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심리학.철학

앎, 삶, 함, 그리고 몸: 의학적 몸의 존재론

작성자환공(桓公)|작성시간19.07.31|조회수203 목록 댓글 0

 

앎, 삶, 함, 그리고 몸: 의학적 몸의 존재론

 


강 신 익

의학의 궁극적 대상은 사람의 몸이며, 의학이란 바로 몸을 다루는 양식이다. 하지만 그 몸을 어떻게 개념화하는가에 따라서 그것을 다루는 양식, 즉 의학의 체계는 엄청나게 달라진다. 따라서 시대와 문화권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의학의 체계는 그 시대와 문화가 어떤 몸의 개념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몸을 살아가고 있는지를 반영한다.

20세기를 풍미한 생의학(生醫學, biomedicine)은 몸과 마음을 철저하게 분리시킨 심신이원론에 근거한 것이다. 따라서 생의학은 마음에서 분리된 물질로서의 몸만을 그 대상으로 삼고 있다. 이 글은 이러한 몸의 개념이 문화의 세기라고 일컬어지는 21세기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지를 묻고, 이 시대의 의학이 근거해야할 새로운 몸의 존재론을 구성해보기 위한 것이다.

몸은 앎(몸의 인식론), 삶(몸의 현상학), 함(몸의 윤리학)의 형태로 존재한다. 인식과 현상과 행위는 몸에서 통합된다. 의학이 이렇게 통합된 몸을 대상으로 삼을 때, 신체의학ㆍ정신의학ㆍ의료윤리학으로 나누어진 분열을 극복하고 진정한 전인(全人)의학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주요어】 앎, 삶, 함, 몸, 의학, 심신이원론, 몸의 존재론

1. 물음의 방식

“나는 누구인가?”

누구나 한번쯤은 자기 자신에게 던져보았을 질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간결한 물음의 문장이라 하더라도 거기에는 일정한 의도가 포함되어 있기 마련이다. 예컨대 우리는 왜 위 질문을 “나는 무엇인가?”라고 하지 않았을까? 그것은 질문을 하면서 이미 그 답을 일정한 방향으로 설정해 두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첫 번째 질문은 나의 이름이나 직업, 사회적 지위 등 인간으로서의 나의 존재에 대한 물음일 터이다. 하지만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뭔지 상식을 뛰어넘는 대답을 따로 준비해야할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이처럼 어떤 물음을 어떻게 묻는가에 따라서 그 결과는 판이할 수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만물의 근원(원소)이 무엇인지를 주로 물었다. 어떤 사람은 그것이 물(탈레스)이라 했고 또 다른 사람은 불(헤라클레이토스)이라 했으며 아낙시메네스는 공기가 원소라고 했고 엘레아학파에 이르면 흙이 만물의 근원으로 여겨졌다. 또 어떤 사람은 어떤 불확정적이며 무한정한 것(아페이론, apeiron, 아낙시만드로스)이 원소라는 추상적 대답을 제시한다. 그러다가 엠페도클레스에 이르면 물, 불, 흙, 공기의 사대 원소가 만물을 구성한다는 소위 사원소설이 확립되었으며 이것은 이후 천 년 이상 유럽인의 사유를 지배하게 된다. 모든 것을 제일 원리로 환원하여 묻는 서양인의 사유태도는 그들의 종교와 학문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난다. 기독교와 이슬람의 유일신 사상이 그렇고 원자론과 환원론에 근거한 과학적 방법론이 또한 그러하다. 신의 존재를 근거로 나의 존재가 연역될 수 있다는 생각과 더불어 물질세계의 존재와 현상은 궁극적 단위인 원자의 존재와 그 작용으로 환원된다는 생각이 지배하게 된다. 이로써 물음의 방식이 일정한 틀을 갖추게 된다. 이러한 물음의 방식은 서양의 근대를 기획한 데카르트에게도 그대로 상속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그는 자신의 존재의 근거를 생각이라는 단일한 사태에서 찾고자 했던 것이다. 그는 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야만 했을까? 도대체 나의 존재는 증명될 수 있는 것인가? 그는 자신의 존재의 근거를 밝혔지만 그 ‘존재의 근거에 대한 물음’의 근거는 무엇인가? 이러한 것들이 이 글에서 묻고자 하는 것들이다. 이러한 물음들을 통해 근대적 기획의 일환으로 이루어낸 현대의학의 성과와 그 존재근거를 해명하고 이를 토대로 새로운 물음의 방식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고대 중국인들은 만물의 궁극적 원리가 무엇인지를 묻기보다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 더 관심이 많았다. 서구인들이 궁극적 원리에 관심을 가지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동양인들은 주어진 현상에서 출발하는 방식을 취한다. 만물의 궁극적 원인이 무엇인지를 묻기보다는 주어진 현상을 관찰하고 관찰에서 얻어진 구체적 자료로부터 추상적 개념을 만들어내되 그 추상화의 수준은 아주 초보적이다. 음양오행이라는 사유의 틀은 일견 심오한 진리를 담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실은 너무나도 자명한 관찰로부터 출발한 것이다. 어떤 언덕이 있을 때 햇빛이 잘 드는 곳이 있는가 하면 그늘진 곳이 있게 마련이라는 평범한 관찰에서 음과 양의 조화적 대립의 원리를 찾아내는가 하면, 쇠로 만든 도끼가 나무를 잘라낸다는 사실로부터 금극목(金克木)의 원리를 추론하고, 나무가 물을 먹고 활기를 찾는다는 관찰로부터 수생목(水生木)의 원리를 추론하는 식이다. 유럽인의 사유방식이 다양한 현상을 궁극적 원리로 환원하는 것이라면 동아시아인의 사유방식은 평범한 관찰에서 얻어진 초보적 추상의 원리를 거시적 현상에 확대 적용하는 방식을 취한다. 오행의 기본 원리는 가장 단순한 관찰에서 추론된 것이지만 그들은 그 원리를 미시적으로 파고들어 증명하는 대신 보다 다양한 현상에 확대 적용한다. 목화토금수(木火土金水)의 오행을 곡식(오곡), 맛(오미), 내장(오장) 등 무수한 현상에 대응시켜 그것들을 통일적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서양의 중국학자들은 이것을 서양의 환원적 사유양식에 대비시켜서 체계적 대응(systemic correspondence)의 사유체계라 하고 이렇게 습득된 지식을 패턴화된 지식(patterned knowledge)이라 한다.

어떤 물음의 근거를 다시 묻고자할 때는 똑같은 방식의 물음을 제기하기보다 이와는 다른 물음의 방식들을 검토하는 것이 더 타당한 방법일 것이다. 이 글에서는 동아시아적 사유의 방식과 현상 파악의 틀, 그리고 이러한 것들이 의학에 나타나는 양상에 대해 살펴보고 이를 서구에서 유래된 근대적 담론 및 여기에 뿌리를 둔 현대의학과 대비해 봄으로써, 이 두 가지 사유양식을 동시에 가지고 살아가는 21세기 한국에 적합한 새로운 몸의 기획이 가능한지를 검토해 보고자 한다.


2. 몸의 문화적 구성

이러한 상이한 사유체계는 두 문명이 발전시킨 의학체계에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난다. 의학체계의 상이함을 비교하는 일은 그래서 그 문명의 사유체계를 비교하는 일이 된다. 따라서 서양의학의 진단 개념으로 동양의학의 처방을 분석한다든지 동양의학의 변증방법으로 서양의학의 처방 내용을 논하는 일은 무모한 시도일 수밖에 없다. 다음과 같은 실제 사건을 통해 우리는 이 점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1870년대 청나라 정부는 영국 정부에 대한 우호의 표시로 목수와 기술자들을 케임브리지로 파견하여 단순한 아치모양의 목재 다리를 건설하도록 했다. 이 다리는 짧은 시간 안에 완성되었고 곧 영국 전역에서 이 다리를 보려고 많은 관광객이 몰려들었다. 그 이유는 이 다리의 특이한 구조와 건설방법 때문이었다. 이 다리는 볼트와 너트, 또는 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으면서도 정상적인 하중을 훌륭히 견디고 있었던 것이다.

이 다리에 가장 많은 호기심을 가졌던 사람들은 케임브리지 대학의 과학자들이었다. 그들은 열장이음(dovetail)에 가해지는 스트레스와 변형력을 분석하는 등 이 다리의 구조를 면밀히 연구했지만 다리의 전반적 강도가 어디서 나오는지, 그리고 각 조각들을 어떻게 그렇게 조합할 수 있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한 사람이 기발한 아이디어를 냈다. 이 다리를 구성하고 있는 나무 조각들을 모두 하나씩 분해하되 모든 과정을 정확히 기록하고 사진을 찍어두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과학자들은 정부 당국의 허가를 얻어서 작업에 착수했다. 그들은 이 작업의 결과로 엄청난 과학적 발견을 할 수 있을 것이며 열장이음을 이용한 목재 교각의 비밀이 곧 밝혀질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다리의 해체작업이 완료되고 이제 이 해체된 다리를 다시 조립할 때가 되었다.

과학자들이 큰 조각들을 조립하려고 했지만 도저히 다리를 완성할 수는 없었다.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보았지만 소용이 없자 그들은 손쉬운 방법을 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볼트와 너트를 끼워서 열장이음의 역할을 대신하도록 한 것이다.



이 다리는 지금도 케임브리지에 있는 켐강에, 볼트와 너트의 상처를 간직한 채 말없이 서 있다. 하지만 이곳 사람들 중 이 다리에 얽힌 이러한 이야기를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들은 이 다리를 일러 ‘수학의 다리’라 한다.

이 사례는 환원적 사유양식과 체계적 대응의 사유양식이 일으키고 있는 불협화음의 성격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여기서 사물과 현상을 보는 케임브리지 과학자들의 문제의식은 분해와 환원을 지향하지만 중국 기술자들은 구성과 조화의 방향을 취한다. 다리의 건설이라는 구체적이고 실체적인 목적을 성취하는데 있어서도 이처럼 극단적인 차이를 보이는 이유는 분명 두 문명의 기본 성격에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글에서는 이 사례를, 두 문명이 사람의 몸을 바라보는 시선과 그것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방식의 차이에 적용해 보도록 한다. 몸을 바라보는 방식의 차이는 곧바로 그들이 발전시켜 온 의학의 차이로 이어진다.

이렇게 몸에 대한 해석이 다르다면, 그렇게 다른 해석에 근거한 두개의 의학은 영영 접근이 불가능한 것일까? 이것이 이 글에서 답해보고자 하는 중심 물음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1930년대부터 뜨거운 논쟁이 오고간 바 있다. 1934년부터 1937년까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오가며 진행된 뜨겁고 긴 지상 논쟁이 그것이며, 1990년대 들어서 몇몇 연구서가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논쟁과 연구들은 거의가 의학, 한의학, 약학 등 이해당사자들이 중심이 되어 자신들의 주장을 주고받은 것들이며, 그 내용에 있어서도 어느 일방을 지지 또는 비판하거나 절충하려는 것들이다.

이러한 절충의 결과가 소위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이다. 하지만 이러한 논리는 과도적 처방에 불과하다. 동도(東道)는 꼬불꼬불한 산길이며 서기(西器)는 커다란 자동차이다. 이 둘을 조화시키려면 큰 길을 내거나 오솔길에 알맞은 작은 자동차를 개발해야 한다. 큰 길을 내려면 오솔길을 버리고 터널을 뚫든지 산허리를 깎아내야 한다. 꼬불꼬불한 오솔길을 살려가며 길을 넓히는 것은 지극히 비효율적일 뿐 아니라 본래 오솔길의 정취를 살려내지도 못한다. 지금까지의 동도서기는 동도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버리거나 서도(西道)로 변화시키는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도(道)가 기(器)를 인도하기보다는 오히려 기(器)가 도(道)를 지배한 꼴이 되어버렸다. 이제 우리 산천에서 동도를 찾기는 매우 어려워졌다. 아니, 동도를 논하는 것 자체가 이미 무의미한 일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작가 황석영은 차라리 서도동기(西道東器)하자고 주장한다. 이미 동도와 서도를 구분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면 차라리 그 모든 것을 인정하고 그 대신에 우리 자신들의 튼튼한 “그릇”을 마련하여 그 속에 모두 담자는 것이다. 동도서기의 애초의 의도가 완전히 뒤바뀐 것이다.

이 글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 ‘그릇’이다. 여기서 이 그릇은 단순한 도구의 의미만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담는 크나큰 저장고의 뜻을 가진다. 이 그릇이 크다고 할 때 그 크다는 말의 의미는 물리적인 크기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보다는 그 의미의 지평이 넓다는 뜻에서 그런 것이다. 의학적으로 말할 때 이 그릇은 바로 우리의 “몸”이 된다. 우리의 몸은 세상을 담는 그릇인 동시에 그 세상을 만들어가는 주체이다. 여기서의 몸은 데카르트적으로 분절된 몸이 아니라 물리적ㆍ생물학적 의미의 구체적 육신과 의미의 지평이라는 추상적 의미가 결합된 것이다. 어떻게 추상(抽象, abstract)과 구상(具象, concrete)이 결합될 수 있겠느냐고 물을 수도 있겠다. 이 글은 추상과 구상을 결합한 새로운 실체로서의 몸을 구성하기 위한 다소 무모한 기획의 일환이다.

서양의학의 몸은 신경계, 근골격계, 소화계, 순환계, 면역계, 내분비계 등의 시스템으로 구성된다. 이 시스템은 기능의 단위인 동시에 구조의 단위이다. 이 시스템들은 조직, 세포 등 더 작은 단위로 환원된다. 동양의학의 몸은 오장육부로 구성된다. 그러나 이 단위들은 결코 독립적이거나 자족적이지 않고 더 작은 단위로 나누어지지도 않는다. 그것들은 다른 단위와의 상호작용 속에서만 존재한다. 이것들은 물리적 실체이기보다는 추상에 가깝다.

이제 이 두 가지 사유양식을 결합한 새로운 몸을 구성해보자. 몸은 앎(지식), 삶(현상), 함(행위)으로 구성된다. 그래서 몸에 대한 새로운 담론에서는 인식론(앎), 현상학(삶), 윤리학(함)이 결합되어 있다. 그 각각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3. 앎으로서의 몸: 몸의 인식론

의학에서의 몸은 앎의 대상(지식)이지만 동시에 앎(인식)의 주체이기도 하다. 의학은 몸에 ‘대한’ 지식체계이지만, 그 지식은 몸을 ‘통해서만’ 인식되고 몸 ‘속에’ 체화(embodied)될 때 진정한 앎이 된다. 몸이 관계하지 않는 허령한 인식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의학은 몸에 대한, 몸을 통해 인식된, 몸속에 간직된 앎의 체계이다. 의학은 외과나 내과 교과서에 있지도 않고, 수술실이나 진료실, 실험실에 있지도 않다. 의학은 지식과 실천의 체계로 무장된 의료인과 환자의 몸속에 있다. 의학은 몸에 나타나는 현상에 대한 인식의 방편이며 실천의 도구이다. 따라서 의학은 하나의 문화이다. 의학이 문화라면 의학의 주체이며 대상인 몸도 문화이다. 의학의 역사는 바로 몸의 역사이다. 의학이 그리고 몸이 문화로서 존재했다는 사실은 무수한 역사적 사례를 통해 증명될 수 있지만, 과학적 방법론으로 무장한 현대의학 마저도 문화로 규정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좀 더 자세한 논증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이 점에 대해서는 이미 다른 글에서 논의한 바 있으므로 여기서는 역사적 사례를 통해 우리의 조상들이 몸을 어떻게 인식해 왔고 그 결과 어떻게 다른 의학체계를 만들어 왔는지에 대해 살펴보도록 한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과학적 방법론과 그것을 사용하는 현대의학이 얼마나 보편적인지에 대한 답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몸을 느끼는 방식은 주로 오감에 의존한다. 보고, 듣고, 만지고, 냄새를 맡고, 경우에 따라서는 맛을 봄으로써 그 몸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그 몸을 표상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오감이 그렇게 평등하지가 않다. 선사시대나 역사시대, 고대와 현대를 막론하고 그 시대 사람들이 몸을 어떻게 인식했는지를 알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들이 창조한 예술작품을 통하는 것이다. 이집트의 벽화를 통해 고대 이집트인이 가졌던 몸에 대한 관념을 읽을 수 있고, 그들이 삶과 죽음을, 그리고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는 몸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알 수 있으며, 쌍영총 벽화를 통해 고구려인이 살았던 몸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은 인간의 오감 중 시각을 통해 표상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의학에서는 사진(四診)이라 하여 질병을 진단할 때 오감을 다양하게 활용하도록 가르치고 있지만, 그것이 일단 객관화되어 전달의 대상이 되려면 또 다시 시각(문자나 그림 등)의 여과장치를 거쳐야 한다. 이처럼 몸에 대한 지식(앎)은 주로 시각으로 표상된다. 어쩌면 다른 감각들에 대한 시각의 우위가 모든 문명의 공통점이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똑같은 시각적 표상이라 할지라도 그 표상의 양식은 각 문화별로 독특한 특색을 가진다. 우리는 이집트 피라미드 벽화와 쌍영총 벽화에 나타난 사람의 모습을 한 눈에 구별할 수 있다. 고대 그리스의 조각상은 모두 벗은 몸에 울퉁불퉁한 근육이 강조되며 팔등신의 날렵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우리의 부처상이나 미륵상에서는 활동의 상징인 근육보다는 온화한 미소가 강조된다.

이처럼 몸을 시각적으로 표상하는 방식이 다른 것은 각 문명이 몸에 대해 어떤 개념을 가지고 있었는지에 기인하며, 이처럼 다른 몸의 개념은 그들이 구성한 의학에 그대로 반영된다. 시각적 표상의 차이는 단순한 표현방식의 차이를 넘어서는 중대한 인식의 차이를 낳는다. 우리는 사물을 보기 전에 일정한 선인식(先認識)을 가진다. 어떤 사물을 바라볼 때 그 사물에 대해 미리 가지고 있던 경험이나 지식에 따라 그 사물은 전혀 다른 모습을 하기도 한다. 흔한 말로 아는 만큼 보인다. 그러나 여기서 아는 것은 양(量)의 문제가 아니라 질(質)의 문제가 된다. 많이 알수록 정확히 잘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알고 있는지에 따라 달리 보인다는 말이다. 해부학의 역사에서 예를 들어보자. 고대 로마의 갈레노스(Galenos)는 인류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의사였다. 그는 히포크라테스의 자연주의 의학을 계승 발전시켰을 뿐 아니라, 방대한 저술을 통해 이후 거의 1500년간 유럽의 의학사상을 지배하게 된다. 그는 주로 돼지를 해부함으로써 해부학을 정초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만들어진 여러 가지 오류는 그의 의학적 성과와 함께 천년 이상 아무 비판 없이 답습되었다. 이러한 지적 유산은 갈레노스 의학에 격렬하게 반대해 해부학 혁명을 주도한 베살리우스에게까지 상속되었다. 그는 갈레노스의 가르침만을 암송하는 추상적 해부학에 반기를 들고 실제로 많은 시체를 해부한 결과 오늘날의 해부학과 별 차이 없는 사실적 해부도를 완성했다. 하지만 그가 그린 여성 성기의 모습을 보면 누구든지 실소를 머금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여성의 성기를 남성 성기의 정확한 음형으로 그리고 있다. 보이는 대로의 시각에 충실하고자 했던 그의 사실적 시선조차도 여성은 남성을 위해서만 존재한다는 시대적 도그마를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해부학의 역사에서 이러한 예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그렇다면 몸을 바라보는 시선은 동양과 서양의 의학에서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 살펴보자.

서양의학은 몸을 최소단위로 분해 환원한다. 몸에 나타나는 어떠한 현상-예컨대 질병 현상-도 그 원인은 몸을 구성하는 단위의 변화에 있다고 본다. 그래서 케임브리지의 과학자들이 했던 것과 같이 몸을 분해하고 그 구성요소들을 정확히 기술함으로써 모든 비밀을 풀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근대적 해부학이 뿌리를 내린 근대 이후 서양의학의 발달 과정은 이 구성단위가 끊임없이 최소화해온 과정이었다. 이에 따라 질병의 단위도 간이나 심장 등의 인체기관에서 그 기관을 구성하는 조직으로, 조직을 구성하는 세포로, 그 세포 속의 생체 분자로, 세포의 핵 속에 들어있는 염색체로, 그리고 이제는 염색체에 들어있는 유전자로 점점 더 축소해 간다. 이러한 구성단위들 간에 어떤 상호작용이 있으며 그 결과 어떤 거시적 현상이 나타나는지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덜하다.

반면에 동양의학은 애초부터 몸의 실체적 구성요소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동양의학사를 통해 볼 때, 몇 번의 인체해부 기록이 있기는 하지만 그 경우에도 각 구성요소의 형태나 구조에 주목하기보다는 그것의 무게나 길이, 그리고 다른 장기와의 연결에만 관심을 집중한다. 인체 기관의 구조나 형태보다는 생활세계에서의 관찰을 통해 추론된 오행이라는 체계와 어떤 대응 관계를 갖는지에 더 주의를 기울인다. 인체의 구성요소에 있어서도 기관이나 조직, 세포 등 감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실체에 주목하기보다는, 정(精), 기(氣), 신(神) 등 실체인지 추상인지 구분할 수 없는 존재들로 되어있다고 한다.

이처럼 앎의 대상으로서의 몸은 그것을 바라보는 또 다른 의미의 몸, 즉 지각과 인식의 주체로서의 몸에 크게 의존한다. 지각과 인식은 대상을 무조건적으로 반영하는 수동적 과정이 아니라 그것을 일정한 기준에 의해 수용하고 변형시키는 적극적 과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동양과 서양의 의학이 구성한 몸이 그렇게도 다를 수 있었던 것이다. 지각과 인식은 몸을 통해 이루어지므로 의학에서 몸은 인식의 대상인 동시에 주체가 된다. 몸은 앎의 대상일 수 있지만, 그 대상을 바라보는 주체로서의 몸은 역사와 문화를 통해 살아온 몸이다. 앎의 대상으로서의 몸에도 주체로서의 몸이 살아온 역사와 문화가 투영되며, 주체라는 것도 결국은 그 삶의 여정이 대상으로서의 몸에 투여된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앎으로서의 몸은 역사와 문화를 매개로 주체와 객체 사이를 순환하는 구조를 가진다. 이러한 순환의 매개인 역사와 문화는 우리의 삶을 구성하며 삶은 몸의 또 다른 구성요소이다.


4. 삶으로서의 몸: 몸의 현상학

몸에 대한 또는 몸을 통한 앎이라 하더라도 그 앎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체계와 형식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러한 몸에 대한 체계적 앎의 구조를 우리는 의학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몸에 대한 앎의 구조는 몸이 통과해 온 역사와 문화에 따라 무척 다양하다. 서양의학에서 바라본 몸의 앎은 구조적ㆍ환원적이며 동양의학에서 바라본 몸의 앎은 체계적 대응과 상호연관을 강조한다는 등이다.

또한 일정한 앎의 체계를 공유하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의 몸이 살아가는 방식은 그 앎의 체계와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다. 의사들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앎의 체계에 따라 살아주기를 바라지만, 사람들은 의학지식을 존중하면서도 자신의 방식대로 살아간다. 흡연이 건강에 해롭다는 사실은 의학적으로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흡연인구는 쉽게 줄어들지 않는다.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의사들 중에서도 약 34% 정도는 금연을 실천하지 못한다고 한다. 저개발국의 인구문제를 해결하기위해 다양한 산아제한의 방법들이 도입되었지만 성공한 예는 그리 많지 않다. 한국의 임산부는 출산 뒤에 뜨끈뜨끈한 온돌방에서 미역국을 먹으면서 조리를 하고서도 손발이 저리다고 불평하지만, 유럽의 임산부들은 출산 직후 찬물로 샤워를 하고서도 이런 불평을 하지 않는다.

물론 앎의 체계와 삶의 방식이 일치하는 사례는 불일치의 사례보다 훨씬 더 많다. 한 세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치명적이었던 폐렴은 이제 원인균을 죽이는 페니실린을 투여함으로써 별 문제 없이 완치할 수 있다. 면역학적 지식과 외과술의 발전으로 이제 남의 장기를 이식하여 목숨을 건질 수 있는 가능성이 훨씬 높아졌다. 유전학과 생식의학의 새로운 발전으로 인해 우리는 10년 전만 해도 생각지도 못했던 무병장수의 꿈을 꿀 수도 있게 되었다. 인류의 평균 수명은 200년 전에 비해 두 배 가량 길어졌다. 이 모든 것들은 앎이 삶을 이끌어 왔다는 증거다. 하지만 몇몇 긍정적 사례만을 가지고 둘 사이의 관계를 일반화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제 두 의학에서 앎과 삶이 어떤 관계를 가지는지에 대해 살펴보자.

일반적으로 서양의학에서 앎(지식)은, 삶과는 아무런 관계없이 존재하는 절대불변의 진리이며 추구해야할 목표이다. 반면에 삶의 모습은 다양하고 변덕스러우며 예측을 불허한다. 의학의 목표는 몸에 대한 앎의 체계로 이러한 변덕스런 삶의 현상을 완벽하게 설명하여 삶을 예측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삶의 현상은 항상 실체적 앎의 체계로부터 연역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사고방식의 대표적 사례가 소위 플라시보(placebo, 僞藥?果)에 대한 현대의학의 태도이다. 어떤 치료법의 효능을 확인하고자 할 때 연구자는 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되는 치료법과 함께 아무 효과도 없을 것으로 예상되는 다른 치료법(플라시보)을 함께 적용하여 그 결과를 비교한다. 그 이유는, 의학적으로는 아무 치료효과가 없을 것으로 예상되는 치료법을 적용한다 하더라도 실제로 치료효과를 보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새로운 치료법의 효능을 확인하고자 할 때는 아무런 치료를 하지 않았을 때와 비교하지 않고, 플라시보를 투여했을 때와 비교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현대의학은 치료효과와 플라시보에 의한 효과에 대해 미리 명확한 가치판단을 하고 있다. 치료효과는 중히 여기면서 플라시보는 잡음으로 여겨 통제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시험하고자 하는 치료법은 의학이 뿌리박고 있는 앎의 체계에 포함되지만 플라시보는 그 체계의 밖에 있는 현상에 불과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플라시보를 의학의 실체적 앎의 구도 속에 끌어들여 설명하고자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이다. 왜냐하면 근대 이후의 서양의학에서는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실체적 변화만을 인정하며, 플라시보에 의한 증세의 호전은 단지 심리적 요인에 의한 일시적 착각일 뿐 실체적 변화는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치료법의 효능을 입증하려면 반드시 소위 이중맹검법(double blind test)에 의한 시험을 거쳐야 한다. 여기서는 치료를 받는 환자나 치료행위를 하는 의사 모두 자기가 어떤 치료법을 사용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의사나 환자가 어떤 선입관을 가짐으로써 나타날 수 있는 비실체적 효과의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려는 것이다. 여기서 비의학적 치료 효과나 환자와 의사 사이에 있을 수 있는 인간적 교류와 교감은 활용의 대상이 아니라 제거되어야 할 통제의 대상이 된다. 앎의 체계는 정교하게 정의되고 점차 확장해 나가지만, 삶의 다양한 현상은 철저하게 앎으로부터 소외된다. 앎과 삶의 불화! 이것이 오늘날 서양의학이 당면하고 있는 문제 중 가장 심각한 것이다.

질병으로 고통 받는 환자의 입장에서 보면 실체적 변화와 현상적 변화의 구분은 큰 의미가 없다. 오직 고통 받는 나의 몸이 있을 뿐, 그것은 실체도 현상도 아니다. 물론 합리적 이성을 가진 환자라면 고통의 원인을 몸속의 실체적 변화에서 찾으려 하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모든 고통이 그런 실체적 변화로부터 연역되지는 않는다. 예컨대 팔이나 다리를 절단당한 사람은 잘려나가고 없는 부분에 통증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물론 이런 경우라도 현대의학은 그것을 설명할 수 있는 훌륭한 이론체계를 가지고 있다. 이 이론에서는 실체와 현상이 명확히 구분되며, 없어진 다리에 느껴지는 통증은 환상(phantom)일 뿐이다. 하지만 실지로 없어진 다리에 통증을 느끼는 환자는 그런 과학적 설명에 만족하지 못하며, 여전히 현상과 실체를 혼동하면서 살아간다.

이러한 앎과 삶의 불일치가 서양의학에만 독특한 현상은 아니다. 역사와 문화를 통해 존재했고 지금도 존재하고 있는 모든 의학체계는, 그것이 고도의 추상적 개념으로부터 연역된 것이건 생활의 경험으로부터 귀납적으로 형성된 것이건 관계없이, 일상적 삶과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동아시아의 한의학도 예외는 아니다. 음양오행의 순환적 앎의 구조가, 필요한 모든 것을 대지로부터 얻어야만 했던 농경사회의 삶에는 적합한 것일 수 있었을지 모르나, 전 세계가 이웃으로 되어버린 현대인의 복잡한 삶과는 화해하기 어려운 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 현대인이 살아가는 세상은, 음지와 양지로 나누어진 평화로운 언덕이 아니라 온갖 인공구조물로 뒤덮인 고층건물의 숲이다. 이러한 콘크리트의 숲 속이라고 음지와 양지가 없지야 않겠지만, 현대인의 삶은 거기에서 음양의 순환적 이론체계를 추론할 만큼 한가롭지 않다. 오행이론과 체계적 대응의 사유양식이 실체보다는 관계를 중시하는 유연한 것이며, 점차 분자화해 가는 현대인의 생활에 대안적 희망을 줄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이미 나무, 불, 흙, 쇠, 물이라는 오행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 많은 인공물과 더불어 살아간다. 한의학의 앎은 일견 민중의 삶과 전면적으로 결합하고 있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한의학에서의 앎과 삶의 불일치는 대체로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첫째는 그것의 계급적 성격에서 찾을 수 있다. 소설과 TV 드라마가 아무리 조선의 의사 허준의 희생적 민중사랑을 강조한다 하더라도 그의 주요 임무는 기본적으로 임금의 건강을 돌보는 것이었지 가난한 농민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민중은 공식적 한의학 지식과는 별도의 경험적 의약의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민중의 삶이 한의학의 공식적 앎의 체계로 흘러들어가기 어려운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둘째는 우리네 앎과 삶의 문화적 구성요소가 이전과 같지 않다는 점이다. 한의학에서 사용하는 각종 변증법(예컨대 오행설에 근거한 장부변증, 風寒暑濕乾火의 육음변증, 陰陽表裏寒熱虛實의 팔강변증 등)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앎의 체계나 삶의 방식과 얼마나 일치하는지 생각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우리는 이미 한의학적 감수성을 잃어버렸으며 우리 고유의 앎과 삶을 서구화한지 오래다. 현대인은 침술의 효과는 인정할지 몰라도 그 효과를 설명하는 한의학의 이론구조에는 의심의 눈초리를 던진다. 이처럼 한의학의 앎도 우리의 삶과 그렇게 친하지 않다.

서양의학과 동양의학에서 바라보는 앎의 몸이 모두 우리의 삶과 이렇게 동떨어져 있다면 우리는 과연 어떤 몸을 살고 있는가? 우리가 살고 있는 몸은 두 의학체계의 앎의 구조와 우리 자신의 경험과 역사, 그리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과 문화의 영향으로 구성된다. 나는 깜짝 놀라서 간이 콩알만 해질 때는 한의학의 앎의 구조를 따라서 담력이 담겨져 있는 간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간암에 걸려 이식수술을 받고자 할 때는 해독과 소화작용을 하는 서양의학의 구조적ㆍ기능적 간을 가지고 살아간다. 불에 데어본 적이 있는 어린아이는 다시는 난로를 손으로 만지지 않지만 그렇지 않은 아이는 불 무서운지를 잘 모른다. 아이의 몸에 나 있는 화상의 자국은 그래서 단순한 물리적 상처가 아니다. 그것은 그가 살아온,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몸에 일정한 방향과 의미를 부여한다. 르네상스 시대의 유럽 여인은 풍만한 몸매에 만족감을 느끼지만, 현대의 여인들은 끊임없이 더 날씬해지기를 열망한다. 이러한 현상은, 똑같은 몸매에 다른 가치를 부여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그리하여 급기야는 그 몸에 투여한 가치가 그 몸을 구성하기에 이른다. 모든 음식을 거부하는 소위 거식증 환자는 날씬함에 대한 강박감에 의해 빚어지고 그렇게 구조와 기능이 구성된 그런 몸을 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현대인이 살고 있는 몸은 자연과 인공의 전통적 구분마저도 무의미하게 하는 경우가 많다. 시각장애인이 가진 지팡이와 청각장애인이 착용한 보청기는 이미 그 주인의 감각기관이고 따라서 몸의 일부라고 할 수 있다. 인공심장을 가진 환자는 그것이 바로 자기의 생명이라고까지 할 수 있다. 만성신부전 환자는 정기적으로 혈액투석을 하지 않으면 생명을 부지할 수 없다. 그렇다면 혈액투석기는 그의 몸의 일부라고 해야 옳지 않을까? 이 때 그 사람은 다른 사람과 몸의 일부를 공유하고 있는 것이 된다. 이 밖에도 현대의학은 자연적 몸과 인공물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갖가지 수단들을 가지고 있다. 인공관절과 인공치아는 이미 일반화된 지 오래고, 다양한 인공 장기가 개발되고 있으며 심지어는 유전자에 조작을 가한 인간이 탄생할 날도 멀지 않은 듯 하다. 우리의 몸은 밖으로도 얼마든지 열려있다. 나는 인터넷을 통해 내 집의 커튼을 열 수 있고 냉ㆍ난방기를 작동시킬 수도 있으며, 유치원에 간 아이의 노는 모습을 지켜볼 수도 있다. 인터넷에 연결된 센서를 통해 내 몸의 맥박과 혈압이 측정되고 수만리 떨어져 있는 의사가 나를 진찰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인터넷도 내 몸의 일부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을 확장하다보면 이 세상 만물이 모두 내 몸속에 들어와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래서 위상수학자 조지 가모후는 내 몸을 뒤집어 이 세상 모든 것을 그 속에 담아버린 형상의 특이한 그림을 그리기도 했고, 고대 인도인들은 전 우주를 태내화(胎內化)하여 서 있는, 태양의 눈과 달의 눈을 지닌 크리슈나신의 모습을 그리기도 했다.

이처럼 우리의 몸은 다양한 형태로 구성될 수 있고, 그렇게 달리 구성된 몸은 거기에 걸맞은 삶을 살아간다. 지금 여기의 우리들이 살고 있는 몸은 여기 살았던 우리 조상들이 구축한 몸에 대한 앎의 체계와 그들이 살았던 삶의 영향을 받을 뿐 아니라, 서구인들이 구축한 앎의 체계와 그들의 의학체계, 그리고 그것이 만들어낸 새로운 삶의 방식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하지만 내가 살고 있는 삶 중에서 어떤 것은 동양적이고 어떤 것은 서양적이라고 구분해서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전통적인 삶과 현대적인 삶을 나누어 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만큼 우리의 삶은 전면적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전통과 현대를, 그리고 서양과 동양을 동시에 살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이런 삶을 살고 있는 우리의 몸이 의학의 대상인 동시에 주체이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소견이다. 물론 그 몸이 주체인 것은 몸이 외부세계를 받아들이는 지각과 인식의 담지자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세계에 대해 자신을 주장하는 ‘행함’의 도구이며 주체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음 절에서는 이 ‘행함’으로서의 몸에 대해 살펴본다.


5. ‘행함’으로서의 몸: 몸의 윤리학

몸은 앎을 통해 세상을 그 속에 새겨 넣으며, 삶을 통해 세상과 교제하고 세상과 동화한다. 몸은 또한 자신을 행함으로써 자신과 동화된 세상을 바꿔 나가기도 한다. 이렇게 하여 몸을 구성하는 순환의 구조가 완성된다. 몸을 행하는 방식은 문화적으로 역사적으로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는 몸을 행하는 다양한 방식을 세 가지 범주로 나누어 살펴본다. 이 범주들은 크게 보아 동양과 서양의 전통을 대표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겠으나, 부분적으로는 전통과 현대를 대표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첫째 동양이 수신(修身)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면 서양은 용신(用身), 또는 체육(體育)을 위주로 한다. 수신이 몸을 닦는 행위라면 용신은 몸을 이용해 일정한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는 행위이다. 스스로의 몸을 닦는 공부는 절대적 선(善)을 지향하기보다는 스스로의 충만함을 목적으로 한다. 선(善)은 이렇게 함으로써 자동적으로 달성된다. 이 때의 몸은 물질로서의 몸뚱이일 뿐 아니라 도덕적 주체로서의 ‘나’와 ‘우리’이기도 하다. 용신의 전통에서는 몸뚱이(體)를 기르고(育) 확충함으로써 일정한 수준에 도달하고자 한다. 고대 그리스의 조각상들이 한결같이 옷을 입지 않은 나체이며 늘씬한 팔등신에 울퉁불퉁한 근육 투성이인 것은 이러한 지향의 자연스런 결과이다. 그들은 절대적 아름다움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둘째, 이러한 상이한 전통은 두 전통이 가진 의학에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난다. 동양의학과 근대 이전의 서양의학이 양생(養生)을 강조한다면 근대 이후의 서양의학은 위생(衛生)이 위주이다. 양생에서는 삶을 기르고 북돋음으로써 몸을 행하지만 위생에서는 삶을 지키고 방어하는 데 온 힘을 쏟는다. 양생에서는 삶이 끊임없이 가꾸어 가야할 과정으로서의 몸이며 실존이지만 위생에서의 삶은 존재로서의 몸뚱이일 뿐이다. 양생이 생성(becoming)을 강조한다면 위생은 존재(being)의 철학이다.

셋째, 수신과 양생의 전통에서는 스스로 닦고 가꾸어 온 몸이 스스로를 규제하지만, 용신과 위생의 전통에서는 몸을 규제하는 객관적 규범을 필요로 한다. 서구적 윤리이론으로 말하면 동양에서는 덕(德)의 윤리를 강조하는 반면, 서양에서는 의무론이나 공리주의가 발달했다. 한국 사회에서는 의술을 인술(仁術)이라 부르면서 의사에게 고도의 도덕성을 요구하는 분위기가 우세하지만, 서양에서는 일찍부터 의사의 행동을 규제하는 구체적 규범을 만들어 실천해 왔으며, 이를 통해 자신들의 직업적 자율성과 사회적 지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한국의 의사들은 고도의 도덕성을 요구받고 있지만 그 도덕적 행위를 이끌어갈 구체적 가치체계와 행동지침, 사회적 시스템을 가지고 있지는 못하다. 그래서 현실적인 사람들은 인술이라는 도덕적 개념 자체가 고도 산업사회에서는 합당하지 않은 구시대의 유물이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의료 서비스의 생산과 소비를 모두 시장의 원리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전략은 모든 몸들의 상품화를 전제로 한 것이다. 아픈 사람의 몸은 서비스의 소비자에 불과하며 의학지식을 가진 사람의 몸은 의료서비스를 통해 돈으로 바꿀 수 있는 재화에 불과하다. 몸이 상품이 되면 그 몸속에 담긴 앎과 삶이 상품화되며 그 몸이 행하는 모든 것도 교환가치로만 평가된다. 몸의 상품화는 앎과 삶과 함이 몸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의미하며, 결과적으로 몸의 소외를 낳는다.

사회생물학자들은 한 걸음 더 나가서 우리의 몸이라는 것이 결국은 이기적인 유전자들이 자신들을 증식해 나가는 매체에 불과하다고 주장함으로써 몸의 소외를 더욱 부추긴다. 여기서 몸은 아무런 정체성을 가질 수 없을뿐더러 결국은 유전자라는 단위로 환원되고 만다. 우리의 몸이 행하는 이타적 행동조차도 결국은 몸속에 담겨있는 유전자의 이익을 위한 것이며 우리의 몸은 그저 그 유전자를 운반하는 용기일 뿐이라고 한다. 따라서 몸은 어떤 도덕적 가치의 제약도 받지 않는다. 인간의 배아를 복제하는 행위도, 심지어는 인간의 개체를 대량으로 복제 생산하는 행위도 제재할 근거가 없어진다. 아주 편리한 현대적 몸의 기획인 셈이다.

이처럼 철저히 탈도덕화하고 탈경험화한 물질적 몸이 현대의학이 대상으로 삼고 있는 육체(肉體, Korper)이다. 여기에 삶의 다양한 경험을 보태면 ‘삶으로서의 몸(Leib, lived-body)’이 되고, 여기에 또다시 도덕적 함의를 덧붙이면 전체로서의 몸(身)이 된다. 새로운 몸의 기획은 가치와 감성으로부터 소외된 몸에 다시 활력을 불어넣기 위한 것이다. 그리하여 이렇게 새로이 태어난 몸을 새로운 의학의 화두로 삼고자 하는 것이다.


6. 새로운 몸의 기획

새로운 의학은 몸에 대한 새로운 기획을 필요로 하며 새로운 기획을 위해서는 참신하지만 위험할 수도 있는 사유의 모험이 요구된다. 이 글은 이러한 사유의 모험을 위한 것이다.

몸과 마음을 전혀 다른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본 데카르트의 근대 기획은 당시로서는 대단한 모험이었음에 틀림없지만, 결과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우리는 지금도 그 근대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 결과 우리는 지금, 불과 100년 전에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풍요를 구가하고 있다. 생의학(biomedicine)의 눈부신 발전은 근대기획의 가장 직접적 결과이다. 그러나 이러한 눈부신 발전의 끝에서 생의학은 여러 가지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생의학에의 도전은 궁극적으로 그것이 기본적으로 가정하고 있는 몸의 개념에 대한 도전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 몸의 개념은 데카르트의 근대기획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따라서 생의학에의 도전은 곧바로 근대에 대한 도전으로 이어진다. 이제 생의학에 대한 도전의 양상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봄으로써 그것이 근거한 몸의 개념을 역으로 추론해본 뒤 대안적 담론의 가능성을 탐색해보도록 한다.

첫째, 많은 사람들이 의료관계에서 따뜻한 인간미가 사라져가고 있다고 안타까워한다. 이것은 몸과 마음을 분리한 뒤 물질적 몸(Korper)만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은 생의학의 탐구 자세와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 이로써 마음의 영역은 심리학이나 정신분석의 대상으로 분리되고, 정신의학은 마음의 물질적ㆍ생물학적 현상에 국한되거나 의학의 본류와는 구분되는 특수 영역으로 자리매김 된다. 마음의 작용을 인정하는 경우에도 물질적 몸의 현상에 부수되는 것으로 인식하거나 본격적인 의학의 영역이 아닌 인간관계나 의료윤리의 문제로 치부된다. 이러한 현상은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현대의학이 플라시보 효과를 바라보는 시각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마음의 작용은 항상 부수적인 현상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진다. 의학의 대상이 물질로서의 몸뚱이에 대한 탐구에 한정된다면, 의료관계에서 인간적 교류를 중심에 둘 수 있는 가능성은 매우 낮아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는 의료관계의 비인간화의 원인을 “몸/마음”의 이원론에서 찾을 수 있으며, 이에 대한 대안으로서 “몸-사람”의 일원적 몸 담론을 제시할 수 있다.

둘째, 생의학의 놀라운 발전은 이제 신비의 영역으로 남아있던 “생명”을 조작하는 데까지 이르고 있으며 이에 대한 거부감과 불안감이 증폭되고 있다. 인간 유전자지도가 완성되고 인간복제의 기술적 가능성이 확인되자, 인간의 사회적 행동을 포함한 모든 형질이 유전자에 의해 결정된다는 생물학적 결정론 또는 유전자결정론이 한층 힘을 얻고 있으며 과학자들은 이를 상업적으로 이용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전망이 과학적으로 얼마나 타당한 것인가의 문제는 별도로 치더라도 어쨌든 유전자는 이제 시대적 담론의 중심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에 따라 과학기술의 발전이 오히려 디스토피아를 가져올 것이라는 불안감이 높아지고 있으며 현대의학의 발전방향에 대한 반성의 움직임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 또한 데카르트의 근대 기획에서 제시하고 있는 몸-기계의 모델에 그 근원적 원인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몸 기계론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담론이 요구된다고 보는 것이다.

셋째, 몸/마음의 이원론과 몸-기계론의 담론 구조는 우리의 전통적 가치와의 갈등을 초래한다. 儒, 彿, 仙을 막론하고 우리의 전통 사상에서 몸과 마음의 분리나 기계적 몸 담론은 무척이나 생소한 것이다. 물론 우리는 100년여의 근대화 기간동안 이러한 전통과 상당부분 결별했다고도 볼 수 있겠으나, 수천 년 동안 체화된 문화적 전통을 하루아침에 떨쳐버린다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을뿐더러 바람직하다고 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서구적 몸 담론을 무조건 배척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동ㆍ서의 전통을 모두 담을 수 있는 새로운 그릇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 우리의 사상사에 대한 전면적 재검토가 있어야할 것이다.

넷째, 동ㆍ서를 막론하고 현대의학의 차가운 이성에 식상한 대중은 이제 소위 대안의학에 눈을 돌리고 있다. 일반적인 예상과는 반대로 교육수준이 높을수록 대안의학에 대한 선호도는 더 높다고 한다. 미국의 경우 정통의학에 지불된 비용보다 대안의학에 지불된 비용이 더 크다는 보고도 있다. 따라서 생의학만이 가장 합리적이고 보편적인 의학체계라는 주장은 점차 그 빛을 잃어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동아시아의 경우는 이 대안에 있어 전통 한의학에 많은 힘이 실리고 있으며, 양의학과 한의학의 이원적 구조가 이미 정착된 상태다.

이처럼 현대의 생의학은 개념적ㆍ사회적ㆍ문화적으로 여러 도전에 직면해 있으며 이를 극복하기위한 다양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사회적으로 주어진 기득권에 안주하거나, 과학적 담론의 보편성에 의지해 개념적 검토를 소홀히 한다거나, 대중의 문화적 요구에 등을 돌리는 등의 행위는 문제 해결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다양한 노력들이 필요하겠지만 여기서는 주로 개념적 구조에 초점을 맞춰 논의를 진행해 왔다. 이제 이상의 논의를 종합해 새로운 몸의 기획에 착수해 보자.

이제 우리는 새로운 형태의 물음을 준비해야 한다. 데카르트가 존재의 근거를 물었다면 우리는 삶의 의미를 물음으로써 새로운 의학의 근거로 삼아야 한다. 우리의 삶은 밖으로 열려있는 몸을 그 매개로 삼는다. 새로이 기획된 몸은 부피와 무게와 형태를 갖춘 단순한 연장(延長, extension) 이상의 것이다. 이 몸은 장(場, field)으로 존재한다. 이 몸의 장을 통해 우리는 세상을 알고 세상과 교제하며 그 세상과 하나가 된다. 우리는 앎의 장을 통해 몸 속에 세상을 새겨 넣으며, 삶의 장을 통해 몸과 더불어 세상을 살아가고, 함(행위)의 장 속에서 몸을 통해 세상과 교제한다. 어떤 경우든 몸은 삶의 반영이다. 따라서 몸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생성한다. 삶은 앎과 함을 통해 생성된다. 앎(지식)의 구조와 함(행위)의 규범은 역사와 문화 속에서 만들어진다. 이것이 몸-사람의 일원적 구조이다. 나는 몸이며, 몸을 살아가면서 그것을 알아가는 동시에 그 몸을 행한다. 현대의학은 몸을 단순히 연장을 가지는 존재로 파악함으로써 이처럼 다양한 상호작용을 하는 장의 연결고리들을 잃어버렸다. 이제 새로운 의학은 몸에 대한 새로운 존재론을 준비해야할 것이다. 새로운 몸의 존재론에서는 “나는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 “나는 몸이다”라고 답한다. 나는 몸이며 몸은 끊임없이 생성함으로써 존재한다. 나의 몸은 앎과 삶과 함의 장 속에서 끊임없이 생성한다.

의학은 이러한 역동적 조화 속에 존재하는 몸을 돌보는 체계이다. 이제 의학은 건강이라는 추상적 개념이나 질병이라는 생물학적 상태에만 매달릴 것이 아니라, 몸의 존재조건에 관한 전반적 반성 속에서 재구성되어야 한다. 몸을 알고 살아가며 행하는 모든 과정이 바로 의학의 대상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