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설명이 제 관념체계가 아니다 보니까 태극 같은 게 남의 관념이라서 설명이 헷갈려요. 저도 잘 모르겠고 혼란스럽긴 한데.. 원래 읽어야 될 부분을 읽으면.. 태극론은 이제.. 무극인 태극이 있다. 그 다음에 “태극이 움직여서 양을 낳고, 움직임이 극한에 이르면 고요해지는데, 고요해져서 음을 낳는다. 고요함이 극한에 이르면 다시 움직인다. 한 번 움직임과, 한 번 고요함이 서로 뿌리가 되어 음과 양으로 나누어지니 ‘두 가지 양식’이 세워진다.” 이렇게 설명하고 있는데, 여기서 분명 이 사람도 설명한거 보면 그 부분에 대해서 얘기하긴 하는데, 태극이 움직여서 양을 낳는다고 해요. 무극이 태극인데, 태극이 움직이면 양이 된다고 하고, 움직임이 극한에 이르면 음이 된다고 해요. 음을 낳는다고.. 태극이 움직인다는 뜻으로 쓰고 있잖아요. 태극이 움직인다면 움직임은 이미 형체가 있는 거잖아요. 근데 태극은 형체가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싶어 하면서 움직여서 양이 된다고 하면, 이게 설명이 머리가 복잡해지는 면이 있어요. 갑자기 태극이 뭐길래 움직일 수 있고 움직여서 양이 된다고 하는데 양이 뜬금없이 뭐냐구요. 이 태극의 동정문제가 생각보다 좀 어려워요. 태극에 대해서 개념잡기 힘들어 하는 건 옛날사람들이나 지금이나 똑같아요. 뭘 태극이라고 해야 되는지. 뭐 기를 아는 사람은 기를 태극이라고 하거나 기의 움직임을 태극이라 하거나 이렇게 말할 수 있겠지만, 그건 그 사람들의 문제인 거고 또 원래 장재나 서경덕이 말하는 기는 그런 식의 하위개념이 아니에요. 요즘의 알고 있는 기는 상당히 하위개념이에요. 상당히 조잡한 개념이라 그런 정도를 가지고 기라고 말하면 조금 아쉬운 것이 있어요. 아무튼 움직여서 양이 된다고 해요. 움직여서 양이 된다는 건, 왜 이렇게밖에 말할 수 없냐면 뭔가 나타나는데 나타나기 위해서는 어떤 이유가 있어야 되잖아요. 아님 법칙이 있어야 되거나 원리가 있어야 되잖아요. 그 어떤 법칙과 원리가 있기 때문에 양이 되거나 음이 되거나 뭔가 되고 있다구요. 그걸 동정이라 한다고 하는 거죠. 동정이라는 게 움직이는 거와 움직이지 않는 걸 말하고 있는 게 아니라, 그 중간에 필연성 또는 우연성을 말하기 위해서.. 어떤 사물이 있는데 그 사물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사물이 이루어지는 과정이 있었다는 뜻이 돼요. 그 과정을 설명하고 싶어하거나 과정 없이 되는 건 없다고 말을 하거나 하는 건데, 그걸 동정이라고 하죠. 동정이라고 해서 움직이는 운동을 의미하는 건 아니에요. 운동이 아니라 일종의 아까 말한 ‘반’이라는 개념, 도덕경에 나온대로 움직임을 포함한 좀 더 포괄적인 개념이에요. 어떤 것이 된다는 거는 그것이 되는 과정이나 될 수밖에 없는 원리이거나 힘이 있단 뜻이 되잖아요. 그런 걸 다 동정의 개념으로 설명 하는 거죠. 그럼 ‘동’이라고만 하거나 간단하게 한 단어로만 설명하면 되는데 ‘동과 정’이라고 두 가지를 설명하잖아요? 그건 여기서 고요함이, 그니까 움직여서 양이 되거나 음이 되거나 하는데, 다시 고요해서 정에 의해서 움직인다고 또 해요. 정이 다시 움직인다고. 고요하다는 건, 우선은.. 아까 말한 일용사물, 만물을 의미 할 수가 있어요.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고요해요. 말이 안 되죠? 그 얘기가 아니라, 세상은 변하잖아요? 움직이고 있고? 근데 갑자기 고요하다 그러면 말이 안 되는데, 여기서 고요하다는 건 또, 움직인다는 말이 꼭 그 사물의 움직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과정이거나 어떤 사물이 나타났을 때 이미 나타나는 그 필연적인 의미, 필연성을 얘기한다고 했을 때, 여기서의 세상이 고요하다고 말을 한다면 이 고요함이라는 게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그 자체가, 세상 통째로 ‘일자’의 의미로 본다고 했을 때는, 그러니까 전체개념이에요. 보편개념이에요. 보편개념보다 전체개념이에요. 전체를 봤을 때.. 전체라고 하는 거요. 그 전체를 ‘정’이라고 한다구요. 전체가 다시 움직인다고 하잖아요? 1이 다시 2가 된다는 의미가 들어가요. 거기서는.. 그니까 고요함에서 움직임이 나오는 거에요. 왜 고요함에서 움직임이 나오냐면, 이 고요한다는 게 어떠한 사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근거이거나 전체이거나 일자이거나 포괄적 의미이거나 그런 식의 의미를 말하는 거에요. 그럼 왜 ‘고요함’이라고 말을 하냐구요. 그냥 ‘전체’라고 말을 하거나, ‘일자’라고 말을 하거나 아니면 ‘만물만상’ 아니면 ‘그 무엇’ 이라고 말하거나 ‘그것’이라고 말하면 되는데, ‘고요함’이라고 설명 한다구요. 이 세상은 고요해요. 그 고요함에서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구요. 그 얘기는, 이 개념은 왕양명의 그 개념도 되는데.. 내가 볼 때만 그것이 사물의 의미를 가진다는 거요. 우리식으로 말하면 내가 그 꽃을 불렀을 때 비로소 그 꽃이 나에게, 나의 꽃이 되었다고 하나? 그거요. 그게 고요함에서 움직인 거에요. 내가 보기 전에는 그냥 ‘무’로 있다구요. 고요히 있었다고 하잖아요? 왕양명이? 내가 그걸 봤을 때 그때 비로소 나한테 온 거에요. 다가온 거라구요. 내가 본다는 거, 내가 뭔가 이해했다는 거, 뭔가를 체득, 지식을 이해하거나 알아보거나 경험을 하거나, 감각을 하거나 감흥을 한다는 거요. 그것이 움직인거에요. ‘추상적인 움직임’이라고 해야 되나..사물의 움직임처럼 장소이동이 아니라 ‘의미이동’, 의미가 움직인다는 거..알지 못한 것을 안다고 한다면 그걸 움직였다고 한다구요. 그런 식으로 움직임을 말하는 거요. 이 세상이 고요한데 갑자기 움직임이 일어난다구요. 갑자기 .. 쉬는 시간에 얘기한 빅뱅이 있는데, 빅뱅도 고요한데 하나가 툭 튀어 나와서 움직이는 건데, 사실 이유는 없잖아요. 이유는 없는데 하나가 움직였단 뜻이잖아요. 근데 그건.. 설명이 많은 것이 빠져있는 것이기는 해요. 움직이는 데는 또 그냥 무조건 움직인다 말할 수 없는데. 그 빅뱅이론하고 태극이론하고 똑같애요. 그냥 뜬금없이 움직이고, 뜬금없이 고요하고, 또 뜬금없이 움직여요. 그 외의 설명, 더 깊은 설명. 왜 태극이 움직일 수 있냐 또는 이 세상이 왜 고요에서 하나의 움직임이 이뤄질 수 있냐, 똑같은 얘기거든요? 이 세상을 태극이라고 한단 얘기는, 이 세상이 고요하다는 얘기와 이 세상이 바로 태극이라 말한다는 얘기와 똑같아요. 이 세상을 태극이라 말하면, 원리이거나 이치이거나 이 세상 그 자체? 아니면 의미? 형이상학적으로 보는 면이 있거나 그렇게 되는 거죠. 세상을 태극이라 보는 거죠. 세상은 나와함께 하나의 그 무엇이 되는 거지, 구분하지 않고 구분될 수 없고, 그렇게 보는 면이 그걸 태극이라고 하는 것이 있거든요. 원리라고 하거나 이런 말 자꾸 쓰게 되는데, 사실 그렇게 원리나 이치로 태극을 이해하는 건 조금 오해가 생길수도 있어요. 그거보다는 태극을 원리나 이치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있는 그대로 라는 게 있어요. 그니까 ‘이치 이전’이라는 개념이 있어요. 그 이치는, 이치라고 하거나 원리라고 말을 하면 도덕경에 말한대로 ‘유’에 해당해요. 그 부분은. 근데 무에 대한 개념은 없는 거잖아요. 근데 태극에는 무에 대한 개념도 들어가 있어요. 오히려 무에 대한 개념이 더 강해요. 앞에서 그래서 ‘무극이태극’이라는 거, 무극이나 태극이나 같은 얘기인 건데, 태극에 원리나 법칙이나 그런 식으로 이해하는 것을 조금 경계하기 위해서 무극이란 개념을 넣다고 할 수도 있어요. 무의 개념을 넣고 있다구요, 도덕경에 있는 그 무. 그 무는 뭐냐면 ‘있는 그대로’ 에요. 이 세상이. 이 세상 자체를 얘기해요. 이 세상 자체가 왜 무냐, 이렇게 말을 하면. 무 라고해서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렇다구요. 가치분별이나 판단분별, 가치분별, 사실판단, 의미판단 이런 식의 것을 하지 않았을 때, 아무것도 판단하지 않고 아무것도 내 감정이나 내 욕구나 그런 것에 이해득실이나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을 잠재우고 그거 없이 이 세상을 보게 되었을 때, 그럼 본다고 하지 않고 그냥 접한다고 해야 될지 모르겠는데 접했을 때, 아니면 같이 있거나. 같이 있다고 해야 되겠죠. 그냥 ‘나와 이 세상이 물아일체로 있는 거요’. 물아일체이기 때문에 물아일체라고 말할 수 없는 상태요.
접하거나 접한다는 것도 일종의 움직임이기 때문에 움직이지 않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