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세르반테스 (Miguel de Cervantes Saavedra 1547-1616)
최초의 근대소설인 〈돈 키호테〉의 저자로
기존의 서사적이고 희극적인 작법 방식에서 탈피하여
독특하고 파격적인 서술 방식을 창안했다.
프랑스 사상가 샤를 몽테스키외가 《돈 키호테》를 두고 한 말이다.
아마 세르반테스의 작품을 한 번도 읽지 않았거나,
혹은 세르반테스라는 이름을 처음 들어 본 사람이라도
'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돈 키호테와 그의 조수 산초 판사는 알고 있을 것이다.
세계 문학사에서 가장 독창적이고 유쾌한 인물 돈 키호테.
돈 키호테를 만든 에스파냐 소설가 세르반테스의 인생은
그의 작품 《돈 키호테》만큼이나 흥미진진하고 모험으로 가득하다.
또한 《돈 키호테》 역시 높은 이상, 불가능한 꿈에 저돌적으로 돌진하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단
순한 모험담이 아니라, 프랑스의 문학사가 생트 뵈브의 말처럼
'인간의 본성에 대한 성서'라고 불릴 만큼
인간의 본성과 인간 세상에 대한 다중적이고도 보편적인 진리를 담고 있는
위대한 걸작으로 꼽힌다.
미겔 데 세르반테스 사베드라는 1547년 9월 29일
에스파냐의 마드리드 인근 알칼라 데 에나레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귀족 출신으로 의사였으나 경제적으로 무능했기 때문에
가족들은 채권자들의 눈을 피해 늘 이사를 다녀야 했다.
이런 이유로 세르반테스는 정규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지만,
닥치는 대로 책을 읽고 배우는 것을 좋아해서 스스로 공부했다고 한다.
소년 시절 그는 길을 걷다가도 글이 쓰인 종잇조각을 밟기라도 하면
즉시 주워 읽을 정도로 활자 중독이었다고 한다.
가난하고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세르반테스는 그의 작품이 보여 주는 것처럼 매우 낙천적인 인물이었다.
가난했던 시절에 대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양념은 굶주림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늘 굶주려 있기 때문에 늘 모든 음식을 맛있게 먹을 수 있다."라고
농담을 할 정도였다.
1569년,
세르반테스는 군대에 들어가 에스파냐의 베네치아 주둔군에서 복무했다.
그해 펠리페 2세의 왕비 이사벨을 추모하는 작품집에 소네트 몇 편을 쓰기도 했는데,
이것이 지금까지 알려진 그의 공식적인 첫 작품들이다.
1571년,
지중해의 패권을 두고
신성동맹(오스만 제국의 팽창을 저지하기 위한 가톨릭 국가들의 해상 동맹)과
튀르크군 사이에 레판토 해전이 벌어지자 참전해 활약했다.
이때 가슴과 왼손에 화승총을 맞는 부상을 입고,
그 후유증으로 왼손을 영영 쓰지 못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이후 5년이나 더 군인으로 복무하며 수많은 전투에 참전했다.
또한 전투에서 입은 부상과 흉터에 대해 큰 자긍심을 가졌는데,
특유의 긍정적인 성격으로
'오른손의 명예를 드높이기 위해' 왼팔을 쓰지 못하게 되었다고 농담할 정도였다.
1575년,
세르반테스는 군대에서 퇴역해 고향 에스파냐로 가는 귀환길에 올랐다.
그러나 귀국 도중 해적선의 습격을 받고 해적의 포로가 되어 알제리로 끌려갔다.
몸값을 지불하지 못한 그는 결국 5년간 노예 생활을 했는데,
그동안 네 번이나 탈출을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1580년에야
가족과 성삼위일체 수도회 수사들의 노력으로 몸값을 지불하고
가까스로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는 후일 이때의 경험을 작품에서 묘사하기도 한다.
퇴역 직후에 세르반테스는
전쟁에서의 공로를 인정받고 훈장까지 받은 전쟁 영웅이었다.
그러나 에스파냐로 돌아오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린 탓인지
전쟁의 공훈을 인정해 주는 이도, 일자리를 주는 이도 없었다.
게다가 가난했던 집안은 그의 몸값을 마련하느라 더 빈곤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생계가 막막해진 그는 자신의 괜찮은 글솜씨를 발휘하여 고난을 헤쳐 나가기로 결심한다.
그는 짧은 기간 동안 30여 편의 희곡 작업을 했으나(
현재 남아 있는 작품은 〈라 누만시아〉와 〈알제리의 생활〉 2편뿐이다)
대단한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고,
근근이 생활을 꾸려 나갈 수준의 돈을 벌었을 뿐이었다.
1585년에는
목가적인 로맨스 소설 《라 갈라테아》를 발표했는데,
이 작품은 대중적으로 제법 큰 인기를 끌었고,
외국에까지 번역 소개될 정도였다.
하지만 그가 원하던 부와 명성은 안겨 주지 못했다.
그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가장이 된 세르반테스는
펜을 버리고 보다 안정적인 수입이 보장된 직업을 찾아 나섰다.
그리하여 말단 관리직을 얻어
에스파냐 무적함대의 군수품 징발관, 세금 징수관 등으로 일했다.
10여 년간 관리 생활을 하면서
세르반테스는 회계 장부상 세입금을 맞추지 못하고,
공금을 사기당하는 등의 혐의로 몇 차례 감옥에 갔는데,
그중 세비야에서 투옥 생활을 할 때 《돈 키호테》를 구상했다고 한다.
《라만차의 현명한 향사(鄕士) 돈 키호테》(이하《돈 키호테》) 1부는
그의 나이 58세 때인 1605년에 발표되었다.
관리 생활을 하는 동안 계속하여 분쟁에 휘말리던 세르반테스는
그사이에도 희곡 몇 편을 써서 그 돈으로 위기를 타개해 보려는 시도를 했다.
그의 순탄치 못한 관료 생활은 44세 무렵 끝이 났는데,
《돈 키호테》가 발표되기까지 그
가 무엇을 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정확하게 남아 있지 않다.
《돈 키호테》는
출판되자마자 엄청난 인기를 끌었으나
세르반테스는 당장의 생계를 위해 판권을 출판업자에게 싸게 팔아 버린 바람에
여전히 가난한 생활을 했다.
《돈 키호테》는
17세기경 에스파냐 라만차에 사는 한 향사가
당시 유행하던 기사 이야기에 지나치게 사로잡힌 나머지
스스로를 '돈 키호테'라고 칭하고,
한 마을에 사는 약삭빠른 합리주의자 산초 판사를 시종으로 데리고
기사 순례를 떠나며 겪는
기행에 관한 대서사이다.
그는 환상과 현실을 혼동하고,
포복절도할 만한 각종 기상천외한 행동을 일삼는다.
당시 유행하던 기사도 소설에 내포된 환상을 경멸하던 세르반테스는
기사도 소설에 담긴 허황된 이상을 풍자하고자 이 글을 썼다고 밝혔다.
처음 발표되었을 때
이 작품은 돈 키호테의 기행들을 더할 나위 없이 우스꽝스럽게,
해학적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희극소설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인물의 원형 제시, 개인과 사회와의 투쟁 속에서
인간 정체성의 문제,
이성과 환상의 대립,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에 나타나는 가치관의 혼란, 해학 속에 숨겨진 비애감,
심지어 16세기 무적함대의 괴멸 이후 서서히 몰락하던 에스파냐의 지위를 표현했다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되면서 걸작 반열에 들어선다.
또한 저자가 중간에 개입하여 해설하는 등
독특하고 파격적인 서술 방식도 주목받았다.
세르반테스는 이 작품을 통해
그동안 서사적이면서 희곡적인 작법에서 탈피해
현대소설의 양식을 발현시켰으며,
우리의 관심을 세계에서 개인의 내면으로 전환시키고,
개인의 다양성에 주목하게 했다.
이에 따라 이 작품은
서구의 소설 양식을 창안하고,
소설이 인간의 모든 경험과 내면에 대해 쓸 수 있도록 가능성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최초의 근대소설로 지칭된다.
《돈 키호테》는
당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헨리 필딩은
《조지프 앤드루스》가 세르반테스풍으로 쓴 것이라며 공공연하게 밝혔고,
도스토옙스키는
산초 판사의 캐릭터에 기인하여 《백치》의 미쉬킨 왕자를 만들어 냈다.
뿐만 아니라 미술계에서는
오노레 도미에, 구스타브 도레, 살바도르 달리, 피카소 등이,
음악계에서는
멘델스존, 라벨, 슈트라우스 등이
《돈 키호테》를 소재로 한 작품을 남겼다.
현대에 들어서는 수많은 영화 및 뮤지컬로 재탄생되기도 했다.
이후 세르반테스는 그동안 쓴 12개의 소설들을 묶은 《모범소설집》,
동시대 시인들을 평가한 시 《파르나소스 산으로의 여행》, 《희곡 8편과 소극8편》 등을
발표하면서 작가로서의 입지를 다졌으며,
죽기 얼마 전에는 《돈 키호테》 2부를 출간했다.
《돈 키호테》 2부는
산초 판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데,
1부에서의 독특하고 파격적인 서술 방식은 더 발전해
등장인물들이 《돈 키호테》 작품 자체를 논하는 등
현대의 메타픽션적인 방식이 등장하기에 이른다.
1616년 4월 23일,
세르반테스는 말년에 앓고 있던 수종증이 악화되어 69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그의 유해는 마드리드의 삼부 수도회에 묻혔으며,
이듬해 죽기 직전 완성한 《페르실레스와 시히스문다의 사역》이 출간되었다.
이 작품의 서문에는
온갖 풍상 속에서도 낙천주의와 유쾌함을 잃지 않았던
거장 세르반테스의 면모가 잘 드러난다.
- 청아출판사(이한이 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