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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모음

지옥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외식의 죄

작성자황성재|작성시간14.07.28|조회수92 목록 댓글 0

가장 고치기 어려운 외식하는 죄

2014, 7, 27

요18 : 28-32

오늘 본문을 통해서 외식하는 죄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유대인들의 외식이 잘 나타나 있는 부분입니다.

28절에 “그들이 가야바에게서 관정으로 끌고 가니 새벽이라 그들은 더러움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 관정에 들어가지 아니하니라.”

대제사장과 서기관들 그리고 장로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이미 작정되었기 때문에 형식적인 재판과정을 거쳐 결의하고 당시 유대의 총독으로 있던 빌라도가 있는 관정으로 끌고 갔습니다.

그들은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는 것은 더러움을 받는 것이요, 더러움을 받은 자는 명절 예배와 그 음식 나는 행사에 참여할 수 없기 때문에 이 불결을 피하기 위해서 로마 총독의 관저를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한 시기와 질투로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그 엄청난 죄는 뒤로 하고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면 불결하게 된다는 이 사소한 죄는 피하고자 호들갑을 떠는 저들의 위선은 심히 부패한 죄인의 바로 그 모습입니다.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는 것은 더러움을 받는 다는 것은 율법도 아니요, 그들의 조상들의 전승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소한 정결은 지키고자 하되 죄 없으신 예수님은 죽이고자 하는 저들의 외식은 주께서 저들을 꾸짖은 대로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꿀꺽 삼키는 아주 말할 수 없이 부패한 위선자들의 모습입니다.

예수께서는 저들을 회칠한 무덤이라 하셨습니다.

겉은 깨끗하고 아름답지만 그 속은 사람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이 가득한 자라고 하셨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가 어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하셨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데리고 가서 행악자로 고발을 했습니다.

로마법에 의하면 종교적인 문제로는 사람을 죽일 수 없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행악자로 몰아 사형을 시키고자 한 것입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으로부터 행악하는 죄를 찾지 못한다 할지라도 예수님을 죽여 달라고 강권을 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빌라도에게 강권하는 것은 나라에 소요가 일어나면 로마정부에서 총독에게 그 책임을 묻게 되기 때문에 소요가 일어나는 것을 총독도 피하기 위해서 그 나라 백성들의 요구를 들어 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용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총독에게 예수님을 행악 자로 죽여 달라고 강권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본문에서만 아니라 성경 여러 곳에서 외식하는 유대인들을 보아왔습니다.

우리 주님은 이들을 심히 꾸짖으셨습니다.

이 외식하는 죄는 지옥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주의 말씀을 깊이 생각하고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가 진실로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고 하는 믿음의 사람이라면 우리 주님이 심히 꾸짖은 이 외식하는 죄는 크게 경계하고 피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믿음을 가진 사람들조차도 밖으로 들어난 죄만 생각하고 그들의 마음에 품고 있는 더 큰 죄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음으로 짓는 죄도 우리의 행위로 짓는 죄 못지않게 심각하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외식하는 죄는 우리들 모두에게 있는 보편적인 죄요, 가장 고치기 어려운 죄요, 가장 심각한 죄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말과 행위를 의롭고 바르게 행하려고 애쓰며 노력하고 있지요?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어 처음에는 겉으로 들어난 그 행위로 짓는 죄만 신경을 쓰게 됩니다.

마음에는 어떤 악한 것을 품고 있다할지라도 밖으로 드러난 말과 행위만 고치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말과 행위를 통해 밖으로 드러나고 있는 이 죄도 쉽게 고쳐지지 않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불쑥 불쑥 악한 것들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사실 행위로 짓는 죄를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 심각하게 생각하고 예민하게 깨닫습니다.

거듭난 사람에게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들어와서 우리들의 죄를 비쳐 주시기 때문입니다.

거듭나지 않으면 자기의 육신으로 행하는 그 죄 자체를 잘 깨닫지 못합니다.

나는 악한 말과 행위만 아니라 나의 헛된 말과 헛된 행위를 고치는 데까지는 많은 기간이 걸렸습니다.

우리의 겉으로 들어나 보이는 많은 부분이 시정된 다음에 오는 문제는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 상태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전에는 말과 행위의 잘 못된 것을 고치는데 급급했지만 행위가 아니라 정작 내 영혼의 상태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자기 영혼의 상태를 깨닫는 이들은 자신이 외식하는 자요, 위선자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마음과 행위가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 자기는 거짓된 그리스도인이라는 자책이 심하게 올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참 믿음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 같은데 자기만 거짓된 믿음을 가진 것 같아 괴롭습니다.

마음에 이러한 자책감을 가지면서부터 자기 마음을 의롭고 깨끗하게 하는데 항상 노력하게 될 것입니다.

나의 경험은 말과 행위를 중점적으로 고치는 기간과,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을 중심으로 노력하는 기간이 확실하게 구분되어 있습니다.

믿음의 선진들을 보면 그들의 믿음의 전반부와 후반부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전반부는 중생하여 살아계신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기간으로 주님을 만나서 큰 기쁨과 영생과 하늘에 소망을 두게 되는 믿음이 되기까지의 기간입니다.

후반부는 인격적으로 만난 주님을 말씀으로 섬기고 주와 동행하면서 이 때 필요한 것이 정결한 마음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영혼이 깨끗해야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만 아니라 모든 중생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자기 마음이 정결하게 되어야 한다는 것을 자연스런 깨달을 것이요, 또한 영혼을 정결하게 하는데 마음을 다하게 될 것입니다.

그 것은 성령이 안에서 역사하시기 때문에 오는 간절함입니다.

그러나 자기 마음을 정결하게 하고자 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노력하는 이마다 부딪히는 벽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자기의 어떤 결심과 노력에도 번 번히 실패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작정하고 애를 써도 되지 않는 것을 깨닫게 되기까지도 긴 기간이 지나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사람마다 자기 결심과 노력으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으로 깨닫지 못한다면, 이것은 참으로 자기 경험으로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어느 때나 자기 결심으로 자기 노력으로 하려고 시도할 것입니다.

텔레비전에서 아프리카 어느 숲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야생 코끼리를 잡아 훈련시키는 것을 보았습니다.

야생 코끼리를 잡으면 한 동안 쇠밧줄로 큰 나무에 코끼리의 다리를 묶어 놓습니다.

야생 코끼리는 한 동안 그 쇠밧줄에서 나오려고 발버둥을 칩니다.

그러다가 자기는 이 쇠밧줄에서 나올 수 없다는 알고 체념하고 쇠밧줄이 조금만 팽팽하게 되어도 더 멀리 가려고하지 않습니다.

야생 코끼리가 이렇게 자기는 쇠밧줄에서 풀려날 수 없다는 것을 알듯이 우리도 육신의 노력으로는 결코 정결하게 되지 못한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나는 내 노력으로 참되고 진실하고 의롭게 정결하게 살아 보려고 무던히 애를 썼습니다.

나는 내가 정결하게 살지 못하는 것은 내가 거듭나지 못했기 때문인가 하는 의심까지 하면서 내 자신에게 수 없이 낙심하고 고민하면서 주께서 도와 달라고 기도하고 나도 진실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고 싶다고 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결심해야 기껏 작심 3일이 되었습니다.

나는 누가 사람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 안에 성령이 계심을 알고 그 성령을 찾고 의지하라고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결심이 약한 줄로만 생각하고 다시 다 결심하고 정결하게 살려고 노력한 것입니다.

나는 이러한 시기에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님을 알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습니다.

내가 여기서 드릴 수 있는 말씀은 자기 믿음의 문제로 고민하고 찾는 사람은 하나님이 은혜를 주심으로 그 길을 열어 주시고 알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믿음의 문제로 고민하고 찾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 길을 앞서 가면서 자기가 경험했던 것을 증언하는 설교가 가장 크게 그의 가슴에 와 닿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로 고민하지 않는 이들은 들어도 곧 잊어버릴 것입니다.

오직 자기 안에 계시는 주님을 알고 그 주님으로 사는 이들만이 정결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의 육신의 결심으로도 겉으로 들어난 죄는 고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을 정결하게 하는 데는 육신으로는 어떤 결심을 해도 어떤 각오를 새롭게 해도 헛될 뿐 고칠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의 영을 가진 사람만이 주님의 그 영과 마음으로 그의 영혼을 정결하게 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아무나 가질 수 없는 믿음의 비밀입니다.

며칠 전 유병언이 변사체로 매실 밭에서 발견되었지요?

그들이 네델란드 선교사로부터 전수 받은 복음은 잘 못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복음을 참으로 깨닫지 못했고 순종의 삶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주의 말씀에 순종의 삶이 없다면 사람의 마음은 변하지 않습니다.

부패한 육신의 마음 그대로 언제나 남아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우리 마음에 있는 것으로 감추어져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우리의 삶과 말과 행위로 밖으로 들어나는 것입니다.

믿음이 밖으로 말과 행위와 삶으로 드러나지 않는 믿음이라면 야고보 사도가 말씀하신 것처럼 그것은 죽은 믿음이요 그 믿음은 자기를 구원할 수 없는 믿음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주의 말씀에 대한 순종과 형제에 대한 사랑과 의롭고 정결한 삶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그를 결코 구원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진실한 것이라면 반드시 의로운 삶과 정결함으로 밖으로 들어나야 합니다.

그 믿음만이 그를 구원하는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순교당하여 죽는 죽음이 가장 귀한 죽음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잡혀서도 그들의 믿음을 부인하지 않았기 때문에 굶주린 사자 밥이 되어 찢겨 죽임을 당했고, 또 화형을 당하여 가장 고통스러운 죽임을 당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끝까지 주의 따르는 순종의 길을 가다가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그러나 유병언과 같은 죽음은 결코 의로운 자의 죽음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유병언은 자신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지 아니면, 타살을 당했는지, 아니면 저체온 증으로 자연사 했는지는 모르지만 죄인으로 쫓겨 다니다가 죽은 것입니다.

그의 죽음은 누가 보아도 의로운 죽음은 아닙니다.

그가 정말 의로운 믿음을 가졌다면 애초부터 도망 다니지 않고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다면 자신 출두해서 해명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도피 생활을 하다가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가 만약 주님께 순종하는 참 된 목자라면 사업 보다는 복음 전하는데 전심전력을 했을 것이고, 그가 만일 사업을 했더라도 그의 믿음의 양심을 지키며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믿음의 양심을 지키는 의로운 삶이 없고 정결한 삶이 없었다는 것은 그는 진실로 믿는 자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가 정말 믿음의 사람이라면 믿음의 양심으로 지키며 살았을 것입니다.

주님은 불순종하는 자와 외식하는 자들은 지옥의 심판을 피하지 못한다 하셨습니다.

주님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다만”이라고 하신 단어를 주목해야 합니다.

“다만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가리라.”하셨습니다.

또 주님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하셨습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은 좁고 그 길은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라.” 하셨습니다.

“생명을 얻게 하는 좁은 문”이라는 하실 때 “좁은 문”은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문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선택 받은 아주 적은 수의 사람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문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협착한 길이라고 하실 때 “협착하다”는 단어의 뜻은 겨우 한 사람이 지나가기에도 좁은 길이요, 험한 길이라는 뜻입니다.

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 협착한 길로 가는 그들만이 생명으로 인도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좁은 문은 생명을 얻게 하는 참된 믿음을 뜻하고 협착한 길은 주의 말씀에 순종하여 가는 길을 의미합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또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은 협착하기 때문에 찾는 자가 적다고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3장 23-24절을 보면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묻기를 “주여 구원받은 자가 적으니이까?” 하고 묻자 주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시기를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하고 대답을 하셨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이 많은 이유에 대해서

고린도전서 1장 30절을 들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이 되셨으니.”

하나님께서 낳은 자들은 다시 말해서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들 안에 그리스도가 계시다는 말씀입니다.

복음서에 수 없이 나오는 말씀입니다.

자기 안에 그리스도가 계시면 첫 째 자기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께서는 그에게 지혜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그 지혜란 자기 안에 계시는 주님의 뜻을 아는 것이 곧 지혜입니다.

우리는 기도하면서 곧 주님의 뜻을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주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지혜를 가진 이들이 생명의 문과 생명의 길로 가는 사람들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 안에 계시는 주님은 우리들의 의가 되시는 분이라 하셨습니다.

우리들은 주님의 대속의 죽으심으로 모든 죄가 사하심을 받고 의롭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는 우리의 의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이 말씀은 더 나아가 우리가 죄 사함 받고 의롭게 되는 것만 아니라 내가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것도 오직 우리 안에 계시는 주로 말미암아 의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육신에서 나온 것은 다시 말해서 우리의 마음에 나오는 것은 그 어느 것이든 비록 그것이 우리 생각에 옳고 선한 것이라 해도 하나님께 의롭다하시는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사도 바울은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우리 육신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없고 하나님과 원수 된다고 했습니다.

육신은 하나님을 위해서 행하지 않습니다.

육신은 자기를 위해서 그리고 자기 유익을 위해서 행하는 것입니다.

육신이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 해도 자기 육신의 유익을 위해서 행하게 됩니다.

그리고 육신은 마귀의 종입니다.

그래서 육신은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 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가증스러운 자요, 외식하는 자로 여기십니다.

하나님의 뜻은 오직 주로 말미암아 행할 때 다시 말해서 주님의 마음으로, 또는 주의 영으로 행할 때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행하는 그것을 받으십니다.

육신은 결코 하나님을 위해서 행하지 않고 자기 유익을 생각하며 행하게 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의로운 삶을 실패하는 이유가 바로 자기 육신으로 주의 말씀을 행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로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거룩함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거룩이란 단어는 오직 하나님께만 쓸 수 있는 단어입니다.

우리 안에 계시는 주님만이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내 안에 주님이 사실 때 거룩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혼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육신은 결코 거룩한 삶을 살지 못합니다.

육신을 결코 우리 영혼을 정결하게 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육신의 마음이 없어지는 것이 거룩이요 정결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주님의 마음이 곧 하나님 앞에 거룩이요 정결한 마음이 되기 때문입니다.

거룩하고 정결한 마음은 주님의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육신의 마음을 예수 그리스도의 영과 마음으로 바꾸는 것이 거룩이요, 정결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그리고 정결한 마음을 갖기 위해서는 오직 한 길 밖에 없습니다.

주로 말미암아 사는 것이요, 주님의 마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자기 육신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려고 하고 또 자기 마음을 정결하게 하려고 하기 때문에 실패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육신으로 하나님을 섬긴다면 정결한 마음을 가지지 못한 상태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외시하는 자요 위선자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열심 있는 자요, 옳고 바르게 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그 마음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마음을 보시고 그 중심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주님은 우리의 구원이 되신다고 하셨습니다.

결국 우리가 주로 말미암아 사는 그리스도인이 주님의 지혜와 주님의 의와 주님의 거룩하심으로 살 수 있고 이들을 하나님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여러분들도 주로 말미암아 사는 것이 우리 신앙의 진수라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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