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은 여러 가지 부문에 걸쳐서 상당히 컸으나, 특히 논리학에 있어서 가장 컸다고 하겠다. 고대 말기에, 형이상학에 있어서는 아직도 플라톤이 우위를 차지하고 있을 때, 아리스토텔레스는 논리학에 있어서 권위자로 인정되었으며, 이러한 그의 지위는 중세기를 통하여 존속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 대해서도 기독교 철학자들이 우월성을 인정하게 된 것은 13세기에 이르러서의 일이었다. 이 우월성은 <르네상스> 이후에는 대체로 상실하게 되었지만, 논리학에서의 우위는 그대로 존속되었다. 그리고 오늘에 와서도 모든 카톨릭 철학 교수들과 그 밖의 많은 사람들이 논리학에서의 현대의 새로운 발견에 대하여 계속하여 완고하게 반대하고 있으며, 프톨레미의 천문학과 같은 낡은 체계를 완강하게 고집하고 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보아,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그의 역사적인 위치는 반드시 정당하다고 볼 수는 없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미치고 있는 압도적인 그의 영향이 분명한 사색을 불가능하게 만들어, 그가 이루어 놓은 이전의 철학자(플라톤까지 포함해서)들에 의한 발전이 어떤 것이었는지 생각하기 어렵게 하며, 또 한편으로는 그가 이루어 놓은 논리적인 업적이 궁지에 몰리게 되어, 그 뒤에 따르는 2000년 이상의 정돈 상태를 이루지, 않고 계속해서 발전되었던들, 얼마나 놀라운 성과를 보였을까, 상상조차 하기 어려울 지경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이전의 철학자들에 대하여 살펴볼 때, 독자들이 그들에게서 감화를 받지 않도록 하라는 주의를 환기시킬 필요는 없다. 그러므로 그들에 대하여 연구할 때에는 그들의 능력을 마음껏 찬양하면서도, 독자들은 그들의 학설에 찬동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는 이와 다르다. 그의 학설은, 특히 논리학은 오늘에 와서도 논란의 대상이 되어 있으므로, 단순히 역사적인 학설로만 취급할 수는 없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논리학에서 이룬 업적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삼단논법에 대한 것이다. 삼단논법은 세 부분으로 되어 있는 하나의 추론이다. 대전제와 소전제 및 결론이 그것이다. 이 삼단논법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으며, 스콜라 철학자들은 그 하나하나에 명칭을 붙였다. 그 중에서 가장 일반적인 것은 <바바라>(Barbara)라는 형식이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 (대전제)
소크라테스는 인간이다. (소전제)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 (결론)
또는
모든 인간은 죽는다.
모든 그리이스인은 인간이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이스인은 죽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두 가지 형식에 차이를 두지 않았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가 나중에 고찰해 보려고 하는 바이지만, 옳지 못하다)
또 다른 형식은 이러하다. 어떠한 어족도 이성적이 아니다. 모든 상어는 어족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상어도 이성적이 아니다(이러한 형식을 <켈라랜트>(Celarent)라고 불렀다).
모든 인간은 이성적이다. 소수의 동물은 인간이다. 그러므로 소수의 동물은 이성적이다(이 형식을 <다리이>(Darii)라고 불렀다).
어떠한 그리이스인도 검둥이가 아니다. 소수의 인간은 그리이스인이다. 그러므로 소수의 인간은 검둥이가 아니다(이 형식을 <페리오>(Ferio)라고 불렀다).
이 네 가지 형식이 <제1격>(first figure)을 이루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밖에 제2격과 제3격을 더 첨가하고, 스콜라 철학자들은 제4격을 더 첨가하였다. 제1격 이외의 각각의 격을 여러 가지 방법에 의해 제1격으로 변경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단일한 전제에서 할 수 있는 추리도 있다. 예를 들면 <소수의 인간은 죽어야 한다>에서 우리는 <소수의 죽어야하는 존재는 인간이다>라고 추리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이 결론은 <모든 사람은 죽는 것이다>에서 추리할 수 있다고 한다. 우리는 <어떠한 신도 죽지 않는다>에서 <죽는 존재는 다 신이 아니다>를 추리할 수 있으나, <소수의 사람은 그리이스인이 아니다>에서 <소수의 그리이스인은 인간이 아니다>라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와 그의 후계자들은, 위에서와 같은 추리를 무시하고, 모든 연역적 추리는, 엄밀히 표현하면, 삼단논법이라고 생각하였다. 또 그들은 모든 참된 삼단논법에서, 삼단논법의 각 형식 속에 포함되는 모든 추론을 분명히 하면, 모든 오류를 방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 체계는 형식 논리학의 시발이었다. 그리고 그런 의미로서는 중요하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다. 그러나 이것을 논리학의 시발이 아니라 궁극적 완성태로 생각할 경우에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비판이 가해질 수 있다.
1. 이 체계 안에 내포된 형식적인 결함
2. 다른 여러 가지 형식의 연역적인 추론에 비해 삼단논법에 대한 지나친 평가
3. 논리적인 형식으로서의 연역에 대한 지나친 평가
우리는 우선 아래와 같은 두 가지 진술을 비교하는 데서 시작해 보자.
♠ 형식적인 여러 가지 결함
<소크라테스는 인간이다>와 <모든 그리이스인은 인간이다>를 비교해 보자. 이 두 가지 진술은 분명히 구별해 놓을 필요가 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에서는 이 구별을 하지 않는다. <모든 그리이스인은 인간이다>라는 진술은, 흔히 그 안에 이미 그리이스인들은 존재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의미가 내포되지 않는다면, 그의 삼단논법 중에서 어떤 것은 옳지 못하다는 결론이 도출될 것이다.
<모든 그리이스인들은 인간이다. 모든 그리이스인들은 백인종이다. .그러므로 소수의 인간은 백인종이다.> 이것은 그리이스인들이 존재해야만 참되고 그렇지 않으면 참되지 못할 것이다. 예컨대 내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하자.
<금으로 된 모든 산은 산이다. 금으로 된 산은 금이다. 그러므로 소수의 산은 금이다.> 이 결론은 옳지 못하다. 그러나 이 전제들은 어느 의미에서 정당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내용을 분명히 표현하려면 우리는 여기서 <모든 그리이스인은 인간이다>라는 진술을, 두 가지 부분으로 나누어서 표현해야 할 것이다. 즉 첫째로 <그리이스인은 존재한다>와 다음으로 <만일 그리이스인이 어떤 존재자라면 그것은 인간이다>라는 두 부분이 그것이다. 또한 둘째 부분은 완전히 가언적이며, 그리이스인이 존재한다는 뜻은 그 안에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리하여 <모든 그리이스인은 인간이다>라는 진술은 그 형식에 있어서 <소크라테스는 인간이다>라는 진술보다 훨씬 복잡하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이다>에서는 소크라테스가 이 글의 주어로 되어 있는데 <모든 그리이스인은 인간이다>에서는, 주어가 될 <모든 그리이스인>을 실제로 갖지 못한다. <그리이스인은 존재한다>라는 진술에나 <그리이스인이 어떤 존재자라면 그것은 인간이다>라는 진술에는 <모든 그리이스인>이라는 말은 없다.
형이상학과 지식론에 있어서 여러 가지 오류가 생긴 근원은 이와 같은 순전히 형식적인 과오에 있었다. 예컨대 <소크라테스는 죽는다>와 <모든 인간은 죽는다>와 두 명제에 대한 우리들의 지식이 어떠한가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 소크라테스는 죽는다>라는 진술이 옳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우리의 대부분은 증언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증언이 믿을 만한 것이 되자면, 소크라테스를 알고, 또 그가 죽은 것을 본 사람에게 우리 자신을 이끌고 가야 한다. 소크라테스의 시체를 본 일이 있다는 사실과 또 그 시체가 전에 <소크라테스>라는 명칭으로 불렸다는 지식은 우리가 소크라테스의 가사성에 대하여 확신을 갖기에 충분하다.
그런데 <모든 인간은 죽는다>의 경우는 문제가 다르다. 그런 일반적인 명제에 대한 우리의 지식 문제는 결코 풀기가 쉬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때로는 단지 언어상의 명제에 지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모든 그리이스인은 인간이다>라는 명제는 인간이 아니면, 그리이스인이라고 부르지 않을 터이므로 알 수 있는 명제이다. 이런 일반적진 명제는 사전을 찾으면 알 수 있지만, 이런 명제는 실제로 세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고, 단지 그런 말이 어떻게 사용되는가를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죽는다>와 같은 명제의 경우에는 그것과 다르다. 죽지 않는 인간이라고 말할 때, 거기에 논리적인 모순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우리는 그런 명제를 귀납에 의해 믿게 되는 것이다. 세상은 (예컨대) 150세 이상 산 사람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 적이 없다. 그러나 만일 산 사람이 아직도 있다면 그렇게 단언할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형이상학적인 오류는 <모든 인간은 죽는다>에서 <모든 인간>이 주어가 되는 것이 <소크라테스는 죽는다>에서 <소크라테스>가 주어가 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는데서 생기는 것이다. 어느 의미에서 <모든 인간>은 <소크라테스>가 어떤 존재자임을 나타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떤 존재자임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어느 의미에서는 종도 실체라고 말한 것은 이 때문이지만, 그는 이 진술을 다른 것과 구별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후계자들은 특히 포르피리(Porphyry)는 이 점에 대하여 유의하지 않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마찬가지 실수로 하여 빠지게 된 또 하나의 오류는 어떤 술어의 술어(a predicate of a predicate)도 또한 그 처음 술어의 주어의 술어가 된다는 것이다. 내가 만일 <소크라테스는 그리이스인이다. 모든 그리이스인은 인간이다>하고 말할 경우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생각하기를 <인간>은 <그리이스>인의 술어이며, 또 <그리이스인>은 <소크라테스>의 술어가 되므로 분명히 <인간>은 <소크라테스>의 술어가 된다고 하였다. 그런데 실은 <인간>은 <그리이스인>의 술어는 아니다.
이름(name)과 술어의 차이나, 또는 형이상학적인 용어로 말하면, 특수개념과 보편개념의 차이는 그와 같이 해서 애매하게 된다. 그리하여 철학에 대해서는 매우 나쁜를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이러한 결과에서 생긴 혼란 중의 하나는, 유(class)를 그것의 구성요소 중의 하나와 동일하게 보는 데 있다.
이로 말미암아 하나라는 수에 대한 올바른 주장을 세울 수 없었으며, 여기서부터 단일성에 대한 끝없는 형이상학적인 미궁속에 빠져 들어갔던 것이다.
♠ 삼단논법에 대한 과대평가
삼단논법은 단지 연역적인 논의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수학은 모두가 연역적인데도 불구하고 삼단논법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물론 수학적인 논의를 삼단논법의 형식으론 고쳐 쓸 수도 있을 터이지만, 이것은 많은 기술을 필요로 하며, 또 더 알기 쉽게 되는 것도 아니다.
산술의 경우를 예로 들어, 16실링 3펜스에 해당하는 물건을 샀다고 치자. 그리고 1파운드의 지폐를 주었다면 거스름은 얼마나 받게 되겠는가. 이런 간단한 계산을 삼단논법으로 고치는 일은 어리석기 짝이 없으며, 또 문제의 본질을 그르칠 우려가 있다. 그리고 논리학 자체에서도 삼단논법이 아닌 추리가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말은 하나의 동물이다. 그러므로 말의 머리는 동물의 머리이다>와 같은 추리이다. 실상 참된 상단논법은 진정한 연역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다른 연역법들에 대하여 전혀 논리적인 우위를 차지하지 못한다.
철학자들은 연역에 있어서 삼단논법에 대해 우위를 주려는 태도에서, 수학적인 추리의 성격을 오인하게 되었던 것이다. 칸트는 수학이 삼단논법으로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수학은 특수한 논리적인 원칙을 사용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 원칙도 논리학의 원칙과 마찬가지로, 분명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자기의 선배들처럼 형태는 다르지만 결국은 아리스토텔레스를 존경한 나머지 과오를 범하게 되었던 것이다.
♠ 연역에 대한 과대 평가
그리이스인들은 대체로 현대의 철학자들보다 지식의 근원으로서 연역에 대하여 더욱 중요시하였다. 이 점에 대해서는 플라톤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과오를 덜 범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거듭 귀납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있으며, 아래와 같은 문제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즉 우리는 연역의 출발점이 되는 그 첫째 전제를 어떻게 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그런데 그는 다른 그리이스인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지식론에서, 연역에 대해 지나친 평가를 하였다.
가령 우리가 스미스씨는 죽는다고 생각하였다고 하자. 그때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우리가 스미스씨가 죽는다는 것을 안 것은 모든 사람은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모든 사람이 죽는다>는 것이 아니라, 150년 전에 난 사람은 모두 죽었으며, <100년 전에 난 사람들도 같다>는 점을 것이다. 이와 같은 이유에서 우리는 스미스씨는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이런 논리는 귀납적이요, 연역적이 아니다. 귀납법은 연역법보다 납득이 잘 가지 않는다. 그리고 오직 개연성을 지니고 있을 뿐 확실성이 희박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귀납법은 한편 새로운 지식을 줄 수 있지만, 연역법은 그렇지 못하다. 논리학과 순수 수학 이외의 중요한 추리는 모두 귀납적이며 연역적이 아니다. 그러나 법률과 신학은 예외이다. 이것들은 그 첫째 원칙을 의심할 여지가 없는 원본, 즉 법령 전서라든가 성서에서 끌어내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 중에는 <분석론 전서>(The Prior Analytics) 이외에 (여기에는 삼단논법이 취급되었다) 철학 사상에 매우 중요한 것들이 있다. 그 중에 하나가 비교적 짧은 <범주론>(The Categories)이다. 신플라톤주의자인 포르피리가 쓴 이 책의 주석서는 중세기 철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포르피리는 제쳐놓고 아리스토텔레스만 다루기로 한다.
나는 범주(category)에 대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나, 칸트나, 헤겔의 경우를 막론하고, 그것이 분명히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말하려면, 아직까지 그것을 한번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솔직히 고백하진 않을 수 없다. 나는 이 <범주>라는 용어가 철학적으로 유용한 말이라고 보지 않으며 또 어떤 분명한 개념을 나타낸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10가지 카테고리가 있다. 실체, 양, 질, 관계, 장소, 시간, 위치, 상태, 능동, 수동 등이 그것이다. 이 카테고리의 용어에 대한 정의가 오직 한 군데 있다. 그것은--<내용이 중복되지 않는 표현>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위에 열거한 것들이 곧 이어서 나열되어 있다. 이것은 아래와 같은 뜻인 것 같다. 즉 한 낱말의 뜻이 다른 낱말의 뜻과 중첩되지 않는 각 낱말은 실체를 의미하거나, 또는 양--등등을 의미하는 것 같다. 이 열 개의 카테고리가 어떤 원칙에서 나온 것인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다.
<실체>는 첫째 어떤 주어의 술어가 될 수 없는 것이며, 또한 주어에 있어서 현상하는 것도 아니다. 어떤 사물이 <주어에 있어서 현상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 주어의 부분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주어가 없이는 존재하지 못할 경우에 하는 말이다. 여기서 그는 다음과 같은 예를 들고 있다. 문법 지식의 일부는 마음에 현상하며, 어떤 종류의 흰색은 몸에서 나타난다. 위에서 말한 1차적인 의미에서, 실체는 어떤 개별적인 사물이나 개인이나 또는 한 마리의 동물일 것이다. 그러나 2차적인 의미에서 종이나 유, 가령 <인간> 또는 <동물>-도 실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 2차적인 의미는 자기 방어력이 약한 개념인 것 같다. 그것은 후세의 철학자들이 좋지 못한 여러 가지 형이상학으로 빠져 들어갈 길을 열어 주고 있다.
<분석론 후서>(The Posterior Analytics)는 대체로 연역론에서 문제삼아야 할 것을 다루고 있다. 즉 어떻게 해서 전체를 얻게 되는가 하는 문제이다. 대체로 연역에 있어서는 어떤 출발점이 있어야 하므로, 우리는 결국 입증되지 않는 어떤 것에서부터 출발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증명 이외의 다른 방법으로 알아야 한다. 나는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설을 상세히 설명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의 학설은 본질이라는 개념 위에 서있는 것이다.
그는 정의를 가리켜 사물의 본질적인 성질에 대한 진술이라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본질에 대한 개념은 모든 철학의 기본적인 부분으로 되어 왔다. 나는 이 개념이 절망적인 혼란속에 빠져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으므로 이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어떤 사물의 <본질>이라고 말할 경우에, <그 사물에 있어서 그 성질이 없이는, 그 사물의 동일성을 유지할 수 없는 성질>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소크라테스는, 때로는 행복할 것이며, 때로는 슬플 것이고, 때로는 건강한 것이며. 또 때로는 병들 것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이런 특성을 달리 지니고 있어도 여전히 소크라테스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므로 그런 특성들을 그의 본질의 일부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인간이라는 것은 소크라테스의 본질에 속한다. 그런데 소크라테스 학파에서는 윤회설을 믿고 있으므로 이를 인정치 않을 것이다. 사실은 <본질>에 대한 문제는 낱말을 어떻게 사용하느냐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여러 모로 다르게 나타나는 사건들에 같은 명칭을 붙이는데 그것은 우리가 그 상이한 하나하나의 사건들이 모둔 단일한 <사물> 또는 <인격>에서 나온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은 이것은 단지 언어상의 편의께 지나지 않는다.
소크라테스의 <본질>은, 그것이 없이는 <소크라테스>라고 부를 수 없는 성질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문제는 순전히 언어에 달려 있다. 왜냐하면, 하나의 낱말은 본질을 지닐 수 있지만, 하나의 사물은 본질을 지닐 수 없기 때문이다. <실체>의 개념도 본질의 개념과 마찬가지로, 단지 언어상의 편의에 지나지 않는 것을 형이상학적으로 변화시킨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세계를 기술함에 있어서 몇몇 사건들, <소크라테스>라는 사람의 생애에 일어난 사건들로서 기술하고, 또 다른 일련의 몇몇 사건들은 <스미스>라는 사람의 생애에 일어난 사건으로 기술하는 것이 편리하다.
이렇게 해서 <소크라테스>나 <스미스>를 몇몇 해에 걸쳐 존속해 온 사물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며, 그것들은 그들에게 일어난 여러 가지 사건들보다 더욱 <견고>하고 더욱 <실재성을 가진>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가령 소크라테스가 병들었다고 할 경우에도, 그는 다른 때에 건강하다고 생각하므로, 우리는 소크라테스가 그 병에서 독립된 것으로 본다. 그러나 병으로 말하면 한편 병에 걸린 다른 어떤 사람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병에 걸리지 않더라도 그가 존재하고 있는 이상 어떤 일이든지 그에게 일어나고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실제로 그에게 일어나는 사건들보다 더 <견고>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실체>라는 개념을 심각하게 다루면, 난점을 면하기 어렵다. 실체란 여러 특성들의 주체라고 하겠다. 그러고 그 특성들과도 구별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특성들을 다 저버리고 실체 자체만을 생각하려고 하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 문제를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보자. 즉 한 실체와 다른 실체를 구별하는 것은 무엇이겠는가? 실체에 대한 논리에 의하면, 그것은 특성의 차이가 아니다. 특성의 차이가 문제되기 이전에, 수에 있어서의 다양성이 전제되어 있다. 그렇다면 두개의 실체는, 그들 자체에 있어서 어떤 차이점을 갖는 것이 아니라 오직 둘이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들이 둘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실체>란 사건을 한묶음으로 모아 들이는 편리한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스미스씨에 대하여 무엇을 알고 있는가? 우리가 그에게 눈을 돌릴 때 한무더기의 색깔들을 본다. 그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느낌과 생각을 가지리라고 본다. 이러한 사건들을 떠나서 스미스씨란 무엇이겠는가? 많은 사건들과 관련된 한 개의 상상적인 갈구리(hook)가 아닐까. 그런데 실상이 사건들은 갈구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대지가 그 위에 놓일 코끼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는 지리학에서 지명에 대하여 그와 비슷한 경우를 볼 수 있다.
예컨대 <프랑스>란 말을 생각해 보자. 그것은 한낱 언어상의 편의에서 사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프랑스>라는 사물은 아무데도 존재하지 않고, 오직 그 여러 부분이 있을 따름이다. 스미스씨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그것은 일련의 사건들에 관한 집합명사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그것을 그 이상의 어떤 것으로 보려고 할 경우에, 그것은 전혀 알 수 없는 어떤 것이 되어버리며, 따라서 우리가 아는 것으로 표현할 필요도 없다.
<실체>는 요컨대 형이상학적 오류라고 하겠다. 또 이 오류는 주어와 술어로 된 문장상의 구조를 세계의 구조로 전환시키는 데서 오는 것이다.
나는 우리가 이 장에서 다루어 온 논리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은 전적으로 그릇된 것라는 결론을 내리려고 한다. 삼단논법의 형식에 관 입장은 틀린 것은 아니지만 중요성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없다.
오늘날 논리학을 배우려는 사람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이나 또는 그의 제자들의 저서를 읽는 것은 시간 낭비라고도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논리학의 여러 작품들은 큰 힘을 발휘하고 있으며, 만일 이 저작들이 아직도 지적 통찰력이 충분히 살아있을 때에 나왔던들, 인류에게 매우 유용한 것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저작들이 나온 것은, 그리이스 사상의 창조기가 거의 끝날 무렵이었다. 그리하여 이러한 저작들은 권위를 갖게 되었던 것이다.
논리적인 통찰력이 되살아나기까지는 2000년 동안이라는 세월을 기다려야 했으며 2000년 동안이나 주권을 행사해 온 아리스토텔레스를 그 권좌에서 끌어내리는 일은 매우 어렵게 되었다. 현대 전반에 걸쳐 사실상 어느 부분-과학이나, 논리, 철학 등-에 있어서나 모든 발전은 다 아리스토텔레스 사도들의 정면 반대에 부딪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