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한국화가 3)


이상범 선생 옛집과 화실(서울시 문화재)
종로구 누하동 178번지와 181번지에 연접하여 자리하고 있다.
청전 선생은 1929년(화실은 1938년 건립)부터 1972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43년을 이곳에서 줄곧 거주하며 작품활동 및 제자양성에 힘썼다.
이곳에 거주하는 동안 선생은 만추(晩秋)·귀초(歸樵)·춘강어락(春江漁樂)·
행촌춘색(杏村春色)·모추(暮秋) 등의 작품을 제작하였다.
근대 한국화를 빛낸 화가로 널리 알려진 한국화가 청전 이상범. 1897년 9월 21일 충남 공주군 정안면에서 태어났다. 이상범은 18세 되던 해인 1914년 3월 계동보통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하고 4월 서화미술회화과에 입학했다.
그림에 입문하면서부터 대가 안중식을 만난 이상범은 스승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처음 그의 작품세계는 스승 안중식을 매개로 고전적 규범 답습에 중심을 두었으며, 그 중에서도 전통회화의 중심이던 산수화가 주류를 이루었다.
1923년(26세) 그는 서화미술회 출신인 동양화 1세대들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전통회화 그룹인 「동연사」를 결성하고 동서미술의 융합을 통해 고전적 규범을 답습하던 기존 정형산수화의 개혁을 꾀하기 시작했다.
그가 추구한 개혁화풍은 주변의 자연경관을 서구식 사생 수법을 도입하여 그 외관과 정취를 필묵법으로 나타낸 것이다. 즉 현실적 소재를 시각적 사실성에 기초를 두고 서양화의 원근법과 음영법 같은 근대적 조형방법으로 그렸다.
「청전양식」독보적인 경지로 완성
한국 산수 화풍의 새로운 전형 창조
그는 서양화식 조형수법을 체득하고 그것을 신문삽화 제작에도 응용하였다. 1927년(30세) 동아일보 학예부 미술기자로 입사해 10년 가까이 근무하면서 수많은 삽화·컷·기행 스케치 등을 그렸으며, 그 가운데 연재소설 삽화만 40편 넘게 담당하였다. 이렇게 30대의 그는 작가적 명성과 대중적 인기를 누리면서 예술의 황금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4·50대 그의 인생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친일작가로 몰려 조선미술건설본부의 회원에서 제외되고, 1949(52세)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창설시 심사위원으로 선정되지 못하는 좌절을 맛보게 되었다.
그러나 1950년대 초 기존의 발전맥락에서 질적인 전환을 시도했던 「청전양식」을 독보적인 경지로 완성시키면서 근대 한국산수 화풍의 새로운 전형을 창조해 내었다.
1962년(66세) 건강이 악화되어 국전 출품도 마다하고 투병생활을 했으나 결코 붓을 놓지는 않았다. 그는 1972년 5월 14일 누하동 자택에서 미완성 2점과 청연산방을 영구히 보존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대표작:「창덕궁 경훈각 벽화」「원각사 벽화」「설로도」「고원귀려도」
수상경력: 대한민국 문화훈장 대통령상 수상(1962), 3·l문화상 본상(1963), 서울특별시 문화상(1966)
[고원무림(高遠霧林)] 1968년, 종이에 수묵담채, 77×193㎝

[산가(山家)] 1950년대, 종이에 수묵담채, 24*48㎝

[산가청류(山家淸流)] 1960년대, 종이에 수묵담채, 63*129㎝

[산가효색(山家曉色)] 1950년대, 종이에 수묵담채, 91*176㎝

[가을] 1963년 종이에 수묵담채 32*129cm

【강상어락(江上漁樂)】1960년대, 종이에 수묵담채, 16*74cm

[고성모추] 1962년 종이에 수묵담채 77*180cm

[모설] 1963년 수묵담채 68*148cm

[산가] 1960년대중엽 종이에 담채 71*151cm

[산가청운] 1960년대 종이에 수묵담채 56*132cm

【산가추섹(山家秋色)] 1960년중반 수묵담채

[산가춘색(山家春色)] 1960년대중반

[산로정취] 1960년대 종이에 수묵담채 128*45cm

[설촌] 1962년 수묵담채 29*129m

[설한] 1960년대후반 수묵담채 22*48cm

[유경] 1960년대 수묵담채 24*129cm

[청류] 1960년대 수묵담채 48*125cm

[추경산수] 1960년작 종이에 수묵 담채 59.2*128.5cm 개인소장

[산고수장(山高水長)] 1960년대, 종이에 수묵담채, 67*180㎝

[춘산유거(春山幽居)] 1960년대 수묵담채 83*84cm

【초동(初冬)】1926년 제5회 선전 입상작 종이에 수묵담채 153x185cm
청전은 동아일보사에 취직해있던 시절, 1936년 동아일보 일장기 말살사건에서 후배화가와 기자가 공모하여 일장기를 지운 사건에 대하여 책임을 지고 고초를 겪었던 일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40대 중반 이후 변절, 일제의 나팔수 역할을 하게 된다.
1941년 결성된 '조선미술가협회'에 일본화부 평의원으로 발탁된 것을 비롯, 대동아공영의 '성전(聖戰)'에 국방 헌금 마련을 위한 각종 전람회에 출품함으로써 일제에 부역하였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일제 말 신문이나 잡지에 군국주의 경향성을 담은 삽화를 그렸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매일신보』에 기고한 삽화 <나팔수>이다. 그 그림은 조선 청년들을 일제의 전쟁에 동원하기 위한 선전용 삽화로, 일장기 아래서 기상나팔을 부는 병사의 뒷모습을 담은 것이었다.
소박하고 고졸한 인품을 지녔으며, 작품에는 엄격하고 사람들에게는 꾸밈이 없어 많은 아낌을 받았던 청전. 그러나 그의 용기는 동아일보사에 근무하던 그 시절까지였었다.
이후 근대 한국화 평단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화가 중 한명으로 평생 존경과 영향력을 행사하며 생을 마감했지만 그의 친일경력은 옥에 티라고 생각하고 싶다.
그와 비교되는 변관식은, 거칠고 어딘가 미숙한 듯 하지만 힘있고 한국적인 화풍으로 청전과 비교된다. 그의 삶은 평생 안온하고 평탄했던 청전과 달리 미술협회의 파벌싸움을 지켜보다 놋그릇을 노수현의 얼굴에 던져 눈두덩이가 찢어졌다는 일화가 있을만큼 기개있고 자유로웠던 화가였다.
청전과 소정의 그림 - 청전은 순응했고 평생을 평탄히 살았으되 사후에 명예를 올곳이 남기지 못했다. 소정은 평생 그의 옹색한 화방에서 단소를 벗삼으며 가난하게 살았으나 커다란 부끄러움을 남기지 않았다.
누구라도 청전이 아니라 소정의 삶을 택할 수 있었을까? 청전도 동아일보에 근무하던 젊은 시절에는, 한때 용기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변절은 그런 용기를 묻히게
해 버렸다.
삶의 지평이 넓어질수록, 지녀야할 용기와 그릇도 커져야 한다. 인생이 끝나기 전까지, 용기는 지속되어야 한다. 그래서 인생이란 수업은 참으로 힙겹고 어려운 것인가보다.

[소정 변관식의 그림】
모추 1965 년작 종이에 수묵 담채 60 x 178 cm 개인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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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림소사] 1960년 수묵담채 128*45cm
누하동 오가리 五街里 구불구불 구불어진 골목길 막바지에 조그마한 화실 하나 장만한 지도 벌써 십여년이 되었다. 나는 이 화실의 장치에 대한 관심보다도 내가 이 화실에서 작품을 구상하고 제작하기 위해서 조용한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것에 무엇보다도 행복감을 느낀다.
참으로 나의 이 조그마한 화실은 나의 모든 창조적인 계기를 계시해 주고 정리해주면서 실현에 옮겨 주는 유일한 일터이다. 나의 모든 생활과 생명이 이 곳에서 이루어지고 이 곳에서 모색된다.
나이 육십이 가까워가니 사고방법과 화풍이 젊은 사람들과 자연히 달라진다. 그러나 나는 항상 낡은 형식에 그대로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것을 진격(進擊)하도록 모색하는 과정에 있다.
이러한 모색이 나의 화실의 최근의 분위기다. 나는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현대를 이해하고 현대를 연구하고 싶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나라의 고유한 민족성을 토대로 해야한다고 본다.
어떻게 하면 서양사람과 또는 중국이나 일본과도 다른 우리나라의 독특한 정취를 나타낼 수 있는가 그것이 중요한 것이다.
화실의 창 너머로 물건 팔러 온 여인이나 또는 시골사람들이 지나가다가 구경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반드시 그분들에게 이 그림을 보시고 어떻게 느끼십니까" 하고 그 감상을 물어본다.
이리하여 어떠한 사람이라도 우리나라의 것이라고 느껴질 수 있고 알아볼 수 있는 그러한 우리민족 고유의 정서를 나타내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민족 정서가 어떻게 하면 현대라는 이 시대에서 창조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내가 지금 화실에서 모색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이다.
나는 이 화실에서 이와 같이 하나의 새로운 것을 우리의 고유한 전통 밑에서 찾고 연구해 나아가려는 학도의 마음을 갖는다. 이러한 마음이 나를 항상 젊게 하고 언제나 진격한 작풍을 갖게 하며 또 앞으로도 내가 더 공부해야 한다는 것을 북돋워 주는 것이다.
아직 한 번도 갖지 못한 개인전을 나는 또 이 화실에서 꿈꾸어 본다. 참으로 단체전에 비해서 개인전이란 한 작가를 온전히 알 수 있을 것이며 또 그 작품의 진가도 알 수 있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기 때문에 나는 개인전을 퍽이나 어렵게 보게 되고 좀처럼 열기가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 일생에 한 번은 반드시 가져 보겠다는 꿈이 살아 있다. 그것이 앞으로 1년이 될지 2, 3년이 될지 모르나 꼭 가져야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개인전은 그 작가의 생명과 생활의 숨김없는 결정체를 그대로 내놓게 되기 때문이다.
『조선일보』, 1955. 6. 24.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