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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에니 전쟁의 발단과 결과

작성자한라짱|작성시간09.10.31|조회수2,196 목록 댓글 0

1. 포에니 전쟁의 발단

(1) 카르타고
  카르타고는 본래 기원전 800년경 페니키아인의 식민지로 건설되었다. 그 후 6세기에 접어들면서 카르타고는 본국과의 관계를 끊고 점차 부강한 국가로 발전해 갔다. 카르타고의 정부는 과두정이었다. 실질적인 지배자는 원로원 내에서 평의회를 구성했던 30인의 상인 귀족들이었다. 이들은 각종 선거를 지배했으며, 정부의 다른 모든 부분을 지배했다. 원로원의 나머지 의원 270명은 특별한 경우에만 소집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정치적 결점이 있었고 인명의 희생을 요구하는 잔인한 종교를 가지고 있긴 했지만, 두 나라사이에 전쟁이 시작될 즈음에 카르타고는 그 화려함과 과학적 업적 면에서 단연 로마를 앞지르고 있었다.

 

(2) 본격적 제국주의의 시작
  기원전 265년에 이르러 로마는 이탈리아 본토를 거의 전부 정복하고 병합했다. 자국의 힘에 대한 자부심과 확신에 차 있던 로마가 제국의 새로운 무대로 진출하리란  것은 거의 확실했다. 로마는 당시에 번영을 누렸던 시칠리아를 아직 장악하지 못한 상태였고, 지중해 세계 다른 지역의 상황에 대해서도 이를 자국의 힘과 안정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이런 이유로 해서 로마는 곧 다른 강대국들과의 일련의 전쟁에 휩쓸리게 되었으며, 이 전쟁을 통해 로마 역사의 흐름은 결정적으로 변화되었다.

 

2. 포에니 전쟁의 경과

(1) 포에니전쟁
 포에니 전쟁은 지중해로 진출하려는 이탈리아와 지중해 무역을 독점하려는 카르타고와의 싸움이었다.
카르타고는 무역에 관한 한 대 해상세력이었다. 로마는 아직도 소규모의 해군을 가졌을 뿐이었고, 해상무역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갖지 않는 작은 농경국에 불과하였다. 두 국가는 적어도 세 번에 걸쳐 동맹조약을 맺었었는데, 마지막 것은 피루스가 시실리를 침범했을 때 그에 대항해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처럼 최후까지 동맹관계를 유지했던 로마와 카르타고가 10년에 채 지나지 않아 그처럼 길고 잔혹한 전쟁으로 몰입했다는 것은 역사의 변칙들 중의 하나가 아닐 수 없다.

(2) 제1차 포에니 전쟁
 이미 언급했던 분쟁의 초점이 되었던 지역은 시실리 시인 메시나로서, 이는 시실리 섬과 이탈리아 본토 사이의 매우 중요한 해협에 있는 도시였다. 이 해협은 서부 이탈리아와 시실리 해안에 둘러싸여 있는 티레니아해를 통제하고 있었다. 당시 메시나는 전에 시라쿠스에 봉사했던 캄파니아 용병인 마메르트인들의 손 아래 있었다. 이들은 얼마전에 메시나의 남자들을 학살하고 여자들을 탈취해 갔었다. 시라쿠스의 젊은 왕 히에로는 도시를 탈환해서 배신자들을 정벌하려 하였다. 이에 마메르트인들이 카르타고에 원조를 청한 것이다. 그런 다음, 이들은 또한 로마에게도 도움을 요청했다. 항상 시실리에서의 그리스 세력을 저지하고자 하는 카르타고는 곧 반응을 보였다. 얼마 뒤에 로마도 또한 똑같은 반응을 보였고, 책략을 서서 재빨리 메시나를 접수하게까지 되었다. 이에 카르타고는 담당사령관을 본국으로 소환해서 그 불찰에 대한 책임을 물어 사형에 처하고 전쟁을 선포하게 된 것이다.
 

히에로 왕은 처음에 카르타고와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그 뒤에 포위 당하게 되자 그는 지난 50여년 동안 동맹관계를 지켜 온 로마와 연합했다. 한편 로마는 바다의 통제권 없이 시실리에서 육전을 승리로 이끄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곧 알아차리게 되었다. 이에 로마인들은 특수한 널빤지 다리를 갖춘, 그 메부리코와 같은 모습 때문에 까마귀라고 불려지는 배를 건조했는데, 이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그들의 첫 함대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것은 더 많은 보병을 배에 실을 수 있는 비정통적 전략을 개발할 수 있게 하였다. 로마 함대들은 카르타고 군대를 패배시켰으나, 배는 거의 한 대도 남김없이 잃어버리고 말았다. 전쟁을 통하여 로마인들에게 가장 어려운 문제는 배를 건조하는 것과 유능한 해군 제독을 얻는 일이었는데, 로마의 장군들은 실상 육전에만 익숙해 있었다. 카르타고의 어려움은, 전적으로 성격이 다른것이었으니, 어떻게 해야 충분한 용병을 고용하며 또한 이들을 이끌 수 있는 유능한 장군을 발견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B.C250년 로마군대는 시라쿠스의 그리스 참주 아가토클레스의 예를 따라 집정관 마르쿠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의 지휘아래 북아프리카를 침입함으로써, 이 값비싼 정쟁의 새 국면을 열었다. 카르티고가 그들의 신민인 아프리카 원주민들에게 별다른 호응을 받지 못하고 있었던 상황이 로마의 이같은 침입을 가능하게 했다고도 볼 수 있다.  로마의 레굴루스는 지방의 지지를 얻었고, 카르타고군을 격파했다. 카르타고는 이제 평화교섭을 원했으나 레굴루스는 오직 무조건 항복만을 요구하였다. 그래서 카르타고 인들은 용병모집을 위해 징병관을 내보냈고, 이들을 이끌기 위해 스파르타 장군 크산티푸스를 고용하기에 이르렀다. 다음 전투에서 레굴루스는 완패했고, 그 자신도 대부분의 그의 군대와 함께 포로가 되었다. 이 사건은 시민군이 용병보다 낫다는 일반적인 생각이 꼭 옳지 않다는 것을 지적해 주고 있다.
 

레굴루스의 가문은 후에 어떻게 장군이 로마에 되돌려보내졌으며, 그가 로마에서 평화조건을 추천했으나 원로원이 어떻게 거절했는지에 관한 이야기를 창안해 냈을지도 모른다. 이것에는 그가 카르타고에 돌아갈 것을 카르타고인들과 약속했다는 말과 그래서 돌아갈 경우 그를 포로로 했던 사람들이 혹독하게 그를 처우하리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가 카르타고에 돌아가야만 했고, 혹심한 고문으로 그곳에서 죽었다고 전하고 있다. 애국담의 정전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이야기는 국가에 대한 헌신과 대담성을 가르치기 위해 로마의 모든세대에 되풀이되어 들려지고 있다. 
 

로마는 전함과 운송선의 일단을 동원하여 레굴루스군의 일부를 구원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사하게도, 구원선단은 폭풍으로 거의 전파되었다. 이 불운한 전쟁 하나가 거의 10만에 가까운 로마인의 목숨을 앗아갔다.
 기원전 250년까지는 로마는 적과의 교전으로, 그리고 폭풍으로 그 배에 탄 사람들과 더불어 두 개의 선단을 잃지 않으면 안되었다. 잠시의 소강상태가 있은 다음에 로마는 마지막 목숨을 건 노력을 전개했는데, 개인적 헌납자들에게서 긁어 모았던 돈을 가지고 구조를 개선한 함대를 건조했다. 이 함대는 카르타고 함대를 시실리 가까이에 있는 드레파나 해상에서 무찔렀고, 서부 시실리의 요새화된 도시를 하나하나 함락시켰다. 기진맥진 끌어오던 긴 투쟁을 한 순간에 끝낸 것이었다.(기원전 242년) 이 승리로 로마는 시실리를 얻었고, 10년에 걸쳐 분할하여, 3200 달란트의 전쟁배상금을 받았다.
 
카르타고 인들은 뒤이어 그들 자신의 용병들과 혹심한 전쟁에 휩쓸려 들어갔다. 그들은 거액의 보너스를 약속했었으나, 전쟁에 패했기 때문에 지불을 거부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용병전쟁은 사르디니아에까지도 확대되었다. 로마인들은 카르타고가 군대를 이탈리아 해안에 가까운 그 섬에 보내는 것을 보자, 그것을 평화조약을 깨뜨리는 것으로 보고 최후 통첩을 보냈다. 카르타고는 요구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으므로 로마측이 제시한 조건들을 받아들였다. 로마는 이제 사르디니아와 코르시카를 장악하게 되었고, 배상금으로 1200달란트를 다시 부가 시켰다. 기원전 237년에 로마의 이같은 행동은 당연히 카르타고인들을 분노케 했고, 누구보다도 하밀카르 바르카를 분개시켰다. 그는 유능한 장군으로서 카르타고 함대가 보급을 계속할 동안 시실리에서 로마군을 곤경에 빠뜨렸던 인물이다. 하밀카르는 그의 아들이 아홉 살이 되었을 때, 카르타고의 주신 타니트의 제단에 데리고 가서 그 아들에게 그가 항상 로마의 적이 될 것임을 맹세시켰다. 그 아들의 이름이 바로 한니발이다.

 

(3) 제2차 포에니 전쟁
 제 2차 포에니 전쟁은 카르타고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되었다. 카르타고에서 용병전쟁이 일단 평정되자, 하밀카르 바르카는 정력적으로 카르타고의 번영과 힘의 회복을 위해 모든 노력을 경주했다. 그는 군대를 스페인에 이끌고 가 그곳에 대한 카르타고의 이전의 통치권을 재확인했고, 그동부 해안을 따라 북으로 확장해 갔다. 그는 그곳에서 은광을 개발하여 채굴했고 또 새로운 것들을 찾아냈다. 기원전 231년에 그가 죽자 그의 사위 하스드루발이 그를 계승 했으나 10년 후에 살해되고 한니발이 총사령관이 되었다. 당시는 아마 바르키드족들이 일종의 개인제국으로 스페인을 지배하고 있었을 것이고, 그들의 성공이 카르타고에 대한 지원을 가져다 주었다.
 

이 기간 동안에 로마에는 다른 일에 여념이 없었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카르타고의 에스파냐 정복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이같은 확장에 대한 로마 정부의 항의에 하스드루발은 오직 로마 배상금으로 지불할 충분한 자금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라는 매우 합리적인 대답만을 했다. 그러나 기원전 225년경 로마는 카르타고의 확장을 저지해 달라는 그리스 동맹국 맛실리아(지금의 마르세이유)의 재촉을 받았다. 조약에 따른다면 카르타고는 에브로 강 남쪽에 머물러 있다는 데 동의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미해결된 복잡한 사항이 있었다. 로마가 이 지역에 또 다른 관여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로마는 에브로 강 남쪽 사군툼시와 동맹을 맺고 있었다. 카르타고인의 입장에서 볼 때, 만일 이같은 관여가 에브로협정 이전에 이루어 졌다면 이는 조약에 따라 취소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또한 만일 이 동맹이 조약후에 이루어 졌다면 그것은 명백히 조약 위배인 것이었다. 
 

사정이 그러했기 때문에 한니발은 그가 기원전 219년 사군툼을 공격할 때 그의 행동이 로마와의 제 2의 전쟁을 야기할 것이라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시기는 아주 호기였던 것 같다. 로마인들은 방금 호 계곡에서 온 골의 침입을 격퇴시키고 그 지역을 식민지화 하려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계곡에 있는 모든 골인들은 사실 로마의적들이었고, 더구나 로마는 일리리움 문제에 말려 들어가고 있었다. 아드리아 해에서의 해적활동은 로마동맹국의 불평을 낳았고, 외교적 노력이 약탈자들을 진압하는 데 실패하자 로마는 이 일을 위해 일단의 군대를 보냈다. 이러한 때에 한니발은 예리한 칼날같이 훈련받은 대군을 갖고 있어서 로마인들에 대한 복수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카르타고로 부터의 전면적인 지지를 얻기 위해서, 그는 로마인들이 문제를 일으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군툼은 바로 그들이 필요로 하는 도구 였던 것이다. 몇 달의 사군툼 포위 동안에 로마인들은 기껏해야 그들이 일리리움과 포 계곡에서 거두었던 정도의 성과를 올릴 뿐이었다. 그리하여 로마 원로원은 카르타고에 특사를 보냈다. 그러나 양쪽이 합의할 수 있는 것은 전쟁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로마인들은 북아프리카를 다시 침입할 계획을 세웠으나 한니발의 그 유명한 행군이 그들의 계획을 변경시키게 했다. 기원전 218년 여름, 일부 정예기병과 전상들을 포함한 30000또는 40000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한니발은 피레테 산맥을 넘어 남프랑스를 통과했다. 초가을에, 그는 알프스의 초겨울 눈 때문에 혹심한 고생을 했고, 더구나 알프스 부족들의 저항에 직면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알프스 부족들이 친로마적은 아니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영토를 지나가는 어떠한 군대와도 자동적으로 싸웠던 것이다. 이때 이탈리아에서 파견된 로마군은 한니발군을 놓치고 말았는데, 왜냐하면 로마인들은 카르타고인의 목표가 남프랑스의 동맹국인 맛실리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들 대부분의 로마군은 스페인으로 진군해 들어갔다. 거기에서 제 2의 작전극을 벌였으므로, 이같은 진군은 궁극적인 승리를 위해서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기까지는 오랜 기간이 걸려야 했다.

 11월에 한니발은 트레비아 강의 전투에서 큰 규모의 로마군을 쳐부쉈는데, 그는 매복작전을 써서 피곤한 로마군을 전격적으로 덮친 것이었다. 그런 다음 그는 골인들을 모집하기 위해 그것에서 겨울을 났다. 기원전 217년 한니발은 예상하지 않았던 길로 중앙이탈리아를 향하여 진군했다. 그러나 그는 습지에서 진균에 감염되어 한 눈을 잃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트라시메네 호수 근처의 제2의 대전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다시 로마인들은 복병의 기습을 받았고 호수에 빠져 익사했다. 이 불행 뒤에, 로마인들은 독재관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를 택했다. 그는 지연작전을 통해 한니발에게 곤혹을 주었다. 이 對한니발 작전은 그에게 Cunctator라는 별명과 함께 로마를 구한 명성을 주었다. 
 

한니발이 가장 바랐던 것은 로마의 동맹구조를 깨뜨리는 것이었다. 로마의 독재관 파비우스는 이를 막으려고 하였다. 전쟁 동안 로마의 옛 동맹국 중, 오직 카푸아 하나만을 제외하고, 모두가 로마와 확고한 동맹관계를 유지했다는 것은 참으로 의미 깊은 일이었다. 이들 동맹국들은 전쟁 중 필요한 인력의 거의 절반을 공급함으로써 로마의 궁극적인 승리를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운명의 해인 기원전216년에 정상의 통치자였던 당시 로마의 두 집정관은 로마가 다시 한 번 한니발과 전쟁을 하도록 강경하게 주장하였다. 한니발이 택한 아폴리카의 칸네 대지에서, 규모면에서 카르타고 군보다 우세한 로마군은 전술적인 함정에 빠져 들어갔다. 한니발의 우세한 기병들에 의해 맷돌 속에 쥐어짜진 것과 같았던 로마군은 싸워 보지도 못하고 대부분 살육당했다. 로마인들은 그달의 손실을 8만으로 잡고 있다. 실제 손실은 이보자 적었을 것이나, 이는 로마인들이 정상국으로의 등정과정에서 당했던 가장 쓰라린 패배였던 것이다.
 

 스키피오는 단 한기지 큰 잘못을 저질렀는데, 즉 한니발의 동생 하스드루발에게 그의 군데를 데리로 이베리아 반도를 피해가도록 허용한 점이다. 다음해 한니발의 앞선 행로를 따라, 하스드루발이 이탈리아에 들어왔다. 이같은 사실을 전해 받은 로마의 방첩부대는 한니발이 하스드루바르이 움직임을 정확히 알지 못하도록 교란하였다. 한니발과 대치하고 있었던 로마군은 과감하게; 그들의 기지를 떠나 6일 만에 240마일을 행진하여 움브리아에 있는 메타우루스 강 근처에서 하스드루발과 대치하고 있는 다른 군세에 가담하였다. 이렇게 합류된 군대는 카르타고군을 전멸시켰다.(기원전 207년) 한니발은 하스드루발의 머리가 그의 사령부 벽 너머로 던져졌을 때에야 이 재난을 알아차렸다. 그의 또 다른 동생 마고가 바다를 통하여 한니발을 도우려 했던 또 하나의 시도도 실파로 돌아갔다.
 

스키피오는 기원전 206년에 로마에 돌아와서 기원전 205년의 해를 위한 집정관에 피선되었고, 침략군의 지휘권을 받고 그해 늦게 시실리를 거쳐 북아프리카로 건너갔다. 기원전 203년에 카르타고는 자체의 방어를 위해 한니발을 불러들였다. 15년 이상이나 그는 이탈리아에 머물러 있었으나, 그동안 대패라고 할 만한 것은 없었다. 그러나 기원전 202년 한니발은 자마 레기아의 결정적인 전투에서 스키피오에게 패했다. 스키리오는 누미디아 기병들의 도움을 받았고, 더구나 한니발의 전상들은 혼란속에서 로마군에게보다는 카르타고인에게 더 많이 피해를 주었다. 결국 이같은 승리는 스키피오의 유연한 전략에 의존한 것이었다. 이로써 스키피오는 더 장대한 이름인 별령 "아프리키누스"로 불리어 졌다. 이제 카르타고는 선택의 길이 없어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4) 제3차 포에니 전쟁
 제 3차 포에니 전쟁은 로마에 의한 일방적인 카르타고의 공격이었다. 이 시기에 이르러 카르타고는 제2차 포에니 전쟁의 결과로 각성한 카르타고인들은 합심단결하여 서둘러 재건하였다. 정복자의 불쾌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할 정도로 과거의 번영을 어느 정도 회복했다. 이제 카르타고의 완전한 파괴와 영토 몰수 이외에는 원로원의 실력자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기원전 149년에 원로원은 카르타고측에 카르타고시를 포기하고 해안선으로부터 내륙지방으로 적어도 10마일 떨어진 곳으로 이주하라는 내용의 최후 통첩을 보냈다. 상업국가에게 이것은 사실상 사형선고에 해당하는 것이었으므로 카르타고는 당연히 이 요구를 거부했다. 그 결과 기원전 149년에서 146년까지 또다시 전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3. 포에니 전쟁의 결과
 카르타고와의 전쟁은 로마에 지대한 결과를 가져왔다. 이 전쟁으로 로마는 동부지중해 국가들과 대립하게 되었고, 또한 세계제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제2차 포에니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마케도니아의 필립포스5세는 카르타고와 동맹을 체결하였으며, 시리아 왕과는 이집트를 양분하기로 결정했다. 로마는 필립포스를 벌하고 그의 계획을 저지하기 위해 마케도니아를 공격했다. 그 결과 기원전 2세기 까지 로마는 그리스와 소아시아 반도를 정복하고 이집트를 보호국으로 만들었으며 거의 모든 헬레니즘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다.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 전쟁은 정말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 같다. 로마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인데, 포에니 전쟁은 그 중 로마의 발전과 변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전쟁 중 하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전쟁에서 승리국이 있으면 그 상대적으로 패배국이 있다. 역사는 가진 자 중심으로 지배자 중심으로 쓰여진 다는 말이 있는데, 로마의 경우도 예외는 아닌 듯 하다. 로마의 포에니 전쟁 승리로 인해 지중해 세계는 로마의 대 귀족, 부농층을 중심으로 재편되었고, 속주민들의 삶, 그리고 하층민들의 삶은 역시 고달픈 것 같다.
 전쟁 승리로 인해 로마의 지배층은 많은 토지를 소유 할 수 있었고, 또한 많은 노예를 거느릴 수 있었다. 이는 곧 로마의 해체에 있어 주요 요인이 되는데 역시 승리와 상승이란 측면 뒤에는 항상 몰락과 하강이라는 반대 급부가 존재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하나의 예라 생각한다. 그러나 로마가 전쟁에서 큰 승리 후 사회 내재적 모순을 잘 해결 했더라면, 그러한 반대급부를 이겨내고 콜롯세움같은 훌륭한 건축물같은 겉으로 보았을 때의 찬란한 문화보다는 모두가 잘 사는 사회를 만들어 내어 후대에 모범이 되지 않았을까하는 안타까움도 있다.
 

현재에도 무엇이든 발전과 상승이란 요소 뒤엔 그에 따라 희생하는 누군가가 있다고 생각한다. 포에니 전쟁을 통해 이러한 면을 잘 알 수 있었으며 지금도 우리는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지만 그 누군가는 핍박받고, 고달픈 삶을 살고 있을 것이란 사실을 잊지 말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고문헌. 탐구당 서양고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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