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에서의 실재론 -3
Realism in Mathematics
3. 직 관
지금까지 나는 적절하게 이해된 집합들이 지각될 수 있다고 주장해왔다. 이것이 절충적 플라톤주의에 관한 베나세라프 스타일의 염려들에 대해 대답하기에 충분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집합론적 앎에 대한 설명의 가장 빈약한 출발점을 제공할 뿐이다. 예를 들어 물리적 대상들의 특정한 집합들에 관한 개별적 사실들에 대한 우리의 앎과 가장 단순한 집합론적 공리들에 관한 우리의 앎 사이의 관계는 무엇인가? 예를 들어 우리는 어떻게 임의의 두 대상들이 정확하게 두 원소들을 가진 집합으로 묶여질 수 있는지를 아는가, 혹은 임의의 두 집합의 원소들이 그것들의 합집합인 집합들로 결합될 수 있는가? 이들 일반적인 믿음들은 가장 기초적인 집합론적 공리들중 두가지-pairing과 union-의 기반을 이루고(underlay),우리의 인식론은 그것들을 설명해야만 한다.
수학과 자연 과학 사이의 주어진 우리의 유비에 대해, 먼저 물리 과학에서의 비교가능한 (comparable) 믿음들의 원천을 물어보자. 기초적인 물리적 앎의 기본적인(rudimentary) 설명들은 거의 대부분(most often) 단순한, 열거적인(enumerative) 귀납(induction)과 함께 시작한다. : 내 샘플의 모든 백조는 하얗다. ; 따라서 나는 모든 백조들은 하얗다고 결론짓는다. 우리가 가장 기본적인 집합론적 믿음들은 동일한 방식으로 정당화된다고 주장할 수도 있지만, 이 방향(line)은 설득력이 없다.(unconvincing)118)119)
이것은 결국 집합론이 물리 과학과 극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가? 유비가 있는 곳에, 유사성들 뿐 아니라 차이점도 있어야만 하지만, 나는 우리가 아직 수학과 자연과학에 대한 우리의 비교가 더 이상 필요가 없는 곳까지 도달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차라리 나는 우리가 상세한 것에 부적절하게 채워져 있다(we've filled in the details incorrectly) 생각하고, 우리 원초적인 일반적 집합론적 믿음들이 실재로는 단순한 열거적 귀납이 아니라 단순한 귀납적 뒷받침에 종속된다기보다 그것들의 집합론적 counterpart들에 종속되는 물리적 대상들에 관한 원초적인 일반적 믿음들에 대응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물리적 대상들이 인간 관찰자(viewer)와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그것들이 운동에서의 자신들의 상태에 독립적이라는 아이들의 hard-won belief들을 고찰해 보자. 이것들이 특정한 예들의 관찰에 의해 시험될 수 있을까? 찻잔이 그것이 테이블을 가로질러 움직일 때 존속한다(persist)는 관찰은 유사한 커피잔들에 대한 관찰들에 의해 제시된 것 이상의 입증(support) 덧붙이는가? 분명히 아니다. 이것들은 단순한 열거적 귀남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는 물리적 대상들에 관한 원초적인 일반적 믿음이다. 우리는 물리적 대상들이 그들을 관찰하고 있는 사람이 없을 때에 존속하는가 하지 않는가를 아는지에 대해 점검할 수(check to see) 없지만,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믿고, 이런 종류의 믿음은 가장 기본적인 세계에 대한 우리의 물리 이론의 단계에서 나타난다.
Hebb의 신경 작용들에 대한 분석은 그것들의 원천에 대한 하나의 가능한 설명을 제시한다. 삼각뿔의 반복적인 봄들이 크기와 방향과 같은 것들의 각(angel)들에 대응하는 1차적 cell-assembly의 발달로 귀결된다는 것을 상기하라. 이 단계에서의 assembly들은 시각 장(場)에서의 특정한 윤곽(contour)들, 단순한 맛들(tastes), 국한된(localized) 촉각적(tactile) 압력들, 그리고 이와 같은 것들에 대응한다. 이 단순한 단계에서의 assembly들을 산출하는 동일한 매카니즘들은 통합된 삼각형 assembly와 같은 고차적 assembly들을 산출할 수 있다. 유사하게 한 측면에서 반복하여 단일 대상들의 봄은 대상들의 부분들에 대한 1차적 assembly들을 통합하는 2차적 assembly를 산출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대상의 규정(manipulation)이나 운동하고 있는 그것을 보는 것은 대상들의 다양한 관점들에 대한 assembly들을 통합하는 3차적 assembly의 발달을 허용한다. 이 지점에서 대상들의 지각은 이들 모든 assembly들의 자극들의 복잡한 phase 시퀀스를 포함한다.120)
장소에서의 이들 매카니즘들과 함께(with these mechanisms in place), 주체는 독립적이고 지속적인 물리적 대상들을 지각할 수 있다. 그러나 신경 발달들이 여기에서 끝나는 것이라고 가정할 이유는 없다. Hebb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
사물, 대상, 공간-점유(space-occupying), 그리고 가시적이고 만질 수 있는 대상들이 주목될 때 유아의 상대적으로 적은 수의 상이한 상황들에서 보통 혹은 항상 활동하는 신경세포들(neurons)로 구성된 고차적 cell-assembly의 활동과 같은 감각을 자극하는 어떤 것에 관한 일반화된 아이디어는 ... 근본적인 것이다. 이들 신경세포들은 그렇나 경우들 중 임의의 하나에서 활발한(excited) 전체 수(total number) 중 작은 부분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들 신경세포들은 여전히 절대적인 용어들에서 큰 수들일 수도 있다. 그러한 assembly의 이론적인 가능성은 분명하고, 그것의 존재에 대한 심리학적 뒷받침도 분명하다. (Hebb(1980), 109)
이 4차 assembly는 물리적 대상의 일반 개념과 대응할 것이다. 그것은 그것의 좀 더 일반적인 특질들에 관심이 맞추어질 때 phase 시퀀스가 특정한 물리적 대상의 지각과 연결된 동안 흉내내어질(simulated) 것이다.
그러한 assembly를 가진 주체는 자동적으로 그것을 모방하는(simulate) 대상들의 본성에 관한 다양한 일반적인 믿음들을 가질 것이다. ; 우리는 이들 믿음들이 3면을 가짐(three-sidedness)가 하나의 모서리에서 다른 모서리로의 눈 이동을 자극하는 형태의 메커니즘들에서 triangle-detector로 구성되어 들어가는 것과 거의 유사하게, 혹은 1차적 모서리 성분들(component)의 형식에서의 three-angledness와 거의 유사하게 cell-assembly로 ‘구성되어 들어간다’(built into)고 말할 수도 있다. 조야하게 제시해서, 한 triangle-detector의 구조는 임의의 삼각형을 세면을 가진 것이라고 믿는 것을 보장한다. 유사하게 물리적 대상 assembly를 가진 누군가는 물리적 대상들은 ‘공간-점유적이고 감각 -자극적’이라고 믿을 수 있다. Hebb의 예들, 혹은 관찰-과 궤도(trajectory)-독립을 사용해서, 앞서 언급된 예들을 사용해서 말이다. 이것들은 적절한 고차적 assembly를 자극하는 모든 것의 본성에 관한 원초적이고, 매우 일반적인 믿음들이다. 나는 그것들을 ‘직관적인 믿음들’이라고 부른다.
물리적 대상들에 유효한 것(what goes for)은 집합들에 대해서도 유효하다. : 특정한 집합들에 대응하는 고차적 cell-assembly들의 발달은 집합의 일반적 개념들에 상응하는 고차적 assembly도 발생시킨다. 이 일반적 cell-assembly의 구조는 그래서 집합들에 관한 다양한 직관적 믿음들의 원인이 된다. 그것들이 수 속성들을 가진다는, 이들 수 속성들이 그 원소들이 움직일 때(barring mishap) 변하지 않는다는, 그것들이 다양한 부분집합들을 가진다는, 그것들이 결합될 수 있다는 등등의 예의 원인이 된다. 그리고 이들 직관들은 집합들에 관한 우리의 과학적인 이론의 가장 기본적인 공리의 기초를 이룬다.121)
나는 누군가의 일반적인 물리적 대상 assembly의 구조가 물리적 대상들에 관한 명가지 직관적인 믿음을 제시한다고 주장해왔다. 예를 들어 대상들은 상이한 관점들에서 볼 때 상이하게 보이거나 우리가 더 이상 그것들을 보지 않을 때 그것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누군가의 일반적인 집합 assembly가 집합들에 관한 한가지 직관적인 믿음들을 제시한다. 예를 들어 임의의 두 대상은 하나의 집합으로 묶어질 수 있다. 물론 이들 믿음들을 이런 방식으로 기술하는 것은 기만적인데, 왜냐하면 그것들은 사실상 언어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두 아이(a child of two)는 특정한 물리적 대상들을 완벽하게 지각할 수 있고, 그래서 일반적으로 물리적 대상들에 관한 직관적 믿음을 가지고 있거나 곧 가지게 될 것이지만, 그것들을 나처럼 표현할 어휘능력이 없다. 요약하면 그러한 믿음들은 언어적 용어들이 없는 사람들에게 접근 가능한 것이지만, 개념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접근가능하지 않다.122)
그런 후 물리적 대상들과 집합들에 관한 그러한 원초적이고, 일반적인 믿음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 우리는 그것들의 인식론적 지위를 탐구해야만 한다. 그것들이 귀납적으로 뒷받침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주지되었지만, 이것은 그것들이 임의의 의미에서 오류가 없는 것(infallible)이라는 것을 함축하는 것으로 간주되어서는 않된다. 잠재적인 오류의 첫 번째 그리고 가장 분명한 원천은 직관적인 믿음에서 언어적 구성으로의 불확실한 이행에 있다. 가장 심하게 작동하지 못하는 것(the most severely disabled)은 결국 필수적인(requisite) cell-assembly들에 도달하기(attain) 때문에, 시도된 언어적 구성에 관한 광범위한 일치는 그것의 옳음에 대한 최선의 주장들(its best claims to correctness) 중 하나를 구성한다. 이런 설명에서 어떤 원리의 직관성에 관한 혼자인 과학자의 주장을 의심하는 것은 정당한 것이다. 만약 극소수의 다른 과학자들만이 이 의견을 공유한다면 말이다.123)
잠재적 오류의 두번째 원천은 직관적인 믿음 자체가 거짓이라는 구분된(distinct) 가능성이다.124)125)
이것은 중심적인 인식론적 의문들을 강조한다.(highlight) : 믿음의 직관성이 그것의 편애(favour) 속에서 설명되는가? 어떤 주장이 우리에게 분명한 것으로 다가오는 범위, 그리고 이 분명성의 정도에 대한 공동체의 찬성의 정도, 그리고 양자 모두는 그 주장이 원초적인 직관적 믿음의 훌륭한 언어적 버전이라는 증거를 구성한다. 우리는 이미 직관적 믿음들 자체가 거짓일 수 있고, 직관성은 결정적인 증거가 아니며, 반대되는 이론적 증거들에 의해 보다 무겁게(outweighed) 간주될 수 있다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것이 그 주장의 진리에 대한 어떤 뒷받침을 하는가의 여부를 묻는다. 그러한 증거가 집합론의 역사에서 다양한 공리들에 의해 설명되어 왔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이 실행을 위한 임의의 이론적 근거(rationale)는 있는가?
이전의 게티어의 문제와 인과 이론에 관한 논의의 연장선상에서, 우리는 우리의 의문을 다음과 같이 고쳐 말할(rephrase) 수도 있다. : 참된 직관적 믿음을 앎이라고 간주하는가?(does a true intuitive belief count as knowledge?) 이 번역(rendition)은 우리가 이미 직관적인 뒷받침이 그 자체로는 어떤 주장을 충분히 정당화하기에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했기 때문에 믿을 수 없는 것(deceptive)이다. 그러나 나는 이 구성이 주된 문제에 초점을 맞추는데 사용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게티어에 대한 답변에서 골드만이 앎의 전통적인 정당화된-참된-믿음 설명에 인과적인 요구(requirement)를 덧붙였고, 이 요구가 많은 사람들에게 플라톤주의에 치명적으로 상처를 주는(fatally damaging) 것으로 보여졌다는 것을 상기하라. 그러나 우리의 직관적 믿음들은 우리의 cell-assembly들의 산물들이다. 그리고 그것들-우리의 최초의 뇌 구성과 우리 아이들의 물리적 대상들과 집합들과의 상호반응들의 합을 결정하는 우리 선조들에게 가해진 진화적인 압력들의 결합(combination)-은 산출하는(responsible for generating) 그 과정들은 인과적이다. 그것들은 적절하게 인과적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진화적인 압력을 행사하는 동시에 어린아이들의 상호반응들을 제시하는 환경에 관한 상응하는 일반적인 사실들이기 때문이다. 그 문제는 이제 골드만의 부가(addition)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전통적인 요구들 중 하나로부터, 즉 그 믿음이 정당화된다는 사실로부터 나온다. 스티브의 Pairing 공리에 대한 믿음은 직관적일 수도 있다.- 그 공리는 그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분명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만약 그가 이들 감정들 이상의 정당화를 제시할 수 없다면 무엇인가?(what if)
이 의문을 직관적 증거에 대한 노골적인(outright) 반박들에서 돌아서는 것은 정당화는 항상 인식자(knower)에 활용 가능한 확신을 주는 일련의 이유들(convincing series of reasons avaliable to)의 형태를 취해야만 한다는 가정을 요구할 것이다. 현대 인식론에서 이것은 ‘내재주의’(internalism)이라 불린다.126)127)
나는 여기서 스티브가 Pairing 공리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정당화할 준비가 되어야 한다는 요구를 거부하면서 외재주의의 편을 든다. 이런 견해에서 인과적 과정, 즉 일반적으로 참된 믿음들에 귀결되는 종류의 과정이 그 믿음을 ‘신뢰할만한’(reliable) 것이라고 보증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이것은 지각의 경우, 병아리 감별사의 경우에 참이고, 만약 우리의 가정들이 옳다면 직관적인 경우에도 역시 그렇다. 그래서 Pairng이 분명하게 참이라는 스티브의 확신의 힘은 다른 것들에 대한 유사한 확신들의 유행(prevalence )과 더불어, Pairing이 직관적 믿음의 훌륭한 언어적 표현(rendering)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하고, 믿음이 주로 직관적인 lend들이라는 사실은 그것이 참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한다. 만약 Pairing이 실재로 참이라면, 그리고 도 다른 이론적 뒷받침이 제시된다면-예를 들어 그 공리가 일관적이고, 그것이 기대했던 종류의 정리들을 산출한다면-, 스티브의 믿음은 앎에 상응하는 것(amount to knowledge)일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직관적인 증거에 대한 하나의 특성(peculiarity)이 환기되어야만 한다. 직관적 믿음의 획득(acquisition)은 어떤 특정한 경험에도 의존하지 않는다. 즉 임의의 충분히 풍부한 경험의 과정은 the required cell-assembly들을 산출할 것이다. :
시각적 지각의 경우 어떤 assembly들이 발달하고, 또 지각의 기초가 되는가는 완전히 그 유기체의 내재적 속성-, 즉 눈 근육들의 반사작용에 의존한다. 그리고 또한 striate와 peristriate cortex의 내재적으로 결정된 구조에도 의존한다. -그 이론에 의하면-, 그것은 cell-assembly들의 구성을 불가피한 것(inevitable)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보통의 시각적 환경들에 주어진 것이다.(given exposure) (Hebb(1980),105)
그래서 경험이 개념들을 구성하는데 필요하다고 해도, 일단 그 개념들이 자리잡으면(are in place), 직관적인 믿음들을 산출하는데 더 이상의 경험은 필요 없다. 이것은 직관적 믿음들이 자신들의 직관적으로 존재함(being intuitive)에 의해 뒷받침되는 한, 그 뒷받침은 ‘순수하지 않게 선험적인’(impurely a priori)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 원초적으로 수학적인 믿음들이 선험적이라는 사실이 따라나오지 않는다는 것에 주의하라. 적절한 이론적 뒷받침들의 보증(corroboration)이 없는 한, 단순한 추측들 이상의 것으로 인정될 수 있는 직관적 믿음을 없다.
나는 또한 여기에서 논의된 특정한 수학적 직관들이 결코 그 이야기의 끝이 아니라는 것도 강조하고 싶다. 나의 집합 지각에 대한 관심 때문에, 나는 중간 크기의(medium-sized) 물리적 대상들의 작은 집합들에 대한 지각에 포함된 직관들에 관심을 집중해 왔지만, 나는 이들 이산적인(discrete) 직관들, 즉 수 이론과 집합론의 초기를 무너뜨린 직관들이 집합론적 앎에 대한 완벽한 설명에 적합한(relevant to) 직관일 뿐이라고 주장하고 싶지 않다. 이와 함께 시작하여(to begin with), 물리적 대상을 지각하는 것의 일부는 그것을 외재적인 공간 내에 존재하는 것으로서 지각하는 것, 즉 그것과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공간의 경계(boundary)를 지각하는 것이다. 이 공간의 개념과 경계 혹은 모양을 지각하는 능력은 물리적 대상 자체의 개념과 더불어 발달한다. 아이들의 환경과의 상호작용의 결과로서 말이다.128)물(correlate)은 부분적으로는 모양(figure)의 끝들을 따르는 눈-운동들에 대한 motor stimulation들에 의해 구성된다. ; 지각된 모양들은 tracing의 행위들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그후로부터(thereafter) 어린아이들이 이산적 집합 개념에 귀결되는 포함, 묶음, 열거(enumeration)의 개념들을 점차적으로 발달시키는 것처럼, 그것들도 부분/전체, 포함, promity보다는 enclosure relation, 묶음보다는 거리, 수보다는 양(measurement)에 근거한 평행하는 개념들(parallel ideas)을 발달시킨다.129) 그것들의 집합론적 counterpart들과 같이 시작한 지각과 행위에서의 이 발달들은 결국에는 연속적인 구조들과 같은 선들-모서리들, 평면의 교차들, 궤도(trajectory)들-의 지각에로 귀결된다. 10살이나 12살 경, 아이는 원초적인 연속성의 개념을 드러내는 기하학적 도형들에 관한 직관적인 믿음을 표현한다.
이들 직관들은 산술에서의 이산적 대상들에 관한 직관의 역할과 자연과학에서의 물리적 대상들의 역할과 유비되는 기하학과 해석학에서의 우리의 체계적인 사유에서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부분적으로 그것들은 밀도(density)의 분명성, 심지어 데데킨트 스타일의 연속성 공리들에로도 귀결된다.130)131)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반복해보자. : 나는 우리의 집합들의 이론들에 대한 모두이거나, 혹은 대부분의 인식론적 뒷받침이 직관적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많은 경우들에서 집합론적 방법론은 소수의 자명한 진리들을 적어 내려가 논리적 귀결들을 이끌어내는 수학자들의 케리커쳐보다 자연 과학자의 가설 구성과 실험과 더 공통점이 많다. 과학/수학 유비가 지시하는 것처럼, 우리의 집합론적 가설들은 이론적이거나 외재적인 뒷받침을 요구한다. 즉 자연과학에서처럼 증명가능한(verifiable) 귀결들, 부당성 증명(disconfirmation)의 결여, 폭(breadth)과 설명력, 상호이론적(intertheoretic) 연관성, 단순성, 정밀함(elegance), 등등에 의한 뒷받침을 요구한다. 현대 집합론에서의 그러한 비-직관적, 비-증명적 정당화들은 4장에서 스케치될 것이다.
4. 궤델적 플라톤주의
이 장에서 나는 집합론적 실재론, 즉 절충적 플라톤주의의 한 버전의 인식론적 출발점들을 스케치해왔다. 이 견해와 콰인/퍼트남 플라톤주의 사이의 차이점들은 1장의 마지막 절의 논의로부터도 충분하지만, 그것의 궤델적 플라톤주의와의 관계성은 그다지 명확하게 도출되지 않았다. 나는 궤델에 대한 나의 중요한 부채(debt )를 좀 더 자세하게 다룸으로써, 그리고 우리의 주요한 불일치점을 보임으로써 이 장을 끝마칠 것이다.132)
궤델의 플라톤주의는 수학과 자연과학 사이의 유비, 그가 럿셀까지 거슬러 추적해가는 유비에 의존한다.133)
그의 주장에 살을 붙이기(flesh out) 위해, 궤델은 우리의 일상적인 감각 경험들을 상세하게 고찰하고,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
물리적 경험의 경우, 우리는 우리의 대상들 .. 에 대한 ... 개념들을 즉각적으로 주어진 어떤 다른 것을 기초로 구성한다. ... 감각작용들(sensations) 이외의 어떤 것이 실재로 즉각적으로 주어진다는 사실은 ... 물리적 대상들을 지칭하고 있는 우리의 개념들이 감각작용이나 단순한 감각작용들의 결합들과는 질적으로 상이한 구성요소들을 포함한다는 사실로부터 ... 따라 나온다. ... (궤델(1974/64), 484)
여기서 집합론적 실재론자는 망막적 자극과 지각 사이의 갭을 연결하는 이 여분의(extra) 구성요소의 원천이 neural cell-assembly라는데 동의하고 주장한다. 그(집합론적 실재론자)는 또한 이 지각적 경험의 지각적 구성요소들이 ‘객관적 실재들의 측면을 표상하지만, 감각 작용들과 반대되는 것으로서라고 주장하고, 그것들이 우리 들 속에 나타나는 것은 우리 자신들과 실재들 사이의 또 다른 종류의 관계성에서 기인되는 것일 것이라고 주장한다’(궤델(1947/64), 484) 집합론적 실재론자에게 있어, 이 ‘또 다른 종류의 관계성’은 cell-assembly를 산출하는 복합적인 인과적 과정, 즉 우리의 선조들에게 미친 진화론적 압력들과 유년기의 대상들에 대한 경험이다.
이제 수학의 무엇인가?(what of mathematics?) 궤델은 계속해서 수학의 기반을 이루는 ‘명시적으로 “주어진”(Evidently the "given")이 우리의 경험적 개념들에 포함된 추상적 요소들과 밀접하게 연결되어있다’고 주장한다. (궤델(1947/64), 484) 다시 집합론적 실재론자는 여기서의 ‘주어진’이 가장 단순한 집합론적 공리들의 기반을 이루는 직관적 믿음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면서 동의한다. 이들 직관들 : 대상과 집합 개념들은 우리의 지각적 믿음들의 ‘추상적 요소들’의 원인이 되는(responsible for) cell-assembly들과 ‘밀접하게 관련된’ 것이다. 그러한 경우들에서 ‘공리들은 스스로를 우리에게 참인 것으로 강제한다’134)
마지막으로 궤델과 나는 모든 공리들이 직관적 근거들에서 정당화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과학/수학 유비가 한 단계 더, 과학적 가설들의 단계에까지 확장되어야만 한다는데 동의한다. :
그 공리들은 반드시 그들 자신들 속에서 자명해야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들의 정당화는 (정확히 물리학에서와 같이) 그것들이 연역된다는 것을 이들 ‘감각 지각들’에 대해 가능하도록 만든다는 사실에 있다. ... (궤델(1947/64)
수학적 직관 외에도 또 다른 (증명가능할(probable) 뿐이지만) 수학적 공리들의 진리성의 기준이 존재한다. 그 기준이란 수학에서의 그리고 누군가 덧붙인다면 물리학에서까지 그것들의 성과(fruitfulness)이다. (궤델(1947/64), 485)
그는 이들 정당화들이 취할 수도 있는 다양한 특정한 형식들의 목록(a list of various particular forms these justifications might take)도 제시한다. :
여기서의 성공이란 귀결들에서의, 특히 ‘증명가능한’(verifiable) 귀결들, 즉 새로운 공리들 없이 증명가능하고, 새로운 공리의 도움에 의한 증명들이 매우 단순하고 발견하기 쉬우며, 많은 상이한 증명들을 하나의 증명으로 축소하는(contract) 것이 가능하도록 하는 귀결들 속에서의 성과를 의미한다. 직관주의자들이 거부하는 실수들의 체계를 위한 공리들은 이런 의미에서 어느 정도까지, 분석적 수 이론이 종종 좀 더 성가신(cumbersome) 방식으로 초보적인 방법들에 의해 그 결과로서(subsequently) 증명될 수 있는 수 이론적 정리들을 증명할 수 있도록 한다는 사실 때문에, 증명되어 왔다. (궤델(1947/64), 477)
그리고 앞서 인용된 구절에서
그것들의 증명가능한 귀결들에서 매우 풍부하여 -전체 영역에 많은 빛을 비추면서, 문제들을 해결하는 그러한 강력한 방법들을 만들어내면서- 그것들이 [직관적]인지의 여부와 관계없이 최소한 잘 구성된 임의의 물리 이론에서와 같은 의미에서 인정되어야만 한다. (궤델(1947/64), 477)
예들은 이들 정당화된 형태들 각각과 그와 같은 다른 것들에 대답하면서 4장에서 기술된다.
이 궤델의 저작들에 대한 신속한 개관은 확실히 집합론적 실재론이 동일한 계열을 따르는 또 다른 발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을 제시한다. ; 사실 그것은 ‘the "given" underlyng mathematics'와 ‘우리의 경험적 개념들에 포함된 추상적 요소들’ 사이의 관계성에 관한 구절이었다. 더구나 Chihara는 나의 인용들과 자료들이 매우 선택적이고, 어떤 때는 매우 기만적이라는 것을 올바르게 지적하였다.135)136)
물론 집합들을 물리적 세계로 가져가고( bring into) 수학적 직관을 일상적인 지각과 매우 밀접하게 연결하려는 나의 동기는 자연주의(naturalism)이다. ; 집합론적 실재론은 내게 수학적인 존재론과 인식론을 우리의 전체적 과학적 세계관에 맞추기 위해 가장 유망한 접근으로 보인다. 대조적으로 궤델은 집합들을 전통적인 플라톤적 실재들로 정의할 뿐 아니라, 비물리적, 비공간적, 정신적(mentalistic) 모나드들의 영역을 가정하기도 한다. 그 이유에 대해 물을 가치가 있다.
다음의 문제를 고찰해보자. : 인간 정신은 유한하고 집합론적 hierarchy는 무한하다. 아마도 나의 정신과 반복적 hierarchy 사이의 임의의 접촉은 기껏해야 무한히 많은 후자의 구조를 포함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경우, 나는 내가 겨우 파악할 수 있는 작은(minuscule) 유한한 부분에서만 표준적 hierarchy와 일치하는 또 다른 구조들의 군(群) 중 임의의 하나에도 연결될 수 있다. 베나세라프에 의하면 궤델은 자신의 모나드들이 이 유한성의 문제에 면역되어 있다고 짐작했다. 즉 그것들은 full hierarchy에 대한 모호하지 않은(unambiguous) 접근을 획득할 수 있다.137)
우리의 유한한 정신들이 어떻게 무한과 접촉할 수 있는지의 의문은 크맆케에 의해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해석에서 매우 일반적인 구성을 얻는다.138)139)해왔던 모든 것이 크맆케의 시공간적 worm을 구성하고 있는 것(a being consisting of Kripke's space-time worm)에도, 그리고 퍼트남의 afterwards에도 적용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 결론들은 지나친 것(outrageous)으로 보일 수도 있고, 사실 그것들은 그래야 하지만, 나는 흥미를 느끼는 독자에게 좀더 완벽한 이 매력적인 역설의 해설들을 남겨둘 것이다. 여기서 내가 하고자 하는 모든 것은 -궤델의 동기에 비추어- 내가 자연주의적 해결책의 주된 구성요소들(ingredients)로 간주하는 것을 보이 것이다.140)
이 지점에서 실재론자는 삼각형들이 사각형들과 같은 다른 것보다 더 서로와 비슷하다는 객관적인 사실, 즉 1장의 두번째 절에서 지적했던 표본(random)과 자연적 묶음들 사이의 객관적인 차이점이 있다는 사실에 기대야만 한다.141)142)
나는 이 장에서 나의 궤델과의 중심적 불일치점의 본성과 기원을 명확하게 만들고자 하였다. 이것은 위의 1장에서의 수학적 실재론의 구성에서나, 이장에서 제시된 수학적 지각과 직관에 대한 설명의 구성에서도 그의 사유에 대해 내가 분명하게 지고 있는 빚을 모호하게 만들어서는 안된다. 그의 영향력은 내가 이론적인 증거와 정당화의 주제를 다루는 4장에서 또다시 분명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좀더 난해한 인식론적 연구에로 돌아서기 전에 플라톤주의에 대한 또 다른 베나세라프적인 염려, 즉 존재론적인 염려를 이번에 다루었으면 한다.
[끝].
NUMBERS
1. What numbers could not be
널리 인용되는 플라톤주의에 대한 인식론적 도전은 지금까지의 나의 초점이었고, 나는 다음 장에서 비록 수학적 지식의 덜 말해지는 것이긴 하지만 동일한 중요성을 취하기 위해 인식론에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하기 이전에 나는 몇몇 관측들이 인식론적인 도전과 같이 거의 기세가 꺽인 것으로 간주하는 플라톤주의에 대한 정교한 존재론적 도전을 논의하는 것을 무시하지 않을 것이다.143) 집합론적 실재론자의 대답은 이미 말해졌던 것에서 암묵적인 것이지만, 이것을 보기 위해, 그리고 상세한 것들을 끌어내기 위해 어떤 노력이 취해질 것이다.
단순화된 또 다른 접근으로 그 문제의 틀을 만들어보자. 기초적 이론으로서의 집합론의 출현은 우연하게 수렴된 두 분리된 발전의 계열들로 추적할 수 있다.144)145)146)
그러는 동안 좀더 철학적인 방향에서 프레게는 보통의 산술에 대한 기초를 제시하는데 관심을 가졌다.147)148)149)
여기서 우리는 과학적인 성공담을 가진다. 그러나 그것은 수들을 집합들과 동일시하는 것에 의존한다. 1장의 처음 명 페이지들에서 나는 집합론의 철학과 기초들이 모든 수학적 대상들이 집합들로 적절하게 간주될 수 있는지의 여부에 개의치 않지만, 그 주제의 이론적 정당화, 즉 그 주제의 동기가 이들 개별적인 동일화들에 주로 의존하는 이 경우에서 집합론적 환원의 본성과 속성에 관한 철학적인 의문들은 제쳐놓을 수 없다. 내가 이번 장에서 고찰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 (집합들과 수들 사이의 관계성의) 의문이다.
이 문제의 원천을 보기위해 잠시동안 프레게로 돌아가 그의 중심적인 존재론적 의문을 제고찰해보자. : 수란 무엇인가?
“정원에 놀고 있는 두 소년들이 있다”와 같은 수적인 진술들을 살펴보자. 나는 이미 이 수적인 귀속(ascription)의 주제가 단순히 소년들을 구성하는 물리적인 재료일 수 없는데, 그것은 그 물리적 재료가 다양하게 상이한 방식들로 단위들(units)-두 소년, 20개의 부분들(머리, 몸통들, 손들, 다리들, 발들), 수만개의 세포들, 더 많은 분자들, 훨씬 더 많은 원자들, 등등으로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개관하였다(review).150)151)
그러나 수의 진술의 내용을 동일화하는 것은 아직까지 수 그 자체를 동일화하는 것이 아니다. 프레게의 분석은 수가 다양한 개념들이 공유할 수 있는 어떤 것-예를 들어 ‘정원의 소년‘과 ’내 키보드 위의 손‘-이라는 것을 제시한다. 프레게적 용어들로 이것은 둘이 그 아래에서 다른 개념들이 실패할 수 있는 개념, 즉 2차적 개념들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프레게는 이것은 직접적으로 건전할 것인데, 이것은 내가 나중에 다룰 이유들, 즉 수가 하나의 개념이라기 보다 사물, 즉 ’자존적인(self-subsistent) 대상‘이라는 이유 때문이다.152) 그래서 둘이 ’정원의 소년‘과 동수인 임의의 개념153)
이 설명의 문제점은 둘이 사실 매우 큰 묶음임이 밝혀진다는 것이다. 프레게의 설명과 같이 집합론에서 무제약적인 comprehension의 (거짓) 원리로 우리는 이 집합을 구성할 수 있지만, 놀랍게도 우리는 역설적인 럿셀 집합을 구성할 수도 있다. 이 비일관적인 소박집합론이 반복적 개념에 근거한 현대의 공리적인 버전으로 대체될 때, 둘은 여기서 정의된 것처럼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을 보기 위해 새로운 두 원소를 가진 집합들이 각 단계에서 구성되고, 그래서 모든 두 원소를 가진 집합들이 구성되는 단계는 없다는 것에 주의하라.
그래서 현대적 집합론에서 둘은 통상적으로 두 원소를 가진 모든 집합들이 아니라 두 원소를 가진 어떤 특정하게 사용하기 좋은(convenient) 집합의 예와 동일시된다. 표준적으로 자연수들은 유한한 폰 노이만 서수들, 즉 0에 대해 ∲, 1에 대해 {∲}, 2에 대해 {∲, {∲}}, 3에 대해 {∲, {∲}, {∲, {∲}}}, 등등인 것으로 간주된다.154)155)
다시한번 현대적 철학적 문헌에서 아주 철저하게 인용되고 논의된 이 문제의 버전은 Paul Benacerraf의 논문으로부터 나오는데, 이번 경우에는 ‘What numbers could not be’이다.156)
Ernie와 Johnny는 모두 집합론 위에서 성장한다. 산술을 배울때가 왔을때 , Ernie는 기쁘게도 그가 이미 수들에 관해 알고 있다는 말을 듣는다. ; 그것들은 ∲(소위 ‘zero’), {∲}(소위 ‘one’), {∲, {∲}}(소위 ‘two’), 등등이다. 그의 선생들은 이들 집합들에 대한 덧셈과 곱셈의 조작들을 정의하고, 모든 재분류(relabelling)이 이루어졌을 때, Ernie는 그의 학교동료들이 하는 것과 꼭 같이 세고 산술을 한다. Johnny의 이야기는 그가 체르멜로 서수들이 수들이라는 것을 듣는 것 이외에는 그와 꼭같다. 그는 또한 그의 학교 동료들과, 그리고 Ernie와 일치하여 세고 산술을 한다. 그 소년들은 함께 합산들을 하며, 소수들에 대해 배우고, 완전수들을 찾는등 등의 것을 즐긴다.
그러나 Ernie와 Johnny는 호기심 많은 작은 소년들이다. : 그들은 그들이 이들 놀라운 것들, 즉 수들에 관해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알고 싶어한다. 그 과정에서 Ernie는 하나가 셋의 원소라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한다. 사실 그는 만약 n이 m보다 크면, m은 n의 원소라고 일반화한다. 열광적인 그는 이 사실을 그의 친한 놀이친구의 주의를 끌게한다. 그러나 여기서 슬프게도 피어나는 수학적 협력(collaboration)은 깨어진다. Johnny는 Ernie의 열광을 공유하지 못할뿐 아니라, 굉장한(prized) 공리가 철저히 거짓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셋이 세 원소들을 가진다는 것조차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베나세라프에 의하면 이 슬픈 이야기의 교훈은-혹은 그것들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 만약 수들이 집합이면, 그것들은 반드시 어떤 특정한 집합들이어야만 한다. 특정한 집합들의 임의의 선택은 보통의 산술이 우리에게 수들에 관해 말해주는 것을 넘어서는 속성들을 드러낼 것이다.(보통의 산술은 Ernie와 Johnny의 논쟁을 주제로 하지 않는다. 그들은 학급 동료들은 이들 소년들이 신경을 곤두세우는 의문들에 놀라워한다.(puzzled) 만약 이들 특정한 선택들 중 하나가 옳은 것이면, 즉 만약 집합들의 한 시퀀스가 실제로 수들이면, 우리에게 어떤 시퀀스가 그것인지를 말해주는 논변들이 있어야만 한다.157)
수들의 친구들(friends)은 수들이 집합들이 아니지만 어전히 그것들이 어떤 다른 종류의 대상들이라는 입장으로 돌아갈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세는 것이나 산술에 적합한 대상들의 어떤 시퀀스를 정의했다고(idetified) 가정해보자. 그리고 우리는 이것들 중 네 번째 것(우리는 0으로부터 시작한다)이 수 3이라고 주장한다. 베나세라프는 이 대상이 우리의 세퀀스에서 그것의 그 시퀀스의 다른 원소들과의 관계들에 의해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만약 그것을 그 시퀀스와 독립적으로 그 대상 혹은 저 대상으로 골라낼(singled out) 수 있다면, 그것은 반드시 어떤 부가적 속성들을 가져야만 한다. 그리고 그는 계속해서 이들 부가적 속성들이 Ernie와 Johnny가 논쟁한 속성들이 잉여적(superfluous)이라는 것과 동일한 의미에서 대상들의 수적인 기능에 잉여적인 것이 될 것인데, 이것이 다음의 의문으로 귀결된다. : 왜 셋은 이들 잉여적인 속성들을 가지고, 다른 속성들은 가지지 말아야 하는가? 만약 이 대상이 실재로 셋이면, 이들 잉여적인 속성들이 올바른 속성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논변들이 있어야만 하지만, 그러한 논변들은 없다. 따라서 수들은 결코 대상들이 아니다. 이 두 번째 결론은 첫 번째 것보다 덜 확고하게 지지된다. ; 두 번째 논변은 수들이 그것의 비 잉여적인 속성들이 그것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속성들인 종류의 대상들이라는 입장에 여지(room)를 남겨준다.158)159)
물론 만약 우리가 자연수들이 집합들이 아니라는 베나세라프의 논변을 설득력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면, 유비적인 생각의 계열(an analogous line of thought)은 실수들이 집합들일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우리는 생각해야만 한다.(as I think we should) 우리는 Georgie(Georg Cantor)와 Rich(Richard Dedekind)의 이야기를 말할 수 있는데, 이들 중 하나는 실수들이 데데킨트 컷들이라고 배울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들이 칸토르의 기초적인(fundamental) 시퀀스들이라고 배운다.160)161)
만약 수들이 결코 집합들이 아니라면, 이 장의 처음 부분에서 재인용된 과학적 성공의 이야기는 의문시된다.(is called into question) 만약 그것의 자연수와 실수들의 이론들에의 조명이 집합들의 이론에 대한 증거로서 간주될 수 있다면, 우리는 수들과 집합들의 존재론적 관계성의 참된 본성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만약 동일하지 않다면, 그러면 무엇인가?(then what?)
2. Numbers as properties
수들이 집합들이 아니라고 가정하면서, 집합론적 실재론자는 새로운 유형의 실재를 그것의 존재론으로 부가하고, 특별한extra epicycle을 그것의 인식론에 부과하는 것의 예상(prospect)과 부딪치게 된다. 그리고 표준적인 집합론적 환원의 설명력을 유지하기 위해 그는 우리의 수들에 대한 이식에 어느정도 적합한 예를 들어 폰 노이만 서수들의 행태를 만드는 집합들과 수들 사이의 관계성도 설명해야만 한다. 마지막으로 집합론의 인식론을 자연스럽게 만드려는(naturalize) 노력들은 만약 수들에 대한 설명이 자연주의적이지 않다면 낭비될 것이다.
그러면 수들에 대한 인식론이 집합들에 대해 주어진 인식론과 가능한한 유사해야한다는 주장과 함께 시작해보자. 그 경우에 수들은 시공간에도 존재해야만 한다. 그러면 수 10이 존재하는 곳은 어디인가?
쉬운 대답은 이것이다. : 10은 내 워드 프로세서의 자판 위에서 움직이고 있는 내 손가락들의 집합이 위치한 곳에 위치한다. 그러나 만약 이것이 옳다면, 10은 임의의 아메리칸 리그 야구팀의 스타팅 멩버(starting ine-up)가 위치하는 곳에도 위치하고, 타임지의 베스터셀러 목록이 위치하는 곳에, 그리고 많은 다른 곳에 위치한다. 이제 물리적 대상들의 집합은 불연속적(discontinuous) 위치- Angel 야구팀의 스타팅 멤버들의 집합은 우익수, 좌익수, 2루수, 지명타자, 덕아웃에도 위치한다-를 가지지만, 그 집합의 일부만이 이들 각각의 장소에 위치하는 반면 수 10은 각각의 모든 10개의 원소를 가진 집합에서 충분하게 나타난다. 전통적인 기준(criteria)에 의해 이것은 야구 선수들의 집합을 특정하게, 수 10을 보편적으로 만든다.162)
과학적/수학적 비유에 의해 그 아이디어는 이것이다. : 집합론은 집합들과 그것들의 속성들의 연구인데, 이것은 물리학이 물리적 대상들과 그것들의 속성들의 연구인 것처럼 수들에 관한 연구이고, (예를 들어) 길이가 그 하나이다. 이것이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보기 위해 ‘길이’라는 특성(quantity 'length')의 형식적 특징들을 고찰해보자.163)
먼저 길이와 같이 주어진 물리적 특성을 가진 대상은 비교 가능하다.(comparable) ; 그것들은 그 특성에 관계되어 선형 순서(linear ordering)를 구성한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이 되는 쉽게 움직일 수 있는 대상들인 중간크기의 단순한 선형 순서가 있다. : A는, 만약B의 한쪽 끝이 A의 끝을 넘어서까지 확장된다면-그것들이 다른 일치하는 끝들과 차례로 놓여질때(when they are laid side by side with the other ends concident)-, B보다 짧다. 고정된(stationary) 대상들에 대해서도 작용하는 방법은 아마도 이와 같을 것이다. : A는, 만약 A의 각 끝에서 끝나는 것과 일직선으로 놓여있는 직선이 B의 양쪽 끝에 도달하지 않는다면(if a string that lies straight with one end at each end of A won't reach both ends of B), B보다 짧다. 분명히 좀더 복잡한(정교한) 시험들이 그 선형 순서를 더
확장시킬 것이다. 이 지점에서 scale of measurement는 그것이 완성된 선형 순서와 일치하는 한, 즉 수적 할당들(numerical assignments)들이 선형 순서와 일치하는한, 할당될 수 있다. 이것은 어렵지 않다. : 어떤 좋은 자를 가지고 야드 단위로 비교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동일한 특성이 상이한 scale에서 측정될 수 있다. ; 길이는 미터 자들에 의해서도 발견된다.(detected)
이제 수의 속성들의 경우를 비교해보자. 쉽게 움직일 수 있는 대상들이 집합들은 직접적으로 수들의 경우와 비교될 수 있다. ; A는, 만약 A의 각 원소가 왼쪽에 놓인 B의 원소들이 왼쪽에 있는 그런 방식으로 B의 유일한 원소와 비교될(set beside) 수 있다면, B보다 적다.(less numerous) 이것이 산출하는 단순 집합들의 선형 순서는 일대일 대응의 수학적 아이디어를 사용하는 모든 집합들에까지 확장될 수 있다. : A는, 만약 A의 원소들과 B의 원소들의 진부분 집합 사이에 일대일 대응이 있다면, B보다 적다. scale은 예를 들어 영어의 수 단어들과의 비교에 의해, 즉 영어로 세는 것에 의해 할당될 수 있다.164)
유일한 disanalogy는 상이한 스케일들에서 집합들을 측정할 여지가 없다는 것인데, 왜냐하면 임의적인 단위의 선택(arbitrary choice of unit)를 위한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 집합들은 이미 개체화된(individuated) 그것들의 원소들과 함께 온다. 이것이 집합들이 프레게의 수 속성들의 담지자들로서의 물리적 양(mass)들에 대한 반대를 피하는 방법이다. 2에 들판에서 놀고 있는 소년들을 구성하는 물리적 양을 할당하는 것은 임의적인 반면, 2에 들판에서 놀고 있는 소년들의 집합을 할당하는데는 임의성이 없다.165)
이 제안-수들이 물리적 속성들에, 특히 물리적 양들에 비유되는 집합들의 속성들이라는-은 훌륭한(admirable) 경제성을 가진 우리의 인식론적 desiderata과 만난다. ; 이전에 집합론에 대해 이전에 기술된 자연주의적 인식론은 정교함(elaboration)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물리적 대상들이 그것들의 속성들의 인식을 포함하는 것과 꼭 같이, 집합들의 인식도 동일한 것을 한다. 사실 우리의 집합 인삭에 대한 설명은 우리가 그것들의 수 속성들을 인식하는 관측으로부터 전개된다. ; 여기서 새로운 것은 모두 이들 수 속성들이 수들이라는 더 나아간 주장이다.
수들의 인식은 집합들의 인식인데, 왜냐하면 수들이 집합들의 속성들이기 때문이다. 역으로 집합들의 인식은 수들의 인식을 전제한다. ; 예를 들어 피아제의 연구는 부분 집합 관계들이 수 속성들 이전에는 적절하게 인식될 수 없다는 것을 드러낸다.166)이 관점으로부터 산술은 유전적으로 유한한 집합들의 이론167)168)
더 나아가 집합론적 환원들의 중요성(함의)은 이제 분명하다. 폰 노이만 서수들은 바로 그것에 반하여 집합들이 수적 크기에 대해 비교되는 측정 막대기(rod) 이외의 것이 아니다. 우리는 폰 노이만 서서들에 관해 배움으로써 수들에 관해 배우는데, 왜냐하면 그것들이 그 수들의 속성들(properties that numbers are)을 예화하는 canonical 시퀀스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폰 노이만과 체르멜로 서수들 사이의 선택은 둘 다 미터로 측정하는 두 상이한 자들들 사이의 선택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Ernie와 Johnny 사이의 논쟁은 한 인치가 목재인가 금속재인가의 여부에 관한 논변과 같다.
자연수들의 집합들의 속성들과의 동일화의 어떤 버전은 프레게와 베나세라프 양자에 의 해 동시에 고찰되었다. 그리고 양 저자는 궁극적으로 이런 종류의 입장들을 거부했다. 베나세라프의 결론은 약간 강한 확신을 가지고(with little strong conviction) 이끌어나온 것이다. -그는 ‘17’이 [집합들]의 술어로 간주될 필요가 없다고 말했을 뿐이다169)
그것들의 고유한(property) 견해에 대한 반대를 위한 가장 의심스럽게(conspicuously) 인용되는 근거들은 문법적인 것이다. : 수 단어들의 역할을 보통의 부사들과 술어들과 비교하는 것,170) 한정적 관사(article)를 가진 수 단어의 사용, 그것들의 다원화(pluralization에 대한 면역성,171)
여기서 우리의 관심은 과학의 목적들을 위해 이용할 수 있는 수들의 개념에 도달하는 것이다. ; 따라서 우리는 일상 생활의 언어에서 속성적 구성들(attributive constructions)에서도 나타날 수 있는 사실에 의해 단념해서는 안된다. (Frege(1884), §57)
베나세라프도 그가 나중에 수들이 대상들이라는 것을 부인할 때 172)
사실상 프레게의 수들의 객관성에 대한 열의는 그가 자기 자신의 정의를 제시하는 바로 그 순간에 흔들리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173)
프레게가 수들이 개념들일 수 있는 가능성-아마도 고유한 견해의가능성도-을 열린채로 남겨놓고, 개념들과 속성들 사이의 관계성에 의존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프레게을 읽는 것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그는 예를 들어 ‘말이라는 개념’(the concept horse‘은 개념보다는 대상을 지칭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174)175)
나는 프레게가 여기에서 실재로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 무엇인지의 논쟁에 공헌을 할(contribute) 것을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프레게 자신은 제쳐두고, 나는 수들이 개념들의 내연성(intensionality)이 그러한 관점의 방식으로(in the way of such a view) 대표하는 개념들과 범위일 것이라는 아이디어를 고찰하고 싶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at stake)을 알기 위해, 단순한 산술적 동일성 2=S(S(0))를 고찰해보자.176)
‘“member of the series of natural numbers ending with S(0)"와 동수인’이란 개념
이것은 다음이다.
‘“member of the series of natural numbers ending with the concept 'equinumerous with the series of natural numbers ending with 0'"과 동수인’이란 개념‘
이제 정의된대로(so defined)의 2의 외연이 정의된대로의 S(S(0))의 외연과 동일한 것이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있다.-이들 각각은 두 개의 것이 포섭되는 개념과 동시인 상태임을 포함한다. 그러나 만약 동연적인 개념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르다면, 우리의 단순한 산술적 동일성은 위태롭다.(in jeopardy) 이것은 개념 관점(concept view)에 대해 분명한 난점이다.
이제 어떻게 이것이 여기서 제시된 속성 관점(property view)위에서 작동하는지를 살펴보자. 만약 2가 예를 들어 폰 노이만 서수 {∮,{∮}}의 수 속성(number property)이면, 속성 2를 가지는 것은 이 집합과 동수(인 상태)가 되는 것이다. 후자가 폰 노이만 서수들에 대해 정의될 때, S(S(0))는 {∮,{∮}} 자체와 동일한 집합인 것으로 밝혀지고, 그래서 둘 중 하나와 동수인 상태가 되는 것은 다른 것과 동수인 상태되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177)
the property 'equinumerous with {∮,{∮},{∮,{∮}}}'
= ?
the property 'equinumerous with {∮,{∮},{{∮}}}'을 확증할(affirm) 수 없는한,
이전의 베나세라프의 새로운 버전이 생길 것이다. : 이것들 중 어떤 것이 3인가?(Which of these is 3?) 어떤 속성들이 정말도 수들인가? 특정한(particular) 폰 노이만 서수들과의 동수성에 의해 정의된 것들인가, 아니면 체르멜로 서수들의 initial segments와의 동수성에 의해 정의된 것들인가? 이것은 속성 견해에 대해 유사적인(analogous) 문제이다.
이제 두가지 문제들을 비교해보자. 프레게적 개념은 술어와 밀접하게 연관된다. ; 사실 그것은 술어의 지시대상(referent)이다. 동일성에 관한 프레게의 견해들은 제쳐두고, 언제 두 술어들이 동일한가를 살펴보자. 우리는 이것은 그것들이 유형적으로(typographically) 동일할때에만 그렇다고 주장할 수도 있지만, 좀더 유연한(flexible) 개념은 사소한(trivial) 문법적 변형들-예를 들어 ‘is Sam's only friend’는 ‘is the only friend of Sam’과 동일한 술어이다-을 허용한다. 반면 누구나 ‘is featherless biped’가 ‘is human’과 다른 술어라는 것을 인정할 것이다. 이것은 ‘is a bachelor’와 ‘is an unmarried male’과 같은 중간적인(intermediate) 경우들은 내버려둔다. 만약 우리가 이들 두 구절들이 ‘bachelor’와 ‘ un- married male’이 동일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동일한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면, 술어들 사이의 동일성에 대한 자연스런 설명은 그것을 동의어(synonymy)와 동일시하는 것이다.
이제 속성들의 무엇인가?(Now what of properties?) 우리는 단순하게 두 속성들이 그것들을 끌어내는(pick out them) 술어들이 동의적일때에만 동일한 것이라고 구체화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이 접근이 우리의 과학적 사유와 부합하지(square with) 않는다는 것을 보았었다.178)
과학적 속성들에 대해 동의어는 너무 강한 조건이다. 술어들-의미의 같음에 의해 개별화된(individuated)-과 집합들-membership의 같음에 의해 개별화된- 사이 어딘가에 중간적인(intermediate) 속성들의 범주가 있다.179)180)
만약 이런 계열을 따르는 어떤 것이 물리적 속성들에 대해 작용하도록 만들어질 수 있다면, 우리의 유비는 수학적 속성들에 대해, 특히 수에 대해 유사한 과정을 제시한다. 'equinumerous with {∮,{∮},{∮,{∮}}}' 과 'equinumerous with {∮,{∮},{{∮}}}'다른 술어들을 다시 한 번 고찰하자. 그것들은 동의어적이지 않지만, 동외연적이고, 그래서 그것들은 동일한 집합을 결정하는 상이한 술어들이다. 그러나 우리의 실질적 관심은 그것들이 동일한 과학적 속성을 표현하는가의 여부이다 ; 왜냐하면 그것들은 우연에 의해서라기 보다 법칙에 의해 동연적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수학의 법칙이 만약 그것들 둘이 동연적이지 못하면 위배되어야 하는가?(Would a law of mathematics be violated if these two failed to be coextensive?) 물론! 그것들의 동외연성은 집합론의 공리들로부터 증명가능하다. 따라서 속성이론에 대한 비-베나세라프적 딜레마-어떤 속성들이 실재로 수들인가?-는 취소된다(dissolve) ; 집합들이나 술어들이라기보다 과학적 속성으로 이해될 때, 폰 노이만 스타일의 수들과 제르멜로 스타일의 수들은 사실상 동일하다.
나는 산술에 대한 복합 환원들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겨냥한(aimed) 이 이야기의 일부가 실수들에 대한 유비적 문제(analogous problem)로 넘겨진다고 생각한다. 즉 : 하나의 실수들의 집합론적 버전을 다른 것보다 선호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대답 : 아무것도 없다. ; 각각의 버전은 동일한 기초를 이루는(underlying) 속성들을 탐지하고(detect) 측정하는(measure) 역할을 한다. 그러나 베나세라프의 논의에 의해 고취된 의문-자연수들이란 무엇인가? 혹은 이 경우에 실수들이란 무엇인가?-에 이르게될 때, 그 대답은 아마 놀랄것도 없이 조금 더 복잡한(복합적인) 것이다.
사실 나는 ‘실수들이란 무엇인가’가 처음에 보이는 것처럼 ‘자연수들이란 무엇인가’에 직접적으로 유사하지(analogous) 않다고 생각한다. 이것을 알기 위해 데데킨트와 프레게의 프로젝트를 비교하라. 프레게는 수 단어들이 명칭(name)들이고 수들은 대상들이라는 견해를 선호하는 확고하게 방어된(firmly entrenched) 언어적 실천과 마주쳤다. 그리고 그의 작업은 이들 대상들의 본성을 명확히 하는 것이었다. 반면 데데킨트의 경우 미리 존재하는(pre-existing) 체계적인 실수들의 사용은 없다. ; 그것이 문제였다! 이 경우에 미리 존재했던 것은 직관적, 기하학적 선이었고, 데데킨트의 작업은 이것의 속성들, 특히 연속성을 흉내낼(would mimic) 수들의 체계를 산출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데데킨트가 직면했던 의문은 프레게의 ‘자연수들이란 무엇인가?’와 유사한 ‘실수들이란 무엇인가?’가 아니라 차라리 ‘연속성이란 무엇인가?’였다.
데데킨트가 주었던 대답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 연속성은 데데킨트 컷이 가지는 것이다. 그리고 베나세라프 스타일 논변이 지적하는 것처럼, 칸토르의 기초적 시퀀스들과, 다른 실수들에 대한 집합론적 버전들도 그렇다. 그래서 결국 모든 집합론적 실수들의 버전들이 발견케 하는(serve to detect) 기초를 이루는 단일 속성, 즉 그것들이 소위 연속성을 측정하는데 사용하는 모든 특정한 다른(disparate) 현상에 의해 공유되는 단일 속성이 있다. 그래서 만약 ‘실수들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적절한 대답, 즉 ‘자연수들이란 무엇인가?’dp 대한 우리의 대답과 평행한, ‘that which the various set theoretic version of the naturals serve to detect'와 평행한 대답이 있다면, 적절한 대답은 다음과 같다 .: 실수들은 연속성의 속성이다.
그러나 이것은 불합리하게 들리고, 나는 그런 이유가 이미 말해진 것으로부터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실수들은 자연수들과는 달리 설명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다. 연속성이란 해명(explication)을 필요로 하는 것이고, 실수에 대한 다양한 집합론적 버전들이 그렇다. 그러나 우리의 직관적인 존재론은, 그것이 자연수들과 그것들의 다양한 집합론적 버전들인 것처럼, 실수들과 다양한 집합론적 버전들이 아니다. ; 차라리 우리는 연속성의 현상을 가지고, 우리는 집합론적 실수들을 가지는데, 이것은 모두 그것을 예화(exemplifying)함으로써 그 속성을 해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것과도 동일시되는 임의의 전-이론적(pre-theoretic) 실수들은 없다.
그것의 집합들과의 관계가 의심될 수 있는 모든 많은 수학적인 것들(things) 중에서, 나는 수들, 즉 자연수와 실수들만을 고찰해왔는데, 그 이유는 그것들이 집합론 자체의 기초들과 정당화에 가장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집합론적 목적들을 위해 유일하게 다른 필수적인 것은 함수의 개념인데, 나는 이것에 대해서도 유사하게 다룰 것을 제안한다. 함수는 집합들 사이의 관계이고, 그 관계는 속성들의 two-placed 버전일 뿐이다.181)
사실상 우리는 함수들을 정렬된 쌍들(ordered pairs)의 집합과 동일시함으로써 이것을 한다.182)183)
나는 수들이 집합들의 속성들이고, 기초적 산술은 유전적으로 유한한 집합들의 수 속성들의 연구이고, 우리의 산술적 사실들에 대한 앎은 이들 유한한 집합들에 대한 우리의 앎에 관한 단편을 가진다(is of a piece with)고 주장해왔고,184)185)
우리의 자연화된 맥락 속에서 이 의문은 우리의 최선의 전체적인(overall) 세계에 대한 이론이 우리로 하여금 물리적 대상들(상식적 실재론), 다양한 관측불가능한 것들(과학적 실재론), 그리고 집합들(집합론적 실재론)에 덧붙여(in addition to) 속성들을 이야기할 것을 요구하는지의 여부에 대한 의문으로 환원된다는 것을 상기하라. 그 의문은 물리적 속성들에 대해 급박한(pressing) 것인 것처럼 수학적 속성들에 대해서도 급박한 것이다. : 물리적 속성들(금이 됨과 같은), 혹은 물리적 양들(1인치임과 같은)이 물리적 대상들과 더불어(along with) 자연과학의 존재론에 포함되어야만 하는가? 퍼트남은 그렇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그는 과학자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단일 속성이 있는데, 이것은 그러 저러한 이유 때문이다(which is responsible for such-and-such)186)’라고 추측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이 진술에 관해 퍼트남은 속성-자유적 번역(property-free translation)을 보지 않았다. 유명론적 과학철학자들은 이들 발화들(locutions)의 중심성을 의심하거나, 번역에 대한 전망들(prospects)을 평가절하 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Lewis는 유명론자들이 속성들에 관한 필요불가결한(indispensable) 진술들을 내가 자연적 묶음들 혹은 종들(natural collections or kinds)이라고 불렀던 것의 존재를 주장하는 것으로 취급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자연성(naturalness)의 아이디어는 무정의적으로 간주될 수 있거나, 혹은 보편자들에 의존하지 않은재 사물들 사이의 다양한 객관적인 유사성들이 용어들로 분석될(parsed) 수도 있다는 것이다.187)
이 이슈를 해결한척 하지 않고 우리가 선택한 수학의 분과에 대한 유사한(analoguous) 의문을 고찰해보자. 집합들뿐 아니라 자연수들이 집합들의 이론의 존재론에 포함되어야만 하는가? 이 의문은 두가지 의미로 간주될 수 있다. 첫째 만약 우리가 현재 수 속성들에 대한 명시적 지칭 없이 말해질 수 없는 수학적 함의의 어떤 것이 있는지를 묻고 있는 것이라면, 나는 그 대답은 no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집합론적 환원들의 교훈(moral)이다. : 우리가 수들로부터 원하는 모든 것은 폰 노이만 서수들(혹은 체르멜로 서수들, 혹은 ...)로부터 얻을 수 있다. 2<3이라고 말하는 것은 만약 x가 {∮,{∮}}와 동수이고, y 가 {∮, {∮}, {∮, {∮}}}와 동수이면, x는 y의 진부분 집합과 동수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2+2=4라고 말하는 것은 만약 두 이접하는 집합들 x와 y가 {∮, {∮}}과 동수이면, 그것들의 합집합은 {∮, {∮}, {∮, {∮}},{∮, {∮}, {∮, {∮}}}과 동수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모든 자연수는 후자를 가진다’는 ‘만약 x가 폰 노이만 서수이면, x와 {x}의 합집합이 폰 노이만 서수이다’이다. ‘2는 소수이다’는 ‘만약 x가 {∮, {∮}}와 동수이면, 그것의 cross product가 x와 동수인 2보다는 적지만 1보다는 큰 농도의 두 집합들은 없다’라는 말이다. 그렇게 계속된다. 실재로 이들 발화들이 종종 좀 더 단순화되지만, 수 이론자들이 집합론 내부에서 작동하는(operating) 문제를 가지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러한 번역들에 의해 희생되는 수학적으로 중요한 것은 없다는 것을 증명한다. 동일한 것이 실수들과 함수들에도 적용된다.
그러나 그것은 산술과 수학을 하는데 있어 단순하게 충분하지 않다. ; 우리의 전체적인 세계에 대한 이론은 우리가 현재 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고, 왜 그것이 유효한 방식을 작동시키는지의 이유를 말하는 장(章)도 포함해야만 한다. 이것은 우리가 구성하고자 애쓰고 있는 그런 종류의 이론과 같이 자연화된 인식론에 의해 요구된 우리의 실행(practice)에 대한 기술적이고 설명적인 이론이다. 그 이론 내에서 앎과 지칭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것과 같은 퍼즐들에 대한,188)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집합론적 실재론자에 대해 집합들은 물리적 대상들이 길이를 가지는 것과 동일한 의미에서 수 속성들을 가진다. 이들 속성들의 존재론적 지위(status)에 대한 또 다른 의문은 더욱 철저하게 유사하다. ; 수학적이고 물리학적 학문들은 동일한 형이상학적 의문과 직면하고 있다. 그 차이는 수학적인 학문들이 그 의문의 일부에 대답을 제시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산술의 집합론적 환원들은 수들에 관해 수학적으로 중요한 모든 것이 집합들만을 사용하면서 말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퍼트남과 다른 사람들은 여전하 물리학에서의 유사한 질문을 논쟁하고 반면에 말이다. 두 번째 의문에 관해 우리의 개별적인(respective) 학문들에 관한 우리의 이론에서 말해져야할 필요가 있는 것에 관한 초과학적(metascientific) 의문이라는 이슈는 양자에 공통된다. ; 자연적 종들, 혹은 아마도 객관적인 유사성은 어떻게 다루어질 수 있는가? 따라서 나는 그 문제를 결코 수리 철학에 특수한 것이 아닌 일반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여기서 그것을 제쳐두는 것이 정당한 것이라고 느끼는지의 이유이다.
3. Frege numbers
속성들로서의 수들에 관한 이전 장은 어느 정도 내가 여기에서 내 자신의 수들에 관한 견해에 관해 말해야 했던 것을 완성시켰지만, 나는 그 topic을 완전히 제쳐놓을 준비는 되어있지 않다. 지금까지 수들을 집합들과 동일시하려는 노력들을 평가하면서, 나는 폰 노이만과 체르멜로 서수들에 관심을 집중했다. 프레게 수들에 관해서는 거의 고찰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 예를 들어 프레게 수 3은 ‘equinumerous with tje series of natural numbers ending with 2'라는 개념의 외연이다. 나는 잠시동안 프레게의 아이디어에 다루고(pause over) 싶다. 내가 이미 제시된 수들의 이론을 변형하려는 의도이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프레게 수들에 대한 주의(attention)가 집합들에 관한 우리의 이론이 무엇이고, 무엇이 아닌지(what our theory of sets is and is not)에 관해 어떤 유용한 조명을 던져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이슈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 베나세라프의 마지막으로 재고찰해보자. 우리는 폰 노이만과 체르멜로의 서수들을 배운 Ernie와 Johnny에 대해 들었다. 이들 각자는 자신의 집합들이 자연수들이라고 주장한다. 둘 중 한 버전이 유효하다. : 그들 사이에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최종적인(conclusive) 논변들은 없다. 그것에 대해 결정적인 논변들이 있는 제삼의 후보가 없다고 가정하면, 수들이 집합들이 아니라는 결론이 따라 나온다.
그러나 또 다른 후보가 있는가? 베나세라프는 프레게 스타일의 제안을 언급한다. : 즉 수 3은 3개의 원소를 가진 집합들이다. 만약 수들이 내가 제시한 것처럼 실재로 집합들의 속성이면, 베나세라프는 이것이 폰 노이만과 체르멜로의 서수들에 대한 이 집합론적 설명에 의한 강제적인(compelling) 논변으로 간주되어야 할것이라는 사실에 대해 두려워 한다. ; 그래서 그는 빈약한(slender) 문법적 근거들 위에서 속성 견해를 거부하게 된다. 수들이 집합들의 속성들이 아니라는 확신만이 그로 하여금 프레게 스타일의 선택(option)을 제쳐둘(put aside) 수 있도록 해주고, 그런후에만 그는 그가 더 이상 바라볼 필요가 없다고 만족한다.189)
종종 만약 속성이 집합론적으로 취급될 수 있으면, 그것은 그것을 예화하는 것들의 집합과 동일시되어야만 한다는 계열을 따르는 이 추론에서 놓친 전제(missing premiss)가 있다. 이것에 관한 어떤 것이 있다. ; 집합론자는 (보통 포 노이만 수들을 전제하는) ‘짝수임’(evenness)을 이야기하지 않고, 짝수(even number)들의 집합을 이야기 한다. 그리고 ‘소수됨’(primehood)을 이야기하지 않고, 소수들의 집합을 이야기 한다. 이 방법론에 의해 프레게 스타일의 집합들은 자연스런 선택이다.
그러나 내가 속성이론을 받아들였음(embraced)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떻게 이들 속성들이 집합론 내에서, 즉 폰 노이만 서수들과 같은 표준적 measuring rod와의 비교에 의해 다루어져야만 하는지에 관해 다른 계열을 지지했다. 이 접근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말하기 원하는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도록 해주는 반면, 우리에게 집합론에서 적절하게 ‘수들’(the numbers)이라고 부를 수 있는 어떤 것도 남겨주지 않는다.190)191)
프레게 수들은 그것들이 자연수들이라고 말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해도 여전히 흥미로운 것이다.192)
베나세라프의 프레게 스타일의 집합들이 프레게 수들의 적절한 집합론적 버전이라는 주정에 반대하는 가장 강력한 논변들 중의 하나는 그것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193)준적인 용어사용(terminology)으로 이것은 ‘proper class’이다. 모든 집합들의 묶음과 같은 다른 묶음들도 또한 proper class들이다. 그래서 일상적인 지혜는 모든 세 원소를 가진 집합들의 집합은 그것이 존재하기에는 너무 크다는 불행한 사실만 없다면 프레게 수의 역할에 대해 훌륭한 후보자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모든 세 원소를 가진 집합들의 집합의 결점(drawback)들을 평가절하한다(underestimate)고 생각한다.
이것을 보기 위해 다음을 고찰해보자. : 보통의 산술은 물리적 대상들, 즉 아마도 그것들의 집합들(한짝의 신발들과 같은), 경우에 따라서는 이것들의 집합들의 집합들, 기타 등등을 세는데 사용된다. 그러나 유한한 rank 이상의 집합들은 그렇지 않다. 이것이 산술이 유전적으로 유한한 집합들의 이론의 일부라는 것이 나의 주장의 내용이다. 물론 경우에 따라(eventually) 우리는 보통의 산술을 넘어선다. ; 우리는 실수들의 equinumerous set들의 집합들과 같은 것들을 세려고 하고, 고차 집합론을 하고 있는 중이다.194)195)
이제 이 무한적 versus 비무한적 산술의 분리가 유지될 수 있다고 가정해보자. 만약 프레게 수들을 대리인(surrogate)들로서의 프레게 스타일 집합들이 가진 유일한 문제가 그것들의 크기라면, 우리는 ‘작은 프레게 수들’, 즉 대응하는 프레게 스타일의 집합들과 함께 보통의 산술의 프레게 수들을 정의(분류)할(identify) 수 있다. ; 즉 작은 프레게 수 3은 세 원소를 가진 모든 유전적으로 유한한 집합들의 집합일 것이다. 내가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여기에서조차 프레게 스타일의 집합들은 적합하지 않다는(unsuitable) 것이다.
작은 프레게 수들은 물리적 대상들(과 이것들의 집합들 등)을 세고, 아마도 우리 세계의 물리적 대상들은 오락가락 할 것이다.(fluctuate)(양, 정도 등에 따라 변동할 것이다.); 새로운 동물들이 태어난다. ; 오랜 별들이 폭발한다.; 나무들이 탁자와 의자들로 전환된다. 물리적 대상들의 수(population)에서의 이들 변화는 집합들의 수(population)에서의 변화와 상호관련된다. ; 짐승의 새끼(cub)가 태어날 때,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집합들의 원소이다. ; 별들이 폭발할 때 집합들도 사라진다. ; 나무들의 집합들이 테이블과 의자들의 새로운 집합들에 길을 열어준다. 마지막으로 집합들의 수에서의 이들 변동(fluctuate)은 세 원소를 가진, 유전적으로 유한한 집합들의 수에서의 변동들을 야기하고, 그래서 이들 모두의 집합, 즉 프레게 수 3에 대한 우리의 프레게 스타일의 후보는 이제 이 집합, 즉 이것이다. 이것은 프레게 스타일의 집합이 그것의 membership을 때에따라 변화시킨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집합들은 그것들의 원소들에 의해 완전히 결정되고, 그래서 그것들은 그것을 할 수 없다(they can't do that)- 차라리 작은 프레게 수 3이 프레게 스타일의 모든 세 원소를 가진 집합, 즉 우전적으로 유한한 집합들과 동일시 된다는 주장은 그것이 또 다른 것을 따라 상이한 시간들에 상이한 집합들과,하나의 집합과 동일시 된다(it be identified with one set after another, with differnt sets at different times)는 주장이다.196)
이것은 만족스럽지 않다. 만약 우리가 정말로 프레게 수들을 수들이라고 생각했다면, 우리는 당연히 3이 무엇이든간에 그것은 그것이 어제 그랬던 것과 오늘도 같은 것이라고 주장했을 것이다. ; 만약 우리가 수 단어들이 지칭 대상들을 가진다고 생각했다면, 그것들은 내일과 마찬가지로 오늘도 동일한 지칭 대상들을 가져야만 한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내가 그랬던 것처럼) 수들이 대상들이고, 수 단어들이 지칭 대상들을 가진다는 theses를 거부한다고 해도, 나는 우리가 여전히 프레게 수들 자체에 대한 이 설명에 반대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모든 세 원소들을 가진 집합들을 묶음을 물을(ask after) 때, 우리는 이제 이 묶음을, 즉 물리적 존재들의 변덕들에 의존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우리가 염두에 두어 있었던 것은 그것의 membership이 시간에 따라 변화될 수 있는 묶음이었던 반면, 그것은 동일한 것, 즉 임의의 주어진 시간에 그 시간에 존재하는 존재들 속의 세 원소를 가진 집합들을 묶는 묶음에 머문다. 그러한 묶음은 비록 그것이 충분히 작다고해도 집합이 아니다.
그러면 프레게 수들은 집합이 아닌 묶음들이다. 큰 프레게 수들은 너무 커서 집합들이 되지 못하고, 그래서 그것들은 proper class들이다. 작은 프레게 수들은 비록 집합이 될만큼 충분히 작지만, 상이하게 개별화되고, 그래서 그것들도 역시 proper가 아닌(without being proper) 류들이다. 수 단어들에 대해 지칭 대상을 주장하려는 이들은 집합들과 류들의 이론을 필요로 할 것이다. 이 유혹에 면역된(immune) 이들이라해도 자신들의 집합들에 관한 이론에 중요한 이들 두 유형의 묶음 사이의 구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류들이 집합론 자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가능성이 남아 있다.197)
이번 장의 초반부에서 나는 현대 집합론의 발전에 공헌한 두가지 집합론적 우려(worry)들을 스케치했었다. calculus의 난점들로부터 칸토르와 데데킨트의 실수들에 관한 작업을 거쳐, 체르멜로의 공리화와 그 이후에로의 역사적인 경로(path)는 주로 -그것의 변천(vicissitude)들이 우연하게 단계들의 계급조직에서 미리 주어진 원소들로부터 귀결적으로(sequentially) 구성된 묶음들에 대한 well-articulated 그림에로 귀결된- 수학적 발전이었다. : 반복적 집합 개념. 각 단계에서 새로운 묶음들은 완벽한 자유와 함께 구성된다. 어떤 구성의 방법에 대한 관심없이도 말이다. 유한한 combinatoric들은 우리에게 각각의 개별 원소들에 대해 yes냐 아니면 no냐라고 말하는 모든 방식들에 대해 유한한 묶음의 유일한(unique) 부분묶음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 개념을 무한으로 옮겨놓으면, 부분묶음들은 ‘결합적으로’(combinatorially) 결정된, 즉 원소들을 선택하는 모든가능한 방법들에 대해, 이들 선택들을 위한 구체화될 수 있는(specifiable) 규칙이 있는지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결정된 것이다. 이것은 묶음의 수학적 개념이다. : 묶음은 반복적인 계급조직을 만드는 단계들의 시리즈들에서 결합적으로 구성된다.198)
두 번째 역사적인 도정(trail)은 프레게의 논리주의에서 시작하여, 럿셀과 화이트헤드의 그 아이디어를 구조해 내려는(salvage) 노력으로 이어지는 것이다.199)200)201)
이들 두가지 유형들의 묶음들은 몇가지 다른 방식들에서 다른데, 그것들 중 하나는 우리가 이미 인식했던 것이다. : 류들은 집합들보다 클 수 있다. 그래서 예를 들어 모든 집합들의 류-‘is a set’이란 술어의 외연- 가 있지만, 그것은 집합이 아닌데, 왜냐하면 그것은 어떠한 집합과도 동연적되기에는 너무 크기 때문이다. 반면 류들은 적절한 술어들이 있을 때에만 구성될 수 있기 때문에, 실수들의 류들이 있는 것보다 많은 실수들의 집합들이 있을 수도 있다. 이것은 이것은 물론 우리의 술어들에 관한 이론의 상세함들에 의존하지만, 어떻게 각 단계에서 모든 집합에 대한 한 술어의 존재가 집합론의 결합적인 개념을 어느정도 전제함(presupposing)없이 보장될 수 있는지를 상상하는 것은 어렵다.202)
우리는 또한 류가 그것의 membership을 바꿀 수 있는 반면, 집합은 바꿀 수 없다는 것도 보았다. 어떤 속성을 가진 사물들의 묶음은 시간에 따라 membership에서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적절한 술어의 외연으로 확인되는 한, 그것은 동일한 류로 남는다. 반면 집합은 그것의 membership에 의해 완벽하게 결정되고, 그래서 어떤 속성을 가진 사물들의 묶음은 이제 하나의 집합, 이제는 또 다른 집합이다.
새롭고(novel) 놀라운 차이점은 membership relation의 구조에서 두드러지는(show up) 차이점이다. 류는 마치 집합들이 또 다른 집합의 원소인 것과 같이 또 다른 류의 원소일 수 있다. - 폰 노이만 서수들의 류는 무한 묶음들의 류의 원소이다- 그러나 폰 노이만 서수들의 류는 무한 묶음들의 류의 유일한 원소가 아니다.-무한히 많은 무한 묶음들이 있다-. 그래서 무한 묶음들의 류는 the distinction of being self-membered를 가진다. 물론 자신을 포함할 수 있는 집합은 없는데, 왜냐하면 그것의 모든 원소들은 그것이 구성되는 단계 이전의 단계들에서 구성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 출처:방인상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