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웨슬리와 영혼 구원 선교
노윤식
I. 서론
John Wesley는 기독교 역사 상 전환점을 가져온 인물이다.
그는 기독교 선교와 그리스도인의 삶에 영향을 주었으며 근대 복음주의 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그는 종교적 명목주의에 반대하여 가슴으로 느끼는 복음을 외쳤고, 외적 종교의식보다 내적 중생과 성결한 삶을 강조하였다.
그는 의문의 교리보다는 믿음의 회심을 강조하였고, 성경에 대한 이론 정립보다는 하나님의 말씀 자체에 관심을 두었고,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을 실천하였다.
이러한 Wesley의 신앙과 실천은 근대 이성과 논리로 정통주의에 빠져서 복음의 생명력을 잃고 있었던 18세기 서구 교회에
새로운 부흥의 운동을 일으켰다. 이 부흥운동은 영국은 물론 북미 대륙에 이어졌고, 영혼 구원을 최우선적으로 실천하는 복음주의
선교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사실, 복음주의 선교 운동의 가장 기본적인 특징은 영혼 구원 중심의 선교 방식으로서 Wesley의 선교에
있어서 가장 주요한 강조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Wesley에 대한 연구는 에큐메니즘, 동방교회 영성, 사회 개혁 등 통전적 선교(holistic missions) 방식으로 집중되어 왔다.
물론, 통전적 선교 방식이 에큐메니칼이나 이반젤리칼(Ecumenical and Evangelical) 양 진영에서 모두 인정되고 있는 선교 합일
사항으로서 그것을 비판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Wesley의 저술을 읽어보면, 그 중심에는 언제나 영혼 구원에 대한 그의 선교적
열망이 내재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을 본 논문에서 주장하려고 하는 것이다.
진정한 Wesley에 대한 재발견은 영혼구원에 대한 선교적인 관점으로 그를 연구할 때에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본 소 논문에서는 Wesley의 영혼 구원을 위한 선교 방식의 실천의 전환점이 되는 시점, 곧 그의 조지아 선교의 실패와
그 이후 변화를 중점적으로 살펴보면서, 그가 영혼구원을 최우선적으로 강조하여 사람들을 주님께로 이끌었던 점을 그의 일기와
서간문 기타 저술 등을 중심으로 밝히고자 한다. 그리고 그의 영혼 구원을 강조하는 선교 방식이 역동적인 소그룹 제자 훈련을 통해
성취되었음을 밝히고, 그것이 21세기 현대 후기사회에 적용되어야 함을 논의하고자 한다.
Ⅱ. John Wesley는 누구인가?
John Wesley는 영국 링컨주 엡워드(Epworth)의 옥스퍼드 대학 출신의 한 성서학자요 영국 국교회 목사인 아버지
Samuel Wesley와 청교도 지도자인 Samuel Annesley 박사의 딸인 경건함과 영혼의 돌봄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어머니
Susanna Annesley 사이에서 19자녀 중 15번째로 1703년 6월 17일에 태어났다.
그는 옥스퍼드 크라이스트 처치 대학을 졸업하고 그의 부친을 도와 엡워드 교회 부목사로 시무하다가, 1729년 옥스퍼드 대학
강사로 임명받았다. 그는 대학에서 동생 Charles Wesley가 조직한 "신성 클럽”(holy club)을 지도하며 회원들과 함께
수감자들과 빈민들을 정기적으로 방문하며 사회 선교를 시작했다.
1735년 10월 Wesley는 북미 조지아 주 선교사로 임명받아 약 2년간의 선교 활동을 마치고 귀국했다. 귀국 후 그는 모라비안
형제단과 신앙의 결속을 다지며 1738년 5월 1일 런던의 패터래인 가에서 신도회(Fetter Lane Society) 창립을 돕고, 그 회의
지도자로서 참여하였다. 같은 해 5월 24일 그는 올더스게이트 가의 작은 집회에서 마음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하였고,
6월에서 9월까지 모라비안 신도들의 믿음의 실체를 경험하기 위하여 독일의 헤른후트를 방문하였다.
그는 헤른후트에서 5개의 남성 구역(class meetings), 11개의 지역 단위 구역(class meetings), 그리고 상호 고백과 권면 및
영적 성장을 위한 90개의 소모임(bands)을 참관하였고, 후일 그의 사역에 적용하였다.
그는 모라비안에게서 믿음으로 구원받음, 세계선교 열정, 여성 사역 및 평신도 사역, 경건주의적 "교회안의 교회"
(ecclesiolae in ecclesia) 조직 등을 배웠으나 모라비안의 신비주의적이고 비성서적인 정숙주의로 인한 도덕무용론에
반기를 들고 그들과 결별하였다.
1739년 1월 1일 Wesley 형제와 약 60명의 신도들이 패터래인에서 기도회로 모였고 이 자리에서 성령의 능력을 체험했다.
그 이후 같은 해 4월 1일 옥스퍼드 대학의 제자이자 신성 클럽의 동료 후배인 George Whitefield의 강권에 의해 그의 역사적인
야외 설교를 킹스우드 지역에서 시작하게 되었다. 그의 성령 충만한 영혼 구원을 목적으로 하는 설교는 중세 봉건 농경사회에서
근대 산업사회로 전환되는 혼란기 영국 사회에서 극도로 무력해진 하층 노동자 계층에게 사회적으로 뿐 만 아니라 영적으로
적응할 수 있도록 새로운 동력을 제공하였다. 그는 Whitefield처럼 유명한 대중 설교가로만 남아 있지 않았고, 믿음을 고백한
사람들을 11-12명이 참여하는 구역 단위로 조직하여 그들 상호간의 친밀한 친교와 영적 돌봄을 통하여 믿음을 지켜나갈 수 있도록 하였다. 그는 각 구역마다 지도자를 세우고 그들을 또 다시 성결의 은총을 추구하는 5-6명의 소그룹 제자훈련모임(bands)에
소속시켰다. 그곳에서 성결의 은혜를 충만히 받은 지도자들은 다시 선발회(select society)에 소속되어 Wesley의 참모들이 되었다.
이러한 그의 제자훈련 방식은 성경적이고 온전한 선교 방식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선교는 복음을 선포하는 것 뿐 만 아니라
믿는 자에게 세례를 주고 가르쳐 제자를 만드는 전 과정을 의미하기 때문이다(마 28:19-20).
1743년 Wesley의 연합 신도회(United Society)가 5000여명으로 조직되었고, 그의 조직은 점차 부흥하여 1744년 6월 25일에
런던 파운드리 교회에서 제 1 차 감리교도 연회를 개최하였다.
Wesley는 영국 뿐 아니라 '성서적 성결을 온 세계로' 전하기 위하여 아일랜드, 스코트랜드, 미국 등지에 신도회를 조직하였고
감리교회로 성장 발전하였다. 그가 1791년 2월 23일 레더헤드 시장 저택에서 마지막 설교를 한 후, 일주일 후 3월 2일 오전 10시에 런던 로드 교회당 저택에서 향년 88세로 서거하기까지, Wesley는 50여 년간의 마상 전도와 40만 킬로미터 이상의 순회 전도,
그리고 4만 2천회의 설교와 200여권이 넘는 저술을 남기었다.
Ⅲ. John Wesley의 조지아 선교 실패
이제 Wesley의 영혼 구원 선교의 중요한 전환점인 조지아 선교를 중심으로 논의해보자.
Wesley의 조지아 선교는 그의 조부 Wesley 목사와 그의 아버지 Samuel Wesley 목사의 선교에 대한 열망의 결과였다.
그의 조부는 남북 아메리카 선교에 참여하려고 했었고, 그의 부친 역시 동 인도와 중국 그리고 아비시니아(이디오피아) 등지에
선교의 꿈을 가지고 있었다. 선대의 선교 열정과 꿈은 John Wesley 때에 와서 이루어졌다.
그의 어머니 Susanna는 데니쉬-할레 선교회(Danish-Halle Mission)의 최초의 남인도 선교사인 Zigenbalg와 Pluetzschau의
영혼 구원 선교 사역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후일 아들의 선교를 기쁨으로 지지하였다.
한편, 신대륙 식민위원회는 조지아주 이민자들을 위한 목회자를 선발했는데, Wesley가 그 적임자로 선발되었다.
신대륙 식민위원회는 영국의 젊은 장교 James Edward Oglethorpe에 의해 개척된 북미 식민지역에 석방된 수인들이나 경제적으로 불우한 사람들을 영국과 독일 등지에서 이주시켜 생활 터전을 마련해 주는 일을 담당하고 있었다.
이 위원회는 북미 이민 계획을 추진하면서 복음선전회(the Society for the Propagation of the Gospel)의 협조를 받아
선교사도 함께 파송하였는데, 그 적임자가 John Wesley였다.
1735년 10월 14일 Wesley는 Oglethorpe의 비서로 선발된 그의 동생 Charles Wesley와 신성클럽 회원인 Benjamin Ingham과
한 상인의 아들인 Charles Delamotte와 함께 220톤급의 시몬즈호(the Simmonds)에 승선하였다.
이 배에는 Nitschman 감독이 인솔하는 모라비안 형제단과 80여명의 영국인이 동승하고 있었다.
Wesley가 품고 있었던 선교 동기는 그의 일기와 서간 등의 내용을 종합해 볼 때에, “영혼 구원”과 “복음전파” 그리고 “이웃 사랑
실천”을 통한 “하나님께 영광”이었다. 그는 결코 낭만주의적 해외 동경이나 경제적인 풍요, 정치적인 명예, 혹은 신대륙 탐험의
야망 등의 갖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웨슬리는 영혼구원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차 선상에서부터 개인기도와 연구 그리고 성찬과
예배를 집례하고, 사람들을 주의 말씀으로 가르치고 권면하는 일을 시도하였다.
그의 관심은 언제나 “영원의 문턱”(brink of eternity), “죽음의 불안,” “하나님과의 대면” 등의 인간 영혼의 구원 문제였다.
그는 폭풍 중에 죽음의 위협에서 두려워하지 않지 않고 찬송하는 모라비안 교도들과 그들의 부녀자들, 그리고 어린 자녀들에게서
진정한 신앙과 헌신적인 봉사에 대하여 큰 감명을 받았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한 신앙에 대하여 모라비안 목사인 Spangenberg에게서 배우게 되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령이 인간의 영과 더불어 그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성령의 증거와 믿음의 확신은 웨슬리의 평생 선교의 주제가 되었다.
그의 조지아에서 선교 활동은 크게 둘로 대별될 수 있다.
그 하나는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태리 스페인 각지로부터 이주해 온 서구인들을 대상으로 선교 활동을 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북미 본토 인디언[토착원주민]들과 흑인들에게 선교하는 것이었다.
그는 사바나를 중심으로 인근 여러 마을을 돌아다니며 순회 선교활동을 했다.
주일에는 새벽 5시에 새벽예배를 인도하고, 오전 11시에 성찬식과 설교를, 그리고 오후 3시에 오후 기도회를 인도하였다.
이 밖에도 독일 모라비안 예배, 프랑스인, 이태리인 예배에 참석하거나 토요 집회인 경우에는 직접 인도해주기도 하였다.
그는 스페인계 유대인들을 전도하기 위하여 스페인어를 배우기도 하였다.
그는 설교와 예배 인도 뿐 만 아니라 빈자와 병자를 돌보는 일에 헌신하였다.
그리고 그의 독특한 선교 방식인 소그룹 모임을 통해 서로 기도하고 권면하는 제자훈련 사역을 병행하였다.
그는 영국 국교회의 도덕과 윤리의 잣대로 사바나 이주민들의 생활을 혹독하게 비판하였고, 그의 사바나에서의 선교 활동의 결과
댄스홀이 한산하게 되었고, 사치와 향락 풍조가 현저하게 사라졌다. 그러나 그것도 오래가지 못하였다.
그의 엄격한 고교회주의와 타협할줄 모르는 강인한 도덕주의는 일반 신도들의 호감을 잃고 말았다.
그는 영국 국교회의 권위와 의식을 존중하여 영국 교회로부터 세례를 받지 않은 자에게는 성찬과 장례식을 제한하였으며,
비국교도 자녀들에게 세례를 다시 주었으며, 세례는 반드시 침례로 행하였다.
그는 새로운 북미 대륙에 이주해 온 사람들에게 엄격한 영국 국교회의 교리와 윤리의식을 고집스럽게 강요함으로써 결국
그들로부터 불신임을 받게 되었다.
이제 Wesley의 현지 인디언 선교 활동에 대하여 살펴보자.
그가 처음으로 조지아에 도착했을 때에, 현지 인디언들이 그에게 찾아와 기독교의 가르침을 배울 수 있도록 요청한 사건이 있었다.
그들의 대표 격인 Tomochichi라는 자가 통역 Musgrove 여사를 통해 스페인들의 강압적인 방식보다는 말씀을 듣고 깨달은 후에
기독교인이 되는 방식으로 자신들을 가르쳐달라고 요청하였다.
그 때에 그는 기꺼이 그들에게 복음을 설명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이 있다면 그들이 배울 수 있을 것이지만 우리는 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그는 선교의 중요한 기회를 놓친 것이었다.
그는 사바나에 머무는 동안 조지아의 평의원회에 의해서 사바나 교구 목사로 임명받았고, 그 사역을 자의반 타의반 수행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인디언 선교를 위해 조지아에 왔으므로 인디언 지역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의무감을 지니고 있었다.
사바나에 머문 지 약 넉 달 후인 1736년 7월 1일에 그는 Chigilly라고 하는 백발의 척타우족(Choctaw) 추장을 만나 창조주와
좋은 책(the Good Book)에 대하여 이야기할 기회를 가졌다.
그 추장은 창조주를 믿고 있었고 백인들의 좋은 책을 가르쳐달라고 Wesley에게 요청하였다.
웨슬리는 그에게 그들의 나쁜 구습을 버리지 않는 한 하나님이 가르쳐 주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고, 결국 그 추장은 그에게
조언하기를, “당신의 하나님은 우리 마음이 하얗게 되지 않는 한 우리를 가르치지 않을 것이다” 말하기도 하였다.
이는 Wesley가 척타우족이 가지고 있던 창조주에 대한 믿음과 성경에 대한 긍정적인 받아들임을 하나님의 선행적인 은총으로
받아들이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들이 행하고 있었던 관습의 잘못된 점을 문화적인 관점에서 이해하기 보다는
영국 국교회의 윤리적 기준으로 지나치게 정죄하여 하나님의 은총의 복음을 전파하지 못한 결과를 초래하였다.
결국 웨슬리는 그들이 복음을 향하여 마음을 열지 않는 것으로 판단해 이교도들에게 문이 열리기까지
선교 사역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또한 당시 인디언 지역에서 전투가 벌어지는 상황이나 사바나 지역에 후임 목사가 오지 않는 상황은 그에게 “이교도들을 향한 선교의 문”이 아직 열리지 않고 있다는 증거로 보여 졌다. 그래서 그는 사바나에서 목회활동을 계속하였다.
이 때에도 Paustoobee나 Mingo Mattaw 같은 현지 인디언들은 그들과 서구인들 사이에 평화를 중재해 줄 것과 이를 통해
기독교 복음 전파를 Wesley에게 요청했지만, 그에게는 역부족이었던 같다.
그 이후 그는 사바나 지역의 신도들과의 갈등과 자신의 청혼자였던 Sophia[Williams 부인]의 성찬거부 사건으로 인하여 법정에
고소를 당하자 곧 영국으로 돌아가라는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귀국하였다.
이로써 그가 기독교의 본질을 인디언들에게 가르치기 위해 떠났던 조지아 선교는 1년 9개월 남짓의 아무런 성과 없이
오명만 뒤집어쓰고 실패로 끝났다.
조지아 선교 실패는 Wesley의 기독교 선교에 끼친 긍정적인 영향 때문에 과도하게 가려져 있는 부분이다.
성결의 복음을 온 세계로 전하려고 했던 그의 선교열정은 그 방법론에 있어서 총과 칼을 들고 가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영혼 구원을 위한 열정이 크다보니 자기중심적으로 되어 무지한 사람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시켜보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선교방법이었다. 그는 선교지의 사람들의 문화와 삶을 먼저 이해하고 동정하며 하나님의 은총의 말씀을
전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엄격한 영국 국교회의 가치와 신앙 기준을 가지고 신세계의 무지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가르치려 들었다.
그래서 선교지 사람들에게 그의 윤리적인 설교와 엄격한 도덕적 태도는 그들의 문화와 삶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않고 무시하고
억압하는 폭력적인 태도로 밖에 이해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Williamson 부인의 성찬 참여를 거부하였고, 그 일로 “정신적 독재”를 일삼고 불법적 권위를 자행하는 목사라고 고소되어 법정에 서게 되었다. 그가 설교하면 할수록 사람들은 그의 말에 귀를 닫았다.
한 신도[Mr. Horton]는 그에게 “우리는 자신을 능멸하는 당신의 말씀을 더 이상 듣지 않을 것입니다. ...
그리고 당신이 여기 오신 이래로 줄곧 싸움만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 마을의 남자든 여자든 당신의 말씀을 염두에 둘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설교를 아무리 길게 할지라도 아무도 그 말씀을 듣기위해 오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사실을 직언하기도 했다.
사실 그는 조지아 선교에서 사바나는 인디언 지역으로 들어가기 전에 잠시 머무르기 위한 곳이었다.
그런데, 그곳에 목회자가 필요하여 잠시 머물었던 차에, 신도들과 주민들에게 갈등을 유발시킨 것이었다.
그의 관심은 언제나 현지 인디언들의 개종에 있었다. 그는 강압적인 폭력을 사용하여 인디언들을 개종할 의사가 전혀 없었다.
그러나 그는 현지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서 교화시켜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도록 하려고 했다.
그는 현지인들에 대한 문화적 이해보다 감상적인 태도를 가졌다. 아마도 그는 당시 낭만주의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고귀한
야만인”(noble savage) 개념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곧, 현지 인디언들은 자연 상태에 머물기에 순수하여 선악을 구별하지 못할 것이라는 다소 감상적인 태도였다.
그러나 그의 낭만적인 사고는 곧 깨어지고 말았다. 그는 북미 남부지역 인디언들을 평가하는데, 게걸스럽게 먹는 사람들,
술주정뱅이들, 거짓말쟁이들, 도둑들, 배울 바가 전혀 없는 자들이라고 경멸하였다.
그는 이들을 “네 발로 걷는 형제들, 재주 있는 동물들”로 경멸하며, 아프리카 이방인들은 정의와 도덕이 부족한 데 비해 미국
이방인들은 별반 나을 것이 없노라고 판단하였다. 그들의 집은 영국의 개집보다도 못하고, 옷은 부적절하며, 최소한의 철학이나
개념도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큰 죄악에 노예가 되지 않은 이방인을 한 사람도 보지 못했노라고 말하며, 명목상의 기독교인들도
문제지만, 현지 이방인들과 비교한다면 그들이 훨씬 부드럽고, 예의바르고, 얘기가 통하는 사람들이라고 평가하였다.
결국 그는 인디언들이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고 판단하고 선교를 포기하였다.
Wesley의 조지아 선교를 평가하자면, 그는 영혼 구원의 열정을 가졌지만 서구인들의 일반적인 생각과 태도를 견지하였던 것 같다.
그는 현지인들과 만남이나 대화에서 타자의 새로움을 발견하는 데 목적을 두지 않았다.
그의 선교의 목적은 타자의 “다름”을 자신의 고교회적 인식 틀로 중화시키어 그것을 복음으로 감싸 안고 동화시키려고 했다.
그는 상호간 문화 배움을 통하여 대화(converse)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바꾸려고만(convert) 했다.
변화하고 바꾸는 것은 일방적으로 강압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총과 성령의 은혜로 타자의 다름을 인정해줄 때에,
타자가 서서히 변화되는 것이다. 겨자씨에서 작은 싹이 나듯이 성령의 역사는 강압적인 것이 아니라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줄 때,
그리고 하나님의 은총으로 사랑으로 감싸 안을 때에 일어나는 것이다.
사실, Wesley의 선교 방식은 새로운 삶의 정착지에서 적응하기위해 갈등하고 힘들어하고 있던 최하층의 현지인들과 제국주의
군대의 침입으로 생존권을 위협받고 있던 현지 인디언들의 관심을 끌 수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Wesley의 고교회적 엘리트주의 선교 방식에 감정이 상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현지인을 영국 국교회의 가치 기준으로 비윤리적으로 매도하고 무시하며 경멸하는 그의 선교적 태도는 현지인들의
대화의 창구를 닫히게 만들었을 것이고 선교 실패로 이어졌다.
IV. John Wesley의 조지아 선교 실패 이후 변화
조지아 선교 실패 이후 Wesley는 1737년 12월 22일, 귀국을 위해서 영국행 사무엘 호에 승선하였다.
여행 중에 그는 20여명의 승객들을 중심으로 아침과 저녁 두 차례 예배를 인도하였고, 지속적으로 흑인 소년 한명과 영어를 못하는
프랑스인에게 성경을 읽어주고 교리를 가르쳤다. 그는 폭풍 중에 죽음의 위협에서 자신의 영혼이 두려움과 혼란에 빠지는 것으로
인하여 실의에 빠졌는데, 그의 생각에 복음이 거짓이라면 자신은 모든 사람들 중에서 가장 어리석은 자일 것이라 자책하였다.
그는 결국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는 길을 찾았는데, 그것은 조용히 주님의 일을 계속하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그는 쉬지 않고 기도하는 일과 자신의 행위로 믿음을 보이겠다는 결의와 더불어 하나님의 명령이라면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 수 있고 물에 빠져 죽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그에게는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는 영혼구원의 길이요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루는 길이었다.
1738년 2월 1일 그는 인디언을 가르치기 위해 영국을 떠난 지 2년 4개월 만에 런던에 다시 도착하였다.
그는 그 심정을 고백하기를, 다른 사람들을 회개시켜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게 하려고 아메리카에 갔던 그가 자신은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께 돌아서지 못했다라고 했다. 그의 이러한 심경 고백은 그의 조지아 선교 실패의 원인을 간접적으로 증언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가 당시 갖고 있었던 영국 지도층으로서 엘리트 의식과 영국 국교회에 대한 자부심, 그로 인한 현지인들의 문화와 삶에 대한
정죄와 질시 등은 복음의 전달 과정을 방해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들이었다.
복음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누구나 만민이 어떠한 문화와 상황에 처할지라도 성령의 능력으로 적용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Wesley는 18세기 영국 런던의 문화와 국교회의 성례전과 윤리 강령에 억매여 하나님의 선교를 역선교하게 만들었다.
이것은 선교사가 아무리 훌륭한 신학 교육과 선교 동기를 가지고 선교에 임한다고 할지라도 현지 문화이해와 동일시(identification) 그리고 타문화 전달 방법론을 체득하지 않고서는 복음의 전달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교훈한다.
그러나 이 실패는 이후 Wesley의 변화와 연결되어 그의 주요 강조점인 '성서적 성결을 온 세계로' 전하는 선교 사역
확산 운동의 원동력이 되었다.
1738년 5월 24일 Wesley는 런던 올더스게이트 거리의 작은 집회에서 한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을 읽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마음의 변화를 일으키신다”는 말씀을 들었다.
그 때 그는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고, 그리스도만을 믿음으로써 모든 죄에서 용서함 받고 죄와 사망의 법에서
구원받았음을 확신하였다. 그는 이 후로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 받는 영혼 구원에 대하여 부흥설교가로서 뉴게이트 교도소,
보칼도 시립 형무소, 글로체스터 그린 빈민원, 그리고 교회와 야외에서 설교사역을 감당하였다. 그는 교구에 억매이지 않고
‘온 세계를 나의 교구’로 하나님이 맡겨주셨다는 확신을 가지고 온 세계에 구원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일에 헌신하였다.
이제 그는 값없이 주는 구원의 기쁜 소식 곧 회개와 죄의 용서에 관하여 설교하였다. 그는 종교적 명목주의에 반대하여 가슴으로
느끼는 복음에 대하여 설교하였다. 그는 외적인 종교 의식보다 중생과 변화된 성결한 삶을 가르쳤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교리나 성경에 대한 이론 정립보다 하나님 말씀 그 자체인 하나님의 사랑과 마음의 변화를 추구했다.
이제 그는 이제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함으로써 영혼구원을 최우선적인 그의 선교 사명으로 정립하였다.
V. John Wesley의 선교 목적: 영혼 구원
Wesley의 영혼 구원에 대한 최우선적인 강조는 그와 초기 감리교 설교자들이 1745년 연회(conference)에서 확정했던 12개항
중에서 11번째 항목을 살펴보면 그 중요성을 알 수 있다.
그것은 평신도 지도자들에게 “영혼 구원하는 일 외에는 다른 일이 없다”(You have nothing to do but to save souls)고 강조하였다. 그리고 초기 감리교 설교가의 부인인 Mary Tucker는 자신의 남편의 사역에 대하여, “위대한 영혼 구원 사역”이라고 평가했다.
그녀는 공식적으로 복음 전파 사역을 원했지만, 그렇지 못하였기에 남편의 영혼 구원 사역에 전 생애를 바쳐 힘을 다해
돕겠다고 했다.
사실, Wesley는 “온 세계는 나의 교구”라고 선언하고, 교회와 야외 집회에서 하나님의 구원에 대하여 선포하였다.
그의 설교는 영혼 구원을 위한 선교적 메시지였다. 블랙 히스(Black Heath) 지역 성회에는 만 이천에서 만 사천 명 정도 모였는데,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지혜와 의와 성화와 구원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Jesus Christ, who of God is made unto us wisdom, righteousness, sanctification, and redemption)에 관하여 설교했다.
어퍼 무어필드(Upper Moorfields) 지역에서는 약 6-7천명의 사람들에게 “목마른 자들 은 누구든지 물로 나아오라"
(Ho, every one that thirsteth, come ye to the waters)는 말씀을 전하였다.
켄닝턴 콤몬(Kennington Common)에서는 약 만 오천 명의 군중들에게 “땅 끝의 모든 자여, 나[하나님]를 앙망하라. 그러면
구원을 얻으리라(Look unto me, and be ye saved, all ye ends of the earth”는 말씀을 전하였다.
Wesley의 설교 사역에서 영혼 구원과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는데, 그 은혜의 양상을 보면 다음과 같다:
어린 양의 피로 깨끗함을 얻는 은혜, 죄사함의 값없이 주시는 은총, 그리고 성령의 부으심(an out-pouring of his Spirit),
은혜의 부으심(general shower of grace), 평강과 기쁨의 충만(filled with peace and joy), 자유하게 됨(set at liberty) 등이다.
특별히, 그의 집회에서는 쓰러지는 역사가 나타나기도 했다. 1738년 송년의 날 패터래인에서 약 60여명의 신도들이 철야하며
기도하였는데, 새벽 3시경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여 사람들이 쓰러져 기쁨으로 소리치는 역사가 일어나기도 했다.
1739년 5월 21일 브리스톨에서 Wesley의 옥외 집회 중에 사람들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쓰러지는 현상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날 저녁 니콜라스 신도회에서 회개와 구원에 대하여 설교하였을 때에 몇 몇 사람들이 쓰러져 땅에 죽은 자같이 되었는데, Thomas Maxfield라는 청년은 바닥에 쓰러져 악한 영에 사로잡혀 부르짖으며 몸을 땅에 부딪쳤고, 신도들이 진정시키며 기도하여 평안을 얻기도 하였다. 이 외에도 Wesley앞에서 발작을 일으키며 부르짖는 경우가 많이 일어났으며 성령의 역사로 그들은
영혼의 평안을 누릴 수 있었다.
이처럼 그의 선교 사역의 중심은 언제나 영혼에 관심을 집중하고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었다.
그에 따르면, 영혼 구원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써 죽음의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일이었다.
그는 죽음을 대단히 두려워했고, 죄의 결과로 자신이 죄인으로 죽어야 한다는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길 원했다.
그가 초기 옥스퍼드에 머무는 동안 “죽음은 아무 것도 아니며, 사후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post mortem nihil est; ipsaque mors nihil)라는 말의 진리성에 대하여 궁구하면서, 죽음 이후에 삶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듯
유령(apparitions) 이야기에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모라비안 형제단이 풍랑 중에서도 어린아이들조차 죽음의 공포에서
자유로운 것을 보고, 모라비안의 신앙에 빠지기도 하였다.
그는 거의 25년(1714-1738)간 구원의 내적 확신을 추구하였는데, 올더스게이트 회심의 체험에서 그는 구원의 확신을 얻었고,
그 확신은 그에게서 죽음의 공포를 몰아내었다. 그는 이후 죽음의 공포에서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확신을 통하여 하나님의 평강을 누리도록 사역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한 예로, 1739년 1월 21일 한 중년 부인이 그의 설교를 듣고 강한 죄책감으로 인하여
죽음의 고통(the agonies of death)에서 부르짖을 때에, 하나님은 “좌우의 날선 검보다 예리한” 성령의 역사로 그녀의 상처받은
영(her wounded spirit)을 치유하였다. 같은 해 3월 6일 Wesley를 반대하던 Compton 부인이 죄 사함의 은혜를 받고
영생(immortality)의 완전한 소망을 증거 하기도 하였다. 그는 이와 같은 경험으로 구원의 확신이 없어서 야기되었던
우울증에서 완전히 치유되었고, 그 이후 25년이 넘도록 깊은 낙심을 경험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Wesley는 영혼 구원을 공포와 절망의 영(the spirit of fear, horror, despair)에서 벗어나 사랑과 기쁨과
평화의 영(the spirit of love, joy, and peace)으로 변화되는 것으로 설명했다. 그것은 죄로 가득 찬 욕망(sinful desire)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순수한 욕망(a pure desire)으로 변화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죄를 용서함 받고 성령을 선물로 받는 은혜이다. 때때로 환상이나 꿈을 통하여 십자가상의 그리스도나 영광의 그리스도를
마음의 눈으로 만나는 경험을 하는 사람들도 있고, 쓰러지거나 진동을 일으키는 경우도 있으며, 신음소리를 내거나 소리를 내어
우는 경우도 있는데, 이것만이 영혼 구원의 결과라고 말할 수 없고 생활의 성결로 증명된다고 웨슬리는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영혼 구원의 결과, 사자와 같던 자가 어린 양이 되고, 술주정뱅이가 술을 끊고 모범적인 사람이 되며, 방탕한 자가
육신으로 더럽혀진 옷을 미워하는 사람이 되는 등 영혼 구원의 결과는 확실한 삶의 변화로 증명된다고 보았다.
이러한 사실을 종합해볼 때에, Wesley에게 영혼 구원의 의미는 죄를 자각(conviction of sin)하고 회개하는 일 뿐 만 아니라,
중생(regeneration)하여 선행을 실천하는 것까지 포함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영혼 구원은 하나님의 자녀임을 성령의 증거로 확신하는 일과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완전함(perfection in love)을
성취하는 일까지도 포함된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완전한 사랑과 동의어인 성결에 대하여 웨슬리는 육체적 금욕이나 종교적
수행의 외적 수단이 아니라, 오히려 내적인 것으로서 동기의 순수성, 사람의 영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 신적 본성(divine nature)에 참여, 그리스도의 마음 닮기,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영혼의 갱신(a renewal of the soul)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Wesley에게 영혼 구원 명령(the mandate to save souls)은 값싼 회심(cheap conversion)으로 축소되지 않고,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제자삼기사역으로 확장되었다. 그는 “영혼과 육체가 인간을 만들지만, 성령과 훈련(the Spirit and discipline)이
그리스도인을 만든다”는 웨슬리안 표현대로 영적 훈련을 통한 제자삼기 사역을 통하여 영혼 구원 사역을 완성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이 고독한 완전이 아니라 사람들의 상호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영적이며 선교적인
완전으로 보았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그의 제자 훈련 소그룹인 신도반(bands)을 통해서 경험하고 실천하도록
장려하였다. 이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사랑의 충만이기에 그 본질상 선교적이라는 사실과
연결된다. 특히, 그는 집회에서 선행적 은총에 응답하여 회개하는 회심자들을 11-12명 단위로 조직하여 구역(class meetings)을
만들고, 그들의 신앙 성숙을 위해 격려하고 돌보는 사역을 감당할 평신도 지도자들을 훈련했는 데, 그것이 신도반이다.
신도반에서 성결의 은혜가 확실히 증명된 사람들은 따로 모아 선발 신도회(select society)로 Wesley의 참모들이 되었다.
이처럼, 그의 영혼 구원 선교 방식은 먼저 대중 집회를 통해 복음에 응답한 회심자들을 소그룹으로 나누고, 그들을 양육하고 돌보는
제자 훈련을 통해서 성령 체험과 신앙의 성숙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경험하고 실천하게 하는 것이었다.
VI. John Wesley의 영혼 구원 선교의 21세기 적용
그러면 Wesley의 영혼 구원 선교가 21세기 현대 후기 사회에 영향력을 지속적으로 발휘할 수 있을까? 21세기는 똘레랑스(Tolerance)의 다름을 인정하는 다원주의 시대이다. 기독교는 점차 공적 종교에서 사적 종교로 자기 매김 당하고 있고, 소수화
주변화의 길로 내쫓기고 있다. Wesley와 같이 영혼구원을 위한 회심과 성결의 은혜를 추구하는 기독교 선교는 사회로부터 경고와
의혹 심지어 두려움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것은 관용과 상호 인정의 시대에 자신의 신앙 체험만을 강요하는 강압적이고
독선적인 모습으로 사회 심리에 비쳐지고 있다.
웨슬리안 단체나 교단에서조차 초기 웨슬리즘이 18세기 영국의 시대 상황의 산물일 뿐 더 이상 21세기 사회에 적용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Wesley는 당시 무신론적 세속주의와 명목상의 신자를 배출해내는 죽은 정통주의 사이에서 이성과 경험을 충족시키는
패러다임을 정립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의 시대는 영국 국교회의 전통 속에서 신앙고백이 국가관리임용에 주요한 기준이 되었던
형식적 정통주의 시대였다. 그리고 지식인들은 자연신론에 빠져 무신론적 경향을 보였던 시대였다.
그 때에, Wesley는 무신론자이든 정통주의자이든 그들의 영혼이 구원받아야 함을 최고의 관심사로 정립하였고, 이것을 그의
설교와 사역, 교리문답교육과 소그룹 영적 제자훈련, 그리고 그의 삶의 중심으로 삼았다. 그러나 21세기에는 그의 구역, 신도반,
선발 신도회, 신앙 규율 등에서 그리스도인의 완전 혹은 성결의 은혜의 경험이 사라지고 있다.
사실, 21세기 서구의 주요 교단 교회들은 Wesley의 후예인 미국 연합감리교회를 비롯하여 전통적인 신앙고백에 저항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기독교 변증가들은 기독교 교리에 대한 변증을 포기하고 있고 서구의 신학대학원 학생들은 점차 회의론자들이
되어가고 있다. 그리고 Wesley의 체험 중심의 성결론은 점차 18-19세기 사회 혼란과 변혁기에 따르는 문화 종교 현상으로
해석될 뿐이다. 더 이상 누구도 심지어 Wesley의 체험적 신앙 실천을 지속적으로 추구한다는 자칭 보수적 웨슬리안주의자들도
일반적인 복음주의의 신학적 확신과 행태를 따라가도록 압력을 받고 있다.
심지어 영적 체험 중심적인 Wesley의 방식은 현 시대와 맞지 않음으로 페기처분 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미국 뉴왁(Newark) 교구에서 24년간 봉직하고 은퇴한 Spong감독은 Wesley의 영혼 구원에 중심을 둔 선교 방법은 구시대적
방식으로 폐기처분하고 새로운 시대에 맞는 전략을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성령잉태, 동정녀탄생, 부활, 승천, 재림 등의 전통 교리와 초자연적인 유신론을 더 이상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하고, 하나님
체험의 용어는 새로운 시대에 부합하는 용어, 즉 “생명의 원천이나 존재의 근거”로 재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방인들을 개종시키려는 복음주의 선교활동들을 우월감과 적대감의 표현으로서 비천하다고 평가절하하고 있다.
그러나 Spong 감독이 놓치고 있는 것은 그가 사역했던 뉴왁을 비롯한 세계 도시에는 존재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인식하며
믿으려하는 사람들보다, 아직도 공동체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며 실제적인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더욱 갈망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는 점이다. 한국을 비롯한 비서구권에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개입으로 인하여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셨기에 영생의 소망을 줄 수 있다고 믿으며, 또한 주님이 승천하셨기에 천국의 처소에
영원히 주님과 함께 거할 소망을 가지고 재림의 소망을 가지고 죽음의 공포를 이기고 있다.
또한 한국을 비롯한 동양권의 복음주의 선교사들은 우월감과 적대감으로 이방인을 억지고 개종하는 선교를 하는 것이 아니라,
소외되고 낙후된 지역을 찾아가 그리스도의 사랑의 실천하며, 현대 후기 사회에서 버림받은 ‘강도만난 이웃’을 치유하며 돌보는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이처럼, Wesley의 영혼구원에 대한 강조와 실천은 오늘날 변화하는 시대에도 적용될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그의 시대가 문화의 세속주의. 교회의 정통주의, 지성의 자연주의로 기독교 선교의 가능성이 희박했던 때였지만, 그는 그 돌파구를
하나님 체험을 통한 개인 영혼의 신생과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성결한 생활을 통해 사회를 개혁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이를 실천하였다. 오늘날의 상황도 그 시대의 상황보다 선교의 환경이 더 낫다고 볼 수 없다.
오늘날의 시대는 선교적 관점에서 볼 때에 영혼구원을 위한 영적 복음 전파망이 더욱 훼손되어 있다.
타종교와 뉴 에이지 운동의 영성이 종교성이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고 있다.
그리고 세속적인 사람들에게는 종교적인 위안을 상업주의로 보상받고 있다.
하나님께 대한 기도와 찬송과 경배를 통해 얻어지는 영적인 평안은 인터넷의 채팅과 노래방과 대형 할인점의 상품에 대한 소비로
대체되어버렸다.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나누는 소그룹은 각종 취미와 필요 중심의 동호회로 대체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위기는 선교의 기회를 창출한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Wesley가 영혼 구원 사역을 완성함에 있어서, 복음 전파와 그로 인한 회심자들을 소그룹인 구역으로 조직하고, 그들을 돌보고
목양하도록 지도자들을 제자 훈련한 것처럼, 오늘날 교회와 선교에 Wesley의 영혼 구원의 선교 방법론이 계속적으로
강화되고 실천되어야 할 것이다.
VII. 결 론
Wesley의 영혼 구원 선교에서 그 핵심적인 하나님 체험의 내용은 ‘그리스도만을 믿음’으로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영혼이 구원받는
체험이었다. 그러므로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자유함을 누리고 영생의 소망을 갖는 경험은 기독교 선교의 가장 기본적인 기초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신앙 체험이야 말로 잘못된 문화우월주의와 형식적인 명목주의 신앙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할 수 있다.
그리고 영혼 구원의 선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으로 믿는 신앙’에 머물지 않고, 소그룹이나 공동체내에서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체험하여 그것을 실천하는 선교적 성숙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것이 Wesley가 추구했던 ‘성서적 성결’을 이루는 길이고 ‘성서적 완전’을 성취하는 길인 것이다.
끝으로, Wesley는 당시 문화적, 교회적, 지성적 상황이 와해되었을 때에, 즉, 영적 복음 전파망이 훼손되었을 때에, 사람들을
하나님의 나라에 이끌 수 있는 매우 실제적인 방법을 고안해 냈다. 그것은 소그룹 운동과 제자훈련이었다.
그곳에서 기도와 말씀 그리고 권면과 친교 활동이 이루어졌고, 이를 통하여 그리스도인의 완전, 곧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히
경험되었고 상호 실천되었다. 그곳은 하나님 체험의 장이요, 영혼 신생의 산터요, 그리고 성결한 신자를 양육하는 제자 삼는
선교의 장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소그룹 운동을 통한 제자양육 방식은 Wesley의 영혼 구원 선교 방식일 뿐 만 아니라,
21세기 교회와 선교의 주요한 선교 방식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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