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무 겸비로 강한 조선을 꿈꾸다
윤휴가 살았던 17세기 중반은 외적으로는 북벌론, 내적으로는 주자성리학의 의리와 명분론이 힘을 확산시켜 나가는 시기였다. 그 핵심인물은 서인의 영수 송시열이었고, 윤휴는 송시열에 치열하게 맞선 라이벌이었다. 그럼 윤휴가 지향한 조선사회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윤휴는 효종 이후 북벌을 구호화 하는데 그치지 않고 실천해 보고자 한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윤휴는 이를 위해 무(武)와 국방 강화를 강조하였다.
“문(文)과 무(武)는 왕의 2가지 술(術)이다. 문은 무엇인가? 교화에 힘쓰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다. 무는 무엇인가? 위엄 있는 정치를 권장하고 화란을 막는 것이다. 일문일무(一文一武)는 때에 따라 소장이 있는데, 숨기면 밝혀지지 않고 남용하면 위엄이 없어지는 것이니, 어느 한 가지도 폐할 수 없다.” ( 『백호집』 권24, 잡저, 「만필상」)
윤휴는 과거제도 폐단의 하나로서 학자·사대부의 문약함과 무를 천시하는 경향을 지적하고 무의 천시는 결국 국방력의 약화를 가져온다고 인식하였다. 윤휴의 상무(尙武) 경향은 「사실(事實)」이라는 편목에서 이순신의 유사(遺事)를 비롯하여 ‘제장전(諸將傳)’이라 하여 정운, 송희립, 이억기, 유형, 정사립, 이완, 진무성, 안형, 김대인, 원균 등 여러 무장들의 행적을 기록한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이순신의 서녀(庶女)는 윤휴의 부친인 윤효전의 첩으로 들어가 윤휴의 서형(庶兄)인 윤영(尹鍈:1612-1685)을 낳은 만큼 인척으로 연결된다. 윤휴가 「유사」의 첫머리에 이순신의 행적에 대해 자세한 기록을 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가계상의 인연도 큰 작용을 했을 것이다.
*** 신병주 교수님의 "이단아로 낙인찍힌 윤휴, 그가 꿈꾼 조선"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