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壬寅年 *정착과 부흥의 해* 5月 ☞가족과 이웃 구령의 달☜ ※보고서를 정직하고 투명하게 기록하여 각 카페에 입력해 놓으면, 6월 30일 복사해갑니다
창6:9-22절) 노아의 언약
세익스피어의<로미오와 줄리엣〉은 서로 적대적인 두 가문의 한계를 뛰어넘은 남녀의 비극적인 사랑을 그리고 있습니다.
지금은 세상이 많이 변해서 젊은 남녀가 가문이나. 가정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신의 의사에 따라 결혼하는 경우가 아주 많습니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개인의 존재가 전혀 의미를 가지지 못했습니다. 의미가 있는 것은 언제나 집단(集團)이었기 때문에 한 개인으로서 *누구라고 하는 개념이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느 가문에 속한 아무개의 몇째 아들 000*라고 하면 사람들이 알아들었지만 *나*라는 개념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즉 개인의 행복은 의미가 없었고, 그보다는 가문의 명예가 중요했어요.
그래서 어느 한 가문이 망하면, 그 안에 속해 있는 자는 주인이든 종이든 가축이든 다 멸망당해야 했고, 또 우리 가문과 저 가문 사이에 싸움이 일어나면, 이유 없이 칼을 뽑아야만 했습니다. 가문이 살아야 자기가 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각 가문에는 고유의 문장이 있었고, 사람들은 가문을 위하여 살고 가문을 위해 죽었습니다. 따라서 감히 가문의 뜻을 거스르고. 서로 사랑했던 로미오와 줄리엣은 엄청난 사람들입니다.
지금 현대적인 시각으로 보면, 이해가 되지만. 작품이 쓰여진 당시에는 얼마나 충격적이었을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결코<로미오와 줄리엣>식의 사고방식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이 구원과 심판을 말할 때에는 철저하게 집단적인 개념을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한 개인이 구원받는다는 개념이 없으며, 모든 것이 집단적인 개념입니다. 즉 내가 속한 집단이 구원을 받으면, 전부 구원을 받는 것이고. 내가 속한 집단이 멸망하면, 전부 다 멸망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보기에는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입니다. 우리는 본문 말씀을 통하여 상반된 두 부류의 사람과 생물들을 보게 됩니다. 한 부류는 이 세상에 속했기 때문에 홍수로 전부 망한 사람들과 짐승들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 부류는 노아에게 속했기 때문에 구원받은 사람들과 짐승들입니다. 우리는 노아 방주 안에 있는 짐승들과 밖에 있는 짐승들 사이에 그렇게 큰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모두 다 그 짐승이 그 짐승 같지요.
그러나 한 무리의 짐승들은 노아의 방주 안에 들어와 있었고, 노아의 언약 속에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구원을 받았고, 다른 짐승들과 사람들은 그 언약에 포함되지 못했기 때문에 전부 멸망당했습니다.
Ⅰ.당대의 의인 노아
오늘 본문 말씀에서 성경은 노아를 당대의 의인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6:8-9절)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성경은 노아에게 엄청나게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그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아무런 도덕적 흠이 없는 사람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평가를 보고. 노아를 전혀 죄성이 없는 사람으로 생각하거나. 한 번도 실수한 적이 없는 천사 같은 사람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사실 그는 우리와 똑같은 죄성을 가진 자였습니다.
그는 홍수가 끝난 후에 포도를 심어서 거기에서 난 포도로 술을 만들어 마셨습니다. 그리고 술에 취해서 벌거벗고 잠을 잤고, 자기를 흉본 아들을 저주했습니다. 이런 것을 볼 때, 노아는 한 번도 죄의 충동을 느껴보지 못한 완전한 의인이었다고 할 순 없습니다.
그렇다면 노아를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고 표현한 성경의 평가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여기에는 적어도 세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로 노아가 당시 사람들의 무서운 죄에 빠지지 않고, 성경이 *강포(强暴)*라고 말하고 있는 그 시대의 무서운 폭력에 빠지지 않았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6:8절)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럼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입니까?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죄짓고 싶고. 폭력을 휘두르고 싶은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간섭하시는 것이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들은 마음껏 죄짓도록 내버려 두시고. 죄에 대해서 감각이 없게 하십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죄를 즐기는 생활을 합니다.
거기에 반하여 어떤 사람들은 죄지으려고 하면, 하나님이 사사건건 간섭하셔서 죄를 짓지 못하게 하시거나. 죄를 짓고 난 후에도 엄청난 양심의 고통이나. 육체의 고통을 주심으로써 죄짓지 못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그가 은혜를 베푸시는 자들에게는 죄가 무엇인지 알게 하시고, 죄를 지으면, 부끄러워서 견디지 못하게 하시며, 지은 죄를 해결 받지 못하고는 잠시도 견딜 수 없는 감정을 주십니다.
노아가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였다는 것은 노아가 한 번도 죄의 충동을 느끼지 않은 천사 같은 성품을 가진 사람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노아도 죄 짓고 싶었어요. 성질나면. 주먹질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하나님께서 간섭하셔서 그것이 얼마나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일인지 깨닫게 하심으로써 다른 사람과 똑같이 죄 짓는 생활을 하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노아의 삶에는 죄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있었습니다. 노아도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지은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아벨의 피 제사입니다. 아벨의 제사는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피 제사였기 때문에 중요했습니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죄가 그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은 채, 그 사람을 따라 다니면서 자신감을 잃게 하든지. 더 뻔뻔스럽게 만들어 버립니다. 죄는 사람을 결코 순수한 상태로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죄는 사람의 양심을 갉아먹습니다. 죄를 짓고 나면, 자신감을 잃고. 완전히 의욕을 상실하든지, 아예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얼굴이 철판처럼 두꺼워지든지. 둘 중에 하나가 됩니다. 그러나 아벨의 피 제사에는 사람의 양심을 죄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는 왜 중요합니까? 우리 양심을 하나님 앞에서 아무 두려움 없이 완전히 해방하기 때문에 중요한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기도하게 합니다.
양심이 해방된 자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모든 죄가 하나님 앞에서 씻겼다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자를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고 부르십니다.
왜냐하면그의 죄가 용서되었기 때문입니다. 노아의 삶에는 진정한 예배가 있었습니다. 그는 예배로 인하여 죄씻음을 받았습니다. 또한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라는 것은 자신의 부족함을 아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자신감이 있는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과 동행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귀찮아합니다. 왜냐하면 자기 나름대로 생각이 있거든요. 그래서 하나님과 동행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여기 가만히 계십시오.해놓고 자기 맘대로 쫓아다니면서 자기 계획대로 살려고 합니다. 그러나 노아는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이 세상에서 죄짓지 않고 살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는 자기 힘으로 아무 것도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무슨 일만 생기면, 하나님을 불렀습니다. 즉 *하나님! 오셔서 이 일에 함께해 주십시오. 저 혼자의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과의 관계에 어려움이 생겨도 하나님을 불렀습니다.
어떤 일을 할 때, 어려움이 생겨도 하나님을 불렀습니다. *제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오셔서 이 일을 해결해 주십시오* 그는 항상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노아의 믿음은 겉으로 볼 때는 표시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참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그가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온전히 순종했다는 것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는 육체의 남은 삶을 전부 이 심판을 대비하는데 사용했습니다.
6:13-14절)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
노아의 믿음은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믿고. 그 심판을 준비하는 것을 통해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노아의 믿음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히11:7절)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없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그냥 보기에는 전혀 심판의 기미가 없었습니다. 홍수로 사람이 멸망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모든 삶은 오직 이 한 번의 심판을 준비하는 일에 바쳐졌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즐기고 주먹질하는 일에 삶을 사용하였습니다. 즉 모든 곳이 강포와 폭력으로 가득 찬 세상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먹고 싸고 자고 마시고 즐기며 하고 싶은 대로 다하면서 삽니다.
그러나 그런 중에서도 노아는 심판의 말씀을 듣고. 이 심판에 대비하는 배 한 척을 만드는 일에 모든 정력과 시간을 다 사용했습니다. 히브리서는 결국 이것 때문에 노아가 자신과 가족들과 많은 짐승들의 생명을 구원하는 믿음의 후사가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Ⅱ.홍수의 의미
홍수 심판에서 특이한 점은 폭력을 휘두른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가축과 들짐승과 곤충과 공중의 새까지 다 멸망했다는 사실입니다.
6:7절)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은 것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수많은 짐승들이 인간의 죄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물론 짐승들 중에도 못된 짐승이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짐승들이 다 못된 것은 아닙니다.
비열한 짐승이나. 다른 짐승들에게 해를 끼치는 짐승, 또는 바퀴벌레처럼 깨끗하지 못한 곤충들도 있지요. 그러나 고추잠자리 같은 곤충이 무슨 죄가 있으며. 사향노루 같은 짐승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짐승과 새와 곤충들까지 다 홍수로 멸망시키십니다. 왜 그렇게 하십니까? 하나님의 무자비함을 보여 주시려는 것일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과 심판의 언약(言約)성을 보여 주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홍수는 그저 노아 시대에 한정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말씀하신 그 심판이 이제 성취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말씀하셨을 때, 그것은 아담 개인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의 대표인 아담과 생사(生死)의 언약을 세우신 것입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에 순종하면, 영원히 살고. 불순종하면, 영원히 멸망한다는 언약이었습니다. 아담은 모든 인류와 피조물을 대표하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아담의 언약 속에는 짐승과 새와 다른 모든 것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학교에서 자기는 잘못하지 않았는데도 다른 아이들 때문에 단체로 벌을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나는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는데, 선생님이 나한테까지 벌을 준다고 입이 나팔처럼 나와 가지고 엄마한테 막 불평을 하지요.
그러면 엄마는 또 분기가 탱천(撑天)해서 *왜 우리 애까지 벌을 주냐?고 화를 냅니다. 구약을 잘 몰라서 그래요.
전쟁이 한번 일어나면, 국가의 대통령이 선전포고를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 나라 국민은 자기가 전쟁에 찬성하든 반대하든 상관없이 전쟁에 개입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나라의 대표가 전쟁을 선포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들끼리 전쟁을 하는데, 개나 짐승들이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그런데도 전쟁이 나면 소나 개나 짐승들이 모두 죽습니다. 고대(古代)때, 싸움에 지면, 여자들과 아이들은 노예로 팔리게 되어 있었습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거역했을 때, 아담은 하나님께 선전포고를 한 것과 같습니다. 죄는 하나님과 싸우는 것입니다. 즉 토개공이 남의 물건을 빼앗았을 때, 그 행동을 통해 국가가 하나님께 선전포고한 것입니다.
또 내가 남의 여자를 갈취하면, 그 행동을 통해 하나님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남의 것을 빼앗지 말라*고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이 선전포고를 보고서도 수천 년을 참으셨습니다. 아벨의 피 제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벨은 *가인을 살려 주십시오 나는 죽었지만, 가인까지 죽으면, 어떻게 합니까?* 하고 그의 피로 호소했기 때문에 가인이 살았습니다. 또 가인의 후손들이 수많은 죄를 지었지만, 아벨의 제사가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용서하셨습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대표성 원리*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셋의 후손들이 예배를 드리려고 하지 않습니다. 예배드리는 시간보다는 텔레비전 보면서 노는 시간이 더 좋거든요. 예배드리는 것보다는 세속적인 재미가 더 좋거든요.
요즘 코로나 시대. 안전 안내는 절대 순종하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지 않으니까 주일 10시만 되면 *00지역 몇 명 확진*이라고 문자가 어김없이 옵니다. 그러면 교회 갈까? 말까? 차라리 신앙을 포기할까?
세속주의가 왜 무섭습니까? 세속주의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무서운 것입니다. 모든 재앙은 하늘에서 내려옵니다. 가장 두려운 일은 하나님이 인간을 더 이상 불쌍히 여기시지 않는 것입니다.
가인의 후손을 살린 것은 경건한 후손들의 예배였습니다. 이 예배는 경건한 자손들만 살린 것이 아니라, 죄지은 자손까지 살렸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사람들이 전부 먹고 마시고 즐기는데, 빠져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성질나면 그냥 때립니다. 모두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에 열중해 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재앙을 연기할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그들에게 임했던 심판은 아담에게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던 그 심판의 말씀이 성취된 것에 불과합니다.
사람만 죽은 것이 아니라, 짐승과 새들까지 모두 죽은 것은 그들이 원하든 원치 않든 다 아담의 언약 안에 포함되어 있었고. 아담 가문에 속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담에게 속한 모든 것은 멸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노아에게 속한 것들은 모두 구원을 받았습니다. 즉 노아뿐 아니라, 노아의 아들과 며느리, 배 안에 있던 모든 짐승과 새와 곤충들이 다 구원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노아와 언약을 맺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원래 아담의 언약에 속해 있었지만, 하나님이 노아와 다시 맺으신 새 언약 속에 들어와 있었기 때문에 멸망당하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통해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자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스스로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은 인간 개인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디에 속해 있느냐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모든 짐승과 새들과 곤충에게까지 *너희는 아담에게 속했으니 아담과 함께 죽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자연에 속해 있는 것들은 전부 아담의 언약에 속해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받으려면, 어떤 인간이나 짐승이나 새나 곤충도 새 언약 속에 들어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새롭게 언약을 맺으십니다.
6:18절)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며느리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노아의 아들들과 자부들과 배 안에 있던 많은 짐승들이 멸망당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들은 아담의 언약이 아닌 새로운 언약 안에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방주 안에 있는 코끼리와 밖에 있는 코끼리가 다를 게 뭐가 있습니까? 방주 안에 있는 하마와 밖에 있는 하마가 본질적으로 다를 게 뭐가 있습니까? 다 비슷하게 먹고 싸고 놀지요. 그러나 하나는 언약 속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살고, 다른 하나는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죽는 다는 것을 교훈적으로 보여 주기 위해서 하나님은 새 언약을 맺지 않은 것들을 모두 죽게 하십니다.
그리고 새 언약에 포함되어 있는 사람들은 그 가족과 하는 일과 비전과 희망까지 모두 살아난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려는 것은 무자비한 심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살고 죽는 문제가 *얼마나 많은 선행(善行)을 행했으며, 얼마나 많이 인정받으며 살았느냐에 달린 것이 아니라, 오직 *그 사람이 어디에 포함되어 있느냐에 달려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십니다.
자연상태 그대로 있는 사람과 생물들은 자신들이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간에 모두 아담의 언약 안에 있으며, 저주 안에 있다는 것을 하나님은 노아 홍수를 통해서 실제로 보여 주셨습니다. 즉 자연상태로 있는 자는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새로운 관계가 필요합니다. 다시 말해서 새로운 대표가 인류를 대표해서 하나님과 새로운 언약을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새로운 언약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자는 몇 십 년이든 몇 천 년이든 결국 언젠가 멸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하나님은 보여 주십니다.
롬5:14절)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이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
하나님은 아담을 하나의 모형으로 제시하셨습니다. 아담과 함께 모든 가축과 짐승이 함께 몰살당한 것은 앞으로 그리스도가 이루실 완전한 구원을 역설적으로 보여 주기 위한 멸망이었습니다.
롬5:15절)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노아 홍수 때, 수많은 짐승과 가축이 죽은 것은 앞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이 얼마나 풍성하며, 놀라운 것인지 보여 주기 위한 예표라는 것입니다.
자연 상태에 있는 생물과 사람은 전부 죽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 그리스도 안에 있는 비전, 그리스도 안에서 꾸는 꿈들은 모두 살아납니다.
모든 인류는 두 가문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하나는 자연적인 출생으로 태어난 가문입니다. 여기에는 아직도 아담의 언약 안에 들어 있는 사람과 짐승이 있습니다. 즉 자연적으로 태어난 것은 개든지 타조든지 전부 아담의 소속입니다. 노아 시대에 살던 개들이 아담을 알았을까? 아담을 몰라도 아담 안에 있었기 때문에 같이 죽은 겁니다.
그처럼 자연상태로 있는 사람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아담에게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멸망합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이 세상에서 어떤 지위를 가지고 어떻게 사느냐?가 아니라 *어디에 포함되어 있느냐입니다. 여러분, 나는 그리스도께 속해 있습니까? 아니면 아담에게 속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죄 없는 짐승들까지 홍수로 쓸어버리신 것은 *너희가 새로운 언약에 속하지 않으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너희는 아담 속에 있는 것이며, 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러나 생명의 말씀을 듣고, 새로운 언약을 맺은 자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단순히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그 사실 때문에 엄청난 축복과 풍성한 삶을 얻습니다. 그것은 아담의 죄가 저질러 놓은 모든 것을 갚고도 남을 풍성한 삶입니다.
죄가 역사하면 역사할수록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강하게 역사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기 위해서 잃은 것이 있으면, 그 잃은 것의 몇 천 배, 몇 만 배를 갚아 주십니다. 즉 그리스도 때문에 잃어버린 것, 죄에서 멀어지기 위해 포기했던 것을 다 갚아 주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오직 한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아-멘
Ⅲ.노아의 방주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아주 큰 네모난 배를 준비하게 하셨습니다.
*방주(方舟)*는 *네모난 배*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고대(古代)애굽 시대에 곡물 수송용으로 네모난 배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러나 노아의 네모난 배에는 뚜껑이 있었고, 내부가 3층으로 되어 있었으며 칸막이가 있다는 것이 특징이었습니다.
6:15-16절)네가 만들 방주는 이러하니, 그 길이는 삼백 규빗, 너비는 오십 규빗. 높이는 삼십 규빗이라. 거기에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 그 문은 옆으로 내고. 상 중 하 삼층으로 할지니라.”
길이는 300 규빗, 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우리 단위로 150미터 정도입니다. 해군에는 *LST*라고 하는 대형수송선이 있는데, 노아 방주가 그 정도 크기인 것 같습니다.
3층으로 나누어 있는 구조는 할 수 있는 한 많은 생물과 물건들을 싣는 데, 또 배의 균형을 잡는데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또 칸막이는 배가 흔들릴 때, 짐승들이 한 곳으로 쏠리지 않도록 막는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노아 방주는 대단히 튼튼하게 지어진 배였지만. 몇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우선 이 배는 한번 들어가면, 밖을 내다볼 수가 없었습니다. 창문이 맨 꼭대기에 있었기 때문에 밖을 내다보기보다는 공기를 순환시키는 정도의 역할밖에 하지 못했습니다.
또 이 배에는 노도 없고, 엔진도 없고,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냥 물에 띄워놓는 것이 전부인 배입니다. 만일 이 배가 망망대해로 흘러가 버리면, 어떻게 합니까? 그 안에 있는 양식은 한계가 있는데, 계속 흘러가서 먼 바다까지 가버리면 어떻게 합니까?
또 이렇게 밖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에서 언제까지 기다려야합니까? 방주에 탄 노아의 여덟 식구들과 짐승들의 처지는 광야를 방황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처지와 너무나도 비슷했습니다.
광야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애굽에서 구원받았습니다. 그들은 네모난 배를 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네모난 상자를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율법이 들어 있는 법궤였습니다.
혹시 하늘에서 하루라도 만나가 내리지 않으면, 굶어 죽을 것이고. 샘물을 놓치기라도 하면, 목말라 죽을 것입니다. 도대체 언제쯤이면, 이 여행이 끝날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노아의 식구들도 그랬습니다. 그들이 1년 동안이나 밖을 내다보지 못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들이 1년 내내 한 일은 방주 안에 있는 짐승들을 돌보면서 싸운 것입니다.
애들이 방학을 하면, 엄마들이 정신을 못 차립니다. 애들이 밖에 나가지 않고. 집에서 계속 사고를 치는데, 애가 하나도 아니고. 둘 정도 되는 엄마는 개학하는 날을 손꼽아 기다릴 수밖에 없지요.
그래서 마침내 개학해서 아이가 학교에 가면 *해방이다!!*하면서 도시락 싸주면서 얼른 보냅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신앙생활도 그와 비슷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러나 미래를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창문은 저 높은 곳에 딱 하나 있는데, 그것으로는 밖을 내다볼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골방에서 기도로 숨만 쉴 수 있는 창문일 뿐입니다. 배 안에 쌀은 점점 떨어져 가고. 마음은 초조해지기 시작하는데, 도대체 이 배가 어디로 가는지 알 수가 없어요.
그러나 이 배를 운전하시는 이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이 배는 하나님이 운전하시기 때문에 엔진이 필요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운전사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굳이 밖을 내다 볼 필요가 없습니다.
밖을 내다봐야 보이는 것이라고는 떠다니는 시체(屍體)들뿐입니다. 살아 있는 것은 이 배 안에 다 있습니다. 이 배는 작은 우주였어요. 그 안에는 앞으로 심을 곡물, 번식할 짐승, 곤충, 새들이 다 있었습니다. 굳이 밖을 내다볼 필요가 없었습니다.
밖에는 죽은 좀비들밖에 없었어요. 우리가 힘들어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분명히 구원은 받았는데, 앞으로 어떻게 될는지, 나의 일이 잘 풀릴지. 그렇지 않을지를 모르는 겁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이상 다음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운전사가 되어 주십니다.
하나님이 조종하시기 때문에 내가 따로 엔진을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즉 하나님도 엔진이 있고, 나도 엔진이 있으면, 그것은 간첩선(間諜船)입니다. 간첩선에는 엔진이 세 개 있어요. 얼마나 빨리 달리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엔진이 있기 때문에 새로 엔진을 만들지 않아도 됩니다.
복음성가 1709장 *구원 열차*
하나님이 조종해서 나가십니다. 우리의 교회(공동체)는 작은 우주입니다. 교회(공동체)안에서 형제와 자매를 돌보며, 나에게 주어진 작은 봉사를 하는 것은 우주적인 구원의 준비입니다. 모든 것이 공동체 안에 다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미래를 더 이상 염려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이미 노아가 겪었던 일입니다. 노아는 홍수로부터는 구원받았지만, 대책이 없었습니다. 양식은 막 줄어드는데, 코끼리나 소들은 계속 밥 달라고 보채니 참 밉습니다.
그래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운전사가 되어주시고. 하나님께서 모든 필요를 잘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Ⅳ.노아의 언약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6:18-20절)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며느리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암수 한 쌍씩 방주로 이끌어 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하게 하되. 새가 그 종류대로, 가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각기 둘씩 네게로 나아오리니. 그 생명을 보존하게 하라”
우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노아와 언약을 맺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집 주인이 그냥 집을 쓰라고 하면, 우리는 불안합니다. 언제 나가라고 할지 어떻게 압니까? 그러나 계약을 하면, 그 계약 기간 동안은 주인도 함부로 나가라고 할 수 없습니다.
계약을 세우면, 주인이라도 계약을 지켜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계약을 세우실 필요가 전혀 없으십니다. 그런데도 노아와 계약을 세우심으로써 하나님 자신을 제한하셨습니다. 즉 *이 방주 안에 들어가라. 그러면. 내가 너희의 모든 삶을 책임지겠다.* 하나님은 노아와 언약을 맺으신 이상 반드시 노아와 그 배에 탄자들의 생명을 지켜주셔야 합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 언약을 지키지 못하신다면, 하나님은 능력이 없으신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하나님 되시기 위해서는 반드시 언약을 지키셔야 합니다. 그래서 언약을 맺은 후. 노아는 배 안에서 굶어 죽을 걱정을 하지 않습니다.
어느 날 배가 어딘가에 부딪치는 듯한 큰 소리가 갑자기 들리기도 하고, 자꾸 이상한 쪽으로 흘러가는 것 같아도 노아는 걱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언약을 세웠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이 방주 안에 들어 있는 이상 노아뿐 아니라, 그 가족과 모든 짐승들의 생명을 지켜 주시기로 스스로의 능력을 제한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온 우주에서 가장 큰 관심을 가지고 지켜 보시는 곳은 곧 이 배 안입니다.
왜냐하면 이 안에 하나님의 약속이 있고. 하나님의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들에게 주신 언약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만 붙들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노아와 언약을 맺으셨던 것처럼 우리의 모든 삶을 책임지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예수 믿는 것입니다. 생명의 말씀을 붙들기만 하면, 하나님이 나의 생명과 장래와 모든 풍성한 삶을 책임지시게 되어 있습니다. 왜 먹을 것을 염려하면 안 됩니까? 우리에게 하나님의 언약이 있기 때문이며. 우리는 생명의 말씀만 붙들면. 먹게 되어 있습니다.
왜 누구와 결혼해서 어떻게 살지 염려하면 안 됩니까? 우리에게 하나님의 언약이 있기 때문에 생명의 말씀만 붙들면, 하나님이 나의 모든 삶을 책임지시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생명의 말씀을 붙드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나를 굶게 하시고, 비참한 삶을 살게 하시고,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당하게 한다면, 하나님이 계약을 위반하신 겁니다.
내가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붙들었는데도 굶어 죽었다면. 곧 심판대로 찾아가서 *하나님, 그러실 수가 있어요? 이건 계약 위반인데요.*하고 따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사람이 굶게 되면, 하나님이 더 급해서 천사들에게 막 지시하십니다.
*빨리 빨리 움직여라. 재가 죽으면 계약 위반이다* 천국이 굉장히 바쁘게 움직입니다. 즉 천사들은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온갖 곳에 전화를 해서라도 그 사람을 살려내야 해요. 얼마나 멋있는 일입니까?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붙들기만 하면, 하나님이 나의 살고 죽는 것과 풍성한 삶과 그밖에 모든 것을 다 책임지시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삶은 내가 생각하는 최선의 삶보다 더 아름다운 것입니다. 나로서는 상상하지도 못할 삶을 하나님이 책임져 주십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언약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세우신 언약에 제한당하시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노아와 세우신 언약을 보면서 이 언약의 몇 가지 한계를 깨닫게 됩니다.
우선 이 언약의 대상이 대단히 제한된 최소한의 범위에 국한됩니다. 노아와 함께 구원받은 사람은 그의 식구 여덟 사람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생물들도 각기 한 쌍씩밖에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인간들은 스스로 구원받기 싫어했기 때문에 죽었고, 짐승들은 방주에 다 들어올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죽었습니다. 이렇게 노아의 방주는 너무나도 제한된 구원만 이루었습니다.
<쉰틀러 리스트>를 보면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만큼의 사람만 구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리스트에 몇 명이 기록되느냐 하는 것은 돈의 액수에 제한됩니다. 노아의 리스트에는 방주의 공간이 허용하는 만큼만 이름을 올릴 수 있었습니다. 방주는 제한된 공간이니까 모든 생물들을 다 구원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노아의 리스트에는 모든 생물의 대표격으로 각각 한 쌍씩만 이름이 올랐습니다. 즉 노아의 리스트에 포함되어 있는 인원은 최소한의 인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노아의 언약을 *보존의 언약*이라고 부릅니다.
다시 말해서 노아의 구원은 엄청난 죄의 흐름을 주춤하게 만들고. 약속하신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 인간이 존재할 수 있게 하는 보존의 언약이지, 완전한 구원이 아닙니다.
또 홍수에서 구원받은 자들이 곧 영생으로 들어간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배에서 나와서 다시 농사 지으며 살아야 했으며, 그들에게서 계속해서 죄인들이 태어났습니다.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 창조질서는 유지되어야 하며, 인간의 폭력과 부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이루어져야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보존의 언약을 세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노아의 구원은 앞으로 있을 우주적인 회복의 예표에 불과합니다. 노아가 가정의 단위로 구원받았듯이 앞으로의 구원도 개인적이 아니라, 가정 단위로, 공동체 단위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가정은 구원을 이루는 아주 중요한 단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족 단위로 구원을 이루셨듯이 우리의 구원도 공동체 단위로, 공동체적으로 이루어 나가실 것을 보여 주십니다. 그리고 노아 시대에 모든 가축이나 짐승들이 함께 구원을 받은 것처럼 앞으로 우리가 받을 구원도 모든 생물들이 함께 하는 우주적인 구원이 될 것입니다.
노아의 리스트에 실린 생물은 극소수에 불과했지만, 그리스도의 리스트에는 땅 끝까지 이르러 수많은 방언을 사용하는 종족들이 다 포함될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구원은 또다시 농사 지으며 생활해야 하는 구원이 아니라. 그의 구원은 영원한 생명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리스트는 노아의 리스트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방대한 규모가 될 것입니다. 즉 구원받기 원하는데도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것입니다. 스스로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사람들만, 멸망당할 뿐, 구원받기를 원하기만 하면,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리스트에 포함될 것입니다.
우리가 노아 홍수를 통하여 반드시 생각해야 할 것은 죄에 대한 무감각보다 무서운 것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믿었고. 그 심판을 대비하는데. 자기 삶 전체를 다 사용했습니다.
그는 진노의 심판을 믿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처럼 폭력에 빠지거나. 무절제한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혹시 하나님의 심판이 없다고 생각해서 하루하루를 믿지 않는 사람과 똑같이 먹고 마시고 즐기면서 살고 있다면, 여러분은 대단히 위험한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노아처럼 미래에 있을 하나님의 진노를 우리의 현실로 끌어와야 합니다. 노아는 심판이 있을 것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이 심판에 대비하여 자신의 남은 삶을 완전히 바꾸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그 순간을 대비하여 여러분의 남은 삶을 근본적으로 뜯어 고치고, 근본적으로 개혁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언약에 포함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집(아파트)넓히고. 돈 버는 재미로 산다면, 여러분은 위험한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죄 짓는 것을 두려워하십시오. 그리고 남은 삶을 온전히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데 사용하십시오. 혹 먹고 마시는 것에 빠지거나. 사람들이 두려워서 양심에 거스르는 짓을 하는 것은 스스로의 영적 상태를 위험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하나님께 돌아왔기 때문에 생활이 어려워지고. 삶이 불안정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나의 운전사가 되어 주십니다. 나는 엔진이 없어도 하나님의 배는 갈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내 마음대로 살지 마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의 모든 삶에 하나님이 찾아오시며. 개입하시게 하십시오. 아벨의 피의 제사, 신령과 진리의 예배를 중단해서는 안 됩니다. 이 예배는 세상에 임할 진노를 막을 것이며, 이 땅에 평화를 가져올 것입니다. 아-멘
복음성가 1432장 *예배 자*
율법서(모세 오경)
▣ 예배 5월 29일(주일예배)
☞가족같은 교회. 교회같은 가족☜
주일 예배와 헌금 봉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천국시민된 특권과 은혜감사
요4:23절)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순서 : ☆사도신경으로 시작하여 ☆성경 : 본문 읽기와 생명의 양식 주 중 감동받은 양식 재공유, ☆찬송 : 삽입된 찬송, ☆헌금 : 헌금과 봉헌기도, ☆연구원 설립을 위한 합심기도와 주기도문으로 끝내십시요.
◈후원금 외 헌금은 전체의 10/1을 연구원 설립비로 ▽입금하고, 나머지는 성도간 교제비, 애경사, 새신자 환영, 전도비 등으로 사용하십시요.
NH콕뱅크 302-8772-0191-01(헌금 종류)
대한 예수교 장로회(합동)교회갱신 성경연구원
정 의 영 목사 ☎ 010-8772-01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