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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파주 이야기

[스크랩] 고봉산에서 만날 새인물 - 성운(成雲)

작성자운정|작성시간14.07.01|조회수117 목록 댓글 0

고봉산 주변에도 고관대작들의 무덤들이 꽤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제가 안내한 무덤은 안곡습지공원에 있는 고양8현 중 한 분인 정지운(鄭之雲)과 장희빈 친정묘역이 전부였습니다.

 

다른 고관대작들을 소개하지 않은 이유는 제가 주로 선호하는 인물들이 아니였기 때문입니다.

 

제가 선호하는 인물들은

- 역사적으로 칭송을 받는 분들

  (예, 고양8현인 정지운, 기준, 홍이상 선생. 그리고 을사조약을 막으려했던 참정대신 한규설 등)

- 극적(비극적)인 삶을 살았던 분들 - 주로 역사의 패자

  (예, 장희빈 친정, 소현세자 후손들, 최영장군, 귀성군 이준, 월산대군과 그 후손들 등등)

- 애틋한 사연이 있는 분들

  (예, 심희수와 일타홍)

- 예술적 감수성이 풍부했던 분들

  (예, 석주 권필 등)

- 신분은 높지 않아도 치열하게 시대를 살다 가신 분들

  (예, 김지남, 굴씨 등등)

- 역사에서 버려진 인물들

  (궁녀, 내시, 금정굴 등)

 

등입니다.

 

그리고 선호하지는 않지만 꼭 소개하려는 분들은

- 역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과 주변인물

  (예, 능원에 묻힌 분들, 송강정철 관련 인물 등등)

- 역사적 격동기에 악인(惡人)의 역할을 크게 했던 분들

   (예, 이량, 홍봉한, 신광한 등등)

 

선호하지도, 소개하지도 않는 인물들은

-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서 무난하게 벼슬살이 하다 죽은 분들

- 순전히 내가 판단하기에 비겁했다고 생각되는 분들

  (예, 세종 때 황희 전임 영의정 이직(선유동에 무덤이 있음)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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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오랑캐로 사는 즐거움'을 얘기했듯이 제가 제 기준대로 올레길에서 인물들을 소개하는 것도 아마추어로 사는 제 나름의 즐거움입니다. (너무 주관적인 것 같아서 죄송하기는 하지만... ㅎㅎ)

 

누벨님이 고봉산둘레길에는 역사적으로 소개할 곳이 너무 부족하다고 하여 고민하다 한 명의 인물을 추가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중종 때 병조판서를 지낸 성운(成雲)입니다.

참고로 제가 이 분을 제가 소개하는 분류로 나눈다면 악인(惡人)에 해당합니다.

후손들이 들으면 기분 나쁘겠지만, 역사적 평가야말로 엄정해야 하고, 후손들도 자기 선조를 엄정하게 평가한다면 오히려 후손들이 더욱 빛날 거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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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운(成雲)은 누구인가?

 

먼저 한국역대인물종합시스템에 나와 있는 자료를 보겠습니다.

 

성운(成雲)(미상∼1528년(중종 23))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치원(致遠). 아버지는 담명(聃命)이다.

1504년(연산군 10) 생원으로서 식년문과에 병과로 합격하고, 1506년 주서(注書)가 되었으나 왕의 미움을 받아 파직되었다. 중종반정 뒤 1511년(중종 6) 장령으로 특별히 기용된 뒤 응교를 거쳐, 1514년 성균관유생을 계도할 사유(師儒) 28인 중의 하나로 선발되었다.

1518년 의정부에 의하여 재기(才器)가 있다고 추천되어 충청도관찰사의 물망에 올랐으나 집의 박수문(朴守紋)의 반대로 임명되지 못하였다.

이듬해 기묘사화 때는 병조참지로 있으면서 입직승지를 제쳐놓고 왕의 밀명을 전달하는 등 조광조(趙光祖)를 비롯한 사림파 제거에 앞장선 공으로 우승지를 거쳐 대사헌이 되었다.

1522년 예조참판이 된 뒤 병조참판과 공조판서를 차례로 역임하고, 1527년 병조판서로 군권을 장악하였으나, 심언광(沈彦光)에 의하여 붕당을 이룬다는 탄핵을 받고 경상도관찰사로 좌천되었다. 시호는 경숙(景肅)이다.

 

위 자료를 보면 기묘사화 때 어떤 역할을 했겠지요?

맞습니다.

 

기묘사화는 역사적으로 중종 14년(1519) 11월 15일에 발생한 것으로 흔히들 얘기하지만, 사실 전날 밤 2고(二鼓, 밤 9시부터 11시 사이. 二更이라고도 함)에 왕의 밀지를 받은 남곤, 심정, 홍경주 등이 신무문(왕궁의 북쪽문)을 통해 입궁하여 조광조 등에게 죄를 줄 것을 주청한데서부터 시작합니다.

 

성운도 이 날 남곤, 심정 등과 함께 입궁하였습니다.

성운의 당시 벼슬은 병조참지(兵曹參知)였습니다.

(참고로 6조에는 정3품 당상관인 참의(參義)각 각 1명씩인데, 병조에만 정3품 당상관이 2명이어서 한명은 참의(參義), 또 한명은 참지(參知)입니다.)

성운이 입궁하자마자 임금인 중종은 당시 입직(숙직) 승지들을 제쳐두고 성운을 가승지(임시승지)로 삼아 조광조 등의 죄를 주는 전교를 내립니다. 말하자면 절차상 하자가 있는 명령이었지요.

 

당시 성운은 사관의 입회 없이 임금과 독대를 할 수 없다는 입직자들의 항변을 무시하고, 심지어 희대의 간신으로 지목받는 심정조차 절차를 무시한다면 안 된다고 했음에도 그를 밀치고 들어가 임금을 만났고, 전교를 받들었다고 합니다.

 

이런 이유로 기묘록속집(己卯錄續集)에는 그를 심정, 남곤, 홍경주 등과 함께 화매(禍媒 : 화를 이끌어 내는 중매장이)로 기록됩니다.

기록을 볼까요?

 

성운(成雲)은 아무 해에 태어났으며 자는 아무개이다. 갑자년(1504)에 급제했다. 기묘사화(1519)가 일어나던 때 참지(參知)를 맡고 있었는데, 몰래 약속을 한 후 때가 되기 전에 들어가 번을 섰다. 처음에는 임시 승지(承旨)로 임금의 전교를 출납하여 승전(承傳)을 받았다. 이장곤(李長坤) 등의 전(傳)에 이것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뒤에 병조 판서로 있다가 심언광(沈彦光)에게 쫓겨나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 어느 날 대낮에 가위에 눌려 정신을 잃었는데, 매우 이상하게 생긴 형체 없는 귀신과 머리나 팔다리가 없는 사람들이 좌우에 늘어서 있었다. 놀라고 혼미하여 본성을 잃고 겁에 질려 중얼대면서 눈도 감지 못하더니 십여 일 만에 죽었다.

 

성운은 병조판서에서 경상도관찰사로 밀려났다가 불과 3개월 만에 현지에서 죽습니다.

 

고려시대부터 광무원년(1897년)까지 역대 인물에 대한 평가를 한 기년편고(紀年便攷 - 朴羲成)의 평가를 보면

 

"己卯以特旨拜大司憲時人目之以奸人"라고 간략히 나옵니다.

해석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기묘년의 일(기묘사화)로써 특별히 대사헌에 제수되었는데, 당시인들이 그를 지목하여 간인(奸人, 간사한 사람)이라고 하였다."

 

이번 주 일요일 성운의 묘를 한번 보러 갈까요?

 

이번 주 올레걷기 -> http://cafe.daum.net/gyolle/G1kl/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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