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하지 않는 마을들을 책망하심(마11:20-24)
율법과 복음은 하나님의 두 경륜이다.
따라서 율법과 복음의 연속과 불연속은 하나님 두 경륜의 연속과 불연속이기도 하다.
이러한 불연속이 있음은 신구약의 중보자 차이 때문이다.
구약의 사람 중보자와 종말의 아들 중보자 차이 때문이라는 말이다.
죄 아래에 세워진 사람 중보자와 하나님의 아들 중보자 차이 때문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 구속을 통한 옛 경륜의 완성 때문에 주어지는 불연속이기도 하다.
여호와의 옛 경륜은 땅에 속한 경륜이다.
이는 죄 아래에 세워진 옛 백성에게 맞춰진 경륜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종말에서의 경륜은 하늘에 속한 경륜이다.
이는 하나님 아들을 통해서 나타나고 시행된 종말에서의 경륜이다.
이처럼 율법과 복음의 연속과 불연속은 언약의 갱신과 발전의 결과 때문이다.
그래서 신구약 성경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셨던 여호와께서
어떻게 믿는 자의 아버지가 되시는지를 말한다.
이처럼 신구약 성경은 언약을 매개로 하는 연속성을 가지며 언약의 갱신으로 인한 불연속성이 있다.
이러한 신구약 성경의 연속과 불연속은 언약 갱신의 결과물이다.
이처럼 언약은 신구약 성경을 하나로 연결하는 연속성이며,
한편으로는 언약 갱신은 불연속을 가져온다.
종말에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통하여 이전과는 다른 경륜을 시행하신다(갈4:4-5).
구약에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 내용,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준 613개 항목의 율법,
곧 옛 백성에 대한 여호와의 율법 통치와는 다른 새 경륜을 시행하신다.
따라서 새 언약 내용인 그리스도 복음은 옛 언약 내용인 모세율법과는 다르다.
모세율법은 휘장으로 가리신 여호와를 말하나,
그리스도 복음은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을 말한다.
모세율법은 이스라엘이 죄 아래에 세워진 종(머슴)임을 말하나,
그리스도 복음은 믿는 자들이 하나님 아들(자녀)임을 말한다.
따라서 구약에서의 구원은 여호와의 율법 통치에 거함이나,
종말에서의 구원은 그리스도의 통치에 거함이다.
그래서 마태복음은 율법 아래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예수에게 나아와서 그를 믿고 따르라고 권면한다.
613개 율법에 부착한 삶을 버리고 예수를 따르는 삶을 살라고 권면한다.
이처럼 종말에 하나님께서 율법 아래의 종(머슴)인 백성을 하나님 아들(자녀)로 구원하심은,
율법은 죄를 없이하지 못하고(히10:4, 11)
그 아래에 있는 자를 온전케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히7:16-9, 10:1).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구원과 생명은 율법 아래에서 주어졌던 것과는 질이 다르다.
이처럼 율법이 주지 못하는 참되고 온전한 구원과 생명을 주고자
종말에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신 것이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율법이 주지 못하는 구원과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 아들이다.
그는 율법을 폐하시고 온전케 하신 그리스도이시다.
이처럼 옛 언약 아래에서 시행되었던 일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일로 온전하게 된다(마13:16-17, 갈4:1-7, 엡2:6).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구원과 생명은 옛 언약의 목표이며 종착점이다.
화 있을진저
본문과 같은 내용이 누가복음 10:13-16절에서도 언급한다.
누가복음에서는 예수께서 열두 사도를 파송하신 후에,
칠십인 제자들을 파송하면서 영접하지 않은 마을을 떠날 때는 발에 묻은 먼지도 떨어버리라고 하신다.
이는 제자들을 영접하지 않은 마을에 대한 천국 왕의 심판 선고이다.
이를 시작 말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날에 소돔이 그 동네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이며(눅10:12),
끝맺는 말은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니라”
이다(눅10:16).
이는 제자들이 전파하는 하나님 나라가 하나님께서 아들을 통해서 하신 마지막 말씀이기 때문에,
제자들의 말을 듣지 않는 자는 마지막 날에 심판을 받으며,
하나님 심판의 상징인 소돔보다 더 큰 벌을 받는 점을 강조한다.
이처럼 누가복음은 종말에 아들을 통한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은 자들의 정죄를 강조한다.
종말에 아들의 말을 듣지 않아 심판받을 대표적인 마을들은
예수께서 많은 권능을 행하신 고라신과 벳새다이며 가버나움이다.
그런데 마태복음은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않으므로 그때에 책망하시되"
라는 말로 시작하며(11:20),
심판 날에 소돔보다 더 큰 심판을 받을 마을인 고라신과 벳새다, 가버나움의 교만을 정죄한다(11:21-24).
예수께서 고라신과 벳새다를 함께 언급하시고,
이어서 가버나움을 언급하심은 반복법이며 강조이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를 파송하신 후에 다른 여러 동네로 전도하시려고 떠나면서,
세례 요한의 말도 듣지 아니하고 인자의 말도 듣지 않는 악한 세대를 책망하시고,
소돔보다 더 큰 심판을 받을 갈릴리 마을들을 정죄하신다.
고라신이나 벳새다. 가버나움 사람들이 정죄를 받음은 모세의 613개 율법을 불순종하였기 때문이 아니다.
이는 예수의 가르침과 행하신 사역을 보고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구약처럼 선지자들이 선포한 모세율법을 따르지 않았거나,
이방 나라의 권세와 영광을 추구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의 가르침과 사역을 접하였음에도
하나님 아들과 그리스도이심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회개하지 않는 갈릴리 마을들
구약에서 선지자들은 모세율법으로 돌아오라고 선포하였다.
이는 613개 항목의 율법이 여호와의 통치질서이기 때문이다.
구약에서는 모세율법에 부착함이 여호와의 백성으로 행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종말에서는 예수를 믿고 따름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일이다.
그것은 구약에서는 모세율법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심을 나타내셨으나
종말에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믿는 자의 아버지가 되심을 나타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모세율법이 시행되는 갈릴리 마을들을 다니시면서 많은 가르침과 권능을 행하셨다.
예수의 가르침과 사역은 모세율법과는 다른 참되고 온전한 하나님 뜻이다.
이처럼 구약에서는 율법 통치에 거함이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알고 섬기는 구원이며 생명이나,
종말에서는 그리스도의 통치에 거함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고 섬기는 구원이며 생명이다.
그것은 종말에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보내셔서
율법의 나라이었던 다윗왕국과는 다른 천국을 세우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천국은 예수의 말이 시행되는 그리스도의 나라이다.
천국은 하나님과 아무런 장벽이 없이
가장 가깝고 친밀하며 하나가 된 하나님 아들(자녀)들로 구성된 나라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고라신과 벳새다, 가버나움을 정죄하심은
그들이 모세율법을 버렸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 자신을 거절하였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하나님 아들과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라신과 벳세다는 가버나움 인근 마을이다.
이곳은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나타내신 곳들이다.
이러한 갈릴리의 마을들은 예수의 고향 마을들이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께서 행하시는 많은 권능을 보았음에도 회개를 하지 않고 영접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한 번 두로와 시돈에 가셨으며,
그곳에서 가나안 여인의 귀신들린 딸을 고치셨다.
예수께서는 상에서 떨어진 자녀의 떡 부스러기라도 먹기를 간청하는 가나안 여인을 들으시고,
귀신이 들린 그녀의 딸을 고쳐주셨다(마15:21-28, 막7:24-30).
그런데 마태가 예수의 사역 결과를 요약할 때는 두로와 시돈에서 많은 무리가 몰려왔다고 기록한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가버나움에 거주하시면서 주변 마을에 천국의 영광을 나타내셨다.
가버나움 주변의 고라신과 벳세다에서 많은 권능을 나타내셔서 영광을 크게 비추셨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를 하나님 아들로 믿지 않았다.
이에 예수께서는 갈릴리 마을들을 정죄하신다.
갈릴리 마을들의 죄는 모세율법을 떠났기 때문이 아니라,
종말에 하나님께서 보내신 아들을 거절하였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행하신 많은 권능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수께서 가르치신 천국 복음을 듣고 행하신 권능을 보았음에도 회개하지 않았다.
이는 모세율법을 가진 여호와 백성이라는 교만 때문이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하늘까지 높아지려는 가버나움의 교만을 언급하셔서 그들의 죄를 지적하신다.
두로와 시돈은 지중해 무역의 풍성함을 가진 이방 도시이다.
두로와 시돈은 예루살렘과 영광을 다툰 이방 도시이다.
이들은 하늘에 그 이름을 두려고 하였던 이방 나라의 대표주자이다.
이처럼 두로와 시돈, 가버나움은 교만하여 예수를 거절하였으나,
가나안 여인은 주인의 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를 먹는 개처럼 예수의 은혜를 간구하였다.
이에 예수께서는 갈릴리 마을들을 심판석에 세우시고 정죄하신다.
맺는 말
가버나움의 교만은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이방의 머리인 바벨론(사13:),
가나안 땅에서 예루살렘과 영광을 다툰 두로와 시돈의 교만과 같다(사23:).
예수를 영접하지 않는 갈릴리 마을들의 죄는
이방의 영광을 추구하며 하나님 아들을 거절한 이스라엘의 죄이기도 하다.
예수께서 그들을 정죄하심은 그들이 모세율법을 버렸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을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거절하였기 때문이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의 죄는 모세율법을 떠나서 여호와를 거절하고 부정함이다.
그러나 종말에 이스라엘의 죄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아들을 거절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자신을 영접하지 않은 마을들을 정죄하신다.
이처럼 정죄함은 그가 하나님 아들이기 때문이다(행17:30-31).
이러한 종말에서의 심판에 대하여
마태는 왕을 영접하지 않은 나라의 본 자손들은 천국에서 쫓겨나고
백 부장처럼 예수에게 나아와서 영접하는 이방인들은
이스라엘 조상들과 함께 천국에 앉을 것이라고 말한다(마8:11-12).
소돔과 대비된 갈릴리 마을들의 심판 배경은 에스겔 16장이다.
여호와께서 바벨론을 동원하여 이스라엘을 심판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이스라엘이 모세율법을 버림으로 여호와를 떠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말에서 심판의 기준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심판 기준은 당대의 통치질서를 거스르고 순종하지 않음이다.
구약에서는 613개 율법 통치에 불순종함이고,
종말에서는 그리스도 통치에 불순종함이다.
이처럼 구약에서 하나님 통치질서는 613개 율법이고,
종말에서의 하나님 통치질서는 그리스도 복음이다.
따라서 구약에서 모세율법을 범하면 율법에서 언급한 심판을 받게 되고,
종말에서 그리스도 복음을 떠나면 종말의 심판을 받는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갈릴리 마을들의 심판이 소돔 심판보다 중하다고 하신다.
이는 종말에 아들을 통해서 나타내신 은혜는 모세율법으로 나타내신 은혜와는 비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구약에서는 휘장의 장벽을 두시고 백성들을 대하셨으나,
종말에서는 사람으로 오셔서 자신을 나타내셨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적게 받은 자에게는 적게 요구하시고,
많이 받은 자에게 많이 요구하신다.
따라서 종말에 예수를 거절하면 소돔 심판과는 비교할 수 없는 중한 심판을 받게 된다.
그래서 히브리서에서도 교회의 특권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중한 심판을 언급한다.
하늘에 속한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