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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의 알맹이는 범부의 생각을 떨어지게 할 뿐

작성자현우당 법오|작성시간17.07.13|조회수25 목록 댓글 0

선가귀감. 스물아홉 번째 게송


수행지요(修行之要)는 단진범정(但盡凡情)이요 별무성해(別無聖解)니라.


수행의 알맹이는 범부의 생각을 떨어지게 할 뿐 성인의 알음알이가 따로 있을 수 없다.


이런 내용이 되겠습니다.

우리가 병이 없으면 건강한 사람이지,  다시 또 무슨 뭐 건강한 사람의 어떤 다른 실체가 있는 게 아니라는 거죠. 감기가 나으면 평범한 사람이 되는 것이지, 감기가 낫고 나서 무슨 뭐 또 뭐를 가져와야 되는 게 아니죠. 그게 왜 그러냐? 금강경에도 보면 그런 말이 있어요.

“여래란, 제 상을 여의었기 때문에 여래다.”

모든 상을 여읜 것. 이게 아상이죠. 

그래서 우리가 이 수행을 한다는 것이 탐진치, 삼독을 녹이는 것 뿐 이지, 탐진치, 삼독을 녹이고 나서 무언가를 다시 찾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굉장한 인간에 대한 절대긍정 사상이죠.

본래 우리 인간이 완벽하다는 거. 다만 그게 인제 어떤 탐욕이나 성냄, 어리석음으로 인해서, 말하자면 삼독의 병이 들은 겁니다.

그래서 이 삼독의 병을 없애기 위해서 약을 쓰는 것처럼 수행을 하는 것이다.

수행의 요지, 알맹이, 핵심은 무엇이냐 하면 다만 범부의 정을 다하는 것 뿐 이요. 별도로 성인의 알음알이, 성인의 이해라는 게 따로 없다, 이게 아주 굉장히 중요한 대목이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는 것도 이름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일 뿐이지 거기에 무슨 뭐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수행의 요지는 탐욕을 다스리고, 성냄을 다스리고, 또 어리석음을 다스리는 데 있는 것이죠. 어떤 사람이 수행을 많이 해서 “아, 내가 수행해서 해서 도를 깨쳤다.”고 하는 사람인데 그 사람이 아직도 탐욕이나 성냄이나 어리석음이 남아있다면 그것은 진정한 깨달음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죠.

왜냐? 수행이라는 거 자체가 자기의 탐욕 에너지, 성냄 에너지, 어리석음 에너지를 다스려서 잘 선용하고, 궁극적으로는 그것이 사라지는 것인데, 사라지게 하는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것을 잘 선용할 수 있다면 다시 말해서 본래는 없는 거지만, 본래 없음을 무아법을 통달하고 다시 또 묘유의 도리를 실행하는 거,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가르침이다.

어떤 분이, 그런 질문을 한 분이 있었어요.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금강경을 읽으면 안 됩니까?”뭐 이런 질문을 하더라구요.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냐?” 하니까.

뭐 “사업을 하는 사람 중에 금강경이나 반야심경을 읽으면은, 금강경이나 반야심경은 공 도리를 설하기 때문에 텅 비어진다.”“ 공장이 다 비어진다.”  또는 뭐 “재물이 없어진다.”

이래 가지고, 간혹 말씀하신 분들이 있어서, 그런 말을 어디서 들었기 때문에 질문을 한 겁니다. 

근데 그것이야말로 공 도리를 잘못 이해를 한 것이죠.

공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여기서처럼 범부의 정이 다한 것. 범부의 정이 다한 것입니다.

탐진치 삼독이 쉰 것. 그것이 공이죠. 그러나 탐진치 삼독이 쉬었다 그래서 다시 말해서 무아법에 통달하고 무심해 졌다 그래서 그것이 그대로 완벽한 공 도리냐? 그게 아니고 진공은 묘유라고 하는 것이죠. 참다운 공은 묘하게 존재하는 것이다.

사람의 단계, 세 가지 단계가 있습니다.

착유, 집착으로 존재하는 것이 있고.

공, 텅 빈 것이 있고.

묘유, 묘하게 존재하는 단계가 있어요.

여러분도 한번 스스로 가슴에 손을 얹고 ‘나는 어느 단계에 속해 있을까?’생각해 볼 필요가 있죠.

내가 이 세상을 집착으로 살아가는 사람, 그런 사람들은 바로 착유의 세계를 살아가는 겁니다. 

모든 것을 나를 위해서, 내 가족을 위해서,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하는 사람들, 명예를 위해서, 이익을 위해서, 이 분들은 다 착유의 세계를 살고 있는 것입니다. 집착으로 존재하는 것.

그러나 ‘아, 이렇게 살아보니까 아, 사실은 모든 것이 부질없는 것이었구나. 모든 것이 내가 없는 것이었구나.’ 이거를 알아서 모든 것의 실체가 공하다는 도리를 깨달아서 애착을 놓는 거, 머무르지 않는 상태에 이른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바로 인제 공에 입각해서 사는 건데, 그것은 진공이 아닙니다. 그것이 바로 가공인거죠. 임시 거짓 공이 바로 그것 입니다.

진공은 그럼 무엇이냐?

그 임시 공을 넘어서서 묘유로써 살아가는 거죠. 묘하게 존재한다. 

이것은 열심히 사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착유와. 착유나 묘유나 ‘유'는 ‘유’죠. 그래서 열심히 살아가는 것은 겉보기에는 똑같지만.

착유로 사는 사람들은 왜 열심히 사냐? 나, 내 가족, 잘 먹고 잘 살고, 명예롭고, 이익 되게 하기 위해서 열심히 산다. 이런 거고. 묘유로써 열심인 사람들은 왜 열심히 사냐?

법륜을 굴리기 위해서 열심히 산다. 이게 바로 묘유로써 존재하는 겁니다. 

밥을 먹는 것도 법륜을 굴리기 위해서 열심히 먹고,

잠도 법륜을 굴리기 위해서 푹~ 자고,

돈도 법륜을 굴리기 위해서 열심히 벌고,

일도 법륜을 굴리기 위해서 열심히 일하고,

심지어는 이 마음 공부하는 것, 수행도 내가 깨닫기 위해서 수행하는 사람, 이 사람은 착유로써 수행하는 거예요. 법륜을 굴리기 위해서 수행을 해야 그게 바로 묘유의 세계에 들어가는 첩경이 되는 것이죠. 그래서 모든 것을 법륜을 굴리기 위해서 한다는 이런 마음가짐을 가질 때 저절로 무아법에

통달하게 되는 거죠. 왜 그렇겠어요? ‘아, 본래 무아라는데, 내가 없어져야 되는데, 탐진치를 쉬어야 되는데.’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은 그 순간에 마음의 초점이 어디가 있습니까? 나에 가 있고, 탐진치에 가 있고, 거기에 가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것은 마치 그림자밟기 놀이와 같아서 자기 그림자를 자기가 밟으려고 아무리 해도 절대 안 밟힙니다.

초점 자체를 바꾸어야 돼요. 포커스가 싹 바뀌어야 됩니다. 포커스가 뭐냐?

법륜을 굴리기 위해서 내가 밥을 먹는다.

법륜을 굴리기 위해서 잠도 자고, 일도 하고, 돈도 벌고, 심지어는 싸움박질도 한다. 필요할 때는.

왜냐? 법륜을 굴릴려면 또 필요해요. 때로는. 그것이 내가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하는 거라면은 그것은 아상을 증강 시키는 것이지만, 법륜을 굴리기 위해서 하는 거라면은 그것은 무아법에 입각해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진정한 공부가 된다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다만 범부의 정을 다하면 될 뿐이지, 성인의 알음알이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부처님의 깨달음,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따로 뭐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는 것이죠. 

뭐 이렇게 생긴 거, 저렇게 생긴 거, 이렇게 있는 게 아니고, 다만 범부의 정을 다한 것. 

다시 말해서 탐진치 삼독이 쉰 자리, 그 자리가 곧 부처의 자리지, 탐진치 삼독을 쉬고 또 무슨 뭐 무슨 다른 것이 별도로 있는 것이 아니다.

병이 다하여 약을 더 이상 쓰지 않으면 이것이 바로 본래의 그 사람이다.

그렇죠. 감기라도 뭐 앓고 이러면은 약을 먹게 되죠. 그러면 약 안 먹고 감기가 떨어지면 본래 건강한 사람이지, 다시 또 뭐 거기다 무엇을 또 따로 구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것이원각경에서도 

지환즉리(知幻則離)요 리환즉각(離幻則覺)이라.

허깨비인 줄 알면 곧 여읠 것이요, 허깨비를 여의면 곧 깨달음이다.이런 말이 있어요.

우리가 앉아서 좌선을 할 때, 갖가지 알음알이, 여러 가지 현상들이 나타납니다.

그랬을 때 그 알음알이나 그 여러 가지 현상들을 ‘아, 이것이 다 허깨비이구나.’하고 이렇게 알며는 거기에 더 이상 매달리고 머무르지 않게 되죠. 그러면 떠나게 되는 거예요.

離, 리별을 한다 이거죠. 예. 허깨비와 리별을 한다. 탐욕과 리별을 한다. 예. 

성냄과 이별을 한다. 어리석음과 이별을 한다. 빨리 이별할수록 좋은 것들이 있어요. 그게 뭡니까? 허깨비, 탐욕, 성냄, 어리석음. 그렇게  이별을 하며는 곧 그 자리가 깨달음의 자리다.

범부의 정과 이별하면 그 자리가 곧 성인의 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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