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잔
며칠 전 친구에게서 문자가 왔다. 짧은 문장이었지만 그 안에는 보고 싶은 마음과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서운함이 함께 담겨 있었다. 마침 나 역시 친구들이 그리웠던 터라 흔쾌히 약속에 응했다. 약속 장소에 도착하니 반가운 얼굴들이 먼저 와 있었다. 근 반년 만에 보는 친구들인데도 엊그제 만난 사람들처럼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친구란 참 이상한 존재다. 오랜 시간이 흘러도 그 사이의 공백을 단숨에 지워 버린다. 몸이 예전 같지 않아 술은 몇 잔밖에 마시지 못했다. 하지만 그날 나는 술보다 더 진한 것을 마시고 있었다.오리고기가 익어 가고 술잔이 한두 번 오가던 중 누군가가 말했다.
"공동수도 기억나냐?“
그 한마디에 시간은 순식간에 수십 년 전으로 되돌아갔다.
전농국민학교 시절 이야기.
답십리 골목 이야기.
밀가루공장 이야기.
경미극장 앞에 살던 친구 이야기.
겨울이면 집 앞 밭에서 배추꼬랑지를 캐 먹던 이야기.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한 친구가 기억을 꺼내면 다른 친구가 잊고 있던 장면을 덧붙였다. 나는 공동수도를 기억했는데 친구는 그 옆 연탄가게를 기억했고, 또 다른 친구는 골목 어귀 만화가게를 떠올렸다. 한 사람의 기억으로는 희미하던 풍경이 여러 사람의 기억이 겹쳐지자 마치 오래된 흑백사진이 서서히 색을 되찾듯 선명하게 살아났다.
그 순간 문득 깨달았다.친구와의 술자리는 술을 마시는 자리가 아니라 사라진 동네를 다시 찾아가는 여행이라는 것을.
우리가 어린 시절 살았던 동네는 오래전 철거되었다. 공동수도와 밭이 있던 자리, 친구들과 뛰놀던 골목들은 모두 사라졌고 지금은 그 자리에 신답초등학교가 들어서 있다. 직접 찾아간다 해도 내가 기억하는 풍경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그런데 친구들과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순간만큼은 달랐다.사라진 골목이 다시 열리고, 밀가루공장의 냄새가 되살아나고, 겨울 밭의 배추꼬랑지가 눈앞에 나타났다. 없어진 줄 알았던 동네가 친구들의 기억 속에서 다시 살아난 것이다.
그래서 친구는 참 고마운 존재다.친구는 단지 곁에 있는 사람이 아니다. 내가 지나온 시간을 함께 기억해 주는 사람이다.혼자라면 잊어버렸을 풍경을 되찾아 주고, 흐릿해진 기억에 다시 색을 입혀 준다.
어느새 시간은 훌쩍 지나 있었다. 시계를 보고 모두가 놀랄 정도였다. 하지만 누구 하나 서두르지 않았다. 마치 아직도 해가 지는 줄 모르고 뛰어놀던 국민학생들처럼 웃고 떠들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우리 세대는 넉넉한 시대를 살지 못했다. 공동수도에서 물을 길어다 쓰고, 겨울바람이 스며드는 골목을 뛰어다니며 자랐다. 가진 것은 많지 않았지만 친구들과 함께할 시간만큼은 넉넉했다.
그래서일까.
세월이 흘러 흰머리가 늘어나고 이마에 깊은 주름이 생긴 지금도 친구들을 만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성공도 실패도 아닌 그 시절의 골목과 냄새와 웃음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보고 싶은 사람은 미루지 말고 만나야 한다고.
언젠가 시간이 나면 만나겠지, 다음에 연락하면 되겠지 하며 미루다 보면 어느새 세월은 훌쩍 지나가 버린다. 지금처럼 친구들과 만나 추억을 나누고 웃을 수 있는 시간은 생각보다 길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친구를 만나는 일은 단순한 약속이 아니다.
살아온 시간을 다시 확인하는 일이고,
잊어버린 나 자신을 다시 만나는 일이다.
그 날 나는 술기운보다 추억에 더 취해 있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가만히 중얼거렸다.
별 하나 나 하나.
별 둘 친구 둘.
우리는 오리고기를 먹으며 현재를 살고 있었지만, 대화 속에서는 이미 사라져 신답초등학교가 들어선 그 동네 골목을 다시 뛰어다니고 있었다.세월은 우리 머리에 흰 눈을 내려놓았지만, 친구들이 모인 자리에서는 아직도 해가 지는 줄 모르고 놀던 아이들이었다.
술은 몇 잔 못 마셨지만,
추억은 배가 부르도록 마시고 왔다. 2026.6.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