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면상과 내면상, 그리고 전이
이 규 환 국립정신병원의국 자료실
정신 외부에 있는 대상들이 형성하는 상과 내부에 형성되는 상에 대해 알아보고 이를 통해 전이라는 현상을 설명하려고 한다.
우리는 자신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어떻게 알았을까? 이런 질문을 하면 거울을 보고 안다든지 또는 다른 사람이 이렇게 저렇게 생겼다고 말해줘서 안다고 대답한다. 그렇다. 우리는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친 영상이나 타인을 통해서 알게 된다. 즉, 나는 외부에 있는 영상을 통해 자신을 인식한다는 것이다. 나는 내 마음 밖에 그려진 모습을 통해 규정되는 존재가 된다.
이런 방식으로 정신 외부에 있는 모습인 외면상이 안으로 들어와 내면상을 형성한다. 우리는 마음 속에 수많은 영상들을 가지고 있다. 이 수많은 내면상들은 결국 내 마음이라는 스크린에 비춰진 외면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를 들어, 독실한 기독교 신자의 삶은 기독교적 가치관에 의해 좌지우지될 것이다. 즉, 기독교적인 가치관은 그의 밖에 있었던 것인데 그의 마음 안으로 들어와 내적 가치를 갖는 내면상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외면상은 내면에 상을 형성하며 정신세계를 구조화한다. 그에게 기독교적 가치관은 초자아를 구성할 것이다. 원래 초자아는 부모의 상을 받아들여 형성되는 것이다. 부모의 상은 문화적 가치, 사회적 질서, 법, 관습, 도덕, 종교 등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드는 인간의 본능적인 에너지를 공급하는 터와 같은 것이고, 반면에 초자아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등장하는 부모의 상이 내면으로 들어와 형성하는 것이다.
그러면 자아는 어떻게 형성될까? 이드처럼 내부로부터 생기는 것일까아니면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영상일까? 이런 질문을 받으면 우리는 그간 알고 있던 정신분석학에 대한 지식으로 대부분 초자아와 이드 사이에서 생겨나는 것이라고 대답한다. 자아는 이드로부터 자라나면서 생겨난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우리는 '나'라고 알고 있는 자아가 이드처럼 내부로부터 진화되는 것일까, 아니면 초자아처럼 외부로부터 들어온 영상일까 하는 문제를 풀어보기 위해 나는 나를 어떻게 알게 되었는가를 생각해본다. 앞에서 말했듯이 나는 거울 속에 비친 영상이나 타인의 진술에 의해 나를 인식하게 된다. 즉, '나'는 거울 속의 영상이나 타인의 진술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내가 나라고 알고 있는 '나'는 초자아와 같이 외부로부터 들어온 영상적 존재다.
나르수스는 호수에 비친 자신(거울 속의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자기를 인식한다.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며 희열을 느끼며 자기애에 빠진다. 그러나 자아가 생겨나는 순간 나는 본래 모습을 잃어버린다. 새로운 탄생과 더불어 일어나는 상실과 소외가 생기는 원리는 여기서도 적용된다.
우리는 지금까지 '나'라고 생각해왔던 자신을 이질적인 타인의 모습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자아가 외부로부터 들어온 내면상이라고 얼른 이해되지 않는다. 최초의 자아는 거울에 비친 영상으로부터 온다. 거울에 비친 영상은 내가 아니고 타인이다. 거울 속에 있는 타인(영상)이 내부로 들어와 '나'를 구성한다.
우리는 본능적 에너지(리비도)를 가지고 있는 이드와 외부로부터 들어온 타인이 형성한 내면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나'라고 생각해왔던 자아는 마음 안에서 생성되고 진화되는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온 타인이다.
'내'가 진정한 내가 아니고 타인으로부터 온 영상이라면 타고난 천성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타고난 천성이란 태어날 때 가지고 있는 성격적기질이다. 다시 말하면 '나'라고 생각하는 자아의 형성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어떤 특성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나는 나를 구성하지 않고 타인에 의해 구성되는 존재다'라고 말해야 한다.
그러면 무인도에 혼자 사는 사람도 자아가 생기는가? 물론 무인도에서 혼자 사는 사람에게도 자아가 생긴다. 왜냐하면 거울 속의 영상은 무인도에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때 생긴 자아는 사회 속에서 형성된 자아와는 상당히 다를 것이다. 늑대와 함께 자란 소년 이야기가 생각난다. 소년의 자아를 구성하는 요소 중에 타인이 늑대다. 그래서 소년은 자신을 늑대로 인식한다. 인간은 태어나서 상당히 긴 기간을 부모에게 의존한다. 태어나서 의존할 수 있는 대상이 없다면 인간적 삶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가 이제 '나'라는 존재를 알게 되자 내가 나의 주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접하면서 나는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이런 느낌은 당연하다. 우리는 '나'에 대한 자기애적 환상을 깨어질 때 필연적으로 허탈감을 느낀다. 반야심경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중에 첫 구절은 현상계의 모든 만물은 아무 것도 아닌 빈 것이다라는 의미다. 세상만물이 아무 것도 아닐 때 어찌 우리가 허무감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나 이 허무함을 거치는 길이 환상 속에 그려진 허상을 깨고 다시 태어나는 과정이다. 이 깨달음을 통해 진정한 자신을 만난다.
자아는 계속해서 변하는가? 그렇다. 변화는 생명의 기본이다. 자아가 움직이고 있는 생명의 모습이라면 변화하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는 끝없는 변화 속에 있는 존재다. 환경도 나를 변화시킨다. 환경 속에서 자신을 변화시키며 살아가는 것이 적응이다. 자아가 환경과 정신내면 사이를 중재하며 살아가는 '나'라는 존재로 있는 한 변화는 필연적이다.
이제 이쯤에서 전이에 대해 알아보자. 우리의 정신세계는 외부로부터 마음 속으로 들어온 영상들과 욕구와 욕망의 동력인 에너지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이 두 가지에 의해 우리의 삶이 어떤 패턴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마음 속의 영상은 에너지를 받으면 밖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 때 마음 속의 영상에 따라 일정한 행동이 반복해서 나타날 것이다. 이것을 전이라고 한다.
어떤 이가 부모 중에 어머니와 친밀하다고 했다. 왜냐하면 어머니가 자신을 이해해주려고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볼 때 그는 좀 더 나은 모습을 보여주려고 노력한다고 했다. 그런 행동은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의미가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는 다른 사람이 이해해주려는 태도를 보여준다면 어떻게 반응할까? 그는 어머니의 태도에 대해 반응하던 방식으로 대할 것이다. 이해받는다는 느낌에 감사하고 더욱 나은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는 자신을 이해해주려고 하는 타인에게서 어머니를 보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마음 속에는 많은 어머니상 중에 이해해주려고 하는 어머니상에 대한 반응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을 이해해주려고 하는 타인에 대해 내면에 있는 어머니상을 투사하고 그 어머니상에게 반응하고 있는 것이다.
전이는 이렇게 나타난다. 그래서 같은 모습이 반복된다. 전이를 잘 들여다보면 그것과 연결된 내면상을 볼 수 있다. 그 내면상에서 전이를 보여주고 있는 사람의 과거를 만난다. 전이는 좋은 느낌의 내면상을 보여주기도 하고, 좋지 않은 느낌의 내면상을 보여주기도 한다.
부모는 전이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 외에도 아이를 양육하는데 중요한 대상들이 포함된다. 가까운 친척 어른들, 학교 선생님, 보모 등 많은 사람들이 전이를 일으키는 내면상을 형성하는데 기여한다. 우리는 전이 속에서 과거에 경험을 만난다.
전이는 지금 여기에 과거를 재현하고 동시에 미래를 보여주기도 한다. 전이는 과거로부터 또 미래로부터 온다. 왜냐하면 미래에 대한 소망도 전이를 구성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무의식은 과거와 미래, 현재를 구분하는 시간 너머에 존재한다. 무의식의 산물인 전이는 우리에게 과거로 동시에 미래로 안내한다.
누가 다른 사람의 말을 들으면서 "흠.. 흠.."하면서 웃는 행동을 보일 때, 보통 사람들은 그냥 그 사람이 그런가보다 하고 생각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그 모습에 대해 심하게 화를 내고 불편해한다면 그의 마음 속에 그런 행동에 의해 뭔가 자극을 받는 부정적인 내면상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런 반응을 일으키는 내면상을 잘 찾아보고 분석해보면 그의 억압되고 왜곡된 역사를 만나는 것이다. 정신분석은 전이를 따라 무의식으로 여행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대인관계 속의 모든 행동에는 전이가 있다. 정도에 따라 많거나 적게 개입되기는 하지만 전이가 개입되지 않는 행동은 없다. 우리는 전이를 통해 이해하지 못했던 자신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자신도 모르고 한 행동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된다.
전이를 따라가 내면상을 명료하게 보려면 내면에서 떠오르는 것을 그대로 표현해야 한다. 왜곡하거나 억압하지 않고 내면으로부터 떠오르는 것들을 얼마나 표현할 수 있는가가 중요하다. 우리는 자신의 내면을 타인에게 드러내기 힘든다. 또 자신에게 드러내기도 무척이나 힘든다. 이것은 전이를 따라 내면상을 만나러 가는 길을 막는 장해물이다. 따라서 정신분석을 할 때 떠오르는 생각이나 상상을 그대로 드러내도록 규칙을 정한다. 이것이 자유연상이다.
정신분석 작업 중에 분석자의 느낌이나 반응에도 전이가 개입되어 있다. 이 때 분석자는 자신의 느낌이나 반응도 같이 분석해야 한다. 전이는 타인과 내가 서로 상호작용하는 관계 속에서 생긴다. 우리는 전이가 일어날 때 이와 관련된 모든 것들을 함께 보아야 한다.
전이는 타인과 내가 직접 만날 때 일어나는 반응 속에서 보인다. 그러나 주고받는 글 속에도 스며있다. 사람마다 글로 드러내는 독특한 패턴이나 독특한 반응 양상을 보여준다. 이런 것들 속에서 읽혀지는 행간의 의미에도 전이가 내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타인들을 대할 때 수많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만나고 있다는 것을 전이를 통해 알 수 있다. 전이 속에서 부모의 싫은 모습이 자신의 내면상으로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내면상에 따라 자신의 행동이 좌지우지되고 있다. 싫어하는 모습이 자신의 내면에 있으면 자기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된다. 자신을 비하하거나 혐오하기도 한다.
우리는 이런 갈등에서 벗어나기 위해 부정적 내면상에 대한 인식을 변화시켜야 한다. 우선 내면상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긍정적으로 바뀔 수 있는 길을 찾아본다. 증오 속에서 사랑을 찾아내듯이 내가 혐오하던 내면상의 새로운 모습을 찾을 수 있다. 이런 과정 속에 부모에 대한 미움이 줄어들고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나를 구성하고 있는 것은 타인이다. 그래서 타인을 미워하거나 증오하면 그것은 부메랑처럼 내게로 돌아온다. 바로 이 단순한 진실이 너에게서 나를 보고 너와 내가 함께 하는 삶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여기에 부처의 자비와 예수의 사랑이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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