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세계 문학의 어떤 현상도
하이네(Heine, Heinrich 1797-1856)처럼 오늘날까지 그렇게 열정적으로 논의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뫼리케는 그를
"철두철미한 작가"라고 칭하였으며,
또한 "그의 전(全)존재를 거짓말하는 사람"이라고 말하였다.
첼러는 그를 "위대한 마음의 부인자"라고 칭하였다.
그의 문학이 19세기의 문학 발전에 있어서,
특히 시, 산문, 문예란에 강력한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라베 혹은 비스마르크와 같은 다른 종류의 정신의 소유자들조차도,
정신적으로 동요하던 이 시대의 위대한 자극자이며 가장 선동적인 문학적 사건으로서,
이 시인인 동시에 산문 작가인 하이네에게 경의를 표하였다.
"하이네는 괴테와 나란히 언급될 수 있는 유일한 민요의 시인이고,
그리고 그 민요가 특히 독일적인 문학 형식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그대들은 잊을 수 있겠는가?"
〔비스마르크〕.
하이네는 매혹적이고 선동적인 점으로 보아 '현대 정신'의 대표자가 되었다.
"현대 문학의 일반적인 특성은
개성과 회의가 지배하고 있다는 점이다.
권위는 무너졌다 ······ 문학은 이제 객관적이고 서사적이며 소박한 것이 아니라,
주관적이고 서정적이며 성찰적이다."
그는 예술의 상황을 그와 같이 규정함으로써 자기 자신에 관해 말하였다.
그는 이러한 '이해하기 힘든 과도기적 위기'의 시대에 서 있는 자기 자신을
역사적인 시대의 신호라고 파악하였다.
개성적인 것은 역사적으로, 그리고 예술적으로 모범이 되었으며,
그의 예술은 옛 세계와 새로운 세계 사이의 교점이 되었다.
하이네는 뒤셀도르프에서 태어났다.
19세 때 그는 함부르크에 있는 부유한 아저씨의 은행에서 견습생으로 보냈지만,
브렌타노샤미소, 호프만, 그라베Almansor〉는 실패하였다.
기독교로 전향하지 않고는 유대인에게 변호사 자격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법률 공부를 마치고 난 후에 한 때 변호사가 되려고 했던 하이네는
1825년에 세례를 받았다.
하이네는 그 스스로 그것을 비꼬아서 "유럽 문화에로의 입장권"이라고 말하였다.
1826년 〈여행 화첩, 제1권 I. Band der Reisebilder〉이
그를 갑자기 유명한 작가로 만들었다.
그는 뒤늦게 시작한 낭만주의자였다.
감정을 몽상적인 환상으로 이끌어 가는 경향에서뿐만 아니라,
특히 그의 천재적인 주관성, 즉 형식과 분위기를 반어적으로 구사하고,
위트로 순수한 고통을 갑자기 해소시킨다는 점에서 그는 낭만주의자였다.
그는 자연과 전설의 마력에서 정조를 유도해 내는 감정 이입의 힘을 소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성적인 사람이 갖는 정신적인 자유를 소유하고 있었다.
날카롭지만 억압하지 않는 조소(嘲笑)를 좋아하는 그의 버릇은
그것으로 인하여 그 자신을 다치게 하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항상 긍정과 부정, 환상과 몽환적인 감정,
능숙한 처세술과 견유주의(犬儒主義, Zynismus),
감격과 페시미즘, 삶과 독일인에 대한 사랑과 증오 사이를 드나들면서 살았다.
서정적 연애시: 초기 시집 『노래의 책』
하인리히 하이네(Heinrich Heine)는
세기의 전환기, 즉 유럽에 산업화 물결이 일어나
자본주의적 시민 사회가 본격적으로 태동하기 시작한 때에 태어났다.
이 새로운 시대는
역사적 가능성과 함께 자본주의 사회로 진입하면서
갖가지 사회적 모순을 동시에 배태하고 있었으며,
그리하여 하이네의 세계관과 역사관의 형성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또한 그는 독일 태생의 유태인이었기에
어린 시절부터 유태 문화와 기독교 문화 사이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데 큰 혼란을 겪어야만 했다.
그 때문에 생존시뿐만 아니라 사후에까지도
오랫동안 독일의 민족주의자들부터 격렬한 비난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나치 치하의 제3제국 시대에는
심지어 그의 모든 작품이 금지되고 불태워졌던 것이다.
유태인에게는 공적인 사회 진출의 기회가 사실상 박탈되어 있었으므로
하이네의 아버지는
아들이 상인의 길을 걷기를 원하여 1816년 6월, 상인 수업을 위해
그를 함부르크에서 은행가로 큰 성공을 한 동생 잘로몬 하이네에게 보냈다.
하이네는 번창했던 이 무역도시에 약 3년간 머물렀는데,
바로 이 기간 중에 그는 커다란 실연의 고통을 겪어야만 했으며
그것은 그의 생애에 두고두고 큰 영향을 미쳤다.
숙부의 딸인 사촌누이 아말리에를 격정적으로 사랑하게 된 하이네는
숙부와 숙모의 강한 거부감과 모멸적인 언사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그를 가장 고통스럽게 만든 것은 그녀의 싸늘한 시선이었다.
백만장자의 딸로서 상류 사회의 과시적이고 허식에 찬 생활에 익숙한
아말리에에게는
신분을 초월한 순수한 애정이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더욱이 그녀에게 결혼이란
사회적인 신분 상승을 위한 기회일 뿐이었다.
그러한 속물근성의 백만장자 딸이
가난한 사촌오빠를 연인이나 결혼상대로 생각할 리는 만무했다.
하이네의 열정적 사랑의 고백에 대한 답은
그저 차가운 비웃음과 냉담한 거부였다.
실의에 찬 하이네는 1819년 6월
함부르크를 떠나 뒤셀도르프로 귀향하고 말았다.
하이네는 아말리에와 헤어진 후에도
거부당한 사랑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를 정녕 비참하게 만든 것은,
그 자신이 부와 사회적 신분만을 앞세우는 여인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었다.
외모는 아름다우나 내면은 공허하고,
미소는 천사 같으나 가슴은 냉정하기 그지없는 여인의 매력,
이러한 매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기막힌 감정은 격심한 자아 조롱으로 나타났다.
그의 초기 시집 『노래의 책』을 일관하는
신랄한 풍자와 아이러니는 이러한 감정의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매력에 빠져 고통을 겪고 파멸하는 것 자체가
하이네에게는 사랑의 운명이기도 했다.
그의 유명한 시 「로렐라이」
역시 바로 이 사랑의 운명을 노래한 것이다.
높은 언덕 위에서 노래하는 아름다운 요정을 사랑하는 사공,
대답 없는 사랑의 '거친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암초에 부딪혀 파멸해야만 하는 사공의 운명에서
하이네는 자신의 불행한 사랑을 본 것이다.
사랑은 예나 지금이나 불행한 것이고,
사랑한다는 것은 그래서 고통과 수난을 당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하이네는 이 고통의 체험을 시로 형상화했다.
때로는 아름답고 슬픈 언어로,
때로는 냉소적이고 아이러니칼한 언어로
시집 『노래의 책』에 실린 청년 하이네의 시는
사랑의 격정에서 피어난 '수난의 꽃'인 셈이다.
앙가쥬망과 예술의 사회적 소명
『노래의 책』에 실린 아름다운 서정적 연애시들은
시인 하이네의 이름을 유명하게 만드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서정적 연애시가 그의 모든 것은 결코 아니다.
하이네는 시대의 정치적, 사회적 실상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을 아끼지 않은 참여적 저술가이며
유럽과 세계의 미래에 대한 이념적 논쟁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한 사상가이기도 하다.
일면으로는 서정성과 아름다움에 대한 예술적 추구,
다른 일면으로는 비판적 현실 참여,
이 두 영역은 하이네의 작품 활동의 두 개의 축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하이네가 그의 참여론적 저술에서
가장 중요한 테마로 다룬 것은 민중의 해방이었다.
그는 유럽의 여러 나라들을 여행하면서
아직도 남아있는 앙시앵 레짐의 무거운 짐을 지고 신음하는
민중의 고통,
서서히 부상하기 시작하는 새로운 사회질서로서의 시민사회
그리고 유럽의 도처에서 진행되고 있는
낡은 질서와 진보적 세력 간의 싸움을 목격하였다.
이러한 급변하는 정치적, 사회적 상황에서
하이네가 가장 중요한 시대의 문제로 선정한 것은 민중의 해방이었다.
그가 귀족과 교회, 즉 앙시엥 레짐의 권력자들을
민중을 속이는 거짓의 후견자로서, 낡은 시대의 유물로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류 역사 발전을 가로막는 방해자로서 비판하고 규탄한 것은
'민중'이야말로 새로운 시대와 새로운 세계의 주인이어야 한다는
확신에서였다.
그러나 하이네는 독일에서 참여적 작가로서의 활동에
점차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다.
특히 1830년 프랑스의 7월 혁명 이후
하이네를 포함한 진보적 지식인들에 대한 감시의 강화와
보수 세력의 역공세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층 엄격해진 검열로 인하여
그는 저술 활동에 심각한 장애를 받게 되었다.
이러한 독일적 상황의 암울함에 더하여
7월 혁명 이후 종전보다 훨씬 더 자유화를 이룬 파리에서 자유롭게 사유하며 자유롭게 글을 쓰고 자유롭게 살아가고 싶다는 강한 욕구가
파리로 가려는 그의 결단을 재촉하였다.
1831년 5월 19일 하이네는 파리에 도착했고,
죽을 때까지 망명 작가로서 살아야 했다.
하이네는 '해방'과 '자유'의 이념을
예술과 어떻게 매개하려 했을까?
독일의 정신사를 개괄하고 있는 저서
『독일의 종교와 철학의 역사에 대해서』에서
하이네는
"우리가 생각해낸 사상들은 우리가 그들에게 육신을 줄 때까지,
우리가 그들을 물질적 현상으로 만들어 줄 때까지
우리를 그대로 놓아두지 않는다.
생각은 행동이,
말은 살덩어리가 되려한다"고 강조한다.
즉, 추상적 이념이나 사상은
구체적 행동이나 현실적인 것으로 '실현'되려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념과 현실, 정신과 물질간의 합일에 대한 확신에서
하이네는 세계가 '말의 서명',
다시 말해 말-이념이나 사상-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라고,
그리고 "사실은 단지 이념의 결과들"이라고 규정한다.
즉 하이네에 의하면
말과 이념이 세계와 현실을 형성해 나가는 것이며,
이는 세계의 역사가 이념의 역사라는 결론으로 자연스럽게 귀결된다.
이념이 스스로를 구현해 나가는 공간은 '역사'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역사철학적 고찰에서
하이네는 새로운 예술의 사명을 강조하고 나섰다.
예술은 이제 역사의 과정을 발전의 과정으로 만들기 위해서
이념에 헌신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구체적으로
예술이 이념을 설파하고 또 실현하기 위해서
역사라는 원형극장에서 "검투사처럼 싸워야 함"을 의미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술은 오로지 아름다운 예술,
즉 '순수 예술'이라는 좁은 틀에서 빠져 나와
이념적 현실참여를 자신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시인은 이제 자유를 노래하고 찬미해야 하며,
민중의 영혼을 사로잡고 그들이 열광되어
행동하게 만드는 소명을 수행해야 하는 것이다.
"독일의 시인이여! 독일의 자유를
노래하고 찬미하시오, 당신의 노래가
우리의 영혼을 사로잡을 수 있도록,
우리가 열광되어 행동할 수 있도록,
마르세유 찬가 식으로 노래하시오."
-『시대시』 중 「경향」
순수예술의 현실 참여
진정한 민중해방과 '삶의 원칙'
그러나 민중 해방을 위한 참여 문학도 하이네에게는 종착역이 될 수 없었다. 1840년에 발표된 『루드비히 뵈르네-하나의 회고록』에서
하이네는 그가 열광적으로 찬양한 파리와,
그리고 이 도시의 이름으로 상징되는 프랑스 혁명의 모습이
많은 부분 그의 상상 속에서 이상화된 것이었노라고 고백했다.
그가 파리라는 대도시에서
현실의 문제로서 직접 체험한 혁명은 많은 심각한 문제들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혁명의 실상에 대한 점증하는 부정적 인식으로 인해
혁명에 대한 그의 열광적인 자세는 점차 퇴조했고,
이후 하이네는 앙시앵 레짐에 대한 비판 못지않게
과격하며 맹목적인 혁명이론이나 운동에 대한 비판도 강화해 갔다.
그 결과
하이네는 많은 진보적 지식인들이나 혁명론자들과 갈등을 겪어야 했고,
이는 그의 망명 생활을 더욱 고되게 했다.
그러나 하이네는 진정한 자유에 대한 믿음을 굽히지 않았고,
그의 견해로는 왜곡되고 편협한,
그래서 결코 진정한 역사의 발전을 가져올 수 없는
혁명운동에 대한 비판적 거리를 유지해 나갔다.
참여 시인으로서 하이네가
가장 날카롭게 비판한 것은
프랑스 혁명전 낡은 체제의 정신적 질서를 이루었던 가톨릭 교회였다.
그는 가톨릭의 교리를 '유심론(唯心論)'으로 규정하고,
이 교리가 인간의 영적, 정신적 삶과 내세에서의 구원을 중시한 나머지
지상에서의 현실적 삶, 특히 육체적, 물질적 삶을 경시했으며
이로 인해서 민중들의 실질적인 삶의 개선을 등한시 했다고 지적했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등의 가르침이
진리로 통용되는 사회에서는
가난으로 고통 받는 민중들의 물질적 삶의 개선은
처음부터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이네가
가톨릭의 유심론을
역사적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단정한 것은
그가 '유물론자'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는 인간이 오로지 정신적인 존재만도,
오로지 육체적인 존재만도 아니며
진정한 인간의 실체는
정신과 육체, 정신과 물질의 조화와 균형에서 찾아야 한다고 믿었다.
따라서 모든 인간이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을 때
비로소 신적 상태로 승격한 인간들의,
즉 "신(神)들의 민주주의"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이네가 당시의 과격한 혁명론자들,
즉 급진적 공화주의자들이나 사회주의자들에게 결코 동조할 수 없었던 것은 이들이 이 같은 진정한 인간의 실체를 보지 못하고
모든 문제들을 단지 물질적, 정치적으로 해결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하이네는 급진적인 혁명주의자들이 내건 이데올로기의 과격함과
이에 대한 맹신적인 자세를 논박했다.
그들은 오로지 공화주의적인 해결
또는 오로지 사회주의적인 해결만을 신봉하고
자신들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와 직접적인 관련을 가지지 않은
순수 예술이나 그 밖에 모든 정신적인 삶의 풍요로움을
적대시하게 될 것이며,
더 나아가서
그들의 이데올로기적 엄격성을 해칠 수 있는
물질적인 풍요로움까지도 배척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예감한 것이다.
그러기에 하이네는
"소박한 의복, 절제하는 도덕, 양념을 치지 않은 즐거움"만을 요구하는
'혁명의 사람들'에 반하여
"우리는 넥타와 암브로시아, 화려한 외투, 값진 향수,
즐거움과 화려함, 깔깔 웃는 요정들의 춤, 음악과 희극까지도 요구한다"고
말했다.
향락적 성향으로까지 치달을 수 있는 쾌락의 강조는
그 자체로서의 목적은 물론 아니다.
이것들은 급진적 혁명론자들이 요구하는
금욕적 삶의 본성인 엄격함과 진중함
그리고 무거움과 어두움에 대한 평형추 역할을 함으로써
인간의 삶이 편향되지 않고 조화와 균형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수단이었던 것이다.
그가 장편 서사시 『독일. 한 겨울 이야기』에서
오로지 '빵'만이 아니라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미래의 이상향의 조건으로 내세운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말하자면 하이네는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풍요로운 삶,
실용적 노동과 환상적 예술,
유용성과 아름다움이 서로를 배척하지 않는 삶,
이러한 이상적 삶의 실천을 지향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이러한 독특한 해방 개념을 '삶의 원칙'
또는 '삶의 이념'으로 부르기도 했다.
이 '삶의 이념'은
모든 해방 운동의 근원이 되는 것으로 어떠한 경우에도
포기될 수 없는 절대적 목표이며,
따라서 결코 협상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이 목적에 이를 수 있는 수많은 길들은 단지 수단일 뿐이며,
따라서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수정되거나 교체될 수 있다.
그런데 이 '상대적'인 수단을 '절대화'하며,
그 과정에서 원래의 목적을 잊어버리는 것은
하이네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전도일 수밖에 없다.
절대적 평등의 이데올로기와 순수 예술로의 귀환
하이네에게는
급진적인 공화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의 절대적 평등 요구는
이러한 전도의 전형적 실례였다.
근대의 자유주의 사상이 요구하는 '평등'은
모든 사람들의 법 앞에서의 평등,
모든 사람들의 기회의 균등 등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민주적인 국가와 사회의 한 기본적인 구성요소이지 그 전부는 아니다.
다시 말하면 '평등'은 민주적 사회의 다른 구성 요소들 위에 군림하거나
이 요소들을 희생해 가면서까지 추구해야할 그런 '절대적' 목표는
아닌 것이다.
더욱이 이 '평등'이 절대화되면
그 의미도 변질되어 법률적, 사회적 평등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획일화로, 즉 개개 인간의 정신적 자질의 차이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집단적, 전체적 획일로 과격화 된다.
따라서 평등의 이념이 절대적 목표로 절대화되면
모든 인간의자유를 지향하는 민주 사회의 성립,
즉 민중 해방이라는 원래의 목적 까지도
이 절대화된 평등을 위해 희생되어야 한다.
즉 부분이 전체를,
수단이 목적을 지배하는
도착된 상황이 생성되는 것이다.
하이네는 이러한 절대적 평등의 요구를 '평등 광기'로 단정했다.
그는 이러한 '광기'가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지 정확하게 꿰뚫어 보았다.
그것은 인간의 모든 개성이 무시되고 사람들의 개별적인 삶이
철저하게 거부되는 집단주의 사회,
모든 사람이 마치 "똑같이 털을 깎이고 똑같은 울음소리를 내는
양떼"처럼 살아가야 하는 끔찍한 전체주의 국가의 등장일 것이다.
하이네는 예술가로서, 자유주의자로서,
그리고 본래적 '삶의 이념'을 위해 포괄적인 사회 개혁을 추구하는
이상주의자로서
오로지 정치적, 사회적인 해결책만을 모색하며,
편협한 평등주의를 내세우는 이들과 자신을 동일시 할 수 없었다.
이들의 '과격 치료'가
인류의 장래에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아마 절박한 사회 문제를 일시적으로는 해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인류에게 파멸적일 것이다.
하이네는 인류가 "추한 환자복,
회색의 평등 복장을 평생 질질 끌고 다녀야 할 것이다"라고 예언했다.
이러한 음울한 미래의 모습,
예술과 아름다움이 완전히 배제된 황량한 사회,
개성과 천재가 존재할 수 없는 회색 빛 평등사회,
이러한 미래에 대한 불안한 예감이 하이네의 예술의 자율성에 대한
강화된 요구의 배경을 이루고 있다.
1842년 발표된 『아타트롤-한 여름 밤의 꿈』에서
하이네는 이 서사시가 '목적이 없음'을,
어떠한 외부의 목적도 추구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법칙만 따르는 자율적 예술임을 선언했다.
"한 여름 밤의 꿈! 나의 노래는
환상적이고 목적이 없다.
그렇다, 목적이 없다, 사랑처럼,
삶처럼, 창조주와 모든 피조물처럼!"
그러나 이 선언은
하이네가 예술의 '절대적 자아 목적성'을 주장한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하이네는 부정적 현실에 대해
예술이 가진 가능성을 대치시킴으로써
예술을 통한 사회 개혁의 가능성을 탐색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사회 비판은 하이네의 말대로
'더 위대한 세계관'으로부터의 비판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하이네의 예술을 통한 현실비판은
단순한 현실 정치적인 차원을 넘어서
본래의 굴절되지 않은 이념을, '삶의 원칙'을 출발점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하이네적 예술의 자율성은
이데올로기로 도그마화한 이념이
인간 위에서 군림하면서
그들의 삶의 양식을 결정하고 지배하는 것에 대한 저항이며,
인간이 스스로의 주인이 아니라
특정한 이데올로기의 노예로 전락하는 데 대한 경고이다.
그 무엇도 '삶의 원칙'보다, "삶의 목적은 삶 그 자체이다"라는 원칙 보다
우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끝없는 물음
하이네는
주옥같은 연애시를 쓴 서정 시인이자
예술의 사회참여를 주장하는 비판적 저술가이며,
유럽 사회주의 운동의 선구자이자
동시에 공산주의라는 이데올로기의 이론적 허구성과 역사적 모순점을
가장 날카롭게 꿰뚫어 본 최초의 지식인이기도 한 것이다.
하이네 문학 세계의 이러한 다양함,
그리고 시인으로서 그의 예술관의 계속된 변화는
후세에서의 하이네에 대한 연구와 평가를
무척 어렵게 만든 요인이 되었다.
그의 작품세계의 다양한 성향들,
이들은 많은 경우 서로 간에 상충되고
모순되는 관계를 이루고 있는 바,
이들 복잡하게 얽혀있는 예술적 성향으로 인해
하이네는 '내적으로 분열된 작가' 또는 '모순의 시인'으로 불리기도 했다.
또 그의 일관되지 못한 주장으로 인해
하이네는 그의 비판가들로부터
'카멜레온 같은 인간' 혹은 '변절자'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하이네의 지속적인 변신과 이로 인한 모순적 다양함은
무엇보다도 그가 지고의 목표로 설정한 진정한 인간해방,
즉 그가 '삶의 원칙'이라고 부른 근원적 이념을 찾아
끊임없이 헤맨 사실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할 것이다.
하이네의 작품세계가 최종적 결론이 없이
그저 모순과 갈등으로 점철되어 있음은
아마도 하이네가 삶의 원칙이라는
'마지막 진실'에 이르지 못한 사실의 암시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또한 하이네가 '주어진' 진리나 아니면
스스로가 찾아낸 그 어떤 진리에도 안주하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는 좀 더 완성된, 좀 더 높은 단계의 삶의 진리에 도달하려고
끊임없이 물으며 찾아 헤맨 시인인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끊임없이 물어 본다;
사람들이 마침내 한줌 흙으로
우리의 주둥아리를 틀어막을 때까지.
그러나 이것이 대답이란 말인가?
더 생각해볼 문제들
1. 하이네의 참여적 문학론의 토대는
"세계는 말의 서명(署名)이다"이라는 믿음이다.
여기에서 '말'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나?
예로부터 사람들은
그들의 생각이나 의견을 글로서 표현해왔다.
위대한 사상이나 이념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면 『자본론』은
카를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사상이 집대성된 '말'이다.
"세계는 말의 서명이다"라는 믿음은 따라서 세계의 현실은
이념이나 사상이 실현된 결과라는 믿음이며,
'현실'이 우리의 '생각'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이 우리의 현실을 만들어 낸다는 믿음이다.
이런 관점으로 보면 세계의 역사는 이념의 역사이기도 하다.
2. 하이네는 왜 과격한 혁명론이나 공화주의에 회의를 갖기 시작했을까?
혁명 또는 공화주의 등은
사람들이 더 좋은 세계를 만들어 가는 수단일 뿐
그 자체로서 목적은 될 수 없다.
이는 다른 모든 사상이나 이념에도 적용된다.
공화주의나 입헌군주제, 급진적 혁명이나
점진적인 개선, 공산주의나 자본주의 등은
인간을 위한 더 나은 세계를 만들어 가는 수단일 따름이다.
그때 그때의 상황에 따라 사람들은 적절한 '수단'을 선택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수단들이 과격화되면,
본래의 목적은 잊어버린 채 수단이 곧 목적이 될 수 있다.
그러면 인간을 위한 수단이 되어야 할 이념이나 사상이
인간의 위에서 군림하며 인간의 삶을 지배할 수 있게 된다.
바로 이러한 인식이 하이네로 하여금
과격한 사상에 회의를 갖게 한 원인이다.
3. '순수 예술'은 현실로부터 자유로운, 오로지 예술만을 위한 예술이다.
그런데 이러한 순수 예술이 어떻게 '현실참여적' 기능을 가질 수 있을까?
현실로부터 자유로운 예술은
현실의 때가 묻지 않은 '순수함'을 본성으로 가진다.
이 '순수함'을 그 자체로서만 보지 않고
'순수하지 못한' 현실과 대비시켜 보면
현실의 '추악함'이 크게 부각되며,
이러한 추악한 현실에 대한 개선의 욕구가 생겨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순수 예술의 참여적 성격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 김수용, 서양의 고전을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