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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철학

믿음관념의 다양성에 관한 연구

작성자환공(桓公)|작성시간19.09.19|조회수570 목록 댓글 0

 

믿음관념의 다양성에 관한 연구

 

이 병 덕(서강대학교 철학연구소 연구교수)

 

 

 

【주제분류】인식론

【주 요 어】믿음의 관념, 발생적 믿음과 성향적 믿음, 명시적 믿음과 암묵적 믿음, 의식적 믿음과 무의식적 믿음, 일차 믿음과 이차 믿음

【요 약 문】믿음에 대한 다양한 구분이 있다. 예컨대, 발생적 믿음과 성향적 믿음, 명시적 믿음과 암묵적 믿음, 의식적 믿음과 무의식적 믿음, 그리고 일차 믿음과 이차 믿음의 구분이 있다. 이 논문에서 필자는 믿음에 대한 이러한 다양한 구분을 명료화하고, 또한 이러한 구분 사이의 상호 관계를 밝힘으로써 믿음 개념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좀더 증진시키고자 한다. 특히, 필자는 이 논문에서 믿음에 대한 단일한 설명을 유지하면서 다양한 믿음 관념을 일관성 있게 구분할 수 있음을 보인다.

 

믿음에 대한 다양한 구분이 있다. 예컨대, 발생적 믿음과 성향적 믿음, 명시적 믿음과 암묵적 믿음, 의식적 믿음과 무의식적 믿음, 그리고 일차 믿음과 이차 믿음의 구분이 있다. 이러한 다양한 믿음 관념에 대한 명확한 구분이 없어서, 이들 관념이 맥락에 따라 다소 상이한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고, 또한 때때로 일관성 없이 사용되기도 한다. 이 논문에서 필자는 믿음에 대한 이러한 다양한 구분을 명료화하고, 또한 이러한 구분 사이의 상호 관계를 밝히고자 한다. 필자는 다양한 믿음 관념에 대한 일종의 개념 지도를 제시함으로써 우리의 믿음 개념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좀더 증진시키고자 한다. 특히, 믿음에 대한 단일한 설명을 유지하면서 다양한 믿음 관념을 일관성 있게 구분할 수 있음을 보이고자 한다.

 

Ⅰ. 발생적 믿음과 성향적 믿음

 

빌 클린턴은 힐러리가 그의 아내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 우리가 빌 클린턴은 힐러리가 그의 아내라고 믿는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그가 그 믿음 내용에 대해 항상 생각하고 있음을 뜻하지 않는다. 클린턴이 자고 있거나 또는 다른 생각에 몰두하고 있을 때에도 우리는 클린턴은 힐러리가 그의 아내라고 믿는다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믿음은 현재 활성화된(activated) 상태에 있을 필요가 없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구분을 할 수 있다.

(1) 한 믿음은 현재 활성화된 상태에 있으면 발생적 믿음(occurrent belief)이다.

(2) 한 믿음은 현재 활성화된 상태에 있지 않으면 성향적 믿음(dispositional belief)이다.

이 구분 하에서, 우리는 클린턴이 잠자고 있을 때, 힐러리가 그의 아내라는 그의 믿음은 '성향적'(dispositional)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제 다음 예를 생각해 보자.

"점심을 먹으면서 S가 열띠게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비록 그는 자신이 너무 시끄럽게 떠들고 있다는 것을 아직 인식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그가 단지 이것에 대해 생각이 미치기만 해도 그는 이것을 곧 깨닫고, 이에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Audi 1982, p.117.)

 

위의 아우디의 예에서, 흥분한 이야기꾼은 그가 너무 시끄럽게 떠들고 있다는 명제를 단지 생각만 해보아도 그 명제에 동의하게끔 해줄 어떤 성향적 상태(a dispositional state)에 있다. 그러나 그는 그 명제에 대해 아직 생각이 미치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에 아직 그 명제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우리는 믿음의 성향성(dispositions to believe)과 실제 믿음(actual beliefs) 사이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양자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모저(Paul Moser)는 다음과 같은 구분을 제시한다.

(3) S는 명제 P를 믿는다 =df (i) S는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P에 동의했다. 그리고 (ii) 만일 S가 P인가에 대한 질문을 받고 이에 대해 진지하게 대답하고자 한다면, P에 대해 동의하게끔 해줄 그러한 성향적 상태에 있다. (Moser 1989, p.18.)

(4) S는 단지 P에 대한 믿음의 성향성 만을 갖고 있다 =df (i) S는 P를 믿고 있지는 않지만, (ii) 만일 S가 P인가에 대한 질문을 받고 이에 대해 진지하게 대답하고자 한다면, P에 대해 동의하게끔 해줄 그러한 성향적 상태에 있다.(Moser 1989, p.19.)

먼저 우리는 두 가지 종류의 동의(assent)―언어적 동의(linguistic assent)와 심적 동의(mental assent)―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첫 번째 의미의 동의는 객관적으로 드러나는 일종의 언어적 행위이다. 한 사람이 어떤 진술에 대해 질문을 받고 이에 대해 공개적으로 동의하면 그는 그 진술에 대해 언어적 동의를 하는 셈이다. 그러나 두 번째 의미의 동의는 그러한 종류의 언어적 행위 없이도 발생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떠오른 생각 내용에 대해 심적으로 동의(mentally assent)할 수 있다. 이처럼 심적 동의는 객관적으로 드러나는 용인하는 행동이 없이도 가능하며, S의 P에 대한 믿음은 이러한 의미의 심적 동의만을 요구한다.

 

위의 모저의 정의에 의하면, S의 P에 대한 믿음은 두 조건을 필요로 한다. 첫 번째 조건은 S가 P에 대해 고려할 때 P에 대해 동의하게끔 해줄 그러한 성향적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조건은 S가 P에 대해 동의했다는 것이다. 이 두 번째 조건을 '동의조건'(the assent condition)이라고 부르자. 일상적으로 우리는 사람들의 행동을 이해하거나 또는 예측하기 위해서 믿음 개념을 사용하고, 또한 합리적 결정을 내리기 위해 우리의 기존 믿음을 알 필요가 있다. 따라서 경험적으로 믿음과 믿음의 성향성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동의조건을 믿음의 필요조건으로 받아들이면, 우리는 한 주체가 실제로 주어진 명제에 동의했는지 여부를 고려함에 의해서 그의 믿음과 그의 믿음의 성향성을 쉽게 구분할 수 있다.

 

위의 이유가 동의조건을 믿음의 필요조건으로 택해야 하는 유일한 이유는 아니다. 이 조건을 위한 또 다른 이유는 다음의 질문과 관련된다. 한 믿음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다시 말해서, 한 주체는 어떻게 한 믿음을 갖게 되는가? 모저의 견해에 의하면, 한 주체는 P에 동의함에 의해서 P를 믿게 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믿음을 갖게 되는 것(coming to believe)은 믿음 형성의 문제이기 때문에 성향적이 아니다. 한 사람은 명제 P에 관한 믿음의 상태가 그에게 형성된 한에 있어서 P를 믿게 된다. 그리고 P에 대한 믿음의 상태는 그가 P에 동의하는 한에서 형성된다."(Moser 1989, p.16.)

 

이 견해에 따르면, P에 대한 믿음의 형성과 P에 대한 믿음의 성향성의 형성은 전자가 동의조건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구분된다.

동의조건을 위한 또 한 가지 이유는 믿음의 한 중요한 특성과 관련된다. 믿음 내용은 '개념화된 내용'(conceptualized content)을 갖는다. 예컨대, 어떤 사람은 물이 갈증을 해소시켜준다는 것을 믿으면서, H2O가 갈증을 해소시켜준다고 믿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썰(Searle 1995)의 주장에 따르면, 믿음의 존재에 대한 행동적 증거는, 그것이 아무리 완벽하다해도, 항상 그 믿음의 개념화된 내용을 비결정적(indeterminate)인 상태에 머물게 한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물이 갈증을 해소시켜준다는 믿음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는 행동을 한다고 가정해 보자. 이때 문제는 이러한 행동적 증거가 H2O는 갈증을 해소시켜준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는 주장과 양립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동의조건을 믿음의 필요조건으로 택하면, 이런 종류의 비결정성은 상당히 해소될 수 있다. 만일 그 사람이 '물은 갈증을 해소시켜준다'는 문장에 동의하고, 'H2O는 갈증을 해소시켜준다'는 문장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사람이 전자의 믿음을 갖고 있지만, 후자의 믿음은 갖고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 사람 자신도 스스로 어떤 문장에 대해 심적으로 동의하는지를 고려함으로써 자신이 어떤 믿음을 갖고 있는지 결정할 수 있다.

 

Ⅱ. 명시적 믿음과 암묵적 믿음

 

믿음에 대한 또 다른 구분은 명시적 믿음(explicit belief)과 암묵적 믿음(tacit or implicit belief) 사이의 구분이다. 이 구분을 위해 다음의 예를 생각해 보자.

"로렌은 아침에 편지를 읽으면서 책상에 앉아 있었다. 갑자기 그녀는 무엇인가에 놀란 것처럼 숨을 거칠게 몰아 쉬었다. 가장 중요한 고객들이 그날 저녁에 오기로 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녀는 재빨리 집에 전화를 걸었다. '밥, 당신이 나가기 전에 연락이 돼서 참 다행이에요. 스테이크 고기를 넣고 오는 것을 깜빡 했어요. 오븐 타이머를 오후 4시에 맞춰 주세요. 고마워요. 안녕."(Manfredi 1993, p.95.)

 

이 예에서, 우리는 스테이크 고기는 식기세척기로 요리할 수 없다는 암묵적 믿음을 로렌에게 귀속시킬 수 있을까? 당신이 로렌에게 스테이크 고기는 식기세척기로 요리할 수 없음을 말해준다고 가정해 보자. 이렇게 함으로써 당신은 로렌이 전에 알지 못했던 새로운 것을 말해주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만일 그렇다면, 그녀는 이 명제를 암묵적으로 믿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한 가지 분명한 점은 로렌은 '스테이크 고기는 식기세척기로 요리할 수 없다'는 명제를 고려한다면 이 명제에 동의할 것이라는 의미에서 이 명제에 대한 믿음의 성향성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또 한 가지 분명한 점은 로렌은 이 명제에 대해 명시적 믿음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 명제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필드(Field 1978)에 의하면, 사람마다 각자 머리 속에 명시적인 표상으로서 저장되어 있는 어떤 핵심적인 믿음들(core beliefs)을 갖고 있으며, 우리가 어떤 사람이 어떤 명제를 암묵적으로 믿는다고 말할 때 의미하는 바는 그 명제가 그의 핵심적 믿음들로부터 명백하게 귀결된다는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컨대, 내가 당신에게 1973년에 아무도 여기서 중국까지 지구 중심을 관통하는 터널을 파지 않았다고 말한다고 가정하자. 이렇게 말함으로써 나는 당신이 전에는 믿지 않았던 어떤 새로운 것을 알려주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내가 이것을 당신에게 말하기 전에, 이것이 당신의 핵심 믿음의 일부, 즉, 당신의 명시적으로 표상된 믿음들 중의 하나가 아니었다는 것 또한 분명하다. …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어떤 사람이 한 문장을 [암묵적으로] 믿는 경우는 그 문장이 명시적으로 저장된 문장들의 명백한 귀결인 경우라는 것이다."(Field 1978, p.41.)

 

그러나 필드의 제안에는 중요한 문제점들이 있다. 우선 라이컨(Lycan 1986, p.69)이 지적하는 것처럼, "만일 이 제안이 옳다면, 암묵적 믿음은 한 주체의 진정한 내적인 행동-인과 상태(inner behavior-causal state)가 아니다. 그리고 특히 한 주체의 암묵적 믿음은 보는 사람의 눈에 달려 있게 된다, 왜냐하면 암묵적 믿음은 보는 사람이 명백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 당신에게 명백한 것이 내게는 명백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암묵적 믿음은 귀속시키는 사람에게 상대적이 된다." 필드의 제안의 두 번째 문제점은 암묵적 믿음(tacit beliefs)과 믿음의 성향성(dispositions to believe) 사이를 적절하게 구분해 주지 못한다는 점이다. 앞서 언급한 흥분한 이야기꾼의 예에서 살펴본 것처럼, 믿음은 믿음의 성향성과 구분되어야 한다.

 

암묵적 믿음을 이해하기 위한 또 하나의 제안은 데넷의 믿음에 대한 도구주의적 접근이다. 데넷(Dennett 1987)에 의하면, 우리의 믿음 개념은 도구주의적 개념(an instrumentalistic concept)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그의 견해에 의하면, 엄밀하게 말해서 우리는 실제로 믿음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 동물, 그리고 기계와 같은 특정한 시스템들에 대해 실용적인 관심을 갖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들 시스템들의 행동을 이해하고 예측하기 위해서 '지향적 자세'(the intentional stance)를 취한다. 만일 한 시스템의 행동이 합리적 행위자로서 신뢰성 있게 예측된다면, 그 시스템은 진정한 믿음을 가진 존재이다. 그리고 우리는 어떤 상황이 주어졌을 때 한 시스템이 그 상황에서 당연히 가져야만 하는 믿음을 그것에 귀속시킨다. 따라서 한 시스템이 P를 진정으로 믿는다는 것은 단지 최적의 해석 하에서 P가 그 시스템의 믿음으로 귀속되었음을 뜻한다.

 

데넷의 제안은 필드의 제안이 갖는 종류의 상대성을 피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이점이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무엇이 최적의 해석인지에 대해 동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제안 역시 심각한 문제점들을 갖는다. 우선, 데넷의 이론에 따르면, 명시적 믿음과 암묵적 믿음 사이의 진정한 구별은 존재하지 않는다. 두 번째로, 우리는 믿음이 우리의 행동을 산출하고 통제할 때 인과적 역할을 한다는 견해를 포기해야 한다. 이 문제를 피하기 위해, 혹자는 데넷의 도구주의적 접근을 단지 암묵적 믿음에만 적용할 것을 제안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제안에 따르면, 믿음은 두 가지 종류로 양분화 된다. 한 종류의 믿음을 실재론적으로 다루고, 그리고 다른 종류의 믿음을 도구주의적으로 다루는 것보다는, 가능한 한, 믿음에 대한 단일한 이론을 선택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왜냐하면 직관적으로 볼 때 '믿는다'는 표현이 애매한 표현이라고 생각할 좋은 이유가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단일한 이론이 이론적 단순성 차원에서도 낫기 때문이다.

 

암묵적 믿음에 대한 적절한 이론을 발견하는 것이 쉽지 않으므로, 자연스럽게 우리는 암묵적 믿음이라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제거주의적 접근방법을 택하고 싶은 유혹을 갖게 된다. 이것이 만프레디(Manfredi 1993)가 따르는 전략이다. 그에 따르면, 우리가 '스테이크 고기는 식기세척기로 요리할 수 없다'는 암묵적 믿음을 로렌에게 귀속시키게끔 이끌려지는 이유는 그녀가 이 명제에 동의하기 위한 성향성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다음 조건들이 성립하기 때문이다.

 

(i) 로렌은 스테이크 고기를 식기세척기로 요리할 수 있다고 결코 믿지 않을 것이다.

(ii) 로렌이 스테이크 고기는 식기세척기로 요리할 수 없다고 믿는다는 가정과 충돌하는 어떤 행동도 결코 보이지 않을 것이다.

(iii) 로렌이 스테이크 고기는 식기세척기로 요리할 수 없다는 사실에 주목했을 때 어떤 특별한 행동적 변화를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프레디는 이러한 생각에 대해 다음과 같은 반론을 제시한다.

"우리가 로렌에게 스테이크 고기가 명왕성에서 요리된 적이 있는지를 묻는다고 가정해 보자. 이 경우 로렌은 물론 '아니오'라고 대답할 것이고, 위의 세 가지 조건 모두 충족된다. 그러나 우리는 이 경우 이 명제가 그녀의 이전 믿음 중의 하나였다고 생각하는 것보다는, 비록 이 명제가 그녀에게 결코 떠오른 적은 없지만 그녀는 이 명제에 대한 믿음의 성향성을 줄곧 가져왔다고 생각하는 것이 보다 일반적이다. 그녀는 명왕성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결코 스테이크 고기가 명왕성에서 요리된 적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만일 우리의 질문이 그녀가 스테이크 고기가 명왕성에서 요리된 적이 없다는 믿음을 획득하게 된 계기가 아니라면, 이 특정한 믿음은 대관절 언제 획득됐는가? 몇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고, 이 모든 것은 혹성, 명왕성, 요리, 스테이크 고기, 우주 여행, 그리고 지구의 역사에 관한 로렌의 지식에 관한 복잡한 이야기를 포함한다. 그러나 이 어떤 것도 우리가 로렌에게 스테이크 고기가 명왕성에서 요리된 적이 있느냐고 질문했을 때 로렌이 그 믿음을 획득했다는 단순한 주장보다 더 설득력을 갖지는 못한다."(Manfredi 1993, p.102.)

 

따라서, 앞서 언급된 세 가지 조건은 로렌이 그러한 암묵적 믿음을 실제로 가졌다는 것을 확립하기에 불충분하다.

그러나 암묵적 믿음이 행동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배경 조건을 형성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제안에 따르면, 만일 로렌이 다음과 같은 사실을 믿지 않았다면, 그녀는 오븐 타이머를 맞춰달라는 요청을 하기 위해 전화를 걸지 않았을 것이다.

 

(i) 사무실 전화는 정상적으로 작동 중이다.

(ii) 그녀가 집에서 출근한 이후 집 전화번호가 바뀌지 않았다.

(iii) 만일 밥이 집에 있고 전화벨이 울리면 그는 전화를 받을 것이다.

만일 로렌이 (i)-(iii)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믿었다면, 그녀가 밥에게 전화를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만프레디(Manfredi 1993, p.104)가 지적하는 것처럼, 로렌의 행동을 위해 필요한 배경 조건은 로렌이 (i)-(iii)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믿지 않는다는 것을 요구할 뿐이다. 예컨대, 로렌이 사무실 전화는 정상적으로 작동 중이 아니라고 믿었다면, 전화를 걸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로렌의 행동을 설명하기 위해서 요구되는 것은 사무실 전화는 정상적으로 작동 중이 아니라는 믿음을 로렌이 소유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사무실 전화는 정상적으로 작동 중이라는 믿음은 요구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믿음과 믿음의 성향성 이외에 제삼의 카테고리로서 암묵적 믿음이라는 것을 반드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그리고 이러한 제거주의적 입장이 우리의 직관에 위배된다고 생각할 좋은 이유도 없다. 또한 이러한 제거주의적 입장은 앞서 언급한 흥분한 이야기꾼의 예에도 잘 부합한다. 왜냐하면 이 예에서 믿음의 성향성 이외에 미리 존재하는 믿음을 상정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암묵적 믿음은 믿음에 대한 실재론적 입장과 충돌한다. 왜냐하면 무한한 수의 암묵적 믿음이 존재하는데, 명시적으로 표상될 수 있는 믿음의 수는 유한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암묵적 믿음에 대한 제거주의적 입장의 가장 큰 장점은 믿음에 대한 단일한 견해를 유지할 수 있다는 점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Ⅰ장에서 옹호한 믿음에 대한 모저(Moser)의 정의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게 해준다.

 

Ⅲ. 의식적 믿음과 무의식적 믿음

 

프로이트가 '무의식'이란 말을 우리에게 친숙하게 만든 이후, 사람들이 무의식적 믿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예컨대, 햄린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떤 사람이 어떤 것을 믿으면서도 그것을 알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무의식적 믿음이라는 생각에는 비판의 여지가 없다. 어떤 사람은 그가 어떤 것을 믿는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할 수 있고, 그가 그렇다는 사실을 어떤 의미에서 충격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리고 그의 행동을 통해 볼 때, 제삼자에게는, 그가 어떤 것을 믿고 있음에도 그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음이 아주 명백해 보일 수 있다."(Hamlyn 1970, p.98.)

 

그러면 의식적 믿음(a conscious belief)과 무의식적 믿음(an unconscious belief)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핀켈슈타인(Finkelstein 1999)은 그의 최근 논문 "마음의 의식적 상태와 무의식적 상태의 구분에 관하여"(On the Distinction between Conscious and Unconscious States of Mind)에서 두 가지 자칫 빠지기 쉬운 제안을 논의한 후 그 자신의 제안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이 장에서 필자는 이 세 제안을 논의한 후 필자 자신의 제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먼저 핀켈슈타인이 거부하는 두 가지 자칫 빠지기 쉬운 제안을 먼저 고려해 보자. 핀켈슈타인이 '매우 단순한 견해'(the very simple view)라고 부르는 견해에 따르면, 의식적 믿음과 무의식적 믿음은 다음과 같이 구분될 수 있다.

 

(5) 만일 S 자신이 P를 믿는다는 사실을 인식하면, S의 믿음 P는 의식적 믿음이다.

(6) 만일 S 자신이 P를 믿는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면, S의 믿음 P는 무의식적 믿음이다.

핀켈슈타인에 의하면, 이 견해는 만족스럽지 못하다. 다음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해리의 정신분석의는 해리의 심리상태와 행동을 오랫동안 분석한 후 해리가 누구도 자신과는 사랑에 빠지지 않을 것이라는 무의식적 믿음을 갖고 있다는 진단을 내렸다. 그리고 사실상 이 진단이 옳다고 가정하자. 해리는 그 정신분석의의 진단을 신뢰하기 때문에 '아무도 나와 사랑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라는 진술을 받아들인다. 이 경우 해리는 어떤 의미에서 그의 무의식적 믿음에 관하여 인식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위의 진술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해리의 무의식적 믿음이 의식적 믿음으로 바뀌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렇지는 않은 것처럼 보인다. 한 믿음이 의식적 믿음이 되기 위해서는 그 믿음의 주체는 그 믿음을 '직접적인 방식으로' 인식해야 한다. 그러나 해리는 그의 믿음을 이러한 직접적인 방식으로 인식하고 있지 않다. 그는 단지 의사의 진단에 의거하여 그 믿음을 받아들일 뿐이다.

 

핀켈슈타인이 논의하는 두 번째 제안은 그가 '아주 단순하지는 않은 견해' (the not-so-simple view)라고 부르는 견해이다. 이 제안에 따르면, 내가 P를 의식적으로 믿는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내가 나의 믿음 P를 일종의 '내적 감각'(inner sense) 또는 '내성'(introspection)에 의해서 안다는 것이다. 따라서 타인의 증언에 의한 지식은 '의식적'(conscious)이라는 말이 가리키는 종류의 자기 지식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구분을 할 수 있다.

(5') 만일 S가 그의 믿음 P를 내성에 의해서 인식하면, 그는 P를 의식적으로 믿는다.

(6') 만일 S가 P를 믿지만 그의 믿음 P를 내성에 의해서 인식하지 못하면, 그는 P를 무의식적으로 믿는다.

 

위의 제안 역시 만족스럽지 못한다. 이 제안의 첫 번째 문제점은 다음과 같은 역설에 관련된다. S가 다음과 같은 진술을 한다고 가정하자. 'P 그리고 나는 P를 무의식적으로 믿는다.' 이 진술의 두 연언지(conjuncts)는 동시에 참일 수 있다. 그러나 이 진술에는 어딘가 잘못된 점이 있다. 왜냐하면 S가 P가 성립함을 진지하게 주장한다면 P를 무의식적으로 믿고 있다는 주장을 해서는 안될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편의상 '핀켈슈타인 역설'(Finkelstein's paradox)이라고 부르자. 그런데 위의 제안을 받아들이면, 위의 역설 문장은 더 이상 역설적인 문장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이 'P 그렇지만 내가 P를 믿는다는 나의 인식은 내성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라고 말할 경우 무엇이 잘못됐는지 분명치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위의 제안은 핀켈슈타인 역설이 왜 역설적인지에 대한 적절한 설명을 제공해 주지 못한다.

 

필자가 보기에 더 중요한 문제점은 우리가 우리의 믿음을 내성을 통해 아는지가 분명치 않다는 점이다. 이 점에 관련하여, 라이컨(Lycan 1986, p.64)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현상학적 그리고 이론적 근거 모두에서 우리가 믿음을 내성한다는 것은 의심스럽다. 우리가 인지적 대상으로서 내성하는 것은 판단들(judgments)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판단들로부터 우리의 믿음들에 대한 지식을 추론한다." 필자는 전적으로 이 주장에 동의하며, 앞으로 필자의 제안을 설명할 때 이 점에 대해 좀더 언급할 것이다.

 

이제 핀켈슈타인 자신의 견해를 살펴보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의 무의식적 심적 상태의 정의적 특성은 우리가 단지 이 심적 상태를 스스로에게 귀속시킴으로써 이 심적 상태를 표현하기 위한 능력을 결여한다는 것이다. 모든 심적 상태가 그런 것처럼, 무의식은 우리의 행동에 의해서 표현될 수 있다. 그러나 무의식적 심적 상태에 관해 구별되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단지 스스로에게 귀속시킴으로써 그 상태를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만일 질(Jill)이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의 남편을 싫어한다는 무의식적 믿음을 갖고 있다면, 그녀는 이러한 믿음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내 아버지가 내 남편을 싫어한다고 믿는다'라고 말함으로써는 아니다."(Finkelstein 1999, pp.92-93.)

이 견해에 따르면, 의식적 믿음과 무의식적 믿음의 구분은 다음과 같다.

(5'') 만일 S가 어떤 믿음을 단지 스스로에게 귀속시킴으로써 그 믿음을 표현할 수 있으면, 그 믿음은 의식적이다.

(6'') 만일 S가 어떤 믿음을 단지 스스로에게 귀속시키는 것만으로는 그 믿음을 표현할 수 없으면, 그 믿음은 무의식적이다.

만일 질이 '내 아버지는 내 남편을 싫어한다'고 진지하게 주장한다면, 그렇게 말함으로써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의 남편을 싫어한다는 그녀의 믿음을 표현(express)한다. 그리고 만일 질이 '나는 내 아버지가 내 남편을 싫어한다고 믿는다'라고 주장한다면, 그렇게 말함으로써 그녀는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의 남편을 싫어한다는 그녀의 믿음을 보고(report)한다. 핀켈슈타인의 견해에 따르면, 질은 '나는 내 아버지가 내 남편을 싫어한다고 믿는다'라고 말함으로써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의 남편을 싫어한다는 그녀의 믿음을 또한 표현한다. 그리고 그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변호한다.

 

"분석 철학자들 사이에 언명(assertion)과 표현(expression‎‎)이 어떤 방식으로 상호 배타적이라고 가정하는, 다시 말해서, 화자가 한 특정한 심적 상태에 있음을 함축하는 언명은 바로 그 심적 상태를 표현할 수 없다고 가정하는 경향이 있다. … 윌리암 올스톤(William P. Alston)은 이 가정을 정당하게 부정한다: 나는 당신의 계획에 대한 열렬한 동조를 '정말로 멋진 계획이야!', '원더풀!', 또는 '정말 멋지군!'이라고 말함으로써 표현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너의 계획에 전적으로 동조해!'라고 말함으로써도 표현할 수 있다. 나는 X에 대한 혐오감을 '구역질나는군!' 또는 '왝'이라고 말함으로써 표현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그를 혐오해'라고 말함으로써도 표현할 수 있다."(Finkelstein 1999, pp.99-100.)

우리는 표현과 언명이 항상 배타적이지 않다는 핀켈슈타인의 주장은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이 사실이 양자가 구별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물론 어떤 사람이 '나는 P를 믿는다'라고 말함으로써 그가 P를 믿고 있음을 표현할 수 있다는 핀켈슈타인의 주장은 어떤 의미에서 틀린 말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성립하기 때문이다. 만일 그 사람이 '나는 P를 믿는다'라고 진지하게 주장하면, 정상적인 경우 이것은 그가 P에 동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P를 진지하게 주장한다면 이 주장은 P에 대한 그의 믿음을 표현한다. 따라서 그 사람은 '나는 P를 믿는다'라고 말함으로써 P에 대한 그의 믿음을 간접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그 사람이 '나는 P를 믿는다'라고 말함으로써 그의 믿음 P를 (간접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이유는, 핀켈슈타인이 주장하는 것처럼 믿음 언명자체가 직접적으로 믿음을 표현하기 때문에 그렇다라기보다는, P에 대한 언명 조건(assertion conditions)과 '나는 P를 믿는다'의 언명 조건이 정상적인 경우 같기 때문에 그렇다라고 보는 것이 보다 적절하다.

 

이제 질이 '나는 내 아버지가 내 남편을 싫어한다는 무의식적 믿음을 갖고 있다'고 진지하게 주장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게 말함으로써 질은 자신의 무의식적 믿음을 보고하지만,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의 남편을 싫어한다는 믿음을 표현할 수 없다. 핀켈슈타인은 이 사실을 주어진 사실로 받아들이고, 이 사실에 의거해 의식적 믿음과 무의식적 믿음을 구분한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보다 적절한 설명은 왜 이러한 사실이 성립하는가를 설명해줄 수 있는 보다 근본적인 차원의 설명이어야 한다. 필자는 위와 같은 사실이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성립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행동적 증거에 의거하여 타인에게 믿음을 귀속시킨다. 그러나 우리 자신에게 믿음을 귀속시킬 때는 일반적으로 우리 자신의 행동에 의거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일인칭 믿음 귀속과 삼인칭 믿음 귀속사이에는 비대칭성이 존재한다. 필자는 다른 곳(이병덕 2000, Lee 2001)에서 왜 이와 같은 비대칭성이 성립하는지를 설명하였기 때문에, 여기서는 필자의 주장의 요지만을 간단히 언급하고자 한다. 다음 문장을 고려해 보자.

 

(7) 만일 내가 문장 P에 심적으로 동의한다면, 나는 P를 믿는다.

(7)은 적어도 정상적인 경우 성립한다. 왜냐하면 심적 동의는 자신에게 믿음을 귀속시키기 위한 가장 중요한 규준이기 때문이다. 만일 내가 P에 심적으로 동의하고, 또한 합리적이라면, 나는 P를 나의 이론적 및 실천적 추론에서 전제로사용할 것이고, 따라서 나의 행동은 P를 믿는 사람의 행동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사람의 믿음에 대한 언명은 그의 행동과 부합하지 않으면, 다시 말해서, 그의 행동에 대한 최적 설명이 그가 그 믿음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가 믿는다고 말하는 믿음을 거부할 수 있다. 따라서 한 사람의 행동도 믿음을 귀속하기 위한 또 하나의 중요한 규준이다.

 

그러나 우리가 P라는 문장을 심적으로 동의함에도 불구하고 P를 믿지 않는 경우는 극히 예외적이기 때문에, 나는 주어진 문장 P에 대하여 (7)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의심할 만한 강한 이유가 제시되지 않는 한, (7)을 받아들임에 있어서 (추정적으로) 정당화된다. 이것이 믿음을 스스로에게 귀속시키는 기본 절차(default procedure)이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의 믿음에 관한 언명이 특별한 경우 파기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자신의 믿음에 관하여 일인칭적 권위(first-person authority)를 갖게 되는 이유이다.

 

의식적 믿음과 무의식적 믿음의 근본적 차이점은 의식적 믿음의 경우와 달리 우리는 무의식적 믿음을 어떤 증거에 대한 언급 없이 스스로에게 귀속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핀켈슈타인이 지적하는 것처럼, 질은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네 말이 옳은 것 같아. 내 행동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내가 이 얼빠진 무의식적 믿음을 갖고 있다는 것이야. 무의식적으로 나는 내 아버지가 내 남편을 싫어한다고 믿고 있음에 틀림없어." (Finkelstein 1999, p.93.) 이 경우 질은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의 남편을 싫어한다는 무의식적 믿음을 그녀의 행동에 대한 제삼자의 증언에 의거해서 스스로에게 귀속시킨다. 그렇다면 나는 나의 무의식적 믿음을 보고할 수는 있지만, 그 무의식적 믿음을 단지 스스로에게 귀속시킴에 의해서 표현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내가 다른 사람의 믿음을 보고할 수는 있지만 표현할 수는 없는 이유와 본질적으로 같다. 내가 다른 사람의 믿음을 표현할 수 없는 이유는 단지 그의 행동에 대한 증거에 의거하여 믿음을 그에게 귀속시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내가 내 무의식적 믿음을 표현할 수 없는 이유는 단지 나의 행동에 대한 증거에 의거하여 무의식적 믿음을 스스로에게 귀속시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핀켈슈타인의 주장과는 달리, 무의식적 믿음의 정의적 특성은 우리가 무의식적 믿음을 단지 스스로에게 귀속시키는 것만으로는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증거에 의거함이 없이 스스로에게 무의식적 믿음을 귀속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핀켈슈타인의 제안의 또 다른 문제점은 의식적 믿음에 대한 그의 정의가 너무 넓다는 것이다. 한 믿음이 의식적 믿음이 되기 위해서 주체가 최소한 그 믿음을 갖고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그러나 자신의 믿음에 대해 단지 반성적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적어도 일정 시간 동안 자신의 믿음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이 경우 그의 믿음은 최소한 그가 인식하지 못하는 동안은 의식적 믿음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그 믿음을 단지 스스로에게 귀속시킴으로써 그 믿음을 표현할 수 있는 능력 자체를 결여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능력을 갖고 있는 것과 능력을 실제로 행사하는 것은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자는 의식적 믿음과 무의식적 믿음을 다음과 같이 구분할 것을 제안한다.

(5''') 만일 S가 어떤 증거에 의거함이 없이도 스스로 P를 믿고 있음을 인식한다면, S는 P를 의식적으로 믿는다.

(6''') S의 행동에 대한 최적 설명은 그가 P를 믿는다는 것이지만, S가 P를 의식적으로 믿지는 않는다면, S는 P를 무의식적으로 믿는다.

이제 필자의 제안이 적절한지를 테스트해 보자.

 

먼저 우리가 앞서 고려한 '매우 단순한 견해'의 문제점은 'P를 의식적으로 믿는 것'(consciously believing that P)과 '믿음 P에 관하여 의식하는 것'(being conscious of the belief that P) 사이를 구분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필자의 제안은 이 구분을 쉽게 할 수 있다. S가 P를 의식적으로 믿는 것과 그가 그의 믿음 P에 관하여 의식하는 것 사이의 차이는 전자가 어떤 증거에 의거함이 없이 '나는 P를 믿는다'에 동의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두 번째로, 필자의 제안은 무의식적 믿음이 의식적 믿음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쉽게 설명해 준다. S의 무의식적 믿음 P는 S가 아무런 증거에 의거함이 없이 '나는 P를 믿는다'에 동의할 수 있게 되면 의식적 믿음이 된다. 한 사람은 만일 그가 P에 심적으로 동의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기 때문에 믿음 P를 스스로에게 귀속시킨다면 그 자신의 믿음 P를 증거에 의거함이 없이 인식한다. 예컨대, 앞서 언급한 질의 경우, 만일 그녀가 그녀의 행동에 관한 증거가 아니라, '내 아버지는 내 남편을 싫어한다'는 문장에 관련한 증거에 의거하여 이 문장에 진지하게 동의하게 되면, 그리고 그녀가 이 사실을 인식함에 의해서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의 남편을 싫어한다는 믿음을 스스로에게 귀속시킬 수 있게 되면 그녀의 무의식적 믿음은 더 이상 무의식적 믿음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세 번째로, 필자의 제안은 핀켈슈타인 역설을 쉽게 설명해 준다. 'P 그리고 나는 P를 무의식적으로 믿는다'의 형태의 언명의 문제는 무엇인가? 필자의 견해에 의하면, 만일 내가 P에 진지하게 동의하면, 나는 또한 '나는 P를 믿는다'에 동의해야 한다. 그리고 만일 내가, P에 동의하기 때문에, '나는 P를 믿는다'에 진지하게 동의한다면, 그리고 만일 내가 P를 의식적으로 믿는지를 고려한다면, '나는 P를 의식적으로 믿는다'에 동의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위 핀켈슈타인 문장의 두 번째 연언지와 충돌한다. 이것이 내가 위의 핀켈슈타인 문장을 주장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더 나아가, 필자의 제안은 왜 우리가 일반적으로 비언어적 동물들과 관련하여 의식적 믿음과 무의식적 믿음의 구별을 적용하지 않는지를 또한 설명해 준다. 이러한 구별을 하기 위해서는 주체가 어떤 증거에 의거함이 없이 스스로에게 믿음을 귀속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어야 하는데, 비언어적 동물은 이러한 능력을 결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끝으로, 필자의 제안이 갖고 있는 한 가지 함축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앞서 I장에서 논의했던 믿음에 대한 모저(Moser)의 정의에 따르면, 믿음은 동의조건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정의 (6''')은 이 동의조건을 만족하지 않는다. 따라서 무의식적 믿음은 온전한 의미에서의 진정한 믿음은 아니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필자의 견해로는, 이러한 귀결은 우리가 받아들여야 하는 귀결이다. 스티치(Stich 1978, p.506)가 지적하는 것처럼, 믿음의 한 중요한 특성은 믿음이 다른 지향적 상태들과 추론적으로 통합되어(inferentially integrated)있다는 점이다. 즉, 우리는 우리의 기존 믿음을 토대로 하여 새로운 것을 추론하며, 또한 우리의 믿음은 우리의 욕구와 결합하여 행동을 산출한다. 예컨대, 만일 당신이 비가 온다는 것을 믿고, 또한 비에 젖고 싶지 않다는 욕구를 갖고 있다면, 당신은 외출할 때 우산을 들고 나갈 것이다.

 

그러나 포도(Fodor 1983, p.85)가 지적하는 것처럼, "무의식적 믿음은 추론을 의식적으로 할 때 전제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 더 나아가, 무의식적 믿음은 불안정한 상태이다. 정신분석이론에서 가정하는 무의식적 믿음은 억압된 믿음(repressed belief)이다. 이 억압된 믿음은 억압이 제거되면 의식화된다. 따라서 무의식적 믿음은 주체가 그 믿음을 가진 사람의 행동을 함에도 불구하고 그 믿음과 관련된 본인의 인식적 상황을 깨닫지 못하는 한에서 성립한다. 따라서 무의식적 믿음은 온전한 의미에서의 진정한 믿음은 아니라는 주장은 우리의 직관에 크게 배치되지 않는다.

 

Ⅳ. 일차 믿음과 이차 믿음

 

일차 믿음(first-order belief)은 믿음의 내용이 믿음의 개념을 포함하고 있지 않는 믿음이다. 예컨대, 만일 S가 지구는 둥글다고 믿는다면, 이 믿음은 일차 믿음이고, 이 믿음의 내용은 '지구는 둥글다'이다. 이차 믿음(second-order belief)은 자신의 일차 믿음에 대한 믿음이다. 예컨대, 만일 S가 그 자신이 지구는 둥글다고 믿는다고 믿으면, S는 믿음의 내용이 '나는 지구는 둥글다고 믿는다'인 이차 믿음을 갖게 된다.

 

이차 믿음은 의식적 믿음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먼저 어떤 사람이 P를 의식적으로 믿는다는 사실이 스스로 P를 믿고 있다고 믿는다는 것을 함축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자. 피콕(Peacocke 1992)에 따르면, 그 대답은 부정적이다. 이차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믿음의 개념을 소유해야 한다. 그렇지만 피콕의 견해에 의하면 믿음의 개념을 아직 소유하고 있지 않은 아기도 의식적 믿음을 가질 수 있다. 왜냐하면 믿음의 개념을 아직 소유하고 있지 않은 아기도 자신의 믿음을 표현하는 의식적 사고를 할 수 있고, 그리고 그 생각의 내용에 심적으로 동의할 수 있다. 이 경우 그러한 아기의 생각이 발생적 믿음을 표현한다는 점은 인정할 수 있지만, 과연 그러한 믿음이 또한 의식적 믿음인지는 분명치 않다.

 

왜냐하면 그러한 아이는 스스로 어떤 믿음을 갖고 있다는 분명한 인식을 하지는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필자의 정의 (5''')에 의하면, S는 어떤 증거에 의거함이 없이도 스스로 P를 믿고 있음을 인식할 때, P를 의식적으로 믿는다. 이런 의미에서 믿음의 개념을 아직 소유하고 있지 않은 아기는 자신의 믿음을 인식할 수 없다. 그렇다면 피콕의 위의 예는 필자의 제안에 대한 반례가 되는가? 필자는 이 문제는 우리가 '의식적 믿음'을 어떻게 정의하는가에 달린 문제라고 생각한다. '의식적'(conscious)이라는 표현은 철학적으로 다양한 맥락에서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기 때문에, 이 표현이 갖는 모든 뉘앙스를 만족하는 정의를 제시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우리가 할 일은 이 표현의 가장 중요한 의미를 포착하고, 또한 가능한 한 명료하게 규정하는 일이다. 이 논문에서 중요한 점은 주체가 믿음의 개념을 소유하고 있는 정상적인 경우, 그가 의식적 믿음을 갖고 있음은 또한 상응하는 이차 믿음을 소유하고 있음을 함축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점은 피콕 자신도 동의하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기 때문이다. "만일 한 주체가 믿음의 개념을 갖고 있고 그리고 어떤 특정한 의식적 믿음을 갖고 있으면, 그는 그가 그 믿음을 갖고 있다고 판단할 것이다."(Peacocke 1992, p.153.)

 

이제 역(the converse)을 생각해 보자. 즉, 이차 믿음을 갖고 있음이 의식적 믿음을 갖고 있음을 함축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부정적이다. 피콕(Peacoke 1992, p.154)이 지적하는 것처럼, 이차 믿음이 무의식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즉, 흔히 발생하는 경우는 아니겠지만 다음과 같은 경우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이유는 없는 것처럼 보인다. 믿음을 귀속시키는 행동적 규준에서 볼 때, S는 스스로 P를 믿고 있음을 인식하는 사람의 행동을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S는 자신이 P를 믿는다는 것을 믿고 있음을 인식하지 못할 수 있다.

 

이제 끝으로 다음 질문을 고려해 보자. 의식적 믿음에 대한 환상은 가능한가? 다시 말해서, 한 주체가 실제로는 의식적 믿음을 갖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의식적 믿음을 갖고 있다고 잘못 판단하는 것은 가능한가? 피콕은 가능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한 주체가 그가 의식적 믿음을 갖고 있는 것과 같은 주관적 상태에 있기 위해서는 두 조건이 성립해야 한다. 첫째, 그는 그 믿음 내용을 옳게 표상해 주는 의식적 상태에 있어야 한다. 둘째, 이 상태는 의식적 동의(conscious acceptance)의 상태여야 한다. … 그러나 이 조건들이 의식적 믿음을 갖기에 또한 충분한 것처럼 보인다. 만일 그렇다면, 의식적 믿음에 대한 환상은 불가능하다."(Peacocke 1992, p.158.)

 

그러나 필자는 의식적 믿음에 대한 환상이 반드시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떤 여자 S가 그녀의 남편이 자신을 배신한다는 생각을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사람이라고 하자.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남편이 자신에게 충실하다고 믿고자 강하게 원한다. 따라서 그녀는 스스로 그녀의 남편이 충실하다고 믿는다고 생각하며, 또한 이를 의식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S는 그녀의 남편이 그녀에게 충실하다는 의식적 믿음을 스스로 갖고 있다고 판단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S의 행동에 대한 최적 설명은 그녀가 그녀의 남편의 충실성을 믿지 않는 경우일 수 있다.

 

즉, 그녀의 의식적 믿음과는 달리 그녀의 행동은 남편의 충실성을 믿지 않는 여자의 전형적인 행동을 보여줄 수 있다. 예컨대, 그녀는 그녀의 남편의 일상사에 대해 꼬치꼬치 알고자 하며, 그녀의 남편이 늦게 귀가한 경우 왜 늦었는가의 대한 해명에 대해 의심하는 등등의 행동을 보일 수 있다. 물론 이런 종류의 자기 기만은 매우 불안정한 현상이다. 그렇지만 필자가 다른 곳에서 지적했던 것처럼, "비록 불안정하고 또한 단지 잠시 동안일지라도, 위와 같이 한 사람의 공언된 믿음과 그의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라고 해석될 수 있는 경우들이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이병덕 1999, pp.350-1.) 이러한 자기기만의 경우는, S가 진정으로 그녀의 남편이 그녀에게 충실하다고 믿는 경우가 아니므로, '나는 내 남편이 내게 충실하다는 것을 믿고 있으며 이를 잘 의식하고 있다'는 S의 판단은 잘못된 판단일 수 있다.

 

Ⅴ. 결론

 

이 논문에서 필자는 믿음에 대한 네 가지 종류의 구분들에 대해 논의하였다. I장에서 필자는 믿음에 대한 모저(Moser)의 정의가 직관적으로 설득력이 있으며, 특히, 믿음과 믿음의 성향성을 구분하는데 적합함을 주장하였다. II장에서 필자는 믿음과 믿음의 성향성 이외의 제삼의 카테고리로서 암묵적 믿음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충분한 이유가 없다는 만프레디(Manfredi)의 주장을 옹호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일 때 믿음에 대한 단일한 설명을 유지할 수 있음을 주장하였다. III장에서 필자는 의식적 믿음과 무의식적 믿음에 대한 세 가지 기존 제안을 소개·비판하고, 필자 자신의 제안을 대안으로 제시하였다. 끝으로, IV장에서 필자는 의식적 믿음과 이차 믿음의 관계에 대해 논하였다. 특히, 정상적인 경우 한 사람이 의식적 믿음을 갖고 있음은 그가 이차 믿음을 갖고 있음을 함축함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의식적 믿음에 대한 환상이 가능함을 또한 지적하였다. 전체적으로 필자가 이 논문에서 보이고자 한 것은 믿음에 대한 단일한 설명을 유지하면서 다양한 믿음 관념을 일관성 있게 구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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