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 정의와 역사와 분류
심리학의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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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 James(1890) |
심리학은 정신 생활에 관한 과학으로서 그 현상과 조건 모두에 관한 과학이다... ...현상은 감정, 욕망, 인지, 사고, 의사결정 등과 같은 것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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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 Wunt(1892) |
심리학은 자연과학의 주제를 이루는 외적인 경험의 대상과 구별되는 내적인 경험(감가,감정, 사고, 의욕 등)을 연구하여야만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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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ngel(1910) |
심리학은 정상적이든 이상적이든, 인간이든, 동물이든 모든 것에 있는 모든 의식을 심리학자들이 기술하고 설명하고자 하는 주제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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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Watson(1919) |
심리학은 인간행동(행동하고, 말하는 것, 학습되었거나, 학습되지 않은 모든 것)을 주제로 삼는 자연과학의 일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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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 Koffka(1925) |
심리학의 문제는 생물이 외부세계와 접합 때에 나타내는 행동에 관한 과학적 연구라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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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tes(1931) |
심리학은 생체의 행동을 설명하는 일반법칙을 찾아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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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ring(1939) |
"인간이란 무엇인가?" 심리학은 이 질물에 답변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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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 Mume(1951) |
심리학은 일반적으로 "행동에 관한 과학"이라고 정의된다. 그러나 이제는 행동의 의미를 확장하여 사고와 같은 내적인 행동까지 포함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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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 Clark, G. miller(1970) |
심리학은 대개 행동에 관한 연구로서 정의되고 있다. 그 주제는 언어와 생리적 변화와 같은 관찰 가능한 행동적 과정들과 사고와 꿈과 같은 추리될 수밖에 없는 과정들이 포함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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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 Mayer(1981) |
심리학은 인간행동을 이해하기 위해서 동물의 행동을 연구하는 과학이며 이러한 순수한 연구측면 외에 인간문제 해결을 위한 과학적 연구결과를 응용하는 학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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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Morgan, R. King N. Robinson(1981) |
심리학은 인간과 동물의 행동을 연구하는 과학이며 이러한 순수한 연구측면 외에 인간문제 해결을 위한 과학적 연구결과를 응용하는 학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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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Wortman, E. Loftus (1981) |
심리학은 첫째, 행동에 관한 과학이다. 둘째, 과학적 연구에 기초한 학문이다. 셋째, 인간 복지향상의 수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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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의 역사
모든 학문의 근원은 고대 희랍의 철학에 있다고 하는 바와 같이 심리학의 기원도 거기에서 찾을 수 있다.심리학의 철학적 근원은 고대 그리스의 유명한 철학자이며 특히 지식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플라톤 (Platon)과 아리스토텔레스 (Aristotle)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군인으로서 또한 지식인으로서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용맹하다고 알려진 플라톤은 지식의 원천으로서의 감각을 의심했다. 그는 우리 감각은 곧은 막대가 물 속에서 휘어 보이는 것처럼 우리를 속인다고 생각했는데, 플라톤은 또한 인간은 타고난 지식을 지니고 태어난다고 믿었다.
그는 추론이 이러한 지식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한다고 믿었고, 이렇게 추론을 통해 지식을 획득하는 철학적 접근을 이성주의라고 불렀다. 플라톤은 꿈, 지각, 정신질환을 포함한 다양한 심리학적 주제를 연구하기 위해 이성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추론을 사용함에 있어, 플라톤을 비롯한 많은 철학자들은 잘못된 믿음에 근거하여 판단을 내렸죠. 즉 실제 과학적 사실과는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다. 다른 예를 들면, 물체를 볼 때 우리의 눈에서 빛이 발사되어 그 빛에 의해 물체를 본다고 잘못 판단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에는 비록 추론의 중요성을 받아들이기는 했으나, 경험주의라고 불리는 접근 방법을 택하였고, 지식의 원천으로서의 감각경험을 플라톤보다 중요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플라톤처럼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잘못된 결론에 도달하고 말았다. 예를 들어, 그는 강한 정서적인 경험을 하는 동안에는 뇌보다 심장이 더 민감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부정확한 지식이나 방법 등에도 불구하고 아리스토텔레스를 심리학사적으로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는 심리학적인 주제에 대해 형식을 갖추어서 깊이 생각한 최초의 사람이라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중세에는 철학자들보다 신학자들에 의해 심리학적인 질문이 연구되었다. 당시 이러한 질문에 가장 큰 관심을 가진 사람은 성 아우구스티누스라는 교부(敎父)였다. 젊은 시절의 아우구스티누스는 '내일 죽기 때문에 먹고 마시고 즐겨라'라고 하는 에피쿠로스 학파의 추종자로, 젊어서는 방탕했고 그의 이러한 생활은 기독교에 귀의할 때 까지 계속되었다. 그는 자서전인 '고백'에서 자기분석을 통해 기억과 정서, 동기에 대한 자기의 관점을 이야기하였고, 인간 이성과 동물적 열정, 특히 성욕 간의 지속적인 갈등에 대한 통찰을 프로이드보다 훨씬 더 먼저 제시하였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이성을 심리학적인 과정을 연구하는 데 사용하였으며 연구에 있어 과학적인 방법은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십자군 원정이 종교적인 신념에 의해 이루어진 중세 시대에는 경험적인 연구를 수행하는 것은 처벌을 무릅써야 했기 때문에 과학적인 연구는 거의 이슬람 지식인 들에게서만 이루어졌습니다. 이러한 세류를 극복하고 경험적인 방법을 사용하기 시작한 철학자가 바로 뒤에 살펴 볼 베이컨 (Bacon)입니다. 베이컨은 오감을 통해 지식을 획득하는 것을 강조한 아랍 과학자들에게서 영향을 받았고, 철학자들에게 있어 권위에 대항한 경험주의를 강조하여 결과적으로 종교학자들과 충돌하게 되었다.
14세기에서 16세기까지 지속되었던 르네상스 시기에는 중세와는 달리 인간이 다시 관심의 중심이 되었다.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서구의 과학자 및 철학자들은 신학보다는 철학에 의존하여 심리학적인 물음에 대한 답변을 내어놓기 시작했습니다. 르네상스 정신은 프랑스의 위대한 수학자이자 철학자이며 과학자인 데카르트 (Decartes)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최초의 현대적 이성주의자인 데카르트는 스스로의 추론으로 분명하게 증명되지 않는 모든 것은 의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실제로 그의 유명한 명제인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에서 그는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극도의 추론을 사용하였습니다. 데카르트는 종교적인 지도자들에 의해 제안된 주장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반대하는 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그의 이러한 견해 때문에 교회 지도자들은 그들의 권위에 대항하는 데카르트를 억압하기 위하여 그의 저서들을 금서로서 금지하기까지 이른다.
한편, 일부 지식인들은 이성주의보다 경험주의를 선호함에도 불구하고 데카르트와 마찬가지로 심리학적인 질문에 대한 신학자들의 답들을 인정하지 않게 된다. 이러한 지식인들 가운데 대표적 인물은 영국의 정치가이며 철학자이자 과학자인 프란시스 베이컨 (Francis Bacon)이다. 베이컨은 뛰어난 인물이지만 성격적으로 많은 문제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지식인으로서의 역할에서 베이컨은 증명, 체계적 관찰, 회의법 등을 사용하여 현대적인 과학의 틀을 잡게 된다. 영국의 철학자 로크 (Locke) 역시 베이컨과 같이 경험주의 철학의 선구자가 됩니다. 로크는 인간은 감각을 통해 얻어진 인생경험으로 채워 나가는 백지 상태에서 태어난다고 생각했다. 데카르트와 같은 이성주의자들은 지식이란 태어날 때부터 지니고 있는 것이라고 믿는 반면에, 로크와 같은 경험주의자들은 지식이란 단지 인생경험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이러한 유전과 인생경험의 상대적인 중요성에 대한 관심은 본성 (nature)과 양육 (nurture)의 논쟁으로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이성주의와 경험주의 사이의 절충은 독일의 철학자 칸트 (Kant)에 의해 비로소 이루어 지게 된다. 칸트는 지식이란 물리적 환경으로부터의 감각의 조직화와 이해의 생득적 정신기제에 의한 결과물이라고 생각하였다. 예를 들어, 비록 태어난 곳의 언어 경험에 의해 특정한 언어를 사용하지만 말하는 능력과 언어는 타고난 두뇌기제에 의존하므로, 동물은 언어를 학습할 수는 없지만 말을 들을 수 있고 언어의 기제를 지닌 동물들은 경험을 통해 언어의 학습도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심리학적인 주제를 연구함에도 불구하고 칸트는 심리학이 과학일 수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였습니다. 그는 정신은 직접 관찰하거나 측정하거나 조작할 수 있는 실체적인 것이 아니며, 더욱이 그 내용은 일정한 흐름에 있기 때문에 정신의 연구는 과학에서는 필수 불가결한 객관성을 결코 지닐 수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인간의 이해에 있어서 자연과학적인 측면을 강조한 된 것은 데카르트의 유기체론에서 출발했다고 볼 수 있다. 데카르트 이전에는 육처속에 있는 영혼인 마음을 이해하면 인간이해가 이루어 진다고 주장한 아리스토테레스의 사상과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에 기초한 중세 기독교 사상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종교개혁과 데카르트의 유기체론에 영향을 받아 생명현사에는 육체를 구성하는 사물 자체의 법칙도 관여되는 것이어서 모든 생명현상을 오로지 영혼의 작용에만 귀속시킬 수 없다는 사상이 대두하게 되었다. 또한 데카르트의 사상은, 그때까지 금기로 되어있던 인체해부도 자유롭게 되면서 신경생리학적인 연구가 활발하게 되었다. 그 후 Muller(1838)는 신경에너지의 원리를 밝혔다. Helmholtz(1850)는 신경충격의 속도를 측정하였으면, Weber(1846)와 Fechner(1860)는 물리적인 자극과 심리적인 감각 사이의 관계를 양적으로 측정하는 방법을 도출해냄으로써 반사의 신경기제를 밝혔다. 감가의 물리학적 근거를 찾는 데 이르러, 소위 정신 물리학의 발전뿐만 아니라 현대 심리학의 성립에 기초가 되었다.
한편으로 다윈(1809~1882)은 1859년 종의 기원이라는 책을 통해서 자연도태설에 근거한 진화론을 주장하였다. 생물은 환경에 적응할 수 있도록 진화했으며, 신의 자유의지에 의하여 현재 주어진 형태로 존재한다는 것이 아니라는 그의 주장은 심리작용이나 생명현상을 과학적인 방법으로 연구할 수 있는 길을 마련했다. 다윈의 여향을 받은 Galton(1822~1911)은 인간에게 유전적 특질에 따른 유전자가 있다고 주장하며 이러한 특질들을 측정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하기도 하였다. 물론 그가 고안한 측정 도구들은 원시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현대 지능검사와 성격검사의 원조가 되었다.또한 Pearson(1857~1936)과 Spearman(1863~1945) 등의 도움을 받아 상관관계의 기법을 포함한 통계적 방법의 개발로 현대 심리학의 과학적 방법에 크게 기여를 했다.
심리학의 역사에 있서 캐텔 (Cattell)은 최초의 심리학 교수라고 평가되고 있다. 여기서도 볼 수 있듯이 최초의 교수가 기껏 100년 전에 나올 정도로 과학으로서의 심리학의 발전은 아주 최근의 일이다. '심리학은 긴 과거를 지니고 있으나 그 역사는 짧다'고 한 에빙하우스 (Ebbinghaus)에 의하면 많은 지식인들이 고대 그리스 시대로부터 심리학적인 주제에 관심을 두어왔으나, 심리학은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비로소 독립적으로 분리된 학문이라고 한다
대부분의 심리학자들은 이러한 새로운 학문으로서의 심리학의 출발점을 독일의 생리학자인 분트 (Wundt)가 라이프찌히 대학에 실험실을 개설한 시기로 보고 있다. 분트는 1874년 '생리 심리학의 원칙'이라는 역사적인 저서에서 과학적인 심리학을 위한 그의 생각을 밝혔다. 그의 책 제목에서 생리라는 용어를 사용한 이유는, 생리 심리학 자체가 주제라기보다는 인간의 생리적인 과정을 연구하기 위해 생리학자들이 사용하는 과학적인 방법을 적용했기 때문이다.
1875년에 분트는 라이프찌히 대학에서 학생들의 저녁식사를 위해 사용되던 작은 방에 연구실을 마련하게 된다. 이전에 있어왔던 분트의 연구실에 대한 요청은 마음이나 파고 따지게 만드는 심리학과 같은 학문이 발전되는 것이 달갑지 않았던 학교 당국에 의해 거부되었다. 1879년 초 분트의 연구실은 캐텔과 같이 유럽과 북미의 유명한 심리학자들에게 연구의 장이 되었다. 분트가 라이프찌히 대학에 실험실을 개설한지 꼭 100년 되는 해인 1979년, 심리학자들은 심리학 100주년을 기념하고 각종 행사 등을 통해 분트의 업적을 기렸다.
순수 심리학
- 실험심리학 과목은 원서로 배워서인지 해석하다가 끝난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요.
임상 심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