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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삼국지

작성자한라짱|작성시간09.09.18|조회수291 목록 댓글 0

 

 

삼국지三國志

San guo zhi

 

 

 

攻·守·速·遲·勇·德·剛·柔
21세기 코드로 읽는 三國志 인물학  
   

三國志 인물학|삼국지는 어떤 책인가?

 


 수많은 인물이 등장해 지모와 용맹으로 자웅을 겨루는 삼국지는 문학서이자 교양서, 역사서이자 처세학 교본이다. 그래서 정치인은 정치적 야망을 실현하기 위한 참고서로, 기업인은 경영의 지침서로 활용한다. 대통령선거가 다가오면서 갖가지 ‘인물론’이 쏟아진다. 이런 시점에 삼국지 등장인물들의 인품과 행적, 시대상황 등을 살펴봄으로써 승자와 패자를 구분지은 조건을 곱씹어보는 것은 흥미와 의미를 더할 것이다.   

 

 

사내들은 흔히 제 가슴에 품은 포부를 펼쳐 보이기 위해 세상을 산다고 말한다. 그날을 위해 푸줏간 사나이의 바짓가랑이 밑을 기었던 그 옛날의 한신(韓信)처럼 험한 꼴을 보면서도 꾹 참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포부! 그것은 때로는 아름다운 청운의 꿈으로, 때로는 엄청난 대망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게 무엇이길래 온갖 수모를 견뎌내며 그걸 펼치고자 하는 것일까.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하나밖에 없는 목숨마저 초개처럼 버릴 수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한 해답을 구하는 데에는 15세기 중국 작가 나관중(羅貫中)이 쓴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보다 더 효과적인 정보원은 달리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거기에는 나름의 포부와 능력, 자신감을 갖고 난세와 맞서려 했던 사나이들의 삶이 생생하게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수많은 인물이 등장해 지모와 용맹으로 자웅을 겨루는 삼국지는 문학서이자 교양서, 역사서이자 처세학 교본이다. 그래서 정치인은 정치적 야망을 실현하기 위한 참고서로, 기업인은 경영의 지침서로 활용한다. 대통령선거가 다가오면서 갖가지 ‘인물론’이 쏟아진다. 이런 시점에 삼국지 등장인물들의 인품과 행적, 시대상황 등을 살펴봄으로써 승자와 패자를 구분지은 조건을 곱씹어보는 것은 흥미와 의미를 더할 것이다. 

 

나관중은 진수(陳壽)가 쓴 정사(正史) ‘삼국지(三國志)’를 바탕 삼아 거기에다 자신의 가치관을 더하고 등장인물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에 드라마틱한 요소까지 곁들인 얘기를 들려주기 때문에 역사의 흐름은 물론 세상을 사는 지혜에도 눈뜨게 만든다. 그래서 한번 책장을 잡으면 쉽게 놓지 못한다. 이 책이 문학서이자 교양서이기도 하지만 역사서로서, 또 처세의 교본으로 읽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정치인은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이루기 위한 참고서로, 기업가나 경영인은 경영철학의 지침서로도 활용한다. 이런 사람들을 위해 ‘삼국지 영웅론’ ‘삼국지 인간학’ ‘삼국지 경영학’ 같은 이름을 단 책들이 속속 출간되고 있다.

 

삼국지의 쓰임새는 이처럼 넓고 다양하다. 삼국지 등장인물들의 행적과 인품, 시대상황 등을 살펴봄으로써 이들 가운데 승자와 패자를 가른 조건이 무엇이었던가를 밝혀보려 할 뿐이다. 그렇게 해서 도출된 승자의 조건이 바로 천하 제패의 조건일 것이라는 생각에서.

 

 

 

 

삼국지의 무대

 

정공법은 下策, 꼼수는 上策?


 ‘삼국지연의’는 소설이긴 하나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삼았으므로 등장인물들을 제대로 평가하려면 먼저 그들이 살았던 공간과 시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지역적으로는 지금의 중국 영토를 기준으로 하여 지린(吉林)성 이북과 윈난(雲南)성 이남, 신장(新疆)성 이서를 제외한 중국 전역이 된다. 시간적으로는 후한 말기에 터진 황건적의 난(184)으로부터 시작, 위(魏)·촉(蜀)·오(吳)가 정립(鼎立)한 이른바 ‘삼국시대’를 거쳐 사마의(司馬懿)의 손자 사마염(司馬炎)이 삼국을 통일하면서 진(晉)을 건국(265)하기까지 약 1세기에 걸친다.

 

그렇다면 그 무대가 됐던 중국이란 어떤 곳일까. 중국은 거대한 대륙이다. 그 자체가 하나의 세계인지라 중국인 스스로 ‘천하’라고 불렀다. ‘천하’의 주인은 그래서 ‘천자’가 됐다. 야망이 있는 자는 천하를 자신의 손에 움켜쥐려 했다. 천자를 향한 꿈이었다. 천하 제패의 야망이란 바로 그것을 말하는 것이다.

 

천하라는 말에서 이미 중국 대륙이 갖는 공간의 스케일을 짐작할 수 있겠지만, 중국을 실제로 여행해보면 그 사실을 분명히 실감할 수 있다. 동서와 남북간의 공간이동을 통해 목격하게 되는 자연과 인문환경의 변화는 실로 엄청난 것이다.

이렇게 장대한 공간에선 상대를 밀어내 굴복시키는 전법은 통하지 않는다. 아무리 밀어내도 그 끝이 보이지 않거니와, 그렇게 밀고 있는 순간 누가 뒤통수를 때릴지도 알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매복, 야습, 화공, 허위정보 유포 등이 가세하면 상황은 정말 복잡해진다. 전진과 공격이 절대로 능사가 아닌 것이다. 정공법은 오히려 하책(下策)이 되고, 꼼수같이 보이는 후퇴와 도망, 기습이 상책이 될 수 있다.

 

모두 13편으로 구성된 병법의 교본 ‘손자(孫子)’에도 이 점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장기전을 피하라(제2 작전편)’ ‘적의 의표를 찌르라(제6 허실편)’ ‘기선을 제압해 국면을 전환하라(제7 군쟁편)’ ‘임기응변으로 대처하라(제8 구변편)’ ‘지형에 따라 작전을 구사하라(제10 지형편)’ ‘화공의 효과를 높여라(제12 화공편)’ ‘밀정을 최대한 활용하라(제13 용간편)’ 같은 구체적인 방법까지 일러준다. 이러한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손자는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가르쳤다.

 

싸움이란 말이 나왔으니까 말이지만 중국인에게 싸움은 싸움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인심은 물론 천문, 지리에까지 두루 통달해야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한 제갈공명(諸葛孔明)의 말대로 그들에게 있어 싸움이란 지혜와 용기, 전투력 등 모든 것이 총동원되는 극적 모멘트다. 따라서 그 결과에 따라 역사의 흐름이 바뀌게 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중국은 공간적으로만 스케일이 장대한 것이 아니다. 사람의 수에서도 상상을 초월한다. 세계 최대의 인구를 자랑하는 만큼 한번 싸웠다 하면 몇십만 대군이 동원된다. 20세기에 들어와서도 ‘인해전술’을 구사했을 정도이니 그들의 인적 자원은 차원이 다르다고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양에서만 그런 것도 아니다. 질적으로도 그러하다. 출중한 인물, 기상천외한 인재들이 부지기수라 그들만으로도 한 나라를 세울 만큼 엄청난 ‘인재 풀’을 형성하고 있다.

 

 

‘그릇’이 인물 평가기준


 특이한 것은 중국에선 예로부터 인재를 양성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어서였다. 자연발생적으로도 인재가 넘쳐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재란 기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길러지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유능한 리더란 바로 그런 인재들을 찾아내 적소에 배치해서 적절히 활용할 줄 아는 능력의 소유자라고 봤다. 유비(劉備)가 삼고(三顧)의 예를 다해 공명을 군사(軍師)로 맞아들인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고, 그랬기 때문에 유비는 유능한 리더로 평가받는다.

 

그렇다고 리더만 자신에게 필요한 인재를 찾아다닌 것은 아니었다. 스스로 인재라 생각하는 자들이 자신의 포부와 능력을 펼칠 장(場)을 열어줄 리더를 선택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원소(袁紹)의 아래에 있다가 그로서는 안되겠다 싶어 구조를 찾아간 순욱(荀彧)의 경우가 그 좋은 예다.

 

공간적으로 장대하고 다양한 인재들이 풀을 이루고 있는 상황에선 흑과 백의 이분법은 먹혀들지 않는다. 국지적 사고 또한 무용지물이다. 다면적 사고, 전방위 사고, 요즘 말로 해서 ‘글로벌 싱킹(global thinking)’이 요구된다. 그들은 인물을 논할 때 ‘그릇(器)’의 크기를 말하곤 하는데, 그것은 중국이 갖는 지리적 스케일과 다양한 인재를 포용해야 하는 현실적인 필요성을 인식한 결과였다.

 

그들이 ‘능력’이라 표현하지 않고 ‘그릇’이라 한 것은 승패를 가리는 것은 개인의 능력만이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성공과 실패는 특정 개인의 능력과 운명, 그리고 우연이 어우러져 함께 만들어내는 그 무엇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그들에겐 하늘이 뜻이 아주 중요하다. 아무리 출중한 능력을 갖고 있다 해도 하늘의 뜻이 그 사람으로부터 멀어져 있다면 그는 결코 승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늘의 뜻이란 시대가 흘러가는 방향이고, 그것을 움직이는 것은 다름 아닌 민심이었으니 승자란 민심을 얻은 자를 일컫는 말에 다름 아니었다. 1841년 ‘영웅과 영웅숭배’를 쓴 영국의 사학자 칼라일이 출중한 능력을 가진 특정 개인을 영웅이라 칭하면서 어디까지나 개인에 초점을 맞춘 데(‘플루타르크 영웅전’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반해 중국인들은 특정 개인과 함께 그를 둘러싼 집단과의 상호관계에 초점을 맞춰 인물을 평가했다. 다시 말해 ‘관계’에 주목했던 것이다.

무예에 뛰어나고 학문에 식견이 있는 자는 그 분야의 대가일 수는 있겠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전문가일 뿐이다. 전문가는 전체를 보는 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런 자는 재상은 될 수 있으나 천자의 재목으로는 부족하다고 보았다. 독불장군 또한 경계의 대상이었다. 이 때문에 중국에선 영웅이 경계의 대상일 수는 있었지만 칭송이나 숭배의 대상은 되지 못했다. 대신 어질고 덕 있는 인물이 숭배의 대상이 됐다. 그 덕을 이루는 요체가 ‘그릇’이었던 것이다. 우리의 눈에는 무능한 인물로 비치는 사람이 덕 있는 인물로 추앙받았던 데는 이런 정신적 배경이 깔려 있다.

 

 

 

 

 
 

삼국지三國志

San guo zhi

 

 

 

삼국지三國志

San guo zhi (웨)San kuo chih.

중국 기전체 역사서인 〈이십사사 二十四史〉 가운데 한 권.

 

 

 

위(魏)·촉(蜀)·오(吳)의 3국이 정립한 시기부터 진(晉:220~280)이 중국을 통일한 시기까지의 역사를 기록했다. 서진시대에 진수(陳壽:233~297)가 지었다. 총 65권으로 〈위서 魏書〉·〈촉서 蜀書〉·〈오서 吳書〉의 3서로 구성되어 있다. 위나라를 정통으로 하여 〈위서〉에 기(紀)·전(傳)을 두고, 〈촉서〉·〈오서〉에는 열전(列傳)만 두었으며, 모두 표(表)와 지(志)는 없다. 〈삼국지〉는 단대사(斷代史)를 나라별로 저술하여 사체(史體)의 새로운 형식을 열었다. 왕침(王沈)의 〈위서〉, 위소(韋昭)의 〈오서〉, 어환(魚?)의 〈위략 魏略〉을 참고로 하여 편찬했으며, 복잡하고 모순된 3국의 역사를 간결한 문체로 일목요연하게 기록했다. 그러나 너무 간략하게 사실을 기록하여 빠진 부분이 많다. 남조 송나라 때 배송지(裴松之:372~451)가 본서의 간략함을 보충하기 위해 많은 책을 참조하여 상세한 주(注)를 달았는데, 이미 없어진 많은 자료를 인용했기 때문에 삼국시대 연구의 귀중한 문헌으로 평가된다. 청대에도 많은 학자들이 〈삼국지〉에 보주(補注)와 보표(補表)를 달았다. 근대에 기존의 연구성과를 종합하여 노필(盧弼)이 〈삼국지집해 三國志集解〉를 저술했다.

 


《삼국지》(三國志)는 서진(西晉)의 진수(陳壽)가 쓴 중국 삼국시대의 정사(正史)이다. 후한의 운세가 기울기 시작하던 189년부터 진나라의 사마염이 천하를 통일하는 280년까지의 기록을 담고 있다. 《사기》(史記), 《한서》(漢書), 《후한서》(後漢書)와 함께 중국 전사사(前四史)로 불리며 이십사사(二十四史) 중의 하나이다. 이 시기는 전란의 시기인데, 중국 인구사에 따르면, 한나라 시대 5600만명이었던 인구가 삼국지 시대에는 1600만명으로 인구가 급감한, 비극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총 65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위서(魏書) 30권(본기 4권, 열전 26권), 촉서(蜀書) 15권, 오서(吳書) 20권으로 구성돼 있다. (삼국지는 원래 위지, 촉지, 오지라는 표제로 구성되었는데, 송나라 이후 위서, 촉서, 오서라는 표제를 더 많이 사용해왔다.) 삼국지는 '사기(史記)', '한서(漢書)'의 체계를 따라 인물전기 위주로 짜여 졌으나 앞의 두 책과는 달리 연표를 담은 표(表)나 당시의 경제·문화를 기록한 지(志 혹은 書)가 없다.

 

삼국지는 위나라(魏)를 정통 왕조로 보고 쓰여진 역사서이다. 진수는 황제들의 전기인 본기를 위나라의 황제들로 엮었으며 '촉'과 '오'의 황제는 열전에 편입시켰다. 제호를 붙인 것은 위나라뿐이며 촉의 유비와 유선은 각각 선주(先主)와 후주(後主)로 기술하였고, 오의 제왕들은 주(主)를 붙이거나 심지어 이름을 그대로 적기도 했다. 이러한 체계는 진수가 벼슬을 하던 진나라가 위(魏)로부터 선양을 받아 세워진 나라이기에 위를 정통으로 삼고 촉과 오를 비정통으로 본 데에 따른 것이다. 진수의 이러한 사관(史觀)은 훗날 습착치(習鑿齒)의 '한진춘추(漢晉春秋)'나 주희(朱憙)의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이 촉을 정통으로 보면서 논쟁을 불러 오게 되었다.(조위/촉한정통론에 대해서는 정통론을 참조하라.)

삼국지는 서술이 간결하고 분명하여 명저라 일컬어져 왔다. 또한 위서 동이전(위서 오환선비동이전)에는 부여, 고구려, 옥저, 왜인 등의 동양 민족 고대사에 관련된 기록이 남아 있어 중요한 연구 자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하지만 사회적인 혼란 때문에 사료의 수집이 어려워 많은 사료를 참고하지 못하였다. 진수가 주로 참고한 사료는 왕심(王沈)의 '위서(魏書)', 위소(韋昭)의 '오서(吳書)', 어환(魚?)의 '위략(魏略)'으로 알려져 있다.

 

진수가 참고한 자료의 수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5세기 남북조시대 송의 문제가 배송지에게 명하여 여러 책을 수집하여 주를 달게 하였다. 본래 주는 본문의 말뜻을 주해하는 것이나 배송지는 누락된 사료를 기록하는 데 힘을 기울여 수많은 자료를 인용하여 사실을 보충하고 고증하였으며 본문의 몇 가지 오류나 모순을 지적하고 시정하였다. 자신이 인용한 자료의 문제점을 지적하였으며 진수의 인물평과 함께 자기 자신의 평을 넣기도 하였다. 현재 전해지지 않는 많은 자료들을 인용하였기 때문에 그의 주는 사료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 또한 삼국지와 더불어 삼국지 평화, 삼국지 연의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한편 배송지주의 양과 관련하여 20세기 양익양이 삼국지의 글자수에 대해 정문이 20만자, 주(註)가 54만자로 주가 세 배에 가깝다고 하여 삼국지의 주가 정문을 그 양에 있어 압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최근 왕정흡과 오금화가 정확히 글자를 세어 본 결과 정문(본문)의 글자수가 약 36만 8천자 주의 글자수가 약32만 2천자로 본문의 글자가 약간 더 많은 것으로 밝혀졌다. 위서는 본문이 약 20만 7천자 주가 약 21만 5천자, 촉서는 본문이 약 5만 7천자 주가 약 4만 2천자, 오서는 본문이 약 10만 3천자 주가 약 6만 5천자이다.

 

삼국지의 참고서로는 청의 전대소(錢大昭)가 엮은 '삼국지변의(三國志辨疑)', 양장거(梁章鉅)의 '삼국지방증(三國志旁證)', 항세준(杭世駿)의 '삼국지보주(三國志補注)'등이 저명하며 최근의 것으로는 고적출판사에서 1957년 출판한 노필(盧弼)의 '삼국지집해(三國志集解)'와 1991년에 호남사범대학출판사에서 퍼낸 소연뢰(蘇淵雷) 주편의 '삼국지금주금역(三國志今注今譯)'이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김원중 교수가 1994년 완역했다. 정사 본문은 완역되었으나, 배송지주의 상당 내용은 실리지 않았다.

 

 

三國志인물학|삼국지에 등장하는 인물들

 

 

 

인재는 홍수를 이루고

 


 춘추전국시대를 빛낸 사상가 중의 한 사람인 맹자(孟子)는 역사를 일러 ‘일치일란(一治一亂)의 반복’이라 정의했고, 나관중 또한 “여럿으로 쪼개진 것은 언젠가 하나로 합쳐지고, 그렇게 합쳐진 것은 언젠가 다시 여럿으로 쪼개진다(分久必合 合久必分)”라는 멋진 말로 ‘삼국지연의’를 시작했다.

 

군웅이 할거하던 춘추전국시대는 맹자의 말처럼 진시황에 의해 수습되어 진(秦)이라는 사상 초유의 통일 제국이 탄생했다. 진은 단명했으나 곧 한(漢)이라는 거대 제국에 의해 400년 가까이 지속됐다. 그러던 것이 184년에 일어난 황건적의 난을 계기로 광대한 중국 천하를 놓고 군웅들이 다시 한번 쟁탈전을 벌이는 분열의 시대로 빠져들었다. 삼국지는 이때부터 약 1세기에 걸친 혼란의 시대를 무대로 하고 있다.

 

삼국시대는 그러므로 분열의 시대였다. 사회를 움직이는 어떤 고정된 잣대나 가치, 틀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선 난세이기도 했다. 그 이전에는 높은 학식이나 지체를 가졌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힘깨나 쓸 수가 있었지만, 기존의 가치체계가 송두리째 무너진 난세에선 그것이 오히려 장애가 될 수도 있었다.

 

또한 삼국시대는 야망의 시대였다. 기존의 틀이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하자 그동안 숨죽이고 있던 야심가들이 너도나도 그라운드로 몰려나와 힘 겨루기에 달려들었다. 심판도, 룰도 제대로 없는 상황이라 하찮은 필부도 운만 좋으면 왕후장상이 될 수 있는 그런 야망의 시대, 자유경쟁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따라서 정치의식은 그 어느 때보다도 높았고, 인재 또한 둑이 터진 듯 한꺼번에 콸콸 쏟아져 나왔다. 삼국지에 등장하는 그 다양한 인물의 면면을 보라.

 

삼국의 한 축을 이루었던 조조(曹操)와 유비, 손권(孫權)을 비롯하여, 청류와 탁류가 싸우는 통에 어부지리로 얻은 권력을 오로지하다 그만 폭군의 대명사가 돼버린 동탁(董卓), 뛰어난 무예로 적의 간담을 서늘케 하다 결국 주군 동탁까지 죽여버린 여포(呂布), 연환계(連環計)로 동탁과 여포를 동시에 괴멸시킨 후한의 사도(司徒) 왕윤(王允)과 그때 미끼가 되기로 자청한 미인 초선(貂蟬), 반(反)동탁군의 대장으로 한때 북방을 주름잡았던 원소, 원소와 자웅을 겨루고자 한 원소의 이복형제 원술(袁術), 유비와 동문수학하고 북방에서 원소와 패권을 다투다 쓰러진 공손찬(孔孫璨), 형주 자사로 한때 유비를 도와준 유표(劉表), 명의 화타(華陀) 등을 우선 손꼽을 수 있다.

 

그리고 위의 조조 아래에는 그를 삼국의 제일인자로 만드는 데 최대의 공로자였던 책사 순욱, 순욱의 생질로서 사려 깊은 일처리와 판단력으로 조조를 도왔던 순유(荀攸), 조조의 심복으로 ‘난폭자’란 별명까지 얻은 애꾸눈 하후돈(夏侯惇), 조조의 자랑스런 선봉장 하후연(夏侯淵), 교묘한 처세술로 군사의 자리까지 오른 정욱(程昱), 조조를 원소와 비교, 모든 면에서 조조가 뛰어나다고 한데다 손책의 죽음을 예언한 곽가(郭嘉), ‘난세의 철새’ 가후(賈珝), 적벽전투에서 패한 조조를 호위해 허도로 철수한, 투구솜씨가 뛰어난 허저(許楮), “사사로운 일로 국사를 망칠 수는 없다”는 일념으로 조조를 끝까지 지켰던 무장 서황(徐晃), 여러 차례 주군을 바꿨으나 우는 아이도 뚝 그치게 하는 위엄으로 오를 토벌하는 데 혁혁한 전공을 세운 장료(張遼), 군사보다는 학문을 좋아해 다른 장수들과 공을 다투지 않았던 이전(李典), 공손찬 정벌과 관도대전에서 밟히면서도 끝내 용맹함을 잃지 않아 조조가 “나의 한신”이라며 자랑했던 장합, 조비의 등극에 앞장섰던 화흠(華歆), 후한의 헌제를 장안에서 탈출시키는 과정에서 보이지 않게 활약하다 위로 가서 태위의 지위까지 오른 종요(種繇), 조조로부터 “2000석의 장수가 모두 가규와 같다면 걱정할 게 없다”고 칭송받은 가규(賈逵), 용감하게 싸웠으나 사로잡힌 몸이 되는 통에 오에 항복, 끝내 그 수치와 분노를 참지 못해 저세상으로 떠나야 했던 무장 우금(于禁), 관도전투에서 발석거로 대항해 승리를 이끄는 데 큰 힘을 보탠 모신 유엽(劉曄), 조조가 동탁 토벌을 위해 의용군을 모집할 때 제일 먼저 달려오는 등 매사에 솔선한 악진(樂進), 괴력 무쌍의 호걸로 조조를 지키다 장렬한 최후를 맞은 전위(典韋), 조조의 뒤를 이어 위왕이 된 조비(曹丕), 문재(文才)가 뛰어난 조조의 차남 조식(曹植), 촉의 승상 제갈량을 쓰러뜨리고 위가 삼국 최고의 강국임을 증명한 사마의 등이 있었다.

 

 

 

 

 

삼국지三國志

San guo zhi

 

 

 

 

 

三國志인물학|삼국지에 등장하는 인물들 연표

 

《삼국지》의 등장인물 연표

《삼국지》의 총 등장인물의 수는 1,233명이다.

 


155년 - 조조 탄생.
삼국지의 주인공들중 한명인 조조의 탄생. 아버지인 조숭이 중상시 조등의 양자로 들어가게 되면서 조씨 성을 얻었기 때문에 본래의 성씨는 '하후'씨라고 하는 견해도 있으나, 하후돈, 하후연, 조인, 조홍 모두가 조조의 사촌형제로 기록이 되어 있기 때문에 조등과 조숭이 인척관계를 맺은것은 그보다 윗대의 일로 여겨진다.

 

156년 - 손견 탄생.
삼국지의 주인공들중 한명인 손견의 탄생. 청소년 시절부터 집 근처의 강가를 수하들과 돌아다니면서 수적들을 없애는 등 자경단으로서 활약했다고 한다.

 

159년 - 환제가 양기를 모살
양기는 당시 세력을 잡고 있었던 대장군이었다. 양기와 그 일족이 돈을 받고 벼슬을 파는등의 횡포가 너무나 심하여 가까이에 있던 환관들의 힘을 빌려 양기를 주살하는데는 성공했으나 이는 후일 '십상시의 난'을 불러오게 된다.

 

161년 - 유비 탄생.
삼국지의 주인공들중 한명인 유비의 탄생. 후한 제3대 황제인 경제의 자손을 칭하였으나 유비의 할아버지대 부터 탁군에서 어렵게 살았다는 것을 볼때 황족이기는 했어도 기득권층에는 속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경제는 그 후손이 워낙 많아 이미 그때 당시에도 진위여부를 가리기는 어려운 편이었다.

 

162년 - 관우 탄생.
후세에 이르기까지 민간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관성제군의 탄생. 본래는 하동현 해량 출신으로 고향에서는 소금밀매업자들의 뒤를 봐주며(당시 소금은 국가의 전매품이었다) 생활하다가 수배령이 내려지자 탁군으로 피신하여 유비와 교분을 맺었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정사상에 의형제였다는 기록은 없다.

 

167년 - 장비 탄생.
민간에서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호걸 장비의 탄생. 본시 삼국지가 기전체 소설로 정형화 되기 전, 송·원대의 삼국지를 주제로 한 잡극에서 주인공은 항상 장비가 맡았을 정도이다. 유비와는 동향이지만 조상들의 영지인 '연'을 내세우는 것을 좋아해서 소설상에서는 '연인 장비'라고 자칭하는 장면이 많다.

 

175년 - 손책, 주유 탄생.
181년 - 제갈량, 헌제 탄생.
182년 - 손권 탄생.
184년 - 황건적의 난 발발. 도원결의.
점점 가속화 되어가는 매관매직, 가혹한 수탈과 십상시의 횡포로 인해 피폐해져 있던 백성들과, 그러한 백성들의 심리를 이용한 종교결사 '태평도'의 교주인 장각이 일으킨 것으로서, 규모로는 후한최대의 농민봉기라고 일컬어진다. 그 수는 약 50만명에 달하였으며 세력범위도 무려 6개주에 달하여 지방의 군 세력으로는 감당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황건적의 난이 일어남으로서 중국대륙에서 은거하고 있던 영웅들이 일제히 일어나니, 이것은 바로 삼국지라는 거대한 이야기의 시작이었다.

 

189년 - 후한 영제의 사망. 십상시의 난.
영제가 사망하고 장양을 필두로 한 십상시들에 의해, 조정에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청류파 인사들과 대장군 하진이 숙청되거나 살해된다.

 

190년 - 반동탁 연합군 결성. 한 왕조, 동탁에 의해 낙양에서 장안으로 천도.
황건적의 난 당시 서량에서 세력을 규합하고 있었던 동탁이 십상시의 난으로 인해 혼란한 황도에 쳐들어와 권력을 잡고, 형주자사 정원을 살해한 다음 스스로 상국의 자리에 앉는다. 이때 동탁이 끌고온 양주군사들의 횡포와 동탁의 농권으로 인하여 백성들이 또다시 도탄에 빠지자 원소를 필두로 한 18로 군벌들이 대항하여 반동탁 연합을 결성하여 대항하지만, 종국은 제후들끼리의 내분으로 어이없이 와해되고만다.

 

192년 - 연환지계. 여포, 동탁을 살해.
동탁의 시녀와 은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여포는 이를 동탁에게 들킬까봐 매우 두려워하였고, 동탁은 동탁대로 기분이 좋지 않으면 여포에게 화극을 던지는 등의 행패를 부렸다. 이에 서서히 벌어지고 있었던 두사람의 사이를 사도 왕윤이 이간질함으로서 여포는 동탁을 황궁에서 주살하고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게 된다.

 

200년 - 관도 대전.
조조와 원소. 양웅이 맞붙게 된 삼국지 최초의 대규모 전투. 조조는 병력과 사기 양면에서 열세였으나 곽가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원소를 창정에서 대파한다. 원소는 도주하던 도중 죽어버리고 후계자 선정에서 범한 실책으로 인하여 원씨 일족은 분열, 결국 하북도 조조의 수중에 들어가게 된다.

 

207년 - 삼고초려.
조조에게 ?기고 ?겨 신야성에 머무르고 있던 유비는, 선복이란 이름을 쓰고 있던 서서에게 와룡 제갈량의 이야기를 듣고 그의 초막을 세번 찾아간다. 완전히 수세에 몰려 있었던 유비는 특유의 인내심으로 제갈량의 마음을 움직여, 마침내 제갈량도 그를 따르게 된다. 유비의 휘하에 들어온 직후 제갈량은 조인과 하후돈의 군사를 대파하여 내심 자신을 시기하던 관우와 장비도 굴복시킨다.

 

208년 - 적벽 대전.
드디어 천하통일의 기치를 걸고 85만 병력으로 남하를 개시하는 조조군. 이에 대항할 수단이 없던 유비는 휘하장수와 백성들을 데리고 피신하지만 당양 장판벌에서 궤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는다. 하지만 장비와 조운의 활약에 힘입어 간신히 몸을 피하던 도중 유기에게 군사를 빌려온 관우에게 구함을 받고, 제갈량은 유비를 위해 오나라로 가서 동맹을 체결한다. 적벽에서 벌어진 이 싸움은 오나라 총사령관 주유의 지략과 제갈량이 부른 남동풍으로 동맹군의 대승으로 끝나고, 조조는 도망치던 도중 화용도에서 관우와 조우하나, 조조는 지난날 관우가 유비에게 돌아갈때 일을 상기시켜 목숨을 건진다. 관우는 이 일로 인하여 제갈량에게 완전히 무릎을 꿇게 된다.

 

219년 - 유비의 한중왕 등극. 관우의 사망.
서촉 41주를 취한 뒤, 조조와의 한중쟁탈전에서 위장 하후연을 쓰러뜨리는 등 선전한 유비는 마침내 신하 120여명의 주창으로 한중왕에 등극하고, 이에 발끈한 조조는 대군을 일으키려 하나 사마의의 만류로 오와 동맹을 맺는다. 주유와 노숙의 뒤를 이은 명장 여몽은 형주를 수비하던 관우와 일진일퇴를 벌이면서 기습을 성공시키고, 마침내 맥성에서 관우 부자를 붙잡아 참수시킨다. 분노한 유비는 관우의 복수전을 벌이려 하지만 제갈량과 조운의 만류로 단념하고 정세를 살피는데 주력한다.

 

220년 - 조조의 사망. 후한의 멸망. 위나라의 성립.
치세의 능신, 난세의 간웅이라 불렸던 조조도 다가오는 죽음을 피하지는 못하였다. 장무 3년 4월. 천하를 종횡하며 제후들의 중심에 있었던 조조는 끝내 사망하고, 장남인 조비가 유지를 이어 조조의 뒤를 잇는다. 조비는 선양의 형식으로 후한의 마지막 황제 헌제에게서 제위를 찬탈하고 위황제에 즉위, 고조 유방으로부터 400년간 이어져 내려오던 한나라는 이렇게 막을 내리게 된다.

 

221년 - 촉한 성립.
쓰러져가는 한왕조를 재건하고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한다. 오랫동안 유비를 지배해 왔던 이념의 주체인 한나라가 멸망하자, 유비는 관우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과 더불어 격심한 허탈감에 빠진다. 실의에 빠져있던 유비에게 제갈량은 '이제 한왕조의 정통을 이을자는 오직 주공만이 계실뿐'이라 주장하고, 마침내 유비는 마음을 굳혀 촉한의 초대황제에 등극한다. 누상촌의 돗자리 장수가 제위에 오름으로서, 하늘에 두개의 태양은 없다는 법칙이 깨어진 것이다.

 

222년 - 이릉 전투.
승상 제갈량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75만의 대병력을 일으켜 관우의 복수전을 개시하는 유비. 그러나 합류하기로 되어있던 장비가 부하에게 암살당하고, 범인인 장달과 범강이 장비의 목을 가지고 오나라로 도주하자 유비의 분노는 극에 달한다. 관우와 장비의 아들인 관흥과 장포의 활약에 힘입어 초반 선전하는 유비군이었지만, 여몽의 사후 뒤를 이은 백면서생 육손의 화계에 의해 이릉에서 궤멸적인 타격을 입고, 유비는 백제성으로 패주한다.

 

223년 - 유비의 사망. 제갈량의 남만 정벌.
관우와 장비를 잃고, 그 복수전에서도 어이없게 패배한 유비. 아무것도 없이 맨주먹으로 시작하여 황제의 자리에까지 오른 그에게도 죽음은 찾아왔다. 유비는 백제성을 영안궁이라 이름짓고 그곳에 머물다가 제갈량에게 뒷일을 부탁하고 사망한다. 안팎으로 무거운 짐을 맡게 된 제갈량은 계속해서 난을 일으키고 있던 맹획을 정벌하기 위해 출진한다. 수많은 고초에도 불구하고 계속 전진하며, 계책과 귀모를 다한 공명은 마침내 맹획을 일곱번 붙잡아 일곱번 놓아줌으로서 그의 진정한 항복을 받아내고 남만에서 귀환한다.

 

227년 - 출사표. 제갈량의 북벌 시작.
유비의 사후 촉을 지탱하고 있던 공명에게 한가지 소식이 날아드니, 그것은 사마의가 자청해서 양주로 떠났다는 것이었다. 사마의의 군비증강계획이 완전히 이루어진다면 촉의 천하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제갈량은 마량의 동생 마속을 시켜서 사마의를 실각시키고, 촉의 백년대계를 위하여 승상부에 틀어박혀 하나의 상소문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신 량 아뢰나이다..."

이것이 바로, 저 유명한 '출사표' 였다.

 

229년 - 손권이 황제가 됨. 오나라 성립.
북벌에 나선 제갈량이 이끄는 촉군과 조진이 이끄는 위군은 일진일퇴를 한 끝에 촉의 승리로 끝나지만, 국가적 존망의 위기를 감지한 위황제 조예는 사마의를 다시 불러들인다. 제갈량과 사마의가 정면으로 대결하게 되자 양쪽이 혼란한 틈을 타서 손권도 대황제라 칭하고 연호를 황룡이라 하며 오를 세움으로서 완전한 삼국정립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234년 - 오장원 전투. 제갈량의 사망.
유비, 관우, 장비, 조조, 손견도 역사의 무대에서 죽거나 쓰러지고 말았다. 그리고 남은 한 사람... 234년, 제갈량은 오장원으로 진출한다. 하지만 오랜 세월을 전장에서 보낸 그의 건강은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고, 마지막 수단으로 하늘에 기도하여 수명을 늘리는 술법을 행하지만 이마저도 실패로 돌아간다. 가을바람 부는 오장원에서 촉을 지탱하던 거대한 대들보는 마침내 쓰러지고, 사마의는 최후의 순간에 승리를 거두고 위로 돌아간다.

 

263년 - 촉나라 멸망.
근 50여년간에 걸쳐서 삼국으로 대립하고 있던 중국대륙에 서서히 변화가 일기 시작한다. 위에서는 사마의가 쿠데타를 일으켜 병권을 모두 장악함으로서 사마씨 일족의 시대가 도래했고 촉 역시 제갈량의 사후 강유 혼자서 겨우 지탱해 나가던 상태였다. 촉이 내부에서부터 무너져 내리고 있다는 것을 안 사마의의 아들 사마사와 사마소는 등애와 종회 두 장군을 보내어 촉을 토벌케하고, 일반적인 행군로를 벗어나 산악지대로 행군한 등애는 마침내 승리한다. 이로서 촉은 2대 황제 유선을 끝으로 허무하게 무너지고, 한왕조 부흥의 꿈도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265년 - 위나라 멸망. 진나라(서진)의 성립.
역사는 되풀이된다. 일찌기 조비가 헌제에게 선양의 형식으로 제위를 물려받은 것처럼, 위의 마지막 황제 조방도 사마의의 손자인 사마염에게 제위를 선양하고 물러나니, 이것이 바로 신왕조 진나라의 탄생이었다.

 

280년 - 오나라 멸망. 삼국 통일.

 

 

 

 

 

 

삼국지三國志

San guo zhi

 

 

 

 

<삼국지>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 나라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끊임없는 사랑을 받으며 읽히고 있는 최고의 베스트셀러 가운데 하나다. 특히 요즈음은 어느 나라의 독자랄 것도 없이 <삼국지>에 대한 이해나 접근 방법이 매우 다양해졌다. "소설 삼국지"는 물론이고 "만화 삼국지", 컴퓨터 게임, 비디오 같은 다양한 매체를 통해 <삼국지>를 만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삼국지>의 이야기는 너무나 자연스레 우리 생활의 일부가 되어 버려서 "도원결의"나 "삼고초려" 같은 사자성어에 얽힌 이야기는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삼국지>를 좋아하는 이들은 사이버 공간을 통해 토론을 나누는 들의 새롭고 다양한 방법으로 끊임없이 <삼국지>를 분석하고 이해하려 노력하고 있다.



이런 열의를 생각한다면 <삼국지>에 대한 전문학자들의 학술 연구는 상대적으로 활발하지 못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그 까닭을 든다면, <삼국지>가 역사소설이라고는 하지만 뻔한 역사 속의 인물과 사건을 가지고 만들어낸 이야기이기에 중국 고전소설의 또 다른 대작이라 할 수 있는 <홍루몽>, <수호전> 들에 견주어 볼 때 "문학성"에서 상대적으로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아 왔기 때문이다.

 

 




 

 

<삼국지>는 중국 민중이 만든 작품

그러면 문학성이 덜하다고 평가받는 <삼국지>가 세계 독자들에게 그토록 흥미를 주고 그토록 널리 읽히는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 분명 소설 자체에만 그 까닭이 있는 것은 아닌 듯하다. 글쓴이는 외적 요인이 어디 있는가를 밝혀 그 답의 한 면이나마 찾아보고, 또 평소에 궁금했던, 영웅들이 활약했던 그 무대는 실제로 존재하는지, 존재한다면 그 모습은 과연 어떨지 하는 궁금증에 대한 확인도 할 겸해서 실제 "삼국지 문화유산"을 찾아 답사를 해 보았다. 그 결과 중국의 문화 현장은 말할 것도 없고 중국 전역에서 이른바 "삼국지 문화"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는 소설 <삼국지>와 이에 대한 이해와 연구만이 있는 데에 견주어 이 소설의 무대인 중국에서는 오래 전부터 <삼국지>가 현실 생활의 한 부분으로 넓게 자리 잡고 있었다. 

 

 

사실 소설 <삼국지>는 하루아침에 한 사람의 손에 만들어진 그런 소설이 아니다. 진나라 때에 진수가 지은 역사서 <삼국지>를 바탕으로 오랜 기간 동안 민간에서 다양한 형태로 변화되어 오다가 명나라 때에 와서야 정리되어 <삼국연의>라는 본격적인 소설의 틀이 만들어졌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소설 <삼국연의>에만 국한되지 않는 이른바 삼국지 문화라는 것이 형성되었다.

 

이 삼국지 문화는 크게 "역사서 삼국지", "소설 삼국지", 그리고 "민간 전설"이라는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역사서 삼국지"에 나타나는 인물과 사건이 기본 골격이고, 이것이 소설이 되는 과정에서 정리한 이가 덧붙인 허구적인 요소가 보다 다양한 읽을 거리를 주고 있으며, 서민들의 바람과 정서가 담긴 민간 전설 또한 삼국지 문화의 밑바탕에 깔려 있다. 이런 삼국지 문화에 대한 포괄적이고도 전반적인 이해는 소설 <삼국지>를 바르게 이해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다.

 

 

 

 

 

 

그래서 <삼국지>의 본무대인 중국에서 보편적으로 형성되어 있음에도 우리가 아직 잘 모르고 있는 오늘날 중국의 삼국지 문화란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 직접 답사를 통해 눈으로 확인한 부분을 소개해 보겠다.

 

 

신이 되어 버린 관우

중국사람들은 명절이 되면 관우를 신으로 모시며 관우 사당을 참배하고, 제갈량의 거위털 부채를 호신용으로 사용하며, 곳곳에 "삼의묘"를 세워 유비, 관우, 장비 세 형제의 의리를 기리고 있다. 그러다 보니 지역마다 자기네가 삼국지 문화의 중심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하다. 지역들은 저마다 관우 문화의 중심지라고 주장하며, 분명 한 곳이어야 할 제갈량의 집 또한 두 곳이나 있고, 적벽대전이 벌어졌던 전쟁터는 여러 지역에서 각기 자기네가 실제 적벽대전이 일어났던 곳이라고 주장하며 논쟁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중국의 삼국지 문화의 핵심은 뭐니뭐니 해도 관우에게 집중되어 있다. 중국에는 두 사람의 성인이 있다. 한사람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공자이고, 다른 한 사람이 바로 관우이다. 중국사람들은 공자를 "문성"이라 하고, 관우를 "무성"이라 부른다. 

 

 


중국 하남성 낙양시의 남쪽에 관우의 무덤인 "관림"이 있다. 옛날 중국에서는 제왕의 묘를 능이라 하고 왕후의 묘는 총, 일반 백성의 묘는 분, 성인의 묘를 임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이곳의 관우 무덤을 관림이라 하고, 산동성에 있는 공자의 무덤을 "공림"이라 부르는 것이다. 

 

 

그렇다면 관우는 어떻게 해서 성인이 되었을까? 관우는 평생 주군인 유비를 모시며 충성을 다하였다. 임금의 입장에서는 모든 신하가 관우만큼 충성을 다해 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송나라 이후 중국의 봉건 통치자들은 정치적인 속셈에서 관우를 충의의 화신으로 내세우며 끊임없이 그이를 미화하였다. 특히 명나라 때에 이르러서는 본격적으로 관우의 신격화가 시작되었고 청나라에 와서 그 절정에 이르렀다. 처음에는 관우를 장무후와 충혜공으로 봉하였다가 무안왕, 숭녕진군 들의 이름으로 추존하였고, 나중에는 나라를 지키는 충의대제로 모시게 된다. 그러기에 중국의 민간인들은 관우를 후에서 왕으로 부르고, 또 대제로 모시다가, 결국에는 신으로 추앙하게 되어서, 중국 방방곡곡에 큰 사당을 짓고 그이를 기리며 제사를 지내게 된 것이다.

 

곧 청나라 때에 이르게 되면 호국지신으로 모시고 아예 공자를 문신으로, 관우를 무신으로까지 추앙하게 된다. 이러한 영향으로 오늘날에도 새해를 맞으면 많은 중국사람들이 관우 사당에 가서 돈을 많이 벌게 해 달라며 관우 신에게 빌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중국에 공자를 모신 사당은 그리 많지 않으나 관우를 모신 사당은 곳곳에 대단히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중국에 남아 있는 관우 사당은 중앙정부에서 관리하는 것만도 6개가 있고, 베이징 지역에 110여 개 정도가 있는 들 하여 거개의 현이나 시골에까지 다 있다고 한다. 

 

그리고 분명 관우는 한 사람이었는데, 중국에는 두 개의 관우 무덤이 있다. 하나는 하남성 낙양시에 있는 관림이고, 다른 하나는 호북성 당양시의 관릉이다. 관림에는 관우의 머리가 묻혀 있고, 관릉에는 관우의 머리 없는 시신이 묻혀 있다. 삼국시대 조조와 손권에 의해 관우의 시신이 나뉘어 무덤이 두 개가 된 것이다. 

관우의 머리가 묻힌 낙양의 관림에는 그 궁궐 같은 짜임새나 웅장한 규모와 함께 중국사람들의 숱한 정성과 마음이 가득 담겨 있어서 여느 제왕의 무덤 못지않다. 이를 통해 중국사람들의 관우에 대한 존경심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그리고 시신이 묻힌 당양의 관릉 또한 사당과 더불어 체계적인 관리를 해 지금까지 잘 보존되어 있다. 이곳에는 본래 흙으로 된 무덤만 있었는데, 관우를 기리는 기념 건축물이 들어선 것은 송나라 때에 와서라고 한다. 아마 이때부터 봉건 통치자들이 민간에서 관우가 차지하는 위치를 인식하고 이를 활용하기 시작한 것 같다. 다시 말해 관우를 신격화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특히 원나라를 거쳐 명나라 때에 이르러 관우가 민간의 신으로 완전히 자리잡자 본격적으로 관청들이 이 관릉을 꾸미도록 했던 것이다. 관릉의 주요 건축물들 거개가 명나라 때에 지어졌던 것도 이 때문이다. 

 

 

3개의 관우 무덤

이토록 관우의 위치가 절대적이다 보니 중국의 여러 지역에서 서로 자기네가 관우 문화의 중심이라고 주장하며 논쟁을 벌이고 있다. 그 대표적인 지역이 호북성의 형주와 산서성의 운성이다. 이들은 각기 "관공문화" 학회를 열며 거듭해서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그러면 이들 지역은 왜 유독 이토록 관우와의 인연을 고집하는 것일까?  

 

먼저 형주를 살펴보자.

<삼국지>를 읽어 보면 결국 제갈량의 아이디어로 유비는 동오로부터 형주를 빌리는 데 성공한다. 이때부터 사실 형주는 촉의 관할이 되었으며, 유비는 이 형주를 근거로 하여 천하를 3등분하게 된다. 유비가 사천 지역을 얻어 완전히 천하를 3등분한 뒤 이 형주는 유비의 오른팔인 관우에게 맡겨진다. 관우는 형주를 10년 동안 지키는데 이때 형주 성이 지어진다. 이 형주 지역에는 <삼국지>와 관련된 크고 작은 유적들이 많이 남아 있었는데, 오랜 세월을 지나는 동안 역사서나 민간인들의 가슴속에 그 이름과 전설만을 남긴 채 사라져 갔다. 그러나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는 많은 유적들이 삼국시대 영웅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관제묘 행군과 석마조, 춘추각, 괄골료독처 들이 있다. 이것들 모두 관우와 관계 있는 유적들이니 형주와 관우는 보통 인연이 아니며, 이런 까닭에 이 지역 사람들의 관우 사랑은 남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편 운성은 관우가 태어난 곳이다.

<삼국지>에서 관우가 유비에게 자신의 고향을 하동 해량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 하동이 바로 지금의 산서성 운성을 말한다. 산서성 운성시 해주진 상평촌이 관우의 고향이다. 이곳은 운성시에서 동남쪽으로 1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다. 사실 관우는 189년에 고향에서 살인을 하는 불미스런 일로 고향을 떠나게 된다. 그 뒤 219년 쉰 여덟 살로 당양에서 생을 마칠 때까지 끝내 고향 땅을 다시 밟지 못하였다. 

 

실제로 중국에는 관림과 관릉이라는 두 개의 관우 무덤이 있다. 그러나 이곳 관우의 고향 운성사람들은 관우의 무덤이 세 개라고 주장한다. 곧, 몸은 당양에 묻히고, 머리는 하남성 낙양에 묻혔으나, 관우의 영혼은 이곳 산서성 운성의 고향으로 돌아와 묻혔다고 생각한다.

 

이 운성사람들은 온 중국사람들이 떠받들어 모시는 관우 신이 바로 이 고장 출신이라는 것에 대해 그야말로 특별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 운성에는 두 개의 의미 있는 관우 사당이 일찍부터 지어졌었다. 하나는 그이의 고향 마을에 있는 상평관제묘이고, 다른 하나는 해주관제묘이다. 상평관제묘는 관우뿐만 아니라 그 집안 조상까지 모셔놓은 관우 집안 사당이다. 해주관제묘는 중국의 수많은 관우 사당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관제묘이다. 관우의 고향 마을에 그 집안 사당이 있고, 가장 규모가 큰 사당이 있음은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한 일인 듯하다. 그러니 어찌 관우 사랑이 특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특히 이곳 사람들은 세계 곳곳에 있는 관우 사당과 관우 문화를 한국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 이상하게 생각한다.

 

 

적벽은 어디인가

이러한 삼국지 문화의 중심에 대한 자부심은 비단 관우 한 사람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유적지에 대한 논쟁이 한때 격렬했었는데, 삼국시대 최대의 싸움터였던 적벽 싸움터에 대한 논쟁이 바로 그것이다. 그 유명한 적벽대전의 전쟁터가 수나라와 당나라로 내려오면서, 호북성 장강 일대에는 저마다 그 곳이 적벽대전의 장소라고 주장해서 한때는 포기, 무창, 한천, 한양과 황주 해서 적벽이 다섯 곳이나 되기도 했었다. 지금은 고증을 통해 포기 지역으로 정리가 된 상태이다.

 

그러나 지금 중국에는 아직도 적벽이 두 곳이 있다. 그 하나는 <삼국지> 최대의 격전장이었던 곳, 오늘날 호북성 적벽시의 적벽을 가리키는 것이고, 다른 하나의 적벽은 송나라 최대의 문호였던 소동파가 유배시절 객과 더불어 배를 띄워 놀며 명문장 <적벽부>를 지었던 오늘날 호북성 황강현에 있는 적벽을 말한다. 그래서 오늘날 중국사람들은 소동파가 노닐며 지은 <적벽부>의 장소를 "문적벽"이라 부르고, <삼국지>의 전쟁터였던 적벽시의 적벽을 "무적벽"이라고 부른다. 흥미로운 것은 실제 삼국의 전쟁터였던 무적벽보다 소동파가 노닐었던 문적벽을 중국사람들이 더 많이 알고 또 찾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삼국시대 문화유적에 대한 이해와 정리 부족에서 오는 것이기도 하거니와 대대로 내려오는 적벽의 위치에 대한 혼란이 한 몫을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무적벽 지역은 국민당 시절에는 행정구역으로 가어현 소속이었는데, 공산당이 통치하면서부터 포기현 관할로 바뀌었다. 지금 두 개의 적벽이 있는 데다 이와 같은 행정구역의 변화로 적벽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 많은 혼란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중국 정부에서는 얼마 전 행정구역 정리 과정에서 계속된 혼란을 없애기 위해 아예 적벽시로 그 이름을 바꾸어 버렸다. 

 

그러나 이러한 논쟁과 혼란의 근본적인 까닭은 중국 사람들의 삼국지 문화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와룡이 누워 있는 곳

따지고 보면 온 중국 땅이 삼국시대 문화 유적이 있는 곳이다. 이러한 삼국지 문화의 중심에 대한 자부심은 제갈량에 대한 사랑으로 또 하나의 논쟁거리를 만들었다. 곧 제갈량이 유비를 만나기 전 살았다는 융중이 바로 그것이다. 유비가 삼고초려했다는 제갈량의 집이 분명 한 곳이어야 함에도 중국에는 두 곳이 있는 것이다. 

 

호북성 양번시의 남쪽에 제갈량이 살았다고 하는 융중이 있다. 이곳 융중은 제갈량의 제2의 고향으로서 제갈량이 젊은 시절 초야에 묻혀 지낸 곳이다. 이곳은 산과 내가 잘 어우러진, 중국에서는 보기 드문 경관을 갖춘 곳이다. 중국 대륙에는 우리나라와는 달리 산세 좋고 아담한 산이 무척 드물다. 그래서 온 산하가 산과 냇물로 아름답게 어우러져 있는 우리 땅을 삼천리 금수강산이라 표현한 것은 절대적인 평가도 분명 그러하지만 아마도 중국 땅에 견주었을 때의 상대적인 표현이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 중국의 옛말에 산수가 아름다운 곳에서 인재가 나온다는 말이 있는데, 융중과 제갈량을 두고 한 말이 아닐지? 한 시대 세상을 움직였던 제갈량의 뛰어난 지략과 큰 꿈은 분명 이 훌륭한 융중의 자연경관 속에서 길러진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지금 중국에는 또 하나의 융중이 있다고 한다. 하남성 남양시의 와룡강이 제갈량이 살았던 융중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어디가 제갈량이 살았던 곳이란 말인가? 제갈량은 그이가 유선에게 올린 출사표에서 "제가 베옷 입고 남양 땅에서 밭 갈고 있을 적에······"라고 썼는데, 이때의 남양 땅은 당시의 남양군을 가리키는 말이다. 삼국 시대의 남양군은 그 관할 지역이 지금의 호북성 북부를 포함하는 매우 넓은 땅이었다. 그때 융중은 남양군 등현의 한 산촌이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옛 문헌 속의 남양은 고대의 남양군 지역을 지칭하는 것이지 오늘날 하남성 남양시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 덧붙여 중국에서는 제갈량에 대한 중국사람들의 사랑과 자부심 또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제갈량하면 바로 생각나는 것이 "지모", "지략" 같은 단어이다. 그래서 그이는 중국사람들의 머릿속에 이미 지혜의 화신으로 아로새겨 있다. 이런 추상적인 것 외에 또 한 가지 제갈량과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거위털 부채이다. 제갈량을 모신 중국 무후사 어디를 가도 제갈량이 거위털 부채를 들고 있는 초상이나 조각상을 만날 수 있다. 제갈량의 손에 항상 들려 있는 거위털 부채는 이미 제갈량의 이미지를 대신해 지혜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어떤 곤란한 일을 만나더라도 제갈량은 이 부채를 살살 흔들면서 그 해답을 찾아 지혜롭게 문제를 해결하였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제갈량의 그 신기한 부채는 그이의 아내 황월영이 특별히 신선 세계의 거위털로 만든 것이라 한다. 제갈량의 아내 황월영은 당대의 명망있던 선비 황승언의 딸인데 용모가 빼어나지는 않았지만 현명하고 박학다식했다고 한다. 그이는 제갈량과 혼인하기에 앞서 일찍이 오매산의 선녀에게 도를 배우고 무예를 익혔다고 한다. 그이가 선녀와 작별하고 산을 내려올 때 선녀가 그이에게 선계의 거위털을 주며 재삼 당부하며 말하길, "조만간 너는 이것을 사용해 부채를 만들어 남편에게 줄 것이다. 그것은 너의 낭군이 대업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될 것이야" 하고 말했다 한다. 그 뒤 황월영은 제갈량과 혼인을 하였고 그이는 그 깃털로 부채를 만들어 제갈량에게 주었다. 이렇게 해서 부채는 제갈량에게서 뗄 수 없는 보물이 되었고 어딜 가든지 항상 지니고 다녔다고 한다. 중국 사람들은 지금도 이 거위털 부채를 행운을 주는 물건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거위털로 부채를 만들어 자신의 호신물로 삼는 전통을 가진 지방도 있다.

어쨌든 중국사람들이 제갈량을 사모하고 기리는 마음은 한 시대 한 지역에 국한된 것이 아니며, 시대와 지역을 초월한 중국의 전반적 문화 현상임을 우리는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다.

 

 

민간인들의 <삼국지> 숭배

이처럼 오늘날 중국에 남아 있는 삼국지 문화는 우리에게 낯설게 느껴지고 특이한 느낌까지 들게 한다. 그럼 이런 성격과 특징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삼국지>를 보는 관점이 촉한 중심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점, 지역별로 삼국지 문화와 인물에 대한 자부심이 엄청난 수준이며 그에 대한 이해와 인식 또한 똑같지 않다는 점이 무척 흥미로웠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큰 특징은 먼저 관우가 어떤 위대한 영웅들보다 높은 신으로서 추앙받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중국 전역에 깔려 있는 관우 사당을 통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실제로 개발된 대도시에서는 조금 덜하지만 거개의 농촌 지역과 중소도시에서는 실로 전 국민의 민간 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이런 삼국지 문화는 어떤 이념으로부터도 자유롭다는 것이다. 곧 삼국지 문화 속에 도교, 불교, 유교 문화가 함께 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남성 허창시에 장공사라고 하는 장비를 모셔놓은 사당이 있다. 그러나 이 사당은 장비만을 모셔놓은 것이 아니고 장비와 함께 부처도 모시면서 포청천까지 모셔놓은 사당이라는 점이 특이하다. 장공사 안에는 장비를 모신 전각과 함께 부처를 모신 법당과 포청천을 모셔놓은 전각이 나란히 너무나 자연스레 어우러져 있다. 그래서 이 장공사를 포공묘라고 부르기도 한다. 물론 이 사당은 본디 촉나라 장수 장비를 모신 곳이었다. 그러다 어느 날 법당이 들어서고 또 청나라 광서 17년부터는 당시 민간의 존경을 한 몸에 받던 포청천도 이곳에 함께 모셨다. 그러니까 삼국지 문화에 위진시대 이후의 불교 문화, 송나라 이후의 포청천에 대한 민간인들의 존경심이 모두 이 한 곳에 어우러진 것이다.

 

이는 중국과 같이 오랜 역사를 지니고 문화적인 포용력이 강한 나라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처음 이곳을 둘러보면서 너무나 무질서하고 무원칙한 것들의 모음이라고밖에 생각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촉나라 장수 장비를 위나라 사람들이 모셔놓은 것도 그렇고, 전혀 다른 종교 이념을 지닌 사당이 같은 곳에 나란히 있는 것도 그렇다.

 

그러나 자세히 이곳을 살펴보고 또 참배하는 사람들의 태도를 보면, 중국사람들의 조화 융합에 대한 인식과 태도가 대단히 포용력 있고 거시적이어서, 상대적으로 작은 것에 집착해 온 우리의 상식과는 많은 차이가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중국사람들은 자신의 출신지역, 추앙하는 인물, 종교 들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그러나 여기서 지역감정이나 배타성, 결벽성은 찾아보기 힘들다.

 

장공사에서 느낄 수 있는 이런 현상들은 중국의 삼국지 문화 속에 전통 도가, 불가 사상이 자연스레 함께 녹아 있음을 보여 준다. 이와 함께 중국 민간인들은 교육받은 계층들과 달리 특정 이념이나 종교, 지역으로부터 자유로웠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지금도 장비와 부처와 포청천이 중국사람들의 마음속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이 장공사는 중국 민간 속에 보편화된 삼국지 문화의 성격이 어떤 이념으로부터도 자유로움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홍위병도 어쩌지 못한 관우 사당 

또 하나 들 수 있는 것이 이 삼국지 문화가 어떤 면에서 일반적인 경제 개발 논리보다 먼저라는 점이다. 요즈음 온 중국이 개발로 분주하다. 특히 연해지역 경제개발이 성공함에 따라 중국은 크게 자신감을 얻었고 그 결과 개발논리는 탄력을 받아 지금은 서부대개발이란 더 큰 목표를 세워놓고 희망찬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그러나 그 개발은 대체로 경제적인 필요에 따라 대도시지역이나 공단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곧 경제개발 논리와 명분으로 많은 중요한 것들이 뒷전으로 밀리고 있는 안타까운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특히 문화지역의 개발은 대도시의 관광지가 아닌 곳엔 전혀 관심이 미치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실제로 중국의 전통 문화의 현장을 돌아보면 많은 가치 있는 문화 유적이 방치되고 사라져가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어 보는 이의 마음을 안타깝게 한다. 

 

그러나 특이한 것은 중국의 많은 삼국지 문화와 관련된 유적지를 돌아보면 상당수 지역이 최근 개발을 이미 마쳤거나 아니면 한창 개발 중임을 볼 수 있다. 이들 공사가 마무리되면 많은 유적지가 분명 또 다른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심지어 경제 개발보다 먼저 삼국지 문화를 가꾸는 곳도 적지 않다. 이는 중국의 신이 된 관우의 영향 때문인데, 관우의 위치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끔 만들어 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관우는 적어도 중국 민간인들에게는 너무나도 위대한 신으로 이미 자리잡고 있다. 중국 전역에 공자를 모신 사당은 얼마 되지 않아도 관우를 모신 사당은 많다. 문화대혁명 때 공자 사당을 비롯한 많은 문화 유적이 훼손되었다. 그러나 눈여겨볼 것은 문화혁명이 끝난 뒤 문성인 공자의 사당은 그 복원이 미미한 데 견주어 무성인 관우 사당의 복원은 아주 활발했다는 점이다. 실제로 그 서슬퍼런 문화혁명 시절에도 관우 사당은 덜 훼손되었다고 한다. 아무리 사회주의화의 첨병이라 일컬으며 문화 유산을 다 때려부순 홍위병이라고 해도 그이들 마음속의 신은 함부로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어떤 이념이라도 중국 민간인들의 관우에 대한 믿음을 능가할 수는 없음을 보여준 좋은 예이다. 이를 중국 학자들은 민간에 내려오는 전통적인 문화 현상이라고 말한다. 우리나라의 어떤 역사책이나 교과서를 뒤져 봐도 이런 중국의 모습은 나오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 우리가 과연 중국을 얼마나 제대로 이해하고 알고 있는지 생각해 본다. 어쩌면 우리는 그 동안 우리의 입장에서 우리의 방식으로만 중국을 생각해 온 것은 아닌지? 따라서 정녕 중국을 제대로 알고 소설 <삼국지>를 보다 깊이 이해하려 한다면 삼국지 문화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인식에서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남 덕현/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중국 고전소설 비평과 문학이론을 전공하였고 중국사회과학원에서 연구생으로 수학하기도 했다. <중한사전>과 <한중사전>을 펴내기도 했고 얼마 전에는 중국의 <삼국지>에 얽힌 문화 유적들을 둘러본 뒤 <삼국지 문화유산 답사기>를 펴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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