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가귀감. 스물여덟 번째 게송
미심수도(迷心修道)하면 단조무명(但助無明)이라.
마음을 모르고 도를 닦는다는 것은 무명만을 도와 줄 뿐이다.
주해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철저히 깨치지 못했다면 어찌 참되게 닦을 수가 있겠는가. 깨달음과 닦음은 마치 기름과 불이 서로 따르고, 눈과 발이 서로 돕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가 깨침과 닦음 이 관계에 대해서 자칫하면 미혹하기 쉬운데, 깨달음과 수행의 관계는 기름과 불. 기름이 있으면은 거기 불이 계속 켜지게 되고, 또 눈과 발이 서로 돕는다.
눈은 볼 뿐이지만, 또 발은 옮길 뿐이죠. 눈으로 보고 발로써 옮겨 간다. 정상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눈만 가지고서 정상에 도달할 수도 없고, 또 발만 있다고 정상에 도달할 수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올바른 안목, 깨달음에 대한 올바른 안목, 마음에 대한 올바른 안목이 바로 눈이고, 꾸준한 수행 이것이 바로 발이라고 하는 거죠.
“깨달음은 디지털식으로 단박에, 수행은 아날로그식으로 꾸준히 해야 된다.”
미혹한 마음으로 수도한다는 것은 곧 무엇이냐?
수행에는 두 가지 수행이 있습니다.
문안의 수행과 문밖의 수행.
참선 이 문중에서 말하는 수행은 문안의 수행을 얘기하는 거예요. 문안의 수행은 무슨 소리냐?
돈오문 안의 수행이다. 이겁니다. 단박 깨달음의 문, 안에 들어와서 수행하는 것과,단박 깨달음의 문, 안에 들어오지 못하고 밖에서 수행하는 두 가지 종류의 수행이 있습니다.
그럼 문안의 수행과 문밖의 수행에 무슨 차이가 있느냐?
문밖의 수행은 이 몸뚱이가 또 이 마음이 어떤 고정된 실체가 있다고 생각하고 수행하는 것. 그것이 바로 문밖의 수행입니다.
문안의 수행은 이 몸뚱이가 그리고 이 마음이 고정된 실체가 없음을 확연히 알고 수행하는 것. 그것이 바로 문안의 수행이죠.
그러니까 성품은 공하다. 우리 몸뚱이나 우리 마음이나 다 이 본래 성품은 공한 것이다.
이것을 투철하게 알고 수행하는 것이 문안의 수행이죠. 그렇지 않고 이 몸뚱이나 이 마음이, 다시 말해서 고정된 ‘나’가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수행하는 것, 이것이 바로 문밖의 수행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조스님께서도 말씀을 하시죠.
오조 홍인대사가 신수와 대화 했을 때, “이 몸뚱이는 깨달음의 거울이고, 마음은 수행의 다 방편이니까, 열심히 부지런히 닦아서 때가 끼이지 않게 해야 된다.”이런 말을 했을때, “너는 아직 문안에 들어오지 못했다.”이렇게 얘기하신 거예요.
몸뚱이를 닦고 마음을 닦되, 몸뚱이가 사실은 실체가 없고 마음도 여전히 실체가 없음을 알고 닦는 것. 이것은 문안에 들어온 수행이고, 그것이 바로 육조 혜능스님의 참선법 입니다
그래서 참선법과 다른 수행법과 차이가 바로 여기서 확연히 나타나는 것이죠.
그래서 참선법은 이 몸뚱이니 마음이니 하는 것, 모두 공한 것이다. 본래 우리 면목자리, 본마음자리에는 때가 끼일래야 끼일 수가 없다. 다만 때가 끼인다고 이렇게 착각하고 있을 뿐이다.
몸뚱이가 있고 마음이 있다고 착각하고 있을 뿐이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닦아야 진정한 닦음이 된다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선가에서는 돈오 이후에 닦는 것을 진정한 닦음이라고 하고 아직 그런 그 성품이 공한 것을 단박에 깨치지 못하고 닦는 것을 그것은 아직 진정한 닦음이 아니다. 이렇게 얘기하는 거죠.
그래서 자기의 성품이 공함은 단박에 깨쳐서 안다. 이것이 바로 깨달음은 디지털식으로 단박에 얻는 거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몸과 마음은 현상적으로 존재하고 있죠. 그러기 때문에 역시 닦아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몸과 마음이 고정된 실체가 없음을 알고 사실은 닦을 것이 없음을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닦아야 하는, 그런 것이 바로 진정한 닦음이고 그것이 문안의 수행이다.
그런 의미로써 이렇게 “마음을 모르고 도를 닦는다는 것은 무명만을 도와 줄 뿐이다.” 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