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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주요행사

강만수 신부 시복을 위한 현장조사단 방문

작성자이현수 젤뚜르다|작성시간19.07.12|조회수400 목록 댓글 0

오늘 오전에 우리 본당에  역사적으로 중요한 행사가 있었습니다.

6.25 전쟁중에 순교하신  1대 본당 주임 강만수 요셉 신부님을 복자품에 올리기 위한 현장조사단이 방문하셨지요.

대전교구 설정 이후 최초로 1948년12월18일 사제서품을 받고 1950년2월17일 홍성에 첫 본당 주임으로 부임하셨던 강만수 신부님은 대전교구에서 순교하신 10분의 성직자 중 유일한 한국인이셨습니다.

대전에서 피난할 수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성직자로서의 본분을 다하기 위해 홍성으로 오시다가 공주에서 체포되어 1950년 9월 23~26일 사이에 대전 목동 수도원에서 처형되셨다고 합니다.


여기 대전교구 60년사 30쪽에 실린 내용을 올려드립니다.


1) 공주, 홍성 본당

공주 본당에서는 신자 한 명이 성당 마당에서 살해되었고 강만수(요셉) 신부와 신자 1명이 체포되어 대전 목동으로 옮겨졌다.

가장 먼저 일을 당한 사람은 최종수(요한)이었다. 공주 성당을 지은 최종철(마르코) 신부의 형인 그는 성당 마당에서 총살당하였다. 7월 14일을 전후하여 공주를 점령한 공산군들이 성당 안에서 제대와 성물을 부수고, 성당 안에 군마를 매어 놓는 등 난동을 부리자 이에 항의하다가 일을 당하였다. 그의 시신은 마당 한 구석에 임시로 매장되어 있다가 인근으로 이장되었다.

대전교구가 설립된 이래 첫 번째로 사제서품(1948년 12월 18일)을 받은 강만수 신부는 1950년 4월에 홍성 본당 초대 주임이 되었다. 새 본당의 기틀을 마련할 틈도 없이 전쟁이 일어났다. 6월 중순에 강 신부는 성당 신축 문제를 상의하기 위해 대전에 내려왔는데 전쟁이 발발하여 홍성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강 신부의 동생 강경수(요한)는 육군 상사였는데 후퇴하여 7월 중순경에 대전까지 내려왔다가 강 신부를 만났다. 동생은 자기 차로 피난하자고 설득하였으나 강 신부는 “너는 군인으로서 할 일이 있고 내가 할 일은 따로 있다.”하며 홍성을 향해 떠났다. 하지만 홍성으로 가는 길목인 공주에 이르렀을 때 더 이상 나아갈 수가 없었다. 공산군이 이미 그곳까지 점령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강 신부는 공주의 신자들 집에 숨어 지내며 은밀히 성무활동을 하였다. 마지막으로 한 활동은 박모라는 신자의 조당을 풀어주고 혼인성사를 준 일이다.

이때 강 신부의 활동을 적극 도운 사람이 이항진(토마스)이다. 대전공업학교 수학 선생으로 대전에 근무하고 있던 그는 강 신부를 돕기 위해 동행하여 공주로 왔다. 공주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는 터라 그 지역 지리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강 신부의 활동을 돕던 그는 함께 체포되었다. 때는 8월 15일이 조금 지난 어느 날이었다. 둘은 공주 성당 지하에 갇혀 있다가 일주일 후 밤에 대전 목동 수도원으로 이송되었다. 이송 도중 탈출할 기회가 있었다. 공주에서 잡힌 여러 사람을 태운 트럭이 마티 고개를 천천히 넘어가자 수인들이 하나둘씩 뛰어내렸으나 이 토마스와 강 신부는 탈출하지 않았다. 갇혀있는 그들을 면회한 이의 증언에 따르면 둘은 평화롭게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다. 둘은 1950년 9월 23~26일 사이에 목동의 모든 수인들이 학살될 때 함께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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