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는 길목에서
최 병 창
정체를 숨기지 않은 채 유유히 걸어 나온다
누가 방금 닦아 놓은 저 유리창을 따뜻하다 했는가
넌지시 깨어나던 남쪽 하늘이
시간의 주름처럼
아득한 언덕 위에 표지만 하나 정직하게 걸고 있다
움츠리는 햇살의 붉은 촉수가
떠나버린 사랑처럼 아프게 내려앉으며
시차가 기울어지듯 피어난 민들레꽃이 청초하다
언젠가는 멈출지도 모르는
구름들의 개화가 다가오려는지
기다림 속에서는 그저 눈물겹기만 하다
꽃은 또 피면 된다지만
바라보거나 몸을 기울이지 않으면 꽃은 아니 된다
하물며 아무렇게나
아무렇지 않게 봄을 사랑할 수는 없어
햇살의 표지판은 양지 가까이에 세워두어야 한다
예전 같지 않게 가깝던 둔덕이
점점 멀어진 것 같다며
처음 같은 의미가 정해진 답을 찾지 못해
여전히 고개를 갸우뚱해 보지만
당연한 것은 당연하게 받아들여야만 한다
정체를 숨긴다는 것은 다시는 보지 말라는 뜻,
누가 방금 닦아놓은 유리창을 따뜻하다 했는가
아직도 깨어나고 있는 남쪽하늘이
교차하는 그대의 미소처럼
엉성한 어깨 위에 안내판 하나 절반만큼 걸어놓았다.
<2023. 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