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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뚫어 보면 몸뚱이째 들어갈 것이다.

작성자현우당 법오|작성시간17.07.01|조회수54 목록 댓글 0

선가귀감. 열일곱번째 게송


此事는 如蚊子가 上鐵牛하야 更不問如何若何하고

차사    여문자    상철우      갱불문여하약하

下嘴不得處에 棄命一하면 和身透入이니라.

하취부득처    기명일찬       화신투입



이 일은 마치 모기가 무쇠로 이루어진 소에게 덤벼드는 것과 같아서, 

함부로 주둥이를 댈 수 없는 곳에 목숨을 떼어놓고 

한 번 뚫어 보면 몸뚱이째 들어갈 것이다.


화두를 참구하는 이를 얘기하죠. 여기서 이 일이라는 것은, 화두 참구하는 것은 마치 모기가 무쇠 소에게 덤벼드는 것과 같아서, 예. 철우(鐵牛), 쇠로 만든 소다. 모기가 쇠로 만든 소 등에 올라타고 있는데, 그 쇠로 만든 소를 뚫을 수가 없죠. 그 입으로, 모기의 그 가느다란 가냘픈 입으로. 그래서 함부로 주둥이를 댈 수 없는 곳에 목숨을 떼놓고 뚫어보면 몸뚱이째 들어갈 것이다.

주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앞에서 말한 뜻을 거듭 다져서 활구를 참구하는 이가 뒷걸음치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다.

옛 어른이 이르기를 참선은 조사관을 뚫어야 하고, 오묘한 깨침은 마음 길을 끊어야 한다고 했다.

이렇게 나왔어요. 앞서 그 화두의 십종 병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십종 병이라는 것은 열 가지 종류의 화두를 들면서 주의할 점이죠. 근데 그 십종 병 대부분들이 사실은 뭔가 이것을 알음알이로 풀어서는 안 된다. 사량분별을 쉰 자리에서 이 화두를 참구해야지, 화두를 참구하는 것을 사량분별로 참구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이런 말씀을 했죠.

그래서 이것이야말로 마치 모기가 무쇠 소를 뚫는 것처럼. 어떤 입을 댈래야 댈 수 없는 지경. 이걸 뜻합니다. 입으로써, 말로써, 사량으로써, 분별로써 이 화두를 해결 할라고 들며는 그것은 어려운 일이죠. 왜냐? 이 우리 세 가지로 이루어졌다고 말씀을 드렸죠.

물질세계, 몸. 또 마음의 세계, 분별심, 또 본마음의 세계. 이렇게 세 가지로 이루어져 있는데, 참선, 이 화두를 든다는 것은 바로 본마음의 세계로 진입하는 겁니다.

본마음의 세계를 분별심을 가지고 볼려고 하며는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죠.

다시 말해서 마치 파도가 바다를 보려고 하는 것과 똑같은 이치다. 분별심이 쉴 때 본마음이 그대로 드러나게 되는 것인데, 분별심으로 본마음을 볼려고 하는 것은 마치 무엇과 같으냐? 계속 물결

을 일으키면서 이 바다의 본모습이 어땠을까 하고 궁리하는 것과 똑같다는 겁니다.

파도가 쉬어야 본래 바다가 나타나는 것인데, 계속 사량분별로써 본래 바다를 보고자하는 것은 파도를 계속 일으키면서  물결이 쉴만하면 또 한바탕 분탕질을 해서 일으키고, 이런 식으로. 한바탕 바람 불어서 일어나고,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물결을 만들어 내는 것과 다름이 아닙니다. 

마음이 쉬면 본마음이요, 본마음이 움직이면 마음이다.”이런 말이 있죠. 사실 마음과 본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둘이 아닙니다. 본체에 있어서는 둘이 아닌데, 다만 마음이 쉬면 본마음자리고, 본마음이 움직이면, 파동이 일어났을 때 거기서 마음이라고 우리가 일컫는 것이죠.

그런데 이 마음, 다시 말해서 파도, 물결을 가지고, 이것이 본마음이다. 이렇게 얘기할 수는 없는 것이죠. 본마음은 이 물결이 쉰 자리, 사량분별이 끊어진 바로 심로절(心路絶)자리다. 

참선은 모름지기 조사관을 투과해야 하고, 묘한 깨달음은, 심로, 마음 길이 끊어져야만 한다.

이 마음 길이 끊어져야 오묘한 깨침을 얻을 수 있다. 마음 길이 끊어진다는 게 바로 뭡니까?

이 파도가 쉰다는 거죠. 그래서 화두를 들 때, 특히 주의할 점이 어떤 사량분별심으로 화두를 들거나, 또는 그것을 뭐 논문 쓰듯이 밝혀낼라고 들거나, 또는 깨달음을 기대하면서, 기다리면서 들거나, 이런 것들이 모두 앞서 화두를 드는데 있어서의 열가지 병통으로 나온 이야기죠.

고봉화상, 선요를 지은 고봉화상도 자기 스승에게 화두를 받아서 공부를 하는데, 그것을 아침마다 그 스승의 방에 들어가서 점검을 받았어요.“도대체 이 송장 끌고 다니는 놈이 누구냐? ”이 화두를 받았죠. 그래 가지고 가서 점검할라고 절을 딱 드릴 때, “송장 끌고 다니는 놈이 누구냐?”뭔가 입을 땔라고만 하며는 바로 몽둥이가 날라 와서 한방 치는 거예요. 매일 아침마다 한대씩 맞고 더 이상 말도 못하고 나오고, 나오고 이랬던 겁니다.

우리가 이 몸뚱이가 주인공인 거 같지만 사실은 이 몸뚱이는 말하자면 차에 불과한 것이고, 운전수는 따로 있다는 거죠. 우리가 시내나 도로에 나가보면 수많은 차들이 오락가락하죠. 승용차도 있고, 화물차도 있고, 승합차도 있고, 여러 가지 종류의 크고 작은 각종 색깔의 차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차들이 움직이는 것은 그 안에 운전수가 들어가서 그것을 운전을 하기 때문에 그리고 또 연료를 넣고, 또 연료를 연소시키면서 드라이브하는 드라이버가 있기 때문에 차들이 왔다갔다 움직이는 거죠.

그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몸뚱이라는 것도 사실은 차에 비유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바로 그 놈이 있다고 하는 거죠. 마치 자동차를 끌고 다니는 운전수가

있는 것처럼.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운전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고봉스님의 스승이 물어본 얘기죠.“송장 끌고 다니는 놈이 누구냐?”사실은 이 몸뚱이는 드라이버가 빠져 나가며는 그대로 송장이 되어 버리는 겁니다. 드라이버가 안에 들어있을 때 몸뚱이고, 드라이버가 없는 몸뚱이는 송장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송장 끌고 다니는 놈이 누구냐?”이렇게 물어 본 거죠. 그래 가지고 무언가 좀 대답을 할라고만 하며는 그대로 방망이를 내리치니까.‘도대체 이게, 야~ 도대체 이게 누군가?’‘송장 끌고 다니는 놈이 누군가?’이렇게 얘기할라 그래도 한 방망이요, 저렇게 얘기할라 그래도 한 방망이요, 또 그렇다고 대답 안하고 가만히 있어도 한 방망이여.‘야~ 도대체 이거 송장 끌고 다니는 놈이 누군가?’

이렇게 뭔가 어떤 사량분별, 또는 알음알이, 이런 분별심을 가지고 이 답을 댈라 그러며는 그것은 모두 다 어긋난 소식이다.

그래서 화두는 반드시 활구를 들어야 된다. 이렇게 앞에도 나온 거예요. 활구라는 것은 다름 아닌 생생하게 살아있는 말, 산 말이죠. 예. 도인이 내려주신 화두, 이것이 바로 활구입니다. 그래서 활구를 참구하고 그 활구를 갖다가 어떤 사량분별로써 그거를 해결할라고 할 것이 아니라, 그저 화두 들 땐 화두 들 뿐! 그러고 어떤 깨달음을 기대하는, 기다리는 그런 마음도 가져서는 안 된다. 이것은 서장에서도 누누이 나오는 말입니다.

간화선의 종장이라고 하는 대혜스님이 쓴 편지글이 바로 서장이죠. 

거기도 보며는 그런 표현이 누누이 나와요. 스스로를 못 깨친 중생이다. 이렇게 잡아 매어놓고 아, 인제 화두 공부를 통해서 내가 앞으로 깨친 부처가 되어야지. 화두 공부를 하며는 깨친 부처가 될 수 있겠지. 이런 마음을 먹어서는 안 된다. 왜냐?

스스로를 못 깨친 중생이라고 규정을 해 놓고 있다며는 불보살님과 어떤 달마조사가 오더라도 나를 풀어줄 수가 없다는 겁니다. 

왜냐? 자승자박이기 때문에. 그래서 본래 부처다. 이런 확신을 가지고, 그런 대 신심을 가지고, 대 신심이 뭡니까? 우리가 본래 부처다. 나도 비록 지금 탐진치에 찌들린 거 같애도 그러나 본래 부처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그 다음에 대 분심을 일으켜야죠.

본래 부처인데 내가 왜 주인 노릇을 못하고 종노릇을 하고 있을까? 재물의 종이 되고, 신의 종이 되고, 상황의 종이 되어서 because of, 때문에, 탓만하고 있을까? 안 되겠다. 내가 본래 부처인 주인 자리를 찾아야겠다. 하고 분발심을 일으키는 겁니다. 본래 부처라는 대 신심과 본래 부처자리로 통달하리라는 분발심을 일으켜서 화두에 대해서 큰~ 의심을 낼 때, 거기서 큰~ 깨달음이 다가 온다. 라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이 입을 뗄래야 뗄 수 없는 그런 지경, 이런 지경, 다시 말해서 사량분별심을 모두 놓아버린 그런 자리에서 활구를 참구해야 조사관을 뚫고 마음의 길이 끊어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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