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조선 전기 문학
한국의 문학은 크게 고려시대 이전과 조선시대 이후의 2기(期)로 양분하는 경우가 있다. 이는 1446년 세종(世宗)의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로 한국의 문학이 조선 전기부터 언문일치(言文一致)의 표기수단을 얻음으로써 진정한 의미의 한국문학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데 연유한다. 신라에 이미 한국 고유의 향가문학이 있었다고는 하나 그 표현수단이었던 이두문자만으로는 한국의 사상과 말을 완전히 나타낼 수 없었고, 고려에 시가문학이 있었다고는 하나 그것은 미처 문자로 정착되지 못한 하나의 유동문학(流動文學)이었다. 그러므로 참된 의미에서의 한국문학은 한글의 출현에 의하여 비로소 그 자리를 찾아 정착하게 되었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한글이 창제됨으로써 조선 건국 초부터 여러 개국공신들이 왕조의 창업을 찬미한 송축가(頌祝歌)로서의 악장(樂章)이 문자로 정착될 수 있었고, 경전(經典)과 고전의 번역 ·편찬 등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먼저 세종은 1446년의 훈민정음 반포에 앞서 그 실용 가능성을 알아보기 위하여 대표적 악장의 하나인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정인지(鄭麟趾)·안지(安止)·권제(權
) 등으로 하여금 짓게 하였다. 한글 반포 이듬해에 간행된 이 악장은 모두 125장(章)으로 이루어진 조선왕조 창업(創業)의 송축가(頌祝歌)로서 한국 최초의 한글 문헌이었다.
이어서 세종은 불교찬가인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을 친히 지어서 간행하기도 하였는데, 이 또한 《용비어천가》 다음가는 최고(最古)의 한글 문헌으로 전해진다. 이와 같은 악장체(樂章體)의 시가 중에는 조선 초에 유행한 한문체의 송축가가 많이 있었으나, 이윽고 그것은 차차 자취를 감추게 되면서 시조(時調)와 가사(歌辭)가 시가문학의 주류를 차지하게 된다. 시조나 가사가 이처럼 확고한 자리를 굳히게 된 것은 수사(修辭)에 있어 이 두 가지 형식이 한국말을 자유로이 구사할 수 있는 형태적 특징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즉, 시조는 간결한 가운데에서도 소박한 취향을 존중하는 유학자(儒學者)들의 서정을 표현하기에 알맞은 형태였고, 가사 또한 현실적이면서도 설유적(說諭的)인 유교의 이념을 나타내기에 적당한 형태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고려 중기에 이미 싹이 튼 시조는 조선 전기에 이르러서도 아직 그 진가를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였다. 이 무렵에 발표된 시조는 고려 유신(遺臣) 등이 읊은 것이 대부분이었는데, 정몽주(鄭夢周)의 《단심가(丹心歌)》, 길재(吉再)·원천석(元天錫)의 《회고가(懷古歌)》 등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그러나 사육신(死六臣)의 《충의가(忠義歌)》나 김종서(金宗瑞)의 《전진가(戰陣歌)》, 그리고 맹사성(孟思誠)의 《강호사시가(江湖四時歌)》 등에 이르러서는 그 내용에 크나큰 변화가 일기 시작한다. 즉, 그것은 작자 자신의 입장과 생활을 선명하게 나타내는 개성의 문학으로 발전한 것이다. 이와 같이 발전 단계에 접어든 시조문학은 이윽고 이현보(李賢輔)·송순(宋純)·황진이(黃眞伊) 등의 뛰어난 작가를 만나 그 진가를 발휘하게 되었다. 그 밖에도 2대 성리학자인 이황(李滉)의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과 이이(李珥)의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가 있으며, 정철(鄭澈)의 여러 시조에 이르러 조선 전기의 시조문학은 절정에 다다랐다.
조선 전기의 가사문학도 시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한글 창제 이후 국자(國字)에 의한 표현수단을 얻게 됨으로써 크게 발전한 자유형의 시가이다. 최초의 가사작품으로는 성종 때 정극인(丁克仁)이 지은 《상춘곡(賞春曲)》을 꼽는 것이 일반적인데, 그것은 이 작품이 형식과 내용이 잘 다듬어진 초기 가사문학의 대표적 작품인 까닭이다. 이후 가사문학은 송순(宋純)의 《면앙정가(
仰亭歌)》를 거쳐 정철의 여러 작품에 이르러 마침내 황금기를 맞고 활짝 개화하였다. 그의 시가집인 《송강가사(松江歌辭)》에 실려 전해지는 가사작품은 《관동별곡(關東別曲)》 《사미인곡(思美人曲)》 《속(續)미인곡》 《성산별곡(星山別曲)》 등 모두 4편인데, 한국말을 자유자재로 구사한 호탕하고도 비장한 시풍은 가히 가사문학의 절정이라 일컬을 만하다.
그밖에도 조선 전기를 대표하는 가사로서는 유배(流配)가사의 효시인 조위(曺偉)의 《만분가(萬憤歌)》, 왜구(倭寇)를 무찌른 내용을 읊은 양사언(楊士彦)의 《남정가(南征歌)》, 정철의 《관동별곡》에 영향을 준 백광홍(白光弘)의 《관서별곡(關西別曲)》, 자연 속에 한가로이 묻혀 지내는 심정을 읊은 차천로(車天輅)의 《강촌별곡(江村別曲)》, 벼슬 아치의 자세를 머슴에 빗대어 한탄한 허전(許
)의 《고공가(雇工歌)》 등 많은작품이 있다. 한편, 산문에서는 조선 전기를 통하여 한문체에 의한 문학이 여전히 주류를 이루었다. 김시습(金時習)이 한국 최초의 소설인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지은 것을 비롯하여, 서거정(徐居正)의 《동인시화(東人詩話)》, 어숙권(魚叔權)의 《패관잡기(稗官雜記)》, 성현(成俔)의 《용재총화(傭齋叢話)》, 김종직(金宗直)의 《점필재집(
畢齋集)》, 조광조(趙光祖)의 《정암집(靜庵集)》 등이 이 시기의 산문문학을 대표하는 저술이었다.
또한, 번역문학 분야에서는 칠서(七書), 곧 ‘사서(四書)’와 ‘삼경(三經)’ 및 《소학(小學)》 《효경(孝經)》 등의 언해본(諺解本)이 간행된 것을 비롯하여 《능엄경(楞嚴經)》 《법화경(法華經)》 《금강경(金剛經)》 등의 불경과 《두시언해(杜詩諺解)》 《황산곡시집언해(黃山谷詩集諺解)》 등의 번역문학서가 잇따라 나타났다. 특히 이 시기를 통하여 성현 등이 《악학궤범(樂學軌範)》을 편찬하는 가운데 이 때까지 구전(口傳)에만 의존해오던 《동동(動動)》 《정읍사(井邑詞)》 등 여러 고가(古歌)를 비로소 문헌에 정착시킨 것은 획기적인 일이었다.
2.조선후기 문학
한글 창제가 한국문학의 역사를 크게 양분하는 분수령(分水嶺)이었다고 하면, 임진왜란은 조선왕조의 역사를 크게 갈라놓은 분기점이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치르고 난 조선사회에는 큰 변화의 물결이 일고 있었다. 두 차례의 전쟁으로 물질적 피해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정신적인 타격과 충격 또한 막심하였다. 전쟁을 통하여 양반 귀족계층의 무력함을 절감한 평민들의 불만이 고조되고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현상(現狀)에 대한 비판의식이 거세게 일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은 평민의 자각은 문학에도 반영되어 이윽고 평민문학의 대두와 융성을 가져오게 된다.
조선 전기의 문학이 주로 귀족적인 시가문학에 기울었던 데 대하여, 후기에는 그것이 평민들 사이에도 확산되어 시조작가의 수가 격증했을 뿐 아니라 그 내용도 매우 다양하고 풍부해졌다. 가사(歌辭)에도 능했던 박인로(朴仁老)의 《오륜가(五倫歌)》 등 70여 수의 시조작품을 비롯하여 장경세(張經世)의 《강호연군가(江湖戀君歌)》나 이항복(李恒福)·김상용(金尙容)·남구만(南九萬) 등의 시조는 손꼽을 만한 작품이다. 내용면으로도 어지러운 당쟁을 통분한 이덕일(李德一)의 《당쟁차탄가(黨爭嗟嘆歌)》, 임진왜란의 용장 이순신(李舜臣)의 시조, 병자호란의 치욕을 비분하고 충의(忠義)를 읊은 봉림대군(鳳林大君)·김상헌(金尙憲)·이정환(李廷煥) 등의 시조가 있다.
그러나 아무래도 이 시기의 시조문학을 대표하는 최고봉은 윤선도(尹善道)였다.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나 《산중신곡(山中新曲)》 같은 작품은 그의 자연시인으로서의 풍모를 뚜렷하게 할 뿐 아니라 시조문학의 가치를 한껏 발휘하였다. 윤선도에 이르러 절정에 다다른 시조문학은 이후 평민작가들이 그 주역을 맡게 되면서 김성기(金聖器)·김유기(金裕器)·김천택(金天澤)·김수장(金壽長)·박효관(朴孝寬)·안민영(安玟英) 등이 나타났는데, 이들은 작자인 동시에 창곡가(唱曲家)이기도 하였다. 이렇듯 서민계층으로 흘러들어간 시조는 사설시조(辭說時調)라는 새로운 형태의 시조를 낳았는가 하면, 지난날의 시조를 수집·정리하는 가집(歌集) 편찬이 평민 가객(歌客)들 사이에서 성행하였다. 즉, 김천택의 《청구영언(靑丘永言)》을 비롯하여 김수장의 《해동가요(海東歌謠)》, 박효관·안민영이 함께 엮은 《가곡원류(歌曲源流)》가 있으며, 그 밖에도 《고금가곡(古今歌曲)》 《남훈태평가(南薰太平歌)》 《동가선(東歌選)》 등 많은 가집이 출현하였다.
한편, 가사문학에는 조선 전기에 속하는 정철 같은 대가에 이어 후기에는 그와 쌍벽을 이룰 만한 박인로가 나타났다. 그의 작품으로는 임진왜란 때 읊은 《태평사(太平詞)》와 《선상탄(船上嘆)》을 비롯하여 《누항사(陋巷詞)》 《사제곡(莎堤曲)》 《독락당(獨樂堂)》 《영남가(嶺南歌)》 《노계가(蘆溪歌)》 등 7편의 가사가 전해진다. 그러나 박인로의 특출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한때 가사문학이 시조에 밀려 그 기세를 떨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영조 이전까지는 이원익(李元翼)·이수광(李
光)·무옥(巫玉)·임유후(任有後) 등이 가사의 명맥을 잇고 있는 정도였다. 그러나 숙종 이후 소설의 융성과 더불어 가사는 다시 번성하여 장편가사가 널리 창작되기 시작하였다. 영조 때 김인겸(金仁謙)의 《일동장유가(日東壯遊歌)》, 정조 때 안조환(安肇煥)의 《만언사(萬言詞)》, 헌종 때 한산거사(漢山居士)의 《한양가(漢陽歌)》, 철종 때 김진형(金鎭衡)의 《북천가(北遷歌)》, 고종 때 홍순학(洪淳學)의 《연행가(燕行歌)》 등이 모두 1,000여 구(句)에서 4,000구에 달하는 장편가사였으며, 그 밖에도 유명 무명의 작가들이 창작한 수많은 가사작품이 쏟아져 나왔다. 또한 영남(嶺南)의 부녀자 사이에서 주로 유행한 내방가사(內房歌辭)가 많이 전해진다.
조선 후기의 특기할 만한 문학양식으로서 판소리를 들지 않을 수 없다. 판소리의 형성과정에 대해서는 아직 뚜렷한 정설이 없는 형편이지만, 대체로 근원설화(根源說話)가 판소리로 전화(轉化)한 뒤 이윽고 그것이 문자로 정착한 것이 판소리 계통의 고대소설이 되었다고 생각된다. 판소리가 언제부터 불렸는지 확실치 않으나, 기록에 따르면 그 시창자(始唱者)는 숙종 말의 하한담(河漢潭)과 최선달(崔先達)이었다. 《춘향가》를 비롯하여 《심청가》 《흥부가》 《토끼타령》 《장끼타령》 《배비장타령》 《옹고집타령》 《변강쇠타령》 《화용도(華容道)》 《강릉매화타령》 《무숙(武淑)이타령》 《숙영낭자전(淑英娘子傳)》 등 판소리 열두 마당은 고종 때 신재효(申在孝)에 의해 《춘향가》 《심청가》 《박타령》 《토끼타령》 《가루지기타령》 《적벽가(화용도)》의 여섯 마당으로 정리되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의 문학을 대표하는 것은 고대소설의 개화(開花)이다. 세조 때 김시습(金時習)의 《금오신화》가 나타난 이후 발전단계로 접어든 조선의 소설은 광해군 때 허균(許筠)의 《홍길동전(洪吉童傳)》을 출현시켰다. 흔히 최초의 한글 소설로 일컬어지는 이 작품은 계급사상을 타파하고 사회 개혁을 시사한 사회소설로서 당시의 시대 배경에서는 매우 획기적인 주제를 다룬 것이었다. 허균에 이어 조선의 소설을 보다 높은 수준으로 이끈 작가는 숙종 때의 김만중(金萬重)이었다. 그가 남해(南海)에 유배되었을 때 어머니를 위하여 지었다는 《구운몽(九雲夢)》과 임금을 참회시키기 위하여 집필했다는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는 김만중 소설에서 쌍벽을 이루는 작품이다.
그 밖에 작자 미상의 《창선감의록(彰善感義錄)》은 김만중의 작품과 같은 시대에 쓰인 회장소설(回章小說)로서 빼어난 작품이다. 이윽고 영·정조 시대로 접어들면서 전성기를 맞이한 조선의 소설문학은 실학(實學)의 발흥 및 중국소설의 유입과 함께 대단한 흥성을 보게 되었다. 오늘날 전해지는 수백 종의 유명 무명 작가에 의한 고대소설들은 거의가 이 무렵의 소산이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작가로는 먼저 박지원(朴趾源)을 꼽을 수 있다. 그는 《허생전(許生傳)》 《양반전(兩班傳)》 《호질(虎叱)》 《민옹전(閔翁傳)》 《광문자전(廣文者傳)》 《마장전(馬
傳)》 등 10여 편의 단편소설을 창작하였는데, 비록 그 표기는 한문이지만 한국 사실주의 소설의 빛나는 걸작들이다. 엄격한 비판정신에 입각한 박지원 소설은 당시 양반 계층의 무능과 위선을 고발하였다는 점에서 매우 뛰어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한편, 이 무렵 중국소설의 영향으로 군담소설(軍談小說)과 염정소설(艶情小說)이 많이 등장했는데, 전자가 남성의 문학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여성의 문학이라 일컬을 만한 것이었다. 군담소설의 계열에 속하는 작품으로는 《임진록(壬辰錄)》을 비롯하여 《조웅전(趙雄傳)》 《유충렬전(劉忠烈傳)》 《임경업전(林慶業傳)》 《소대성전(蘇大成傳)》 《장인걸전(張人傑傳)》 《곽재우전(郭再祐傳)》 《장익성전(張翼星傳)》 《여장군전(女將軍傳)》 등이 있으며, 염정소설류로는 《춘향전》을 비롯하여 《숙영낭자전》 《옥단춘전(玉丹春傳)》 《운영전(雲英傳)》 《이진사전(李進士傳)》 등 다수의 작품이 전해지나 그 중의 백미는 《춘향전》이다.
그 밖에도 《장화홍련전(薔花紅蓮傳)》 등의 가정소설, 《심청전》을 비롯한 도덕소설, 《옥루몽(玉樓夢)》 등 일련의 기연소설(奇緣小說), 《흥부전》 등의 우화소설 등 여러 유형의 고대소설이 속출하여 소설문학을 풍성하게 하였는가 하면, 궁정기사체(宮廷記事體)로 불리는 새로운 형태의 문학도 발달하여 《계축일기(癸丑日記)》 《인현왕후전(仁顯王后傳)》 등이 나타났고 이와 같은 궁정문학은 더욱 발달하여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의 《한중록(閑中錄)》 《의유당일기(意幽堂日記)》 등의 여류문학을 형성하였다
3.가사(歌辭) 문학
가사는 율문(律文)이면서도 서정, 서사, 교술의 다양한 성격을 지닌 문학 장르입니다. 형식상 4음보(3·4조)의 연속체인 율문이며, 내용상 수필적 산문인 가사는 율문과 산문의 중간적 존재로 볼 수 있다. 시조와 가사를 비교하면, 전자가 서정 장르이고 구수(句數)와 행수(行數)의 제한이 있는데 반하여, 후자는 교술 장르이고 4음보의 연속체라는 점에서 시조(단가)와 다르다. 즉 가사는 산문과 율문의 중간적 형태로 조선조의 대표적인 문학 형식이라 할 수 있다.
*敎述문학이란:교술(敎述)은 사물을 객관적으로 묘사해 설명하여 알리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 시다. 상춘곡, 관동별곡 등 가사문학이 주류이다. 조선시대 남존여비 사상속사상으로 인해 여인들의 활동 제약(사회 참여, 남녀 不平等) 속에서 울어나온 恨을 토로한 내방 가사에서 교술적 요소가 많다. 시은 문학 강의 59번 규원가 참조
가사문학의 발생에 대한 견해는 다양하며 발생 시기는 대체로 고려말부터 조선 성종까지로 본다. 가사의 발생에 대한 견해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경기체가에서의 발생설 : <한림별곡>같은 경기체가의 긴 노래에서 분련체가 사라지고 여기에 다시 중국의 사·부 문학의 형태적 영향을 받아서 가사 형식이 발생하였다는 견해
② 시조에서의 발생설 : 일부 가사의 결사장(結詞章)이 시조의 종장체 형식으로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가사 형식이 3·4조 또는 4·4조 1행씩으로 되어 있다는 점에서 가사를 시조의 파격형이라고 보는 견해
③ 악장체에서의 발생설 : <용비어천가>와 <월인천강지곡> 같은 분장형식이 파괴되면서 사설형식의 가사가 나타났다고 보는 견해
④ 한시현토체(漢詩懸吐體)에서의 발생설 : 종래 우리 조상들은 글을 읽을 때 축문이나 치사(致辭-경사가 있을 때, 왕에게 올리던 송덕의 글) 이외에는 반드시 우리말로 토를 달아 읽었기 때문에 장편 한시에 토만 달아 읽든지 시조체의 초.중장을 연속하면 가사체가 발생할 수 있다고 보는 견해
⑤ 민요에서의 발생설 : 가사의 기원은 같은 4·4조 연속체의 교술율문인 교술 민요에 있으며 구비문학인 교술 민요가 기록문학으로 발전한 것이 가사라고 보는 견해
⑥ 불교계의 신라가요에서의 발생설 : 신라 경덕왕대에 월명사가 지은 <도솔가> 이야기에 나오는 "별도로 산화가가 있는데 글이 많아서 싣지 않는다."에 근거한 견해
가사문학은 중세 이후 사대부의 유교적 이념과 삶을 표현하는데 적합한 형태로서 발생하였다고 보여지며, 최초의 작품은 조선 성종때 정극인이 지은 '상춘곡(賞春曲)'으로 보는 것이 정설이다.
가사문학의 변모 양상은 크게 조선 전기(前期)와 조선 후기(後期)로 나누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전기 가사는 양반 사대부들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주로 벼슬에서 물러나 자연에 묻혀 살아가는 사대부의 생활이 형상화되었고, 시조와 함께 사대부의 문학으로 정착되었다.
정철은 아름다운 우리말의 미감을 살리고 고도의 은유, 상징으로 격조 높은 작품들을 창작하여 가사문학의 제1인자로 평가되고 있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정극인의 '상춘곡', 송순의 '면앙정가', 정철의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허난설헌의 '규원가' 등이 있다. 후기 가사는 박인로, 김인겸, 정학유 등과 평민 및 부녀자들에 의해 주도되어 이 시기의 가사 창작에 평민과 부녀자층이 등장한 것은 시조에서 작자층이 확대되었던 것과 같은 경우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이 시기에는 음풍농월하던 서정 중심에서 벗어나 실생활에서 제재를 구하고 서사적, 교술적 내용이 가미되는 등의 변화가 있었으며, 형식적으로도 장형화되어 이 시기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박인로의 '태평사', '선상탄', '누항사', 김인겸의 기행가사인 '일동장유가', 정학유의 '농가월령가' 등이 있으며, 평민가사로는 '우부가(愚夫歌)', '용부가(傭婦歌)' 등이 있고, 내방가사로는 '규중행실가', '원한가' 등이 있다.
(1) 가사문학의개념
한국 고전 문학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문학 형태로, 시조와 함께 조선조의 대표적인 국문 시가이다. 조선 전기에는 주로 양반 사대부들에 의해 지어졌지만, 조선 후기로 오면 작자층이 확대되어 서민과 양반 사대부 계층의 부녀자들이 가사 창작에 참여하여 그들의 애환을 표출했다.
(2) 기원과 발생
가사의 기원에 대해서는 고려 속요 또는 경기체가에 기원을 두고 있다는 설, 4음보의 연속체 교술 민요가 기록 문학으로 전환되면서 이루어졌다는 설, <용비어천가>나 <월인천강지곡>등 악장의 형식이 그 기원이라는 설, 시조 기원설 등이 있지만, 아직까지 정설로 인정되는 주장은 없다. 가사의 발생에 대해서 역시 기원에 대한 견해들과 같이 많은 주장들이 있는데, 조선조 초기 정극인의 <상춘곡>을 효시로 보자는 입장과 고려말 나옹화상의 <서왕가>를 효시로 보자는 입장으로 나눌 수 있다. 그러나 <상춘곡>을 효시로 보자는 입장이 정설로 인정되고 있다.
(3) 형식
3‧4조 또는 4‧4조를 기본으로 한 4음보의 연속체 운문이며, 마지막 구절이 시조의 종장과 유사하게 끝나는 것을 정격가사라고 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구가 음수율의 제한을 받지 않는 것을 변격가사라고 한다.
(4) 성격
외형적으로 운문으로 되어있으나 내용은 오늘날의 수필과 같은 것이어서 산문적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가사는 산문 정신이 가미된 운문이라고 볼 수 있다.
(5) 가사의 전개 과정
가사는 시대적 흐름에 따라 크게 세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양반이 가사의 주요 작자층이었던 조선 전기, 평민과 부녀자층이 새로운 작자층으로 부상한 조선 후기, 개화기의 가사 등의 세 시기가 그것이다.
조선 전기의 가사는 양반층이 창작을 주도하였던 만큼 시조와 비슷한 내용을 주로 하고 있다. 즉 이 시기의 가사는 송순, 정철 등과 같이 벼슬길에서 물러나 자연에 묻혀 살아가는 생활을 주로 담고 있으면서, 임금의 은혜를 잊지 못하는 ‘충신연주지사(忠臣戀主之詞)’의 성격을 지닌다. 특히 정철의 가사작품은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십분 살린 훌륭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조선 후기의 가사는 대체로 산문적인 경향을 띠며, 현실에서의 구체적인 경험이 직설적으로 표현되는 양상을 띤다. 임금으로서의 ‘님’이 아니라, 사랑하는 대상으로서의 ‘님’에 대한 연정이 표현되기에 이르렀고, 규방에 대한 갑갑함을 하소연하는 부녀자들의 내방 가사나 지배층에 대한 비판을 내용으로 하는 평민 가사가 창작되기고 했다. 한편 조선 후기에는 <일동장유가(日東壯遊歌)>와 같은 장편 기행 가사가 만들어졌다.
(6) 작품 일람
-서왕가 : 고려말, 나옹화상. 세사에 집착하는 중생에게 불교 귀의 권장
-상춘곡 : 성종 1년(1470), 정극인. 전라 태인에 은거하면서 춘경을 노래
-매창월가(梅窓月歌) : 성종 6년, 이인형. 시골에서 한가하게 자연을 즐기는 사대부의 풍류를 노래
-만분가(萬憤歌) : 연산군 4년(1498), 조위. 무오사화(1498) 때 유배지인 전남 순천에서 지은 유배 가사
-면앙정가 : 중종 19년(1524), 송순. 향리인 담양에 정자(면앙정)를 짓고 그곳 자연미와 정취를 노래.
-선반가(宣飯歌) : 중종 22년, 권씨. 이현보가 부승지가 되어 자당을 뵈어 올 때 어머니가 지어 몸종들에게 가르쳐 영접의 잔치에서 부르게 한 것. 내방 가사의 효시
-역대가 : 중종, 진복창. 역대 제왕과 성현의 사적 찬양
-권선지로가(勸善指路歌, 별칭-권의지로사) : 명종, 조식. 세속을 근심하고, 후학에게 도덕을 가르치는 노래
-남정가(南征歌) : 명종 10년(1555), 양사준. 을묘왜변(1555) 때 남정군으로 왜적을 물리친 전쟁 가사
-관서별곡(關西別曲) : 명종 11년(1556), 백광홍. 관서의 자연경치를 노래. 기성별곡과 향산별곡으로 되어 있음. 송강의 <관동별곡>에 영향을 줌
-환산별곡 : 명종, 이황. 세속을 근심하고 전원에서 유유자적하는 생활을 노래함. ‘낙빈가’와 함께 [청구영언]에 전함
-목동문답가 : 명종, 이황. 부귀영화를 버리고 초야에서 소나 먹이며 살겠다는 안빈낙도의 생활을 노래
-자경별곡 : 선조 9년(1576), 이이. 향풍을 바로잡기 위한 도덕 가사
-낙빈가 : 선조, 이이. 작자가 관계를 물러난 은퇴기에 안빈낙도하는 생활 신념을 노래한 은일 가사
-낙지가(樂志歌) : 선조, 이이. 전원 생활의 즐거움을 노래한 은일 가사
-도산가 : 선조, 고응척. 임란을 피해 도산의 유곡(幽谷)에 은거하는 생활을 노래한 은일 가사
-성산별곡 : 명종 15년(1560), 정철. 성산의 자연미와 ‘김성원’의 풍류 노래
-관동별곡 : 선조 13년(1580),정철. 강원 관찰사로 부임, 그 곳의 자연 경관을 노래한 기행가사
-사미인곡 : 선조, 정철. 창평에 귀양가서 임(선조 임금)을 그리는 내용으로 충신연주지사
-속미인곡 : 선조, 정철. 사미인곡의 속편
-서호별곡 : 선조, 허강. 한강의 풍치를 노래
-백상루별곡 : 선조, 이현. 백상루 부근의 풍치와 선정(善政)의 모습 노래
-강촌별곡(江村別曲) : 선조, 차천로. 벼슬에서 물러나서 지내는 전원 한정
-규원가(閨怨歌, 원부사) : 선조, 허난설헌. 유교 사회 체제 아래 가정에 묻혀 있는 여자의 애원을 노래한 규방 가사
-고공가 : 선조 임란 직후, 허전. 농사로써 나라 일을 비겨 관리들의 파당적 행위와 정치적 무능을 비판하였다.
-고공답주인가 : 임진왜란 이후, 이원익. 나라 다스리는 도리를 농사에 비유하여, 붕당 싸움에 열중하는 현실을 개탄‧풍자한 가사. 허전의 고공가에 답한 것이다.
-태평사 : 선조 31년(1598), 박인로. 왜적을 몰아내고 태평 세월의 도래를 갈구함으로써 수군을 위로한 노래. 전쟁 가사
-선상탄 : 선조 38년(1605), 박인로. 임진왜란 뒤 바다에 대한 근심이 끊이지 않을 때, 왜적을 미워하고 평화를 갈구하는 뜻을 읊은 노래. 전쟁 가사
-누항사 : 광해군 3년(1611), 박인로. 이덕형과 교유하면서 지은 가사. 한음이 노계의 고생스런 생활을 물었을 때, 가난하지만 안빈낙도하는 심회와 생활상을 읊은 작품이다.
-독락당 : 광해군 11년경, 박인로. 옥산서원 독락당을 찾아가, 회재 이언적 선생을 추모하고 그 곳 경치를 읊은 것이다.
-노계가 : 인조 14년(1636), 박인로. 지은이가 만년에 숨어 살던 노계의 경치를 읊은 것이다.
-농가월령가 : 헌종, 정학유. 농가의 연중 행사와 풍습을 월령체로 노래하였다.
-일동장유가 : 영조 39년(1763), 김인겸. 지은이가 영조 39년부터 40년까지 일본 통신사 조엄의 서기로 갔다가 견문한 바를 노래한 기행 가사
-만언사 : 정조, 안조환. 대전 별감이던 지은이가 추자도로 귀양가서 겪은 천신 만고의 참상을 노래한 유배 가사
-용담유사 : 철종 11년(1860), 최제우. 동학을 창건한 최제우가 천도교의 포덕을 위하여 용담가‧안심가‧교훈가 등 8편의 가사를 지었는데 이를 총칭하여 용담유사라 한다.
-북천가 : 철종 4년(1853), 김진형. 함경도 명천에 귀양 갔다가 돌아오기까지의 생활과 견문을 쓴 유배 가사로 칠보산 단풍놀이, 군산월과의 사랑 등 호화스러운 생활 모습은 만언사와 대조적이다.
-연행가 : 고종 3년(1866), 홍순학. 청나라로 가는 사신의 서장관이 되어 북경에 가서 견문한 바를 읊은 기행 가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