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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

작성자황성재|작성시간14.08.24|조회수60 목록 댓글 0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

2014, 8, 24

요19: 17-27

오늘 설교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내용입니다.

복음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요, 성경 전체의 중심 내용입니다.

어쩌면 성경 다른 부분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 참된 뜻을 진술하기 위한 부차적인 내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교회 다니는 많은 분들에게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복음을 확신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생명을 얻게 하는 이 복음이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이해와 깨달음과 확신으로 와 닿는 진리가 되지 못하고 있어 생명을 얻지 못하고 다만 종교인으로 남아 있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확신을 가졌으면 하나님이 약속하신 생명을 얻고 그 생명에 따라 삶이 변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20장 18-19절에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조롱하고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셨습니다.

주님은 다시 28절에서는 “인자가 온 것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속죄제물로 대신 드리기 위해서 오셨다고 말씀하시고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제자들과 함께 올라가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스스로 잡히시고 성경의 기록대로 채찍질 당하시고 조롱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도록 빌라도의 군사들에게 내 줌을 당하셨습니다.

온 밤을 심문 받으시고 채찍질 당하시고 조롱당하신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지고 해골이라는 곳으로 로마군들에 의해서 끌려가셨습니다.

해골이라는 곳은 골고다 언덕 또는 갈보리 산이라고도 불리우는 곳입니다.

해골이라는 말은 아람어 이고, 골고다 언덕이라고 하는 말을 히브리 말이고, 갈보리 산이라는 말은 라탄어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곳이 둥그렇게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는 로마군들이 예수님을 예루살렘 성문 밖 골고다 언덕으로 끌고 가서 그곳에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 밖으로 끌려 나가서 죽으신 것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이 두 가지 사실은 예수께서 우리들의 속제제물이 되시기 위한 중요한 두 가지 조건들입니다.

첫 째로 레위기 16장을 보면 속죄 제물은 영문 밖으로 나가서 죽어야 했습니다.

이를 히브리서 13장 12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 피로써 백성들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여러분 이 일을 작은 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만약에 예수께서 성문 밖으로 끌려 나가서 죽지 않으셨다면 그분은 우리들의 속죄제물이 될 수가 없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라 예수께서 성문 밖으로 끌려 나가 나무에 달려 죽으심으로 성경대로 속죄제물이 되신 분이십니다.

두 번째로 신명기 21장 23절에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라,”

율법에 나무에 달려 죽은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 죽는 자라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 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랴.”

사도 바울은 예수께서 나무에 달려 죽으신 것은 우리들이 받을 율법의 저주를 그리스도께서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율법이 저주하는 우리들의 모든 죄를 대신 담당하시고 우리들을 위한 속죄제물로 자신을 아버지 하나님께 드리심으로 우리는 율법의 모든 죄에서 용서 받았고 또 율법의 모든 저주에서 구원 받은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를 다시는 죄로 책잡지 못하고 정죄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우리들의 죄를 영원히 담당하셨고, 영원한 제물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로마군들이 예수님을 끌고 골고다 언덕으로 가실 때 예수께서 친히 자기가 못 박히실 그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밤새도록 심문을 받으시고 등이 깊이 패이고 갈기갈기 찢기는 무서운 채찍을 많이 맞으셨기 때문에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시면서 자주 넘어 지셨습니다.

예수께서 지신 그 십자가는 큰 나무 기둥이었기 때문에 건장한 장정이 지기에도 아주 무거운 것이었습니다.

로마 군인이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길에 모여든 군중들 중에서 건장한 몸을 가진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을 불러서 그에게 예수님이 지신 그 십자가를 억지로 지워 주었습니다.

구레네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갔지만 그 후에 시몬과 그의 아네와 두 아들 알렉산더와 루포는 예수를 신실하게 섬기는 자로 초대교회에서는 널리 알려진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3장에서 루포의 어머니는 나의 어머니라고 부를 정도로 우리 주님께 헌신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구레네 시몬처럼 억지로라도 십자가를 지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다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내가 성지 순례가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가신 그 길을 따라 가 보았습니다.

지금은 길 양쪽으로 상가가 빈틈없이 들어서 있고 승용차 한데가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좁고 구불구불한 길이었습니다.

성지순례 온 목사님이 빌라도 관청이 있던 곳에서 시작해서 골고다 언덕까지 모형 십자가를 지고 번갈라 나눠지고 골고다 언덕까지 올라갔습니다.

우리는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서 그 곳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 지고 가시는 그 길을 목사님들이 모형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이 어차피 형식이요, 모형이지만 나는 그것이 너무나 형식적인 것 같고 진정성이 없는 것 같아서 나는 그 모형십자가를 지지 않았습니다.

만약에 지금 예수께서 지신 그 십자가를 구레네 시몬이 졌던 그 십자가를 내게 지라고 한다면, 아니 내게 그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세상에 이 보다 더 없는 큰 영광으로 온 몸과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내 힘이 다하도록 그 십자가를 질 것입니다.

그리고 내 인생에 가장 큰 영광으로 가장 자랑스러운 일로 남을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에게 주께서 지신 그 십자가를 지실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여러분들도 나와 같은 생각으로 더 없이 큰 영광으로 여기며 기꺼이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해서 그 십자가를 질 것이라고 나는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그 십자가를 지고 가다가 심장 마비로 죽을 것을 안다할지라도 그 십자가를 기꺼이 질 것이라고 나는 믿습니다.

우리 중에 능히 그러고도 남을 믿음의 사람들이 있는 것을 나는 큰 기쁨으로 생각합니다.

우리 주께서 지신 십자가는 아버지 하나님께 죽기까지 순종하는 길이요,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기 생명을 내어 주시는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에게 지워주신 우리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9장 23절에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하셨습니다.

우리들은 우리의 십자가를 기꺼이 져야 합니다.

우리들의 십자가는 우리의 신앙의 양심을 지키는 십자가요,

형제를 사랑하고 섬기라 하시는 십자가요,

복음을 전하라는 십자가입니다.

숨은 부끄러운 일을 버리고, 남을 속임으로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순전하게 순종하는 십자가요, 우리들 모두가 마음을 정결하게 하라는 주님의 절대적인 명령의 십자가를 지는 일입니다.

그 때 그 구레네 시몬이 졌던 주님의 십자가를 억지로 졌지만 그에게 더 없이 큰 영광이었던 것처럼 주께서 우리에게 지라고 하신 그 십자가도 그처럼 영광의 십자가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그 때 구레네 시몬이 졌던 주님의 그 십자가는 건장한 그에게도 온 힘을 다해서 져야하는 아주 무거운 십자가였습니다.

역시 우리에게 맡겨진 그 십자가도 결코 가벼운 십자가가 아닙니다.

18절에 “그들이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새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편에 못 박으니 예수는 가운데 있더라.”

다른 복음서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을 보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기 전에 “몰약을 탄 포도주를 예수께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을 보시고 받지 아니하시더라.” 했습니다.

몰약을 탄 쓴 포도주는 일종의 진통제인데 예수께서 이것을 마시기를 거부하셨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몰약을 탄 쓴 포도주를 마시기를 거절하신 것은 많은 사람들의 죄를 대신 담당하신 예수께서 죄 값에 따른 고통도 온 몸으로 채득하고 감당하시기 위해서 거절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혀 땅위에 세워지는 그 고통이 얼마나 크다는 것을 잘 아시면서도 조금이라도 그 고통을 감하여 주는 그 몰약을 거절하신 것입니다.

주께서 우리들의 모든 죄를 온전히 짊어지시고 그 죄 값을 온전히 담당하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무슨 이유로 십자가의 그 무서운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하게 해 주는 몰약을 거절하실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주께서 몰약을 거절하신 그 이유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마가복음 15장 25절에 보면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시간이 제삼시라고 했습니다.

지금 시간으로는 아침 아홉시가 되는 시간입니다.

주님은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오후 3시에 돌아가셨습니다.

주님은 6시간 동안 십자가에 못 박혀 있는 그 무서운 고통 속에 있다가 돌아가신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있는 고통은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는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이라는 것을 여러분도 이해하실 것입니다.

주님이 당하신 그 고통은 우리들의 죄 값으로 받으신 것입니다.

주님이 못 박히신 그 십자가 위에 빌라도가 “나사렛 예수는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패를 써서 붙였는데 히브리어와 로마어와 헬라어로 기록하여 붙였다고 했습니다.

당시 죄인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 특이한 죄인은 그 죄목을 써서 패를 붙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에게 붙여진 죄목은 도무지 수치스러운 죄가 아니었습니다.

빌라도는 도무지 죄가 없는 사람을 자기를 왕이라 한다고 모함을 해서 죽여 달라고 억지를 쓰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으면 민란을 일으킬 소요를 보고 할 수 없이 죄 없는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죄 없는 예수님을 죽여 달라는 유대인들을 모욕하기 위해서 예수께서 못 박혀 있는 십자가 위에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는 팻말을 써서 붙인 것입니다.

너희 유대인의 왕이 여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가고 있다하고 유대인들을 모욕한 것입니다.

21절에 보면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라 쓰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 고 했습니다.

그러나 빌라도가 대답하기를 “내가 쓸 것을 썼다.”고 말했습니다.

당시 빌라도가 “나사렛 예수는 유대인의 왕” 이라고 히브리어와 로마어와 헬라어 세 나라 말로 팻말을 써서 붙인 것은 모든 사람들이 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는 저 불신자 빌라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약속대로 온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 못 박혀 있는 것을 천하 만민에게 알리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다고 생각합니다.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23-24절에 “군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을 얻고 속 옷도 취하니 이 속 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군인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구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그들이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군인들이 이런 일을 하고.”

로마군들이 예수님의 속옷까지 벗기고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예수께서 속옷까지 발가 벗겨진 것은 우리가 발가 벗겨진 체 예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을 의미하고 또 주께서 발가 벗겨지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의의 옷을 입혀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로마 군인들은 겉옷은 내 조각으로 찢어서 나누어 가고 속옷은 위로부터 통째로 짜여 있는 것이기 때문에 제비 뽑아서 한 사람이 가지고 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알지 못하는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의 옷을 벗겨 나눠가진 것과 옷을 제비 뽑아 가져간 것이 이미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말씀대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뜻입니다.

다윗 왕이 시편 22편에 기록한 예수님에 대한 예언의 말씀입니다.

그 중에 18절 말씀에 “내 겉옷을 나누며 내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하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전혀 모르는 로마 군인들에 의해서 주님께 대한 기록된 예언의 말씀을 정확하게 이룬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속옷이 지금도 교황이 있는 바티칸 궁전에 보관되어 있다고 합니다.

전에 한번 성의라고 해서 신문에 사진까지 찍어서 그 모형을 보여 준 적이 있습니다.

로마 바티칸 궁전에 보관 되어 있는 예수님의 속옷도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셨다는 증거 중에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라면 이 하나 하나의 작은 증거에도 눈을 뜨고 그분에 대한 확실한 믿음의 증거를 얻을 것입니다.

25절에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이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당시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중에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아래 서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와 이모라 했습니다.

예수님의 이모라고 하는 마리아는 사도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입니다.

그리고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24장에 보면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되는 것을 보고 모든 것은 끝났다고 생각하고 자기 고향 엠마오로 내려가던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바로 글로바입니다.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이 막달라 마리아는 7귀신이 들은 여자였는데 예수님께 귀산을 쫓아낸 바로 그 여자입니다.

이 여인들의 거룩한 신앙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계실지라도 그들의 가슴에 예수님에 대한 믿음의 불은 그들에게는 꺼질 수 없는 불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여자들은 주님은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며 믿음의 증거를 가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 분 안에서 분명히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모든 상황이 그분을 부인한다 할지라도 그들이 보고 들은 것은 부인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당시 누구도 갖고 있지 못한 이 거룩한 믿음이 이 여자들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26절-27절에 “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에게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시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는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혀 달린 그 아래에서 말할 수 없이 큰 고통을 당하고 있는 아들의 고통을 함께 느끼며 울고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 달리신 십자가 아래에서 우는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의 고통과 슬픔을 조금은 이해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엄청난 고통의 시간에도 어머니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께 대한 순종으로 목숨을 다하시는 것처럼 어머니에 대한 그의 책임감도 잊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께서 마리아에 대해서 “여자여” 라고 부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주님이 여기서 “여자여”하시는 말씀은 우리말에서는 높인 말이 아니지만 그러나 당시 유대인의 말에서 “여자여” 하는 말은 여자를 아주 높인 말이라고 합니다.

그런다고 할지라도 아들이 어머니에게 쓰는 말은 아니라는 것이 학자들의 해석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언제나 사람을 혈육의 관계로 보지 않으시고 하나님 나라의 영적인 관계로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더욱이 예수께서는 창조주 하나님이시고 비록 육신으로는 자기를 낳은 어머니이시지만 마리아는 피조물이기 때문에 “여자”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에게는 보라 네 어머니라고 하시며 이제부터 네 어머니로 모셔라 하신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후부터 마리아는 어머니로 모셨습니다.

마태복음 13장 55절에 보면 예수님에게는 육신의 형제들이 나사렛 동네에 살고 있었습니다.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형제들이요, 예수님의 누이들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 같은 지도자요 성경 야고보를 쓴 저자요, 또한 유다는 유다서를 쓴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그의 형제들에게 어머니를 맡기지 아니하시고 요한에게 맡기셨을까 하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에게는 주와 하나님을 진실하게 믿는 자 모두를 그분의 어머니를 맡길 수 있는 형제로 생각하십니다.

마태복음 12장 50절에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셨습니다.

세상에서는 같은 어머니 뱃속에서 나왔고 같은 피를 나눈 형제가 가장 가깝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주님의 형제가 되고 가장 가까운 사이가 되는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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