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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의 마음을 버릴 것 없이 다만 제 성품을 더럽히지 말라.

작성자현우당 법오|작성시간17.07.14|조회수23 목록 댓글 0

선가귀감 서른 번째 게송


불용사중생심(不用捨衆生心)이요, 단막염오자성(但莫染汚自性)하라.

구정법(求正法)이 시사(是邪)니라



중생의 마음을 버릴 것 없이 다만 제 성품을 더럽히지 말라.

바른 법을 찾는 것이 곧 바르지 못한 일이다.


중생의 마음 중생심을 버리려고 하지 말고, 다만 자기 본래 성품을 더럽히지만 말라. 

정법을 찾는다고 하는 것, 그 자체가 사실은 사법이다. 이런 소리죠.

왜 그러냐? 그 주해에 보면, 이런 말이 있어요.

버리고 찾음이 다 더럽히는 일이다.

사자(捨者), 구자(求者)가 개시염오야(皆是染汚也)라.

무언가를 구하는 것이 있으면, 벌써 한 생각 어긋났다. 이런 말이죠,

이, 정법 내지는 이 본래 성품 자리에 있어서는, 이미 본래 성품 자리는 있는 그대로 완벽한 것이죠. 무언가를 구하는 게 있고, 무언가를 필요로 하는 게 있다면, 그것은 불완전하다는 말이 됩니다. 

완전함은 뭡니까? 더 이상 아무 것도 필요 없고, 더 이상 아무 것도 바랄 것이 없는, 그 자리가 완전한 자리죠.

어떤 사람들은 뭐 그런 말 하죠. 누가 돌아가시면,  신이 필요로 해서 데려갔다. 뭐 이런 말 하죠. 

필요로 해서 데려갔다. 그 필요로 해서 누군가를 데려가고 그랬다는 것은 불완전하다는 바로 그 증거입니다. 무언가를 필요로 한다면, 그것은 불완전하다는 거예요.

심지어는 정법을 구할 필요조차 없다고 하는 거죠.

왜냐? 정법을 뭔가 구한다는 것, 이것은 충족치 못했기 때문에..

그래서 이러한 수행을 바로 불오염수(不汚染修)라 그럽니다. 불오염수.

수행의 두 가지 종류 중의 하나죠. 하나는 오염수(汚染修)가 있고, 하나는 불오염수가 있어요.

오염수는 무엇이냐?

내 성품이 오염돼 있어. 그러니까 이것을 닦아야 돼. 하고서 닦는 것. 이것이 오염수.

불오염수는 뭐냐?

본래 성품은 오염될래야 오염될 수 없는 바로 그 자리야.  이것은 다만 지켜 나가기만 하면 돼. 이게 바로 불오염수입니다.

그래서 이 능엄경에서 말하는 헐즉보리(歇則菩提) 하고도 상통하는 말이죠.

쉬기만 하면 그대로 깨달음인 것이지, 깨달음이라는 게 뭐 따로이 있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 성품을 더럽히지만 않으면 그게 곧, 그 자리가 마음의 본마음의 자리인 것이다.

그래서 중생의 마음을 버릴 것 없이, 다만 자성을 오염시키지만 말라. 자성 자리는 사실 오염될래야 오염될 수 없는 그 자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럼 오염... 이렇게 나오느냐? 착각이죠.

사람들이 어떤 그 허깨비 같은 세계를 실로 있는 것으로,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품이란 것이 실로 더러워진 것으로 착각하는 거죠.

이 마니주가 있어요. 불교 용어로 쓰이는... 마니보주(摩尼寶珠), 보배로운 구슬인데, 그 구슬은 이렇습니다. 빨간색이 옆에 나타나면 빨갛게 변하고, 파란색이 나타나면 파랗게 변해요.

근데 그렇다고 해서 구슬 자체가 파랗게 완전히 오염된 건 아니죠. 또 빨갛게 오염된 게 아니죠. 그냥 비추어질 뿐이라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여러분들 집에 거울이 있죠. 거울 앞에 똥을 갖다 놓으면 어떻게 됩니까? 거울이 똥을 비춰주죠.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거울이 똥에 오염된 게 아니죠. 다만 비추어질 뿐인 것이에요.

우리 본마음 자리도 그런 겁니다. 자기 성품 자리도. 다만 비추어질 뿐인데, 우리가 보기에는 아유 저거 오염됐어, 저거 똥 묻었어. 이렇게 얘기하는 거예요. 그러나 일찍이 그 마니보주에는 묻을래야 묻을 수도 없고, 또는 물들래야 물들 수도 없는, 그런 자리가 바로 우리가 누구나 지니고 있는 본마음 자리라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 본마음 자리는 일찍이 오염된 바도 없고, 앞으로도 영원히 오염될 수도 없는 그 자립니다. 그러나 우리가 착각을 하고, “아이구 오염됐다, 더럽혀졌다”,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역시 또 병이 있는 곳엔 약이 필요한 겁니다.

분명히 이 사람은 병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것을 “너, 병 없어. 병 없어.” 그래봐야 소용없어요. 병 있는 사람은 내가 아픈데, 뭘. “나는 아픈데, 병들었는데, 왜 자꾸 병 없다 그래?”

“번뇌라는 게 본래 없는 거야.” 암만 해봐도 소용이 없어요. 번뇌가 진짜 있는 것처럼, “그래, 너 번뇌 있지? 내가 치료해 줄 게. 이거 먹으면 나아. 금강경 일곱 번 읽으면 나아. 뭐, 주문 외우면 없어져. 관세음보살 읽으면 없어져.” 이러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나무 밑에서 딱 술을 마시는데, 술을 마시는 바로 그 순간에 그 술잔 속에 뱀이, 실뱀이 들어 있는 걸 목격했어요. 근데 이미 넘기는 순간이었기 때문에 이걸 그냥 자기도 모르게 넘겨버린 거예요. 꿀꺽 삼켜버린 겁니다. 그러고 나서 얼마 안 있다가 아니나 다를까 뱃속에서 뱀이 왔다 갔다 하는 거예요. 야, 이거 뭐야 이거? 왼쪽으로 갔다, 오른쪽으로 갔다, 배가 아파 죽겠다 그러고 하, 병원에 갔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진짜 뱀을 삼킨 게 아니고, 그 순간에 그 나무 위에 있는 실뱀이 그 잔에 비쳤던 겁니다. 나무 밑에서 술 먹다가 뭐, 술김이니까 그게 그것처럼 보였겠지마는, 나뭇가지 위에 매달려 있던 가느다란 뱀의 모습이 그 술잔에 비쳤는데, 그것을 진짜 마신 걸로 생각을 하니까, 진짜 아픈 거예요, 배가. 뱀이 왔다 갔다 합니다. 목구멍으로 올라갔다 내려갔다, 좌로 갔다 우로 갔다...

그래서 병원을 찾아갔죠. 그랬더니 의사들이 한결같이 하는 얘기가, “뱃속에 뱀 없습니다. 아무 것도 없어요. 지금 착각하고 있는 겁니다.” 하는 거죠. 그런데 이 사람은 자기가 굳게 그걸 마셨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자기 눈으로 직접 봤기 때문에, 마셨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 저 의사들이 돌팔이야, 저놈들. 뱀이 없다고 암만 그래도 배가 아픈데, 내가. 배가 아프다니까, 진짜. 뱀이 없으면 내가 왜 배가 아프겠어?” 하고 도리어 의사들 말을 믿지 않게 됐죠.

그러다가 마침내 또 어떤 한 의사를 찾아갔더니, 그 의사는 그러는 거예요. “맞습니다. 뱃속에 뱀이 있군요. 지금 왔다 갔다 하는군요.” 드디어 내가 올바른 의사를 만났다. 아이구, 지금까지는 돌팔이들만 만나가지고 전부 내가 분명히 뱀을 삼켜서 뱀이 지금 뱃속에 왔다 갔다 해서 배가 아픈데, 자꾸 뱀이 없다는 말만 반복하고 있으니, 이거 환장할 노릇입니다. 답답해서....드디어 내가 올바른 의사를 만났구나. “아, 맞습니다. 그 뱀이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하시죠?” “그렇습니다. 대략 크기가 요만하고 요만한 굵기로 생긴 뱀인데, 술잔을 내가 넘기는 순간 내가 먹어버렸습니다.” “아, 걱정 마시고 여기 수술대에 누우시오. 제가 수술을 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수술을 하는 시늉을 다 합니다. 그리고 밖에 나가서 그와 유사한 뱀을 하나 사왔어요. 그래가지고 수술 끝나고 나서 그 환자한테, “야, 뱀이 여기서 나왔어요. 이거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어요.” 하니까 이 환자는, “아, 그럼 그렇지.” “이제 어때요? 괜찮죠?” “아, 싹 나았습니다. 안 아픕니다.” 이러는 거예요.

중생들의 번뇌도 이와 마찬가지라는 거죠. 번뇌라는 건 실체가 없어요.

실제로 없는 것이지만, 번뇌 있다고 굳게 믿으니까, 내 마음이 있다고 굳게 믿으니까, 이 아픈 겁니다. 마음도 아프고, 가슴앓이를 하고, 또 번뇌에 시달리고, 이렇게 되는데, 거기에 대해서 한결같이 그냥 “번뇌는 없다, 없다.” 이렇게 한다고 그 번뇌가 없어지는 게 아닙니다.

대부분의 중생들은, 물론 뭐 한방에, “번뇌는 본래 없는 거야.” 이 말을 듣고 한 방에 번뇌를 놓는 사람도 있기는 있겠죠. 그러나 그것은 지극히 드문 경우고, 대부분의 경우에서는 번뇌가 실재하고 있는데, 내가 지금 고통을 받고 있는데, 왜 없다고 그러냐구? 도대체. 답답한 소리만 하고 있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래, 번뇌 있지? 알어, 지금 번뇌에 시달리고 있어. 그 있는 거야.” 그런데 어떻게 다스리면 번뇌가 없어지는 거냐? “기도하면 돼. 주문 외면 돼. 경전 읽으면 돼. 참선하면 돼.” 이런 식으로 해서 방편으로 번뇌를 없애주는 겁니다.

모든 부처님의 팔만 사천 대장경이 다 중생들을 번뇌에서 벗어나서 해탈에 이르게 해주는 방편일 뿐이다. 이렇게 알아야 되는 거죠.

그 자체를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삼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들이 마치 부처님도 비유하신 것처럼, 강을 건너는 뗏목과 같은 것이다. 고통의 이 언덕에서 열반의 저 언덕으로 건너가는 뗏목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무엇이냐? 우리 중생들이 실제로 번뇌가 실재한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마음속에 고통이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실제로 그 괴로움을 당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번뇌는 본래 공(空)한 것이지만 사실은 건질 것도 없고, 닦을 것도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그것을 실재한다고 믿고 있는 중생들을 건네주기 위해서는 다양한 경전과 또는 명상, 참선, 또는 기도 이런 것들이 필요한 것이죠.

그래서 건너고 나면, 더 이상 정법이니 사법이니 또 구하거나 찾을 것도 없는 거죠.

버릴 것도 없고, 찾을 필요도 없는 그 자리, 그것이 바로 본마음 참 나의 자리고, 그 본마음은 본래 청정하고 완벽한 그 자리기 때문에 더 이상 무언가를 구할 것도 없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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