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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은 斷想

비잔틴(동로마)제국

작성자한라짱|작성시간09.04.01|조회수820 목록 댓글 0

 안녕하시지요? 설도 잘 쇠시고요. 그동안 밀렸던 일로 인해 함께한 여러분께 인사가 늦었습니다.

긴 여정동안 함께하면서 베풀어 주신 따뜻한 장면들을 오래오래 간직하고 있겠습니다.

우선 오늘의 터키부터 먼저 소개합니다. 시간나는대로 지역마다 역사적인 단편이나마 보고 들고 또 자료들을 참고하여 계속 올리려고 합니다. 자주 들려 주십시오. 늘 다복하시기를 생각날 때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09.1.26일 시은 드립니다.

 

 

  

 비잔틴(동로마) 제국이라는 이름은 유스티니아누스 왕조가 지중해 탈환을 위해 벌였던 게르만족 세력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610년 이후부터 오스만 투르크에 의해 팔라이올로구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가 퇴위한 1453년까지를 일컫는 중세 그리스의 동로마 문화권을 의미한다. 그러나 동로마인들은 자신들의 영역을 신의 은총과 영원한 로마의 위대한 유산을 물려받은 그리스도교 국가라는 자부심을 지니고 있어서 스스로를 계속해서 '로마인'이라 불렀다. 비잔티움은 원래 고대 그리스가 세운 식민지였다. 이 지역은 유럽과 소아시아의 경계선에 있었고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324~337 재위)가 330년에 이곳을 '새로운 로마'로 정하고 이를 콘스탄틴노플이라 명명한 후 수도를 옮겨온 뒤부터 동로마라는 새로운 영역의 중심이 되기 시작했다.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죽을 때(395) 제국을 양분하여 동로마를 큰아들 아르카디우스, 서로마를 작은 아들 호노리우스로 하여금 각각 통치하게 함으로써 동서 로마의 분리되다. 서로마 제국은 게르만 족의 대이동에 의해 멸망하지만, 동로마 제국은 천년동안 명맥을 이어, 이 반쪽짜리 로마제국은 앞의 로마 제국과 구분하기 위해 비잔틴이라는 새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산천이 수백 번도 넘게 변할 만큼의 긴 시간을 유지한 나라라면 뭔가 특별한 것이 있었다. 우선 비잔틴 제국은 아시아와 유럽을 갈라놓는 보스포루스 해협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동서 무역의 중심지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그래서 비잔틴 제국이 정치적으로 쇠퇴한 이후에도 지금의 이스탄불인 콘스탄티노플은 경제의 중심지 자리를지킬 수 있었다.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데다 로마 시대부터 건설된 성벽이 버티고 있었기에 이민족들이 쉽게 침범할 수 없었다. 게다가 비잔틴의 황제는 황제 교황주의를 바탕으로 정치의 지도자뿐아니라 교회의 수장까지 겸하고 있었으므로 막강한 힘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이러한 여건을 바탕으로 비잔틴 제국은 6세기 중엽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 전성기를 누린다. 527년에 황제의 자리에 오른 유스티니아누스는 백 년전에 멸망한 로마제국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제일 먼저 착수한 일은 비잔틴 제국 내부를 안정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국내의 안정을 위해서는 사람들에게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되는 일을 명확히 알려주는 법체계를 다지는 일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법전 편찬에 만들어진 로마법 대전은 기존의 로마법을 집대성한 것으로 그 뒤 유럽 각국의 법에 큰 영향을 주게 된다. 또 양잠법을 몰래 페르시아에서 들여와 견직 공업을 일으키는데 힘을 썼다.

 

  나라가 어느 정도 안정된 후에,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는 해외로 눈을 돌려 영토확장사업으로 비잔틴 제국은 지중해 연안, 소아시아, 아프리카의 옛 로마영역을 차지했고, 로마 제국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이탈리아 반도도 반쯤 되찾아서 로마제국의 영광을 재현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사후, 비잔틴 제국은 롬바르드 족의 침입을 시작으로 북쪽의 슬라브 족, 동쪽의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침공에 시달린다.  후대 황제들은 영토를 지키기 위해 모든 영토를 31개의 군관구로 나누고 황제가 직접 임명한 사령관에게 군사, 행정, 사법권을 주는 군관구제와 농민에게 군역에 종사하는 대가로 토지를 주는 둔전병제를 시행했으나 7세기에 강성해진 이슬람 제국의 침입으로 비잔틴 제국은 대부분의 영토를 빼앗기고 수도 콘스탄티노플이 있는 발칸 반도와 소아시아의 남부로 영토가 축소되어 9세기에 비잔틴 제국은 이슬람 제국이 분열된 틈을 타 영토를 다시 회복하고  번성하는 듯 했지만, 군관구를 장악한 지방 세력가들이 황제의 명령을 무시하고 농민의 토지를 빼앗는 바람에 강력했던 황제권을 잃어버리면서 다시 쇠퇴의 길로 접어들게 되어 겨우 명맥만 이어가던 비잔틴 제국은 베네치아 상인의 사주를 받은 제4차 십자군 원정군의 침입으로 더욱 약해져, 결국 1453년에 오스만 투르크 군에게 정복당하여 오늘의 터키가 되었다.

 

 역사학자들 중에서는 비잔틴 제국을 라틴 민족의 제국 보다는 그리스 민족의 제국으로 보는 역사학자들이 많다. 왜냐하면 주요 활동 무대가 발칸반도와 그리스 펠로폰네소스 반도였기 때문에 아직도 서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그들을 옛 고대 로마 제국의 후손으로 기억하고 있다.  아랫 글 비잔틴 제국과 오스만제국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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