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죽거리와 역삼동
- 인조가 말 위에서 죽을 마신 말죽거리
'역(驛)'이라?
지금은 대개 지하철역이나 철도역을 생각하게 되겠지. 그러나, 옛날의 역은 여러 마리의 말을 마련해 두고 공문을 전달할 목적으로 다니는 사람에게 말을 제공해 주거나 바꾸어 주던 일을 했던 곳이다.
'역말', '역촌', '역곡', '역동', '역골', '역삼', --
'역(驛)'자가 들어간 땅이름은 무척 많다. 그러한 곳은 대개 옛날에 역이 있던 곳. 서울의 '역촌동'이나 경기도 부천의 '역곡동' 같은 이름도 옛날에 역이 있어 나온 이름. 교통에 큰 구실을 했던 옛날의 역은 이미 오래 전에 없어졌어도 '역'자가 들어간 땅이름은 지금까지도 남아 그 곳이 옛날에 역이 있었던 곳임을 말해 주고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러한 '역'자 땅이름을 가진 지역에 다시 새로운 역이 생겨난다는 점이다. 물론, 옛날과 같이 말을 바꾸어 주는 그러한 역은 아니래도 '역'자 땅이름 지역에 역이 또 생기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서울 강남구 '역삼동(驛三洞)'도 그러한 곳 중의 하나.
□ 서울 남쪽 첫번째 역인 양재역
옛날엔 말이 중요하게 이용되었던 교통 수단이었다. 옛 관리들은 나랏일로 먼 길을 갈 때 말을 주로 이용하게 마련이었는데, 말이 먼 길에 지치는 것을 막기 위하여 길 중간중간에 말을 바꾸어 주는 역을 마련했다.
역에는 역마(驛馬)가 상비되어 있었다. 여기서는 역졸들이 있어서 말을 교환해 주고 먹여서 보호해 주는 일을 했다.
조선시대엔 역참의 하나로 중요한 도로에 파발을 두어서 선전관의 통행을 편하게 했다. 이 때 이용된 말이 파발마. 이 파발은 원래 선조 38년(1605)에 국토 북쪽이 소란해져 중앙으로의 신속한 연락이 필요해짐에 따라 설치한 것이었다.
대개의 역은 물가에다 두었다. 말에게 물을 먹이기가 쉽고, 말들의 배설물을 쉽게 흘려 보낼 수 있기 때문이겠지.
지금의 서울 서초구의 '양재동(良才洞)'은 옛날에 양재역이 있어서 나온 땅이름.'
양재천이라는 내가 지나는 곳에 있다. 양재천은 과천 관악산, 지금의 정부 과천 청사의 뒤 골짜기에서 발원하여 과천 시내를 거쳐 서울의 강남구를 거쳐 한강으로 들어가는 내이다.
옛날, 서울에서 충청도나 경상도를 가려면 남대문을 나와 동작나루(동작진.銅雀津)나 한강나루(한강진.漢江津)를 건너 남도길에 올랐다. 동작나루를 건너서 첫번째 만나는 역은 과천역이고, 한강나루를 건너서 첫번째 닿는 역은 양재역이었다.
한강나루는 옛날 두뭇개(두모포.豆毛浦) 근처의 나루다. 지금의 옥수동에서 압구정동 방향으로 건너는 나루. 즉, 지금의 동호대교 근처에 있었다. 그 한강나루를 건너 너른 들을 지나 우면산의 동쪽 기슭을 넘어서면 양재천을 만나게 되는데, 그 냇가에 양재역이 자리잡고 있었다.
□ 인조가 말 위에서 죽을 마신 말죽거리
조선시대에 양재역(良才驛)에는 양재도찰방(良才道察謗)이 있었다. 여기서는 종6품 벼슬의 찰방이 경기도 남부 일대에 있는 광주, 용인, 수원, 안성 등의 12개의 작은 역(驛)을 거느리고 이 곳을 지나는 관원에게 숙소를 제공하였다.
양재역 근처의 마을 역시 그 이름이 '역말', 한자로는 '역촌(驛村)'이었다. 이 마을에선 말에게 죽을 먹이는 집이 많아 딴 지방 사람들이 주로 '말죽거리'라고 불렀다. 옛 지도를 보면 한강 남쪽에 '마죽거리(馬竹巨里)' 또는 '마죽거(馬竹巨)'라는 표기로 나온 곳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이 '말죽거리'의 한자식 표기다.
이 근처의 '역삼동(驛三洞)'이란 이름도 말죽거리 때문에 나온 이름. 즉, 역 근처에 '역말(말죽거리)'과 '웃방아다리'와 '아랫방아다리'의 세 동네가 있어서 '역(驛)'자와 '삼(三)'자를 붙여 지은 것이다. '방아다리'는 들 가운데 방아가 있어서 나온 이름인데, 한자로는 '방하교(方下橋)'다. '웃방아다리'는 '상방하교(上方下橋)', '아랫방아다리'는 '하방하교(下方下橋)'다.
본래 이 곳은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의 일부였다. 그런데, 일제 때인 1914년에 경기도 구역 획정에 따라 역 근처의 세 마을을 합해서 '역삼리(驛三里)'라 하다가 1963년에 서울로 편입되어 '역삼동'으로 되었다. 광주군 관할이기 이전엔 과천 땅이었다.
'말죽거리'란 땅이름은 이름 그대로 '말에게 죽을 먹이는 거리'라 해서 나온 것. 말을 이용하는 행인들이 이 곳에 들르면 대개 말에게 죽을 먹였단다.
그런데, 이 이름 유래와는 달리 '말'과 '죽'과 관련한 사실이 있어 이것이 '말죽거리'라는 이름을 낳게 했다는 이설도 있다.
조선 인조 2년(1624) 2월 8일에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해 남도로 가는 길에 양재역에 이르러 기갈을 못 이기자, 유생 김이(金怡) 등이 급히 팥죽을 쑤어 임금에게 바치니, 인조가 말 위에서 그 죽을 다 마시고 과천쪽으로 갔단다. '임금이 말 위에서 죽을 마시다'의 뜻으로 '말죽거리'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한낱 역사적 사실 하나를 '말죽거리'라는 이름에 결부시킨 것으로 보인다.
□ 정치 혼란 꼬집은 대자보가 나붙어
이 곳에선 조선시대에 정미사화(丁未士禍)의 발단이 된 '양재역 벽서 사건'이 일어났다.
인종 원년(1545)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있은 후, 인종이 갑자기 죽고 어린 명종이 즉위하매, 그 어머니 문정왕후(文定王后) 윤씨가 정권을 잡고 나라를 다스렸다.
명종 2년(1547) 9월에 부제학 정언각(鄭彦慤)이 그 딸을 전라도로 전송하기 위해 이 곳 양재역까지 왔다가 벽에 붙은 글씨로 써 놓은 것을 보게 되었는데, 그 내용은 이러하였다.
"여자 임금이 위에 있고, 간신 이기(李 )가 아래에서 국권을 농락하여 나라가 망하게 될 것을 서서 기다리게 되었으니 이 어찌 한심하지 않겠는가."
크게 놀란 그는 바로 선전관 이로(李櫓)와 더불어 임금께 알렸다. 궁중에선 이를 이기, 정순붕(鄭順朋) 등 을사사화의 남은 무리들이 한 짓이라 하여 마침내 봉성군(鳳城君) 원(沅), 송인수(宋麟壽), 이약수(李若水)를 죽이고, 이언적(李彦迪), 유희춘(柳希春), 백인걸(白仁傑) 등 수십 명을 귀양보냈다.
양재역의 벽서 때문에 일어난 이 사건을 '양재역벽서의옥(良才驛壁書獄)'이라고 한다. 이것이 을사사화의 연장인 정미사화이다.
말죽거리의 정확한 위치는 서초구 양재동의 양재초등학교 북동쪽, 지금의 극동빌딩 근처. 이 곳은 남쪽으로 내(양재천)를 끼고 있고, 그 서쪽으로는 우면산의 산줄기가 머리를 숙이고 있는 곳이다. 너른 들이 펼쳐진 곳으로, 옛날에는 군데군데 많은 마을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조선시대뿐 아니라 그 이전에도 남도행의 중요 길목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고려 면종 때 시인인 김극기(金克己)의 시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한길 석양에 망을 믿어 돌아가니
가을바람이 홀연히 일어나
초나라 사람이 슬프도다.
푸른 산과 푸른 땅은 처량한 땅이요,
붉은 잎과 누런 꽃은 쓸쓸한 때로다.---'
한문학자이기도 한 노봉(老峰) 김극기는 광주(廣州)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문장에 조예가 깊었고, 진사에 오른 뒤에도 정치 생활을 원하기보다는 산림 속에서 시를 읊기를 즐겼다.
문헌을 통해 나타나는 이 일대의 옛 마을로는 지금의 양재동에 '말죽거리' 외에 '비석거리', '잔디말'이 있었고, 도곡동엔 '독부리(독구리,독골)', 역삼동엔 '작은말죽거리', '웃방아다리', '아랫방아다리' 등의 마을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 옛날 행인들이 들러갔던 그 마을, 그 자리엔 고속도로가 지난다. 큰 건물 등이 우뚝우뚝 들어섰다. 옛날 말의 울음이 크게 울려 퍼졌을 그 유서 깊던 곳이 어디인지 정확히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그러나, 이 곳의 역 때문에 이름이 붙은 역삼동에 '강남', '역삼', '선릉역' 등 지하철 역이 셋 들어섰다. '역삼(驛三)'이란 땅이름이 기차게도 잘 맞아 떨어졌다. 즉, 역 근처에 마을이 셋 있어서 붙은 이름인 '역삼'이 '지하철역이 셋'이라는 뜻의 '역삼'으로 옮겨간 셈이다.
이래서, 땅이름은 가끔 예언성을 지녔다는 얘기를 듣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