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설교모음

베드로의 통곡

작성자황성재|작성시간14.07.13|조회수212 목록 댓글 0

베드로의 통곡

2014, 7, 13

요18: 12-14, 25-27

오늘 본문의 말씀은 베드로 사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한 사건입니다.

베드로 사도처럼 주님을 믿고 주님을 사랑하고 주를 위해서는 자기 목숨도까지도 드리고자 하는 사도가 그뿐 아니라 또한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자요 주님께 인정을 받은 사도가 위기에 처하자 주님을 부인하는 것을 보면 그것도 주님을 저주하면서까지 부인하는 것은 보면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동일한 내용이 기록된 마태복음 26장 31절에서 35절까지의 내용을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하시면서 “목자를 치면 양들이 다 흩어지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때 베드로 사도가 대답하기를 “다 주를 버릴찌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하고 대답했습니다.

베드로의 장담에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또 말하기를 “내가 주와 함께 죽을 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하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제자들도 다 그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이렇게까지 장담한 사도가 몇 시간도 안 되어 자기도 잡히게 될 위기를 만나자 주님을 저주하면서까지 부인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베드로를 비난하지 못합니다.

우리 자신들이 바로 그렇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내용은 다른 공간복음에 기록된 내용도 참고 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12절에 “이에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잡아 결박하여”

당시 천부장은 이스라엘에 주둔한 로마군의 최고위 지휘관이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체포하러 온 것입니다.

자신의 음성만으로도 그들을 엎드려지게 하시는 큰 능력을 가지신 주께서 그들에게 잡혀 가시는 것입니다.

주께서 그들에게 굴복하여 잡혀 가시는 것이 주님의 뜻이었다면 무엇 때문에 그런 능력을 나타내 보여 주셨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지 않습니까?

두 가지 의미에서 그러했습니다.

첫 째는 그것은 주께서 연약하시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들의 힘에 굴복하여 잡혀 가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두 번째는 주님께서 그들에게 잡히신 것은 자발적으로 죽음을 당하셨다는 것을 입증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러 오셨다면 그것은 억지가 아니라 자발적인 것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께서 스스로 원수들에게 묶이신 것은 우리의 영혼이 죄와 사단의 결박에서 풀려나도록 하려는 뜻에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주께서 원수들에게 자발적으로 묶이셨기 때문에 우리가 원수들의 결박에서 풀려난 것입니다.

13절에 “먼저 안나스에게 끌여 가니 안나스는 그 해의 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라.”

안나스는 바로 가야바 이전의 제사장이었으며 가야바의 장인이었습니다.

요한복음을 무심코 읽으면 먼저 이전 제사장이었던 안나스의 집에 끌려가서 1차 심문을 받으시고 그 다음 제사장 가야바의 집으로 끌려가서 2차 심문을 받은 것처럼 보게 되는데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을 참고해 보면 베드로는 같은 마당에서 주님을 세 번 부인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로 보건데 안나스와 제사장 가야바는 그 때 같은 건물 안에 있었거나 아니면 한 마당을 둔 두 건물이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아마 대제사장이 회의를 소집할 때까지 주님을 안나스 앞에 먼저 간단한 심문을 받게 했을 것입니다.

“가야바는 그 해의 대제사장이라”고 했습니다.

이 내용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대제사장의 임기가 1년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대제사장의 임기는 그가 죽을 때까지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을 통치하는 로마의 총독들이 자기가 원하는 자들로 임으로 대제사장들을 바꾸어 임명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로마의 지배하에 있었고 더욱이 이방인의 총독이 하나님께서 임명하신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직을 좌지우지 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는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버리셨기에 이런 비참한 일이 생긴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리면 이런 비참한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14절에 “가야바는 유대인들에게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권고하던 자러라.”

이 말씀은 요한복음 11장 5절에서 기록된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무덤에 장사되어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불러내 살리신 이 기적을 목격한 많은 유대인들로 인하여 이 표적이 유대인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많은 이들이 예수는 그리스도로 믿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공회로 모여 예수를 그대로 두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을 것이고, 이로 인해 반란이 일어나면 로마인들이 그들의 땅과 민족을 빼앗고 더욱 탄압하리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 때 그 해 대제장인 가야바가 하는 말이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라는 말했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 51절과 52절에 보면 가야바가 그렇게 말한 것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의 대제사장으로써 온 세상에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해서 예수께서 죽으셔야 할 것을 하나님께서 그의 혀를 붙잡아 미리 말하게 한 것이라고 사도 요한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마치 민수기 24장에 보면 모압왕 발락은 모압을 위하여 유대인들을 저주하라고 선지자 발람을 보냈는데 발람은 그 혀가 여호와 하나님께 붙잡혀 오히려 이스라엘 민족을 축복할 수밖에 없었던 것과 같은 경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대제사장 가야바를 통해서, 그 원수의 입을 통해서 예수께서 많은 사람을 위해서 죽으셔야 할 것을 미리 예언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15-16절에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한 사람이 예수를 따르니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이라 예수와 함께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가고 베드로는 문밖에 서 있는지라 대제사장을 아는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문 지키는 여자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오니”

베드로와 다른 제자가 군사들에게 잡히신 예수님을 따라 대제사장의 집 앞까지 따라와서 그 다른 제자는 대제사장 집에 들어갔는데 베드로는 들어오지 못하고 문 밖에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다른 제자가 문지키는 여종에게 말해서 베드로도 문안으로 들어오게 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다른 제자”라고 하였는데 그 또 다른 제자가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많은 학자들 간에도 여러 설이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장사 지낸 유대인의 공회회원인 아리마데 요셉, 혹은 요한복음 3장에 나오는 니고데모일 것이다 하는 설이 있습니다.

그러나 대다수 학자들은 요한으로 봅니다.

사도 요한은 자기가 기록한 요한복음에 자기 이름을 직접 기록하지 않고 주님이 사랑하는 제자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칼빈은 사도 요한은 천한 어부 출신으로 대제사장과 가까운 친분을 쌓고 있다고 생각하기 어렵기 때문에 사도 요한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다른 제자가 사도 요한으로 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는 요한 사도가 만약 요셉이나 니고데모라면 다른데서는 기록하고 있는 이름인데 여기서도 그 제자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을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먼저 17절에서 베드로가 주님을 한 번 부인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문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하기를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하고 묻자 베드로는 나는 아니라 하고 자기는 주님의 제자가 아니라고 부인했습니다.

앞에서도 말씀 드렸습니다만, “주께서 제자들에게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고 말씀하실 때 베드로는 말하기를 “모두가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하고 대답한 사람이었습니다.

주께서 그에게 다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주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내가 주와 함께 죽을 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하고 대답 하였습니다.

결코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 지언정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말한 베드로가, 결코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다던 그 베드로가 단 몇 시간도 안 되어 주님을 부인한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베드로와 같은 비열하고 말만 앞세우는 믿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신 것과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을 위해 대속의 십자가를 지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과 또 그가 주님으로부터 보고 들을 모든 것을 온 세상에 전할 것을 부탁하고 십자가를 지러 가신 것입니다.

하지만 도대체가 믿을 사람들이 못 되지요?

정말 이런 사람들만 믿고 주의 말씀과 주님이 행하신 모든 것을 전할 사도로 남기시고 하나님 나라에 올라가셨다면 그 모든 것을 실패했을 것이 너무나도 뻔하지 않습니까?

죽은 지언정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장담하던 그가 위험에 처하자 그렇게 금방 마음을 바꾸는 그에게 주께서 행하신 모든 것과 말씀하신 모든 것을 맡기신 것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들만이 주님을 3년 반 동행하면서 주님이 하신 말씀과 행하신 모든 것을 목격한 자들입니다.

우리 주님은 그들의 인성과 육신을 믿으신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보내실 성령님의 생명 되심과 성령의 지혜와 능력이 그들 안에서 역사하실 것을 믿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에게 내가 아버지께 올라가면 성령을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고 그 약속하신 성령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들은 주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받고 새 생명의 신령한 성품과 능력을 받아 위대한 사도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베드로와 같이 무식하고 자기 목숨을 위해서는 거침없이 주님을 배반하고 부인했던 어부들이 성령을 받고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자기 목숨을 바쳐 복음을 온 세상에 전파하고 그 복음으로 말미암아 인류의 문화와 사상과 정신과 풍습과 삶을 바꾸어 놓은 위대한 사도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처럼 인류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친 사람들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도 그들이 전하는 복음으로 말미암아 새 생명을 얻고 그리스도인으로써 새로운 삶을 살고 있습니다.

진실로 복음을 믿고 성령으로 인하여 새 생명을 받은 것을 아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자기 육신의 목숨을 주께 바치지 않는 사람이 오히려 이상할 것입니다.

성령님은 변덕스럽고 무식한 사도들을 위대한 하나님의 사자로 변하게 하셨던 것처럼, 온전히 죄인이요 오직 자기만을 위해 사는 우리도 성령님의 신령한 성품을 받고 변하여 의롭고 정결한 삶을 살게 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이 성령님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그들 안에 없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말씀하시고, 그리고 성령님이 그 안에 계시면 스스로 안다고 말씀하셔도 자기 안에 성령님이 계시는지 계시지 않는지 알려고도 하지 않고 고민도 하지 않습니다.

누가 뭐라 해도 자기는 예수 믿으니까 천국 간다고 자기 마음대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성령 받기 전의 베드로를 생각해 보십시오.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지 못하는 이들은 베드로와 같이 입으로는 불굴의 용사처럼 말은 해도 하찮은 일에도 넘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그리스도인의 정결한 삶과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는 삶과 자기 이기심을 버리고 주를 위한 삶을 살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신 목적은 그 영혼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정결하고 선하고 사랑하는 거룩한 영혼이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18절 “그 때가 추운 고로 종과 아랫사람들이 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

그 때가 추운 때이기 때문에 마당에 불을 피우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베드로도 그 마당에서 종들과 아랫사람들과 함께 불을 쬐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해 놓고 그 사람들 틈에 끼어 불을 쬐고 있었다는 것은 생각 없는 행동이었습니다.

그가 또 다른 비슷한 위험에 빠지지 않으려면 대제사장 집을 떠나는 것이 상책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어리석게도 그 마당에서 불을 쬐고 있었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또 다시 부인한 사건을 25-27절까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25절에 “시몬 베드로가 서서 불을 쬐더니 사람들이 묻되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베드로가 부인하여 나는 아니라 하니.”

이것이 베드로의 두 번째 부인입니다.

그는 주님을 부인해 놓고 뉘우치는 기색 없이 그 자리에 서 있다가 다시 두 번째로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게 됩니다.

아마 거기 서 있는 사람들이 차례로 물었다할지라도 베드로는 백번이고 천 번이고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을 것입니다.

다른 복음서에 보면 베드로는 맹세까지 하면서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것을 여기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수많은 사람들이 매일 범하는 죄입니다.

처음에는 그 실수가 큰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실수를 한두 번 범하게 되고 계속 몇 번 범하게 되면 양심이 마침내 잠들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을 멸시하는 일이 몸에 익숙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부당하다는 생각을 자기 마음에서 아예 밀어내 버리고 생각조차 하지 않으려고 하게 됩니다.

우리가 이런 것들을 다 경험했습니다.

유혹에 대한 최선의 방책이 있다는 것을 미리 깨닫는 사람이라면 처음에 작은 사소한 유혹으로 올 때 제 정신을 가지고 있으면 유혹이 멋대로 덤벼들지 못합니다.

처음 사소한 유혹으로 올 때 물리쳐야 합니다.

이것이 최선의 방책입니다.

유혹을 우리 마음에 품고 있으면 반드시 죄 짓게 되어 있습니다.

처음에 작고 사소한 유혹으로 올 때 정신차리고 내 마음에서 작심하고 쫓아내야 합니다.

이것에 실패하면 기회가 오면 바로 죄 짓게 됩니다.

26절에 “대제사장의 종 하나는 베드로에게 귀 잘린 사람의 친척이라 이르되 네가 그 사람과 함께 동산에 있는 것을 내가 보지 아니하였느냐?”하고 말할 때 베드로는 다시 “이에 베드로는 또 부인하니 곧 닭이 울더라.” 했습니다.

다른 복음서를 보면 베드로는 두 번째 주님을 부인하면서부터 맹세하면서 부인합니다.

주께서 동산에서 그들에게 잡히실 때 베드로가 칼을 뽑아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자를 때 내가 그 옆에서 보았다고 해도 베드로는 아주 오리발을 내 밀며 맹세하면서까지 완강하게 나는 그 사람을 모른다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참 뻔뻔스럽게 거짓말을 합니다.

이렇게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 부인할 때 주께서 말씀하신 오늘밤 네가 닭 울기 전에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 하신 말씀대로 그 닭이 울었습니다.

누가복음 22장 61-62절에 보면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 부인하는 그 때 곧 닭이 울고 주님께서 베드로를 돌이켜 보셨습니다.

“주께서 베드로를 돌이켜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밤 닭이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 하신 말씀이 생각이 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 하니라.” 라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 부인하자 바로 그 때 닭이 울고 주께서 그를 뒤 돌아 보실 때, 주님의 눈과 마주칠 때에야 비로써 베드로는 주님으로부터 오늘밤 닭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 하고 경고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고 울었다고 했습니다.

누가복음의 기록을 보면 닭 우는 소리조차 그를 깨우치지 못했지만, 그 때 주님께서 그를 돌이켜 보실 때 주님의 경고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심히 통곡하고 울었다고 했습니다.

주님이 경고하신 닭 우는 소리조차 그를 깨우치지 못했지만 주께서 그를 돌이켜 보시자 그 때 정신을 차리고 밖에 나가서 심히 울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단의 손에 잡혀 넘어져 있는 사람은 주님께서 친히 자신의 눈길을 우리에게 향해 주시기 전에는 그 어떤 죄악이나, 그 어떤 징조와 그 어떤 경고도 효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넘어져 있을 때 주께서 우리를 돌이켜 보셔야 그 때 정신을 차리는 것입니다.

나의 경험으로도 내가 죄로 말미암아 넘어져 있을 때는 어떤 징조도 경고도 다 소용 없고 주님이 나를 돌이켜 보셔야만 내가 정신을 차리고 돌아오게 됩니다.

이 때 베드로는 자신에 대해서 깊이 깨닫는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는 밖에 나가 심히 통곡하면서 자신은 정함이 없는 바람과 같은 존재요, 헛되고 헛된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자신은 죄에 대해서 속수무책인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결코 자신을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이것은 베드로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면 일반적으로 경험으로 알게 되는 자신은 절대 무능한 죄인이라는 의식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자신을 알고 자신에 대해서 심히 통곡해 보신적이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진실한 마음으로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이라면 이런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와 같은 실패를 통해서 우리 자신을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이런 경험을 한 사람들만이 자신을 믿지 않고 “오직 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신 말씀을 깨닫고 자기 안에 계시는 주를 찾고 주님만을 의지하고 주로 말미암아 사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아멘.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