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천주교 갈산 공소네!!!”
서울에서 처음 결성으로 내려오는 길에 창밖으로 보이는, 내 눈에 확 들어오는 ‘천주교’.
나에게 되새겨진 천주교. 반가웠고 순간 가슴이 뛰었다.
‘여기에 공소가 있네.’ 말로만 들었고 글로만 알았던, 신자들이 모여서 기도하는 장소로 기억되는 ‘공소’.
그렇게 스쳐 지난 시간이 흐르고 흘렀던 어느 날, 나도 모르게 정신없이 그곳을 찾아갔다.
막연히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몇 분이 있었다.
처음 왔는데도 내가 언제부터인가 다녔던 곳처럼 낯설지가 않았다.
공소예절이 끝나고도 한참 지난 시간인데도 그곳에는 나를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렇게 여러 사람이 있었다.
사실 난 근 20년 세월을 ‘주님’ 주변을 맴도는 냉담자였다.
고상과 성모상을 장롱 속에 넣어두고 어떻게 버려야 될까, 땅에 묻어야 할까를 고민한 적도 있다.
서울에서 성당은 집 가까이에 있는데도 비행기를 타고 가도 배를 타고 가도 도착할 수 없을 것처럼 멀리 있었다.
왜 그리됐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아니, 모르는 척하고 싶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앞으로의 일을 아시고 나를 부르신 것이었던 것 같다.
마음의 고통을 어루만져 주시려고, 나를 위로해 주시려고 슬픔을 이겨내게 하시려고 그렇게 나를 공소로 부르신 것 같다.
이렇듯 교적을 다시 찾고 주님께 나의 잘못을 고백도 못 했는데, 아들의 죽음을 만나야 했다.
‘아시고 계셨구나! 주님께서는....’
난 아들에게 유아세례를 받게 해 주었고 첫영성체도 하고 사춘기까지 잘 다니게 했다.
결혼하고 아이까지 낳은 아들은 병이 났다.
그러나 그동안 냉담자였던 나는 아들에게 어떻게 해 주어야 할지 몰랐다. 마냥 마음만 아팠다.
이 어미가 열심히 했더라면, 주님의 성체를 한 번이라도 더 모실 수 있지 않았을까?
주님께 더 간절히 기도하지 않았을까? 되돌아 가슴을 쳤다.
주님께서 다시 불러주지 않으셨다면, 이 고통을 어떻게 견디어 냈을까? 아찔했다.
장례미사도 할 수 있게 해 주시고, 너무나 고마운 일이었다.
슬픔을 잊으려고 주님께 나 자신을 맡겨보지만, 때때로 가슴이 아리어 왔다.
그러는 사이 주님께서는 나에게 기쁨을 주셨다.
고집스럽게 피하기만 하던 남편을 세례받게 해 주셨다. 놀라웠다.
기도문도 제대로 외우지 못하고 두 손을 모아 기도할 줄도 모르는 남편이지만, 고마웠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하느님 덕분에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나고, 변변치 못한 기도이지만 할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의 많은 죄 묻지도 않으시고, 나의 길을 앞서가시는 주님.
그 길에 함께 계시는 성모님!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열심히 살겠습니다.
주님! 영광 받으옵소서. 아멘!
갈산공소 유영애 모니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