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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가 우리를 속이는 방식

작성시간13.01.02|조회수146 목록 댓글 0

로마서 제7장 12번(10-11절)

율법과 생명

“생명에 이르게 할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현대인들은 복음 외에 성경에 다른 말씀들에 대해서는 별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나무는 그 줄기만 안다고 해서 그 나무를 아는 것이 아닙니다.

나무를 알려면 그 뿌리도 알아야 그 가지도 알아야 하고 그 꽃과 열매와 잎도 알아야 그 나무를 아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복음을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것과 그분이 지신 대속의 십자가와 부활만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것 마치 복음에 대해서 초등학생과 같은 것입니다.

초등학교만 졸업하면 무식하다고 하잖아요?

우리도 복음의 아주 기본만 알고 있으면 복음에 대해서 초보자라는 말을 들을 수 밖에 없지요.

바울은 율법의 성격과 기능과 목적에 대해서 아주 중요한 진술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기능들을 아는 것은 복음을 올바로 이해하는 데 진수가 되는 주제입니다.

 

바울은 9절에서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에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하는 말을 10-11절에서 자세히 진술하고 있습니다.

“생명에 이르게 할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하는 것입니다.

“생명에 이르게 할 계명” 이라는 표현을 생각해 봅시다.

만일 사람이 그 계명을 지킬 수만 있다면 그 계명으로 인해 생명에 이르게 되었을 것이다. 하는 뜻입니다.

율법은 하나님 나라의 생명을 가진 자들이 사는 삶의 방식들입니다.

또한 율법은 거룩이 무엇이며, 행복이 무엇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무엇임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9장 5절에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

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는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만일 지키면.” 이라는 말씀에 주목해야 합니다.

조건적인 약속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8장 3절에서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율법을 행할 수 없습니다.

 

이제 이 진술을 생각해 봅시다.

“생명에 이르게 할 계명이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사도 바울은 율법이 생명과 행복과 거룩함과 기쁨을 주기는커녕 그 반대로 죽음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그에게 실패와 그의 악한 성질을 보여주며 그의 안에 있는 죄에게 불을 붙여 주었고, 그래서 그는 전적인 무능을 밝혀 주었고 그를 완전히 비참한 상태로 남겨 두었습니다.

율법은 그가 어떤 사람인가를 여실히 보여 주었습니다.

사도가 9장 31-32절에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 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이스라엘이 의에 이르지 못한 것은 율법으로 의를 얻으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56절에서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을 율법이라.”

사망의 쏘는 것이란 말은 사망에 들어가게 하는 독침은 죄라는 것입니다.

죄라는 독침을 맞게 되면 사망으로 들어갈 수 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죄 지은 자를 사망가운데 죽게 하는 것은 율법의 판정이라는 것입니다.

죄에 대해서 사망으로 판정하는 권위는 율법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8장 2절에서 “율법은 죄와 사망의 법”이라고 말합니다.

사도는 다시 설명을 계속해서 “생명에 이르게 할 계명이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이는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가 계명으로 말미암아 기회를 타서)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도다.”

 

바울이 왜 이렇게 죄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설명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지금도 우리는 죄 짓고 있는 죄를 죄로 규정하고 있는 것은 율법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적인 죄를 아는 것이 성경적인 구원을 이해하는데 절대로 중대한 것입니다.

우리가 죄에 대해서 분명하지 않으면 구원의 방식에 대해서도 분명하지 않게 됩니다.

바울은 오래 동안 율법과 죄에 대하여 눈멀고 무지 했으며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그리했습니다.

바울은 모든 유대인들이 바로 그런 경우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율법과 죄에 대해서 그토록 명확히 밝히는데 많은 관심을 쏟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8절에서 이미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도는 8절에서 죄가 그 안에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는 자기 안에 있는 죄의 능력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은 그것은 하나님 다음으로 가장 큰 세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도는 9절에서 죄의 또 다른 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전에는 자기 안에 죄를 몰랐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였도다.” 죄가 계명을 이용해서 완전히 자기를 속였다는 것입니다.

죄가 그를 철저하게 속인 것이라고 합니다.

사람은 어떻게 죄 짓게 되는가?

사도가 고린도후서 11장 3절에 “뱀이 간계로 하와를 미혹케 한 것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여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주께 대한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면 부패하여 죄 짓게 됩니다.

다시 그는 에베소서 4장 22절에서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라.”고 권면합니다.

우리의 육신의 욕심에 따라 살면 죄 짓게 됩니다.

히브리서 3장 13절에서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하게 됨을 면하라.”고 하십니다.

죄의 유혹이 강하면 죄 짓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가 말하는 적그리스도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데살로니가 후서 2장 7-10절에 “불법이 이미 활동하였으나 지금 막는 자가 있어 그 중에서 옮길 때까지 하리라, 그 때에 불법한 자가 나타나리니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저를 죽이시고 강림하여 나타나심으로 폐하시리라.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

말세에 나타날 적그리스도에 대한 바울 사도의 말입니다.

오늘날 이것을 우리가 목격하고 있지 않습니까?

“불의의 속임”이것으로 우리는 적그리스도의 정체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거짓된 것은 그 속에 있어 속임으로 행하는 것을 그가 적그리스도임을 아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에서 말하는바 죄는 권능이 있을 뿐 아니라, 교활하며 우리를 기만하고 유혹하며, 그릇 인도하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죄는 우리들 속에서 계속 기만하고 있습니다.

술 중독자는 그것에서 헤어 나오고 싶지만 그것을 계속합니다.

죄를 지은 다음에 찾아오는 양심의 가책과 슬픔과 고통 고난을 체험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것입니다.

죄는 계속되고 점점 증가하고 있으며 넘치고 있습니다.

우리를 속이는 죄의 본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였도다.” 어떻게 죄가 속입니까?

첫 째는 죄가 우리로 하여금 율법을 잘 못 사용하도록 속인다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1장 8절 말씀처럼 율법을 법있게 쓰면 율법은 선한 것입니다.

그러나 죄가 와서 우리로 하여금 율법을 불법으로 사용케 합니다.

죄가 율법을 불의하게 사용하도록 하는 방식은 죄가 우리로 하여금 행동이 문제이지 상상이나 욕망은 하들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설득하는 것입니다.

죄는 우리를 설득하여 만일 어떤 악한 행동을 하지 않으면 죄로부터 자유로운 것이라고 믿게 합니다.

사람에게 행위들 외에는 아무것도 문제 될게 없다고 가르칩니다.

어떤 죄행을 하지 않는 한 율법을 지키고 있는 것이며 하나님 보시기에 의로운 것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죄가 나를 속였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3장에서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했습니다.

바울 사도가 죄에게 속고 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율법은 어떤 일을 행하거나 하지 않을 일을 하지 않는 한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는 것임을 의미합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처럼 죄는 그로 하여금 율법을 잘못 사용하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두 번째 죄는 또 다시 다른 방법으로 역사합니다.

우리가 죄에 빠질 때 우리의 양심이 강하게 고발하고 율법도 우리의 죄를 지적할 때 죄는 그의 전술을 완전히 바꿉니다.

죄는 우리에게 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 그것은 옳다. 너는 죄지었다. 너는 실패하였어, 너는 그것을 어겼어, 너는 완전히 절망적인 죄인이야.”

너는 아무리 회개해도 곧 죄 짓고 말잖아 너는 아무래도 안 돼 너는 죄에 대해서 무능해 너는 죄 짓지 않으려고 해도 소용없어 너는 절망적이야,

그러니 마음이나 편하게 죄를 지어라,

그래서 두 번 세 번 열 번 죄를 짓습니다.

죄가 우리에게 오는 방식이 이러합니다.

죄가 우리를 침체시킨 후 우리를 설득하여 죄짓게 합니다.

 

세 번째는 죄가 사용하는 또 다른 방식은 “무율법 주의입니다.”

이것은 모든 것 중에서 가장 무서운 죄의 모략입니다.

그것은 이렇게 역사합니다.

우리는 죄 지었으며 율법을 어긴 것을 알았습니다.

죄가 빛의 사자로 와서 말하기를 “너는 죄를 지었고 율법을 어겼다. 그러나 걱정할 것 없다. 죄가 넘치는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친다.”는 것을 알잖아, 전혀 염려할 필요가 없다.

너는 구원 받은 자이며 은혜 아래 있으니 그러므로 무엇을 행해도 문제될 것이 없다.

무율법 주의는 교회를 괴롭혔던 가장 잔인한 골칫거리였습니다.

초대교회에서도 그것으로 고통을 당하였고, 그 후에도 계속 그러합니다.

사람들은 칭의 교리는 우리가 지금 은혜 아래 있으니 우리의 행동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은혜 아래 있고 법아래 있지 않으니 문제 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의 기만성은 우리로 하여금 율법을 잘못 사용하고 잘못 취급하게 합니다.

 

네 번째는 죄는 율법에 대해서 적대감을 만들어서 우리를 속이는 것입니다.

죄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우리를 대적하고 계시다고 느끼게 합니다.

마귀가 하와에게 행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더냐?” “그래 네가 하나님 같이 되는 것을 원치 않으시는 거야.”

“하나님께서 엄격하고 냉정한 율법을 제정하신 것은 너희가 하나님 같이 되는 것을 원치 않으시기 때문에 율법으로 막는 거야” 이렇게 하나님에 대해서 적대감을 갖게 하며 율법을 어기게 하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 죄는 또한 우리로 하여금 율법의 요구는 매우 우리에게 부당하다고 느끼게 합니다.

율법은 우리가 원하는 것은 모두 못하게 하는 매우 부당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율법은 좁고 편협하며, 하고 싶은 것은 모두 하지 말라고 하며 하기 싫은 일만 시키는 것처럼 보이게 합니다.

그렇게 해서 죄는 우리로 하여금 율법을 미워하게 합니다.

우리의 율법에 대한 비분감과 증오 때문에 율법이 무엇을 하지 말라고 하면 죄는 우리 안에서 그것을 하고 싶은 욕망을 창조합니다.

 

여섯 번째 죄는 매우 교활한 방식을 통해서 죄가 우리에게 오고 우리를 어르고 추겨 세웁니다.

그래서 우리 스스로 우리 자신을 매우 높게 생각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죄는 왜 우리가 율법에 붙잡혀 있어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마귀가 하와에게 행한 바와 똑 같습니다.

“하나님이 너희더러 그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다른 말로 해서 “왜 하나님이 그러한 제한을 두셨느냐?” 왜 너희하고 싶은 일을 제지당해야 하느냐? 왜 너희가 해도 좋은 일에 한계가 있느냐?

그것은 너희 인간의 본성에 모독적인 것이다.

너희는 자유를 위하여 지어졌다.

너희 스스로 해 나갈 수 있으며 너희 자신의 삶을 지배할 수 있다. 라고 합니다.

마귀는 아직도 그렇게 말합니다.

마귀는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은 자발적인 존재이며 스스로와 세상을 지배할 수 있으며 그 밖에 어떤 것도 필요치 않다고 확신시킵니다.

죄는 말하기를 네 운명은 네가 만드는 것이라고 합니다.

죄의 교활함을 보십시오.

 

일곱 번째 죄는 율법이 우리에게 어떤 일들을 금지시키는 것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마귀는 “자 보라 율법이 너희 인간을 분명히 반대하고 있어 율법은 너희에게 너희 속에 가지고 있는 능력들과 기능들을 사용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지 않느냐?

너희는 어떤 본능들을 가지고 있으며, 충동과 자극을 가지고 있다.

분명히 그것들은 너희를 위해 있으며 선한 것들이야.

그런데 왜 너희는 그것들을 사용하지 않느냐?

그것들은 오늘날의 대중적인 교훈입니다.

죄책을 느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죄에 대해서는 말도하지 않으면서 죄책감은 우리의 인격을 파괴하니 죄책감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현대정신을 가장 대중적으로 나타내는 것들 가운데 하나는 ‘자기표현’이라는 이단입니다.

그것은 본능이 주인 노릇하게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지 하라는 것입니다.

너희의 내적힘을 충만히 나타내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그것들이 결코 억압당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건강을 해치는 불행을 가져다준다고 합니다.

그것들의 문제를 다루는데 있어서 많은 정신 의학자들이 그들에게 성경에 금지된 것을 하라고 용기를 북돋아 주었습니다.

속에서 올라오는 분을 그대로 분출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들의 고통은 성경의 가르침으로 인해 그들의 개성을 억압했기 때문에 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죄는 교활함은 자기 자신을 추켜세우도록 합니다.

또한 그들은 자기 내부에 있는 생각과 감정들을 그대로 표현하라고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여덟 번째 우리로 하여금 죄에 대해 속게 만듭니다.

우리는 창세가 3장 6절에서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하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아름답고 맛있게 생긴 과일을 먹지 말라고 한 것이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동산에서 가장 좋은 과일이니까 그 맛도 가장 좋을거야.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것을 금지시키다니.

바울은 말하는 요지는 죄는 죄를 매력적으로 보이게 함으로써 죄 짓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바울 사도가 말하는 “죄가 나를 속였다.” 하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우중충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대도시의 아름다움을 보십시오.

미소를 지으며 활발하게 활동하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의 아름다운 의상과 빛나는 눈들을 보십시오.

그것들이 아름답고 훌륭하게 보이지 않습니까?

시골에서만 묻혀 살던 사람이 서울의 생활을 보고 “왜 이런 삶을 몰랐을까? 참 놀랍구나, 얼마나 매력적으로 아름다운가. 보기에 얼마나 유쾌한가. 이것이 진짜 삶이다.” 그것들은 모두 매력적이고 재미있고, 크고 고상하고 자유롭습니다.

경건하고 성경적인 삶과는 아주 대조적입니다.

더 나아가서 죄는 그 결과들에 대한 어떤 생가들도 하지 못하게 합니다.

죄는 그 결과들은 왜곡시킵니다.

여러분은 마귀가 하와에게 하는 말을 기억합니까?

“만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가 확실히 죽게 될 것이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느냐?” “너희는 결코 죽지 않는다.” 마귀는 극도의 독단과 확신을 가지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죽었습니다.

베드로후서에서 경건치 않는 자들은 언제든지 같은 말을 한다는 것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주의 오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너희 전도자들을 핍박과 환란과 징벌과 재앙을 받고 있다. 그러나 너희는 수세기 동안 그 일을 하고 있다. 그런데 세상은 언제나 그 대로 서 있다. 그의 오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벧후 3:1-11)

죄는 그 결과와 열매에 대해서 속입니다.

그것을 우리로 하여금 좋지 않는 일은 전혀 없다고 안심시킵니다.

지옥에 관한 생각은 더더욱 못하게 합니다.

 

지옥은 현대인의 마음으로는 생각할 수조차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의 하나님에게는 전혀 맞지 않는 애기라고 일축합니다.

빛의 사자 모양을 하는 죄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는 많이 말합니다.

오직 사랑뿐입니다. 심판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하십시오.

결국 여러분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입니다.

죄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원하는 데로 살며 죄에 대해서는 생각할 필요도 없고 양심의 가책도 가질 필요가 없다고 우리를 설득시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죄를 용서 받았기 때문에 죄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할 필요가 없다고 우리를 설득합니다.

죄가 우리를 이렇게 속이며 죄 짓게 합니다.

2013, 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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