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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은 문학 강의

처용가(處容歌),향찰,이두,구결

작성자한라짱|작성시간06.04.23|조회수2,621 목록 댓글 0

처용가(處容歌)

 

img1.gif


 

동경명기월량

야입이유행여가

입량사침의견곤

각오이사시량라

이힐은오하어질고

이힐은수지하언고

본의오하시여마어은

탈질량을하여위리고
 

희망의 문학


서울 밝은 달밤에

밤 늦도록 놀고 지내다가

들어와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로구나.

둘은 내 것이지만

둘은 누구의 것인고?

본디 내 것(아내)이다만

빼앗긴 것을 어찌하리.        

희망의 문학

dia_bluve.gif 요점 정리

 

circle01_red.gif 작자 : 처용(處容)

circle01_red.gif 연대 : 신라 헌강왕(875-885)

circle01_red.gif 갈래 : 8구체 향가(4·4조의 민요조로 됨)

circle01_red.gif 표현 : 향찰로 표기, 직서적(直敍的 : 상상이나 감상 따위를 덧붙이지 아니하고 있는 그대로 서술)인 표현. 체념적인 농사(弄詞), 풍자, 제유법

circle01_red.gif 성격 : 축사(逐邪)의 노래

circle01_red.gif 구성 : 1-4행 역신의 침범, 5-6행 대상에 대한 의문 7-8행 처용의 관용, 또는 체념으로 역신과 화자의 대화가 있음(5. 6행)

circle01_red.gif 주제 : 아내를 범한 귀신을 쫓아냄, 혹은 아내의 부정을 체념함, 축신(逐神-귀신을 쫓음)

circle01_red.gif 내용 : 아내를 빼앗은 역신에게 관용의 정신을 베푸는 이야기.

circle01_red.gif 의의 :

1. 벽사 진경(僻邪進慶 : 간사한 귀신을 물리치고 경사를 맞이함)의 소박한 민속에서 형성된 무가(巫歌 : 무속의 노래)이다. 무격 신앙과 관련하여 생각할 때 처용은 제웅(역신을 쫓기 위하여 음력 정월에 동구밖에 내던져 액을 면하게 한다는 볏짚 인형. 처용과 제웅은 발음 및 축사의 기능이 같으므로 처용을 곧 제웅이라고도 한다.)과 연결시킬 수 있다.

2. 의식무, 또는 연희의 성격을 띠고 고려와 조선 시대까지 계속 전승되었다.

3. 고려 속요에도 '처용가'가 있어 향가 해독(解讀)의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circle01_red.gif 출전 :  삼국유사(三國遺事)

dia_bluve.gif 내용 연구

 

서울 밝은 달밤에

밤 늦도록 놀고 지내다가

들어와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로구나. (1-4행 : 역신의 침범)

둘은 내 것이지만

둘은 누구의 것인고?

본디 내 것(아내)이다만

빼앗긴 것을 어찌하리. (5-8행 : 처용의 관용)

희망의 문학

 

circle01_red.gif 고려 속요 '처용가'

 '악학궤범'에 실려 있는 고려 속요 '처용가'에 향가 '처용가' 중 6구가 다음과 같이 한글로 옮겨 있어 향찰 문자 해독의 열쇠가 되었다.

희망의 문학 

dia_bluve.gif 이해와 감상

 헌강왕이 개운포를 지나는데, 깜깜해지는 변괴가 일자 그 자리에 절을 지어 주기로 하니 어둠이 가셨다. 이 자리에 절을 지으니 망해사이다. 동해 용왕이 이에 감사하고 자신의 아들인 처용을 헌강왕에게 바쳐 서라벌에서 살게 되었다. 처용이 벼슬을 하고 있을 때 역신이 그의 아내를 범하여 이 노래를 부르니 역신이 감읍하여 처용의 상이 있으면 범접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이것은 벽사(僻邪)에 해당하는 것으로, 문이나 지붕에 처용상을 붙이게 된 기원, 즉 문신의 좌정 과정을 설명한 것으로 보고 있다.

 배경 설화와 관련지어 작품을 살펴 보면, 이 노래는 동해 용왕의 아들인 처용이 신라에 와서 벼슬을 하던 어느 날, 그가 늦게까지 놀고 있는 사이에, 역신이 매우 아름다운 그의 아내를 흠모하여 몰래 동침했다. 집에 돌아와 상황을 안 처용은 이 노래를 부르자 역신은 크게 감복하여 용서를 빌고 이후로는 공의 형상을 그린 것만 보아도 그 문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하였다. 이후로 사람들은 처용의 형상을 문에 붙여 귀신을 막았다. 이런 배경 설화를 가진 이 노래에 대한 해석에 여러 가지 견해가 있으나 축사(逐邪) 및 벽사진경( 邪進慶)의 노래로 이해하는 것이 통설이다. 역신이 처용의 태도에 감복하여 자신의 본체를 자백하고 퇴각한 내용과 관련하여 무속에서는 아무리 악신(惡神)이라도 즐겁게 하여 보낸다는 풍속과 한국인의 여유에 찬 생활의 예지를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노래는 악신을 보내는 '뒷전풀이'로 이해해야 할 것이라 한다. 이 노래는 신라 49대 헌강왕 때 처용랑이 역신(疫神)을 쫓기 위해 지어 부른 8구체 향가이다. 이 노래의 변형이 고려시대 `처용가'로 악학궤범과 악장가사에 실려 있으므로 향찰로 표기된 어려운 향가를 해독할 수 있는 열쇠를 얻은 것이다.

  이 노래의 내용에 대해서 학자들은

① 민속학의 관점에서 처용을 무속과 관련지어 보는 견해,
② 정치사의 관점에서 처용을 지방호족의 아들로 보는 견해,
③ 신라시대에는 멀리 서역 지방과도 교역이 있었다고 보아 처용은 이슬람 상인으로 보려는 견해 등이 있다.

 그러나 ①의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 하다. 그 까닭은 제 아내가 다른 남자와 자고 있는 것을 보고도 노래 부르며 춤추며 물러났다고 하는 것은 상식을 범주를 벗어난 무격 사회에만 있는 풍습이기 떄문이다. 또한 악신(惡神)이라도 즐겁게 하여 보낸다는 풍속에서 한국인의 여유에 찬 생활의 예지를 볼 수 있다. 이 노래의 절정은 7행과 8행이다. 이는 체념적인 주사(呪詞)로 볼 수 있으나 오히려 처용의 상황(초극적인 이미지)을 부각시킨 것으로 후대로 오면서 벽사(  邪)의 위력으로 발전한 것을 이해할 만 하다. 이를 무가(巫歌)의 일종으로 보아 악신을 보내는 `뒷전풀이'로 이해하지 않고는 해석의 실마리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무속에서는 악신이라도 즐겁게 하여 보내는 것이 통례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해와 감상2

 헌강왕이 개운포를 지나는데, 깜깜해지는 변괴가 일자 그 자리에 절을 지어 주기로 하니 어둠이 가셨다. 이 자리에 절을 지으니 망해사이다. 동해 용왕이 이에 감사하고 자신의 아들인 처용을 헌강왕에게 바쳐 서라벌에서 살게 되었다. 처용이 벼슬을 하고 있을 때 역신이 그의 아내를 범하여 이 노래를 부르니 역신이 감읍하여 처용의 상이 있으면 범접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이것은 벽사(僻邪)에 해당하는 것으로, 문이나 지붕에 처용상을 붙이게 된 기원, 즉 문신의 좌정 과정을 설명한 것으로 보인다. 배경 설화와 관련지어 작품을 읽어 보자.

 이 노래는 동해 용왕의 아들인 처용이 신라에 와서 벼슬을 하던 어느 날, 그가 늦게까지 놀고 있는 사이에, 역신이 매우 아름다운 그의 아내를 흠모하여 몰래 동침했다. 집에 돌아와 상황을 안 처용은 이 노래를 부르자 역신은 크게 감복하여 용서를 빌고 이후로는 공의 형상을 그린 것만 보아도 그 문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하였다. 이후로 사람들은 처용의 형상을 문에 붙여 귀신을 막았다. 이런 배경 설화를 가진 이 노래에 대한 해석에 여러 가지 견해가 있으나 축사(逐邪) 및 벽사진경( 邪進慶)의 노래로 이해하는 것이 통설이다. 역신이 처용의 태도에 감복하여 자신의 본체를 자백하고 퇴각한 내용과 관련하여 무속에서는 아무리 악신(惡神)이라도 즐겁게 하여 보낸다는 풍속과 한국인의 여유에 찬 생활의 예지를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노래는 악신을 보내는 '뒷전풀이'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해와 감상3

 이 작품은 종교적, 역사적, 축사 및 벽사진경의 시각으로의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한편, 역신이 처용의 너그러운 태도에 감복하여 자신의 본체를 밝히고 물러간 내용과 관련하여 무속(巫俗)에서는 아무리 악한 신이라도 즐겁게 하여 보낸다는 풍속과 한국인의 여유에 찬 생활의 예지를 엿볼 수 있다. 따라서, 이 노래는 역신을 보내는 뒷풀이로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 노래의 절정 부분인 시의 마지막 두 구는 표면상은 체념의 태도를 해학적으로 표현한 말에 해당하지만, 이면적으로 보면 일상인의 생각과 감정을 뛰어넘는 처용의 초극적인 이미지를 찾아볼 수 있다.

이해와 감상4

 신라 헌강왕 때 처용이 지었다는 8구체 향가. 삼국유사 권2 처용랑망해사조(處容郞望海寺條)에 관련설화와 더불어 원문이 실려 있다.

〔배경설화〕

 신라 제49대 왕인 헌강왕이 개운포(開雲浦지금의 울산)에 나가 놀다가 물가에서 쉬는데,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해져 길을 잃었다.
왕이 괴이히 여겨 좌우 신하들에게 물으니,
일관(日官)이 아뢰기를 이것은 동해용의 조화이니 마땅히 좋은 일을 해주어서 풀어야 할 것입니다.라 했다. 이에 왕은 일을 맡은 관원에게 용을 위해 근처에 절을 세우도록 명했다. 왕의 명령이 내려지자 구름과 안개가 걷혔으므로 이에 그곳 이름을 개운포라 했다.
동해용이 기뻐하여 아들 일곱을 거느리고 왕의 앞에 나타나 덕을 찬양하여 춤추고 음악을 연주했다. 그 가운데 한 아들이 왕을 따라 서울로 가서 왕의 정사를 도왔는데 그의 이름이 처용이다. 왕은 처용에게 미녀를 아내로 주고, 그의 마음을 잡아 두려고 급간(級干) 벼슬을 주었다.
그런데 그의 아내가 무척 아름다웠기 때문에 역신(疫神)이 흠모하여 사람의 모습으로 변신하여 밤에 그의 집에 가서 몰래 같이 잤다. 처용이 밖에서 돌아와 잠자리에 두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
처용가를 부르며 춤을 추면서 물러났다.
그 때 역신이 모습을 나타내고 처용 앞에 꿇어앉아,
내가 공의 아내를 사모하여 지금 범하였는데도 공은 노여움을 나타내지 않으니 감동하여 아름답게 여기는 바입니다. 맹세코 지금 이후부터는 공의 형상을 그린 것만 보아도 그 문에 들어가지 않겠습니다.라고 했다. 이로 인하여 나라 사람들은 처용의 모습을 그려 문에 붙여 사기(邪氣)를 물리치고 경사스러움을 맞아들였다는 것이다.

〔원문 및 해석〕

 처용이 역신 앞에서 부른 노래는 삼국유사에 무분절로 기재되어 있다. 東京明期月良夜入伊遊行如可入良沙寢矣見昆脚烏伊四是良羅李隱吾下於叱古二隱誰支下焉古本矣吾下是如馬於隱奪叱良乙何如爲理古.
이 노래에 대한 양주동(梁柱東)의 해독은 다음과 같다.
“棋巧串래/밤드리 노니다가/드러 자리 보곤/가리 네히어라./둘흔 내해엇고/둘흔 뉘해언고/본 내해다마/아坮堪 엇디릿고.
 노래의 풀이는
서울 밝은 달에 밤들이 노니다가/들어와 잠자리를 보니/가랑이가 넷이도다./둘은 나의 것이었고/둘은 누구의 것인가?/본디 내 것이지마는/빼앗긴 것을 어찌하리오?이다.
처용의 존재에 대해서는
벽사가면의 인격화現人邪神설, 반중앙적 지방 호족의 아들로서의 질자(質子아들을 인질로 보냄)설, 이재술(理財術)을 지녔던 이슬람 상인설, 호국호법룡의 불교 상관 인물설, 무격(巫覡) 또는 무격의 몸주主神설, 풍월도적 미륵신앙을 갖고 있는 화랑설 등이 있다.
 이름에 대해서는 훈차로 본
터알 바가지설, 곧즛(龍顔)설, 곶얼굴(花容)설과 음차로 본 무(巫)의 뜻인 자충(次次雄慈充)설, 용(龍)의 뜻인 (稱)설, 청룡(靑龍)의 이기(異記)설 등이 있다.
 처용의 왕정 임무에 관해서는
그의 본고장 울산의 사정에 관한 정부의 자문 임무설, 신라 말기 위기에 처한 경제체제를 개혁하기 위한 이재가(理財家)로서의 보좌설, 역신(疫神)을 물리치는 굿으로서의 보좌설, 의무(醫巫)로서의 보좌설, 무격으로서 주술과 가무로써 기상의 변괴를 물리치는 직책설, 왕권 강화와 국가 수호의 임무설 등이 제기되었다.
역신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열병신(熱病神
천연두·홍역·학질을 일으키는 질병신)으로 보고 있으나, 병든 도시의 유한공자(遊閑公子), 곧 타락한 화랑의 후예의 상징으로 보는 견해, 탐락과 방탕 풍조에 빠져 있던 반도덕적인 패륜아의 상징으로 보는 견해, 나라를 병들게 하는 어두움과 악의 화신으로 보는 견해 등이 있다.

〔내용 및 형식〕

처용가의 내용과 형식은 시적 화자가 역신의 화자 처 범접(犯接)을 보고서 그 현장 상황과 그에 대한 화자의 대응태도를 일인칭 독백체 형식으로 노래하되, 노래에는 주가(呪歌)의 성격이 전혀 드러나 있지 않다.
그러나 처용이 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물러나니 역신이 처용의 노하지 않음에 감복하여 사죄하고 물러갔으므로 이 노래를 일반적으로 주가로 본다.
한편 이
처용가에 대해 의례의 한 부분이던 신화무가 중의 일부로써 주적 정조인 창사 부분의 일부라는 견해, 처용이라는 법행룡(法行龍)이 창한 일종의 진언(眞言)이요 불교적인 주문이라는 견해, 주술 기원의 재연(再演)인 서사 부분과 짝해서 역신 퇴치 주술의 핵을 이루게 된 주사라는 견해, 처용신의 유래를 설명한 서사무가에 삽입된 주술 무가라는 견해, 강자에 의한 아내의 정조 유린이라는 비애를 골계로 표현한 민요격 향가라는 견해, 동해의 용신제의(龍神祭儀)에서 불리던 무가라는 견해 등이 제기되어 있다.
이 노래는 가사가 부연되어 고려
·조선 시대의 나례(儺禮음력 섣달 그믐날 밤에 궁중이나 민가에서 악귀를 쫓기 위해 베풀던 의식) 공연 때 처용가무에서 불린다.

참고문헌 三國遺事, 古歌硏究(梁柱東, 博文書館, 1957), 鄕歌解讀法硏究(金完鎭, 서울大學校 出版部, 1980), 新羅文學에 있어서의 鄕歌論(琴基昌, 太學社, 1993), 鄕歌批解(兪昌均, 螢雪出版社, 1994), 鄕歌新解讀硏究(姜吉云, 學文社, 1995), 鄕歌文學論과 作品硏究(羅景洙, 集文堂, 1995), 삼국유사 향가연구(양희철, 태학사, 1997), 處容說話의 綜合的 考察(大東文化硏究 別集 1, 成均館大學校 大東文化硏究院, 1972), 한국고시가의 거시적 연구(김학성, 집문당, 1997), 處容歌硏究(金東旭, 東方學誌 5, 1961), 處容說話의 硏究(張籌根, 國語敎育 6, 1963), 處容說話攷(玄容駿, 國語國文學 39·40 합병호, 1968), 三國遺事所載 處容說話의 一分析(李佑成, 金載元博士回甲紀念論叢, 1969), 處容說話의 一考察(李龍範, 震檀學報 32, 1969), 處容歌의 巫俗的 考察(徐大錫, 韓國學論叢 2, 1975), 處容歌舞의 演劇史的 理解(趙東一, 演劇評論 15, 1976), 處容說話와 그 歌謠의 硏究(金承璨, 韓國文學論叢 4, 1981).(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향찰(鄕札)

한자의 음(音)과 훈(訓)을 빌어 우리말의 문장 전체를 그대로 적던 일종의 표음식 차자(表音式 借字)인데, 이를 향가식 표기법이라고도 합니다. 향찰은 겉으로 보기에는 한자를 나열해 놓은 것처럼 보이나, 실제로 신라인들은 이것을 보며 한자로 읽은 것이 아니라. 우리말로 읽었던 것입니다. 향찰은 한자를 빌려 쓸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서 우리 조상들이 고안해 낸 기록 방식으로 가장 종합적인 체계를 갖춘 것입니다.


이두(吏讀)

이두(吏讀), 이토(吏吐), 이투(吏套)라고도 합니다. 넓은 뜻으로는 향찰, 구결 등 한자의 음과 훈을 빌어 우리말을 표기하는 모든 방법을 통틀어 이두라고 말합니다. 좁은 뜻으로는 한자의 음과 훈을 빌어서 한문을 국어 나열식으로 적기 위하여 주로 조사, 접미사, 부사와 명사의 일부에만 사용하던 문자를 뜻하기도 합니다. 의미부는 한자의 훈을 취하고, 형태부는 음을 취하여 특히 곡용이나 활용을 하는 조사나 어미를 표기했습니다. 훈민정음이 창제된 후에는 그 쓰임이 쇠퇴하기 시작하였으나 소송문, 고시문, 보고서 등의 관용문에는 여전히 쓰였으며, 조선 후기의 영, 정조 때까지 사용되었습니다.

 

二塔天寶十七年戊戌在之(두 탑을 천보 17년 무술 세웠다)

  

 

구결(口訣)

한문을 읽을 때 한자와, 한자를 변형한 약체자(略體字)를 사용하여 문법적 관계를 나타내는 표기입니다. 한문의 순서를 그대로 좇아 토를 다는 방식을 순독구결(順讀口訣)이라 하고, 우리말 구조에 맞게 재구성하여 읽도록 하는 방식을 석독 구결(釋讀口訣)이라 합니다. 즉 구결 문자를 제거하면 온전한 한문이 되는 겁니다. 고려시대 불경에서 많이 발견됩니다.

<진단평가>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하시오.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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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로 우리말을 표기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한자의 음을 우리말 단어의 발음 기호로 활용하는 것으로서, ‘길동’이라는 지명을 적기 위하여 ‘吉’[길]과 ‘同’[동]을 끌어와 ‘吉同’으로 적고 [길동]으로 읽도록 하는 것이다. 이 방법은 한자의 음을 빌려와 쓴다는 점에서 ‘음차 표기’라 한다. 다른 하나는 한자의 뜻, 다시 말해서 훈(訓)을 빌려와 우리말의 음을 표기하는 방법이다. ‘栗’(밤 율)의 훈으로 [밤]을 나타내고, ‘峴’(고개 현)의 훈으로 [고개]를 나타내어, ‘栗峴’으로써 우리말의 [밤고개]를 표기하는 것이다. ‘栗峴’을 [율현]이라 읽지 않고 [밤고개]로 읽는 이 방법은 한자의 뜻, 즉 훈(訓)을 빌려와 쓴다는 점에서 ‘훈차 표기’라 한다.


이러한 단어 중심의 한자 차용 표기는 점차 두 단계에 걸쳐 문장을 표기하는 방향으로 확대되었다. 문장 표기의 1단계는 ‘我愛汝’([아애여], 나 사랑 너)와 같이 ‘주어-서술어-목적어’의 중국어식 어순을, ‘我汝愛’(나 너 사랑)와 같이 ‘주어-목적어-서술어’의 우리말 어순으로 바꾸는 단계였다. 1단계는 점차 명사와 용언 어간에 각각 조사와 어미를 첨가하는 2단계로 이어졌다. 2단계에 속하는 향가 표기, 즉 향찰은 ‘我愛汝’에 조사나 어미를 붙여 ‘我隱 汝乙 愛爲隱如’([아은 여을 애위은여], 나는 너를 사랑하ㄴ다)와 같이 상당히 체계화된 문장 표기 모습을 보여준다. 향찰에서는 어절을 단위로 하여 대체로 뜻이 중요한 명사나 용언 어간은 ‘훈차’를 하고, 문법적 기능이 중요한 조사나 어미는 ‘음차’를 함으로써, 한 어절의 표기가 ‘훈차+음차’라는 일반적인 원칙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한자 차용 표기의 역사는 일본의 경우에도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일본은 이러한 한자 차용 표기를 오늘날까지 계승하여 문자 생활을 하고 있지만, 우리의 경우에는 새 문자를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한자 차용 표기를 알고 있던 세종대왕은 왜 일본과 달리 훈민정음을 창제하였는가? 이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일본어와 우리말이 갖는 음절의 특징에 주목하여 그 이유를 찾는다. 일본어는 음절이 간단하여 한자로 표기하는 데에 문제가 없었을 뿐 아니라 그 수도 50개 정도면 충분하였다. 이에 비해, 우리말은 [곳], [닫]과 같이 한자로 나타낼 수 없는 음절이 많았을 뿐 아니라 그 수도 2,000개 이상이 필요하였다. 세종대왕은 이러한 한자 차용 표기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하여 훈민정음을 창제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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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위 글의 내용과 부합하지 않는 것은? ▶ 

① 훈차에서 한자 한 글자는 우리말 음절 하나와 대응되었다.

②‘愛爲隱如’(사랑하ㄴ다)의 ‘爲’(할 위)는 훈차 표기 방법을 따랐다.

③ [곳], [닫]과 같은 음절은 한자 한 글자로 음차 표기할 수가 없었다.

④‘坪村’을 [평촌]으로 읽으면 음차가 되고, [벌말](벌마을)로 읽으면 훈차가 된다.

⑤ 한자 차용 표기는 ‘단어 표기 → 문장의 어순 조정 → 조사와 어미의 첨가’ 순서로 전개되었다.


2.위 글을 바탕으로 할 때, 훈민정음의 창제 이유로 가장 적절한 것은?  ④

① 향찰에서 보조 성분의 어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서

② 한자 차용 표기가 고려 시대 이후에는 사용되지 않아서

③ 한자로는 조사나 어미의 문법적 기능을 잘 드러낼 수 없어서

④ 한자 차용 표기로는 우리말의 소리를 충분히 표기할 수 없어서

⑤ 한자 차용 표기에서 음차는 문제가 없었지만, 훈차는 문제가 많아서


3.<보기>의 설명 중, 위 글로 미루어 타당한 것끼리 묶인 것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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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 

ㄱ.고대에 우리말과 중국어의 발음은 달랐으나 어순은 비슷했다.

ㄴ.어떤 언어 공동체의 문자와 표기는 그 공동체의 언어 특징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ㄷ.한자 차용 표기에서 ‘훈차+음차’ 표기의 단위는 현대 국어 맞춤법의 띄어쓰기 단위와 관련이 깊다.

ㄹ.현대 일본의 문자와 표기는 그들의 한자 차용 표기를 계승한 것이므로 향찰과는 공통점을 거의 찾을 수 없다.

========================================================================

① ㄱ, ㄴ       ② ㄱ, ㄷ       ③ ㄴ, ㄷ     

④ ㄴ, ㄹ       ⑤ ㄷ, ㄹ


4. <보기>의 우리말을 영어와 국어 로마자 표기법을 활용하여 향찰과 같은 방식으로 적어서 읽는다고 할 때, 쓰기와 읽기의 방법이 올바른 것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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