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 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루카 9, 23-24)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救世主)로 믿고 사는 사람들로 여니 사람들(비신자: 非信者)과는 그 삶이 같지 않다. 그렇다고 하여 사는 일반(一般) 사회적(社會的)인 삶이 다르다는 것이 아니고 사는 목적(目的)이 다르다는 것이다. 먹고 사는 것에는 다름이 없고, 입고 사는 의복(衣服)에도 같은 것을 입고 살지만, 그 질(質)에 있어서는 같지 않다.
입는데 사치(奢侈)하게 않으며, 먹는데 과욕(過慾)을 부리지 않는다. 물질적(物質的)으로는 이 세상살이에 목적을 두지 않으므로 과욕을 부리지 않으며, 검소(儉素)하고 겸허(謙虛)하게 살면서 영신적(靈神的)인 삶을 그 첫째로 한다. 인생의 목적이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그의 십자가의 길을 따라감을 통하여 그를 따라간다.
즉 고통(苦痛)을 피(避)해 가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분부(分付)를 따라 십자가를 지고 그 뒤를 따르는 것이다. 비신자들이 볼 때에는 바보스럽기까지 할 정도(程度)로 그의 말씀을 글자 그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인 것이다. 왜 그런가? 그는(예수 그리스도) 우리 한국(韓國)민족(民族)의 선조(先祖)도 아니고 시대적(時代的)으로도 2천여 년 간(年間)이나 차이(差異)가 있는데 그가 가르친 길을 따라 살다니? 그러나 인생(人生)이 무엇이냐? 할 때에 그분의 가르치심이 가장 합리적(合理的)이고 맞는 진리(眞理)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 확신(確信)이 아니고서 그의 가르침을 따라 두 번도 아니고 단한 번뿐인 일생(一生)을 통째로 바친다는 것은 미련(未練)해도 그렇게 바보스러울 수가 없는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는가? 사람에게는 불사불멸(不死不滅)하는 영혼(靈魂)이 있고, 우주(宇宙) 삼라만상(森羅萬象)을 창조(創造)하신 조물주(造物主)가 계시고, 그 조물주(하느님)께서 계시(啓示)로써 복음(福音)을 선포(宣布)하셨기에 그를 안 믿을 수 없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은 세상의 어느 누구의 가르침보다도 진리임에 틀림이 없다는 증거(證據)로 그분은 십자가(十字架)에 정사(釘死)로 한 후에 3일 만에 스스로 부활(復活)하심으로 하느님의 아들(천주성자: 天主聖子)이심을 증거 하였기에 그로인(因)하여 믿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자기 생명을 자유자재(自由自在) 좌지우지(左之右之)할 수 있는 분이면 전지전능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리고 또한 그의 가르치심에 조금도 진리에 어긋남이 없으니 믿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 예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시자, 베드로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嚴重)하게 분부(分付) 하셨다.(루카 9, 20-21)
우리에게도 같은 질문을 하신다면, 나는 어떻게 대답을 할 것인가? 베드로와 같이 정확(正確)한 대답을 할 것인가? 글쎄요? 하면서 부정확(不正確)한 대답이나 모른다는 대답을 할 것인가? 각자의 처지에 따른 대답을 할 것이다. 그러나 주님, 저는 당신을 신뢰(信賴)하며, "당신은 저의 하느님!" 하고 아룁니다. 당신의 손에 제 운명(運命)이 달렸으니, 원수(怨讐)들과 박해자(迫害者)들의 손에서 저를 구원(救援)하소서. .... 거만(倨慢)하여 업신여기고 의인(義人)을 거슬러 파렴치(破廉恥)하게 지껄이는 거짓된 입술들을 잠잠(潛潛)하게 하소서.(시편 31, 15-19). 이렇게 생각하며 우왕좌왕(右往左往)하지 않는 확고(確固)한 신심(信心)을 가지고 일체(一切) 부동(不動)한 걸음으로 앞만 보고 가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