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뜽금없이

작성자thomas|작성시간10.09.15|조회수26 목록 댓글 0

성 십자가 현양 축일>

 

<뜬금없는 십자가>

 

화폐가 원활치 않고 쌀이 화폐를 대신하던 시절에, 그날 그날의 쌀의 시세를 정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요즘 말로 치자면 거간꾼이나 중개업자들이 모여서 쌀의 시세를 ‘띄운 금’, 곧 ‘뜬금’을 정하여 그것을 기준으로 쌀을 매매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날에 유통되는 모든 곡물은 바로 이 뜬금에 따라 거래되었던 것이고 그날의 뜸금을 정하는 절차와 제도를 중시여겨 뜬금이 없이 거래되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단도리’를 했다는 데에서 유래되어 훗날 예고 없이 엉뚱하게 붉어져 나오거나 일어나는 일들을 두고, ‘뜬금없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살다보면 뜬금없는 일들이 있습니다. 얼마 전에도 어르신들과 환담을 나누던 차에 뜬금없는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북한에 쌀 지원한다는 소식으로부터 시작된 담소는 천안함 이야기를 거쳐 얼마 전 북으로 가서 한반도기를 흔들고 돌아온 ‘정신 나간’ 목사의 이야기로까지 이어졌습니다.

 

보통 이런 레파토리에는 괜시리 젊은 신부가 끼어들어 애먼 소리 늘어놓았다간 여엉 그 자리의 끝이 개운치 못한 법이라 그저 묵묵히 듣고 있는데, “종북주의자, 빨갱이, 좌파니 하는 것들은 싸그리 잡아다가, 그 뭐야? 삼청교육대, 그거 다시 만들어야 돼! 거기에다가 집어넣고 정신 개조 시키지 않으면 안돼!”하시는 소리를 듣게 된 것입니다.

 

야, 정말 오래간만에, 뜬금없이 들었습니다. 삼청교육대! 하지만 뜬금없는 그 소리에 순간 등골이 서늘해집니다. 여러분들은 독일에서 일하시느라고 삼청교육대를 잘 모르시지요? 예, 모르시는 것이 좋습니다.

 

12.12 불법적인 정권 찬탈의 주범들이 소위 말하는 ‘국보위(국가 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합니다. 이 국보위를 통해 자신들의 불법적 쿠데타를 강제하던 그들은 이른바 ‘사회 정화’와 ‘정의’를 세우겠다는 이름으로 ‘계엄포고 제13호’를 발동시키고 80만 명의 군과 경찰들을 대거 투입하여, 1980년 8월 1일부터 1981년 1월 25일까지 총 6만 755명을 법원의 영장 발부도 없이 검거작전에 돌입하지요.

 

그 중에 A급으로 분류된 3천 252명은 재판에 회부됐으며, D급 1만 7천 761명은 훈방 및 환자 처리로, 그리고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한 B급과 C급 3만 9천 742명은 ‘순화교육’이라는 미명하에 강제로 군부대에 압송되어 삼청교육을 받아야 했으며 이 과정에서 구타와 학살 그리고 실종은 비일비재하였고, 지금도 정신병자가 되거나 가족과 생이별해 살고 있는 이들이 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 가운데 35.9%가 ‘불량배 소탕’이라는 명분과는 달리 전과사실이 전혀 없던 노동자, 농민, 대학생과 여성 319명, 심지어 17명의 중학생까지 잡혀 들어가 모진 신체적 정신적 고문을 당해야 했던 것이, 삼청교육입니다.

 

가장 불법적인 정권이, 뜬금없이 정의구현을 외친 것이지요. 세상을 향해 정의 구현을 외치는 것이 자신들의 부정과 불법을 은폐하는 최적의 조건이라고 믿었던 것이고, 자신들의 부정과 불법에 저항하는 사람들 잡아다 족치는 그야말로 ‘촌놈 겁주기’ 한 것이 <삼청교육대>였는데도 불구하고, 왜 그 삼청교육대가 뜬금없이 다시 등장해야 하는 걸까?

 

좀 슬픈 결론을 먼저 말씀드리자면, 이것이 대한민국 어른들의 십자가입니다. 빨갱이에 대한 뼈저린 체험뿐만 아니라, 그것을 주입시키고 강제시킨 불법적인 권력자들의 ‘방식’에 길들여져 있는 것입니다. 누가 빨갱이를 만들었습니까? 세상은 모두가 좌파가 되거나 혹은 모두가 우파가 될 수 있는 곳도 아닙니다. 아니 하느님 나라는 그런 것과 전혀 무관한 나라입니다. 그것 모두 우리가 만들지 않았습니다. 권력자들이 만들어놓은 것입니다. 그들이 분열시킨 것이고 자신들의 권력을 위해 획책한 술책들이었습니다.

 

갈라진 것은 무엇입니까? 민중들입니다. 북이나 남이나 권력자들은 여전히 떵떵거립니다. 가장 불의한 세습 정권이 대를 이어가며 인민들을 내리누르고 있고, 제가 볼 때는 사깃꾼에 가까운 대통령과 그 모리배들, 청문회를 열었다하면 위장전입, 땅 투기, 쪽방투기 뭐 하나 안 걸리는 것 없는 위인들끼리 모여서 뜬금없이 ‘공정사회 실현’을 외치고 있습니다.

 

뜬금이 없을 때에는 생각의 지평을 좀 넓힐 필요가 있습니다. 목사 한 사람 올라가서 ‘한반도기’ 흔든다고 통일이 오는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대한민국이 망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그런 사람 하나가 있을 뿐입니다.

 

오히려 더 위험한 것은 국가의 정체성 운운하며 저는 오만 짓꺼리를 다 한 인간들이 법치를 강요하고 삼청교육대로 입을 막으며 언론을 장악하고 사람들 생각을 한 방향으로만 ‘전체화’시키려는 그 불순한 의도가 더 위험합니다.

 

우리들의 십자가는 아직 멀었습니다. 아직도 우리는 이별을 해야 할 것입니다. 아직도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욕해야 할 것이고, 으르렁거리고 싸워야 할 것입니다. 저마다의 생각으로부터 움직이지 못하는 우리 이 시대의 십자가...

 

뜬금없이 흐른 강론을 바로 잡을 때가 되었습니다. 제 강론의 결론은 이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바로 십자가들입니다. 내가 살아온 이 인생들 말입니다. 그리고 그 인생의 결론으로 내가 여전히 부여잡고 있는 나라는 이 초상이 바로 나의 십자가입니다.

 

버리지도 못하고 버릴 수도 없는 상처와 정형화되어버린 성질들,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하고, 나와 다르면 참지 못하며, 왜 사람이, 왜 세상이, 왜 저 인간은 저래야만 하는지를 끝내 받아들이지 못한 채, 서서히 ‘박제’가 되어가는 내 자신이, 그렇습니다. 나의 십자가입니다.

 

처음에는 저도 고통이 십자가고 병고가 십자가고 눈물이 십자가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아닙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요. 내 자신이 바로 나의 십자가입니다. 그 어떤 것 하나도 바꾸지 못하고 변화시키지 못하며, 같은 성질과 같은 죄와 같은 몸에 번번이 걸려 넘어지고 있는 내 자신, 그러면서도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깨닫고 있지 못하는 바로 내 자신이 나의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이 십자가를 지고 갈 것입니다. 타인이 십자가가 아닙니다. 내 자신이 바로 나의 십자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나와 함께 동행하십니다. 나보다 나를 더 인내하시고 나보다 나를 더 참아주시며 오늘날까지 그분이 이 십자가인 나에게 <매달려 계십니다!>

 

십자가 현양 축일입니다. 뜬금없는 축일입니다. 십자가를 현양하다니... 세상에 현양할 것이 없어서 수치스런 사형도구를 현양하는 종교가 어디 있단 말입니까? 하지만 이 속에 하느님의 신비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이 시대의 십자가, 그리고 나의 십자가를 놓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은 세상이 떠드는 정의와 공정 가운데 계시는 분이 아니라 가장 아픈 곳, 가장 서럽운, 하지만 가장 선한 양심으로 하느님 마음을 닮으려는 그 곳에 지금도 십자가로 서 계십니다. 그리고 그 하느님은 그대로 나에게 매달려 계십니다.

 

내가 단절시키고, 내가 파괴시키고, 내가 내 것만을 고집하여 기어이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모든 것들로부터 하느님은 외로운 십자가로 내 안에 서 계십니다. 현양하려거든 바로 그 하느님에게로 다시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것들에 너무 화내지도 마시고 너무 빠지지도 마십시오.

나의 것들에 너무 실망하지도 마시고 너무 탐닉하지도 마십시오.

 

하느님의 것들에 매달리십시오. 이것이 십자가 현양축일의 정신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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