사회 사상이나 사회 개혁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종교적인 개인 신념체계를 고수하는 것과 유사한 심리상태를 갖게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이 개인의 심성을 무시하고 관념적으로 構想하는 이상적 사회제도나 사회조직이 과연 그들이 목표로 삼은 것과 같은 결과를 초래할 것인가 하는 것은 가정을 넘어서는 입증할 수 없는 것이다. 사회사상이나 사회개혁에 대한 계획이란 종교의 신념체계와 마찬가지로 실증적으로 증명될 수 없는 假想이며 대부분 허구의 산물이다. 따라서 이런 허구에 따르는 지식은 오류 지식일 수밖에 없다. 원하는 사회 변화를 초래하기 위해서는 그 사회에 살고 있는 개인의 의식이 변해야 한다. 즉 새로운 사회적 대상에서 각 개인이 새로운 지각을 얻어야 한다.
인간의 사고는 직선 방정식으로 표현할 수 있을 만치 합리적이지 못하다. 편견과 고정 관념과 原因歸屬 偏向(attribution bias)이 어디에나 있다. 이런 것들은 인간사고를 비합리적인 것으로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성공한 것은 언제나 자기 자신에게 그 원인이 있다고 생각하고 실패한 것은 주어진 여건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주장은 언제나 옳고 다른 사람의 주장은 잘못이라는 편견에 사로잡히는 사람이 많다. 여성에 대한 固定 觀念 남성에 대한 고정관념은 우리의 일상생활의 거의 전부를 지배하고 있다. 인간인 이상 어떤 비합리적 지식도 갖지 않고 투명한 정신상태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모든 것을 합리적으로만 사고한다면 오히려 인간은 하루도 생존할 수 없을 수도 있는 것이다. 社會의 矛盾에 비분강개하여 모든 사람이 생명을 걸고 투쟁한다면 낚시 밥이 떨어지자마자 낚시에 걸리는 두충개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種族保存은 이루어 질 수 없을 것이다.
5. 結 言
심리학은 인간에 관한 모든 정보를 연구 검토하여 인간을 이해하려는 학문이다. 그런 정보가 개인의 신념체계에서 오던 이성의 비판적 사고의 결과든 또는 단지 의식에 현상으로 나타나 보이는 지식이든 또는 편견이나 오류와 같이 비합리적인 지식이던 모든 지식이 심리학의 자료가 된다. 그러나 심리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그가 현재 취급하고 있는 지식이 어떤 차원의 원천에서 파생된 지식이며 따라서 거기 표현되는 개념이나 용어들이 어떤 한계를 지니고 또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 하는 것을 철저하게 검토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잘못된 용어의 사용으로 심리학의 지식이 인간 생활에 폐단을 초래할 수도 있고 또 다른 학문에서 잘못 이용되는 경우도 생길 것이다.
參 考 文 獻
Bain, Alexander (1818-1903) Mental and Moral Science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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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Knowledge of Truth and Knowledge of Phenomenon
Chung, Yang Eun
Describing and explaining the findings of the empirical studies of psychology with the terminologies explored by other inquiries than psychology such as philosophy and theology, etc., nowadays seem to help prevailing the conceptual confusions not only in psychology but also other disciplines. The blocking of the interdisciplinary communications and misunderstandings among the men of intelligence, therefore, might be not unusual only to enhance the claims of the opinions unproved to be real without considering the facts.
One of the reasons to bring the conceptual confusions seem to be due to the ignorance and/or negligence of the exact features and sauces of knowledge emanating conceptions, for the conceptions denoted by the same terms often have different meanings according to the sources of knowledge. Generally speaking so-called knowledge about truth and that of phenomenon might possibly be discerned and theology and philosophy are usually interested in uncovering the knowledge of truth and psychology mainly in the knowledge of phenomenon. The sources of man's knowledge, therefore, might be divided into two main fields, and one includes subfield of personal belief and that of a priori conceptions the other that of phenomenal facts and error conceptions.
First source of the conscious knowledge (knowledge of truth) mainly owe to the individual belief system. In modern livings man usually formulates and develops his own unique private belief system by which he steers his own life. Plenty of environmental influences such as great religious teachings, social ideologies, cultural traditions and what not, constantly stimulate individuals to produce imaginations which consist of the prime source of individual's private belief system. Therefore, people usually consider the conceptions and knowledge supplied by their individual belief systems to be knowledge of truth, notwithstanding some criticise that the individual belief system is merely the products of imagination unproved by the facts.
Second souce of true knowledge (knowledge of truth) seems to be reasoning a priori. Philosophy assumes the inner ability of REASON which makes it possible to proceed man's thinking without relating to the empirical facts. For instance mathematics processes the natural numbers in accordance with its own logic, and only by matching with the results of abstract mathematical proceedings empirical facts could be turn into the knowledge of truth.
Third source of conscious knowledge is to be knowledge of phenomenon. Psychology prefers to study phenomenal knowledge based on the empirical facts instead of the problematic knowledge of truth espoused by both theology and philosophy. Psychology disdains to accept constructs not to be susceptible to experience and keeps on the passing thought instead of the transcendental abilities of every mighty powers. Therefore knowledge of phenomenon is always relative and changing according to the surrounding conditions which stimulate psychologists to study.
Fourth dimension of the conscious knowledge might be the error informations or irrational knowledge. Illusions provide another important knowledge. Usually illusions have been considered as error or irrational knowledge because there is no facts corresponding to the illusions in the physical world. For instance in the boundary of the red chips mounted on neutral gray background we can detect the green color which is the complimental the chip's color. This color is indeed similar with color complimental to the chip's color but that color is only in the mind of observer. Psychology is interested in the irrational thoughts because almost all human beings are reined by the irrational thinking such as prejudices or attribution biases.
Psychologists should be well familiar with these four sources of human knowledge to study man's mind and avoid the confusions resulted from using same terminologies in different sources of knowled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