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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작성자rudia|작성시간14.11.02|조회수99 목록 댓글 0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2014. 11. 2


                                                                                                                                   요 21 : 15 -25


제자들이 새벽 갈릴리바다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주님을 중심으로 해서 숯불을 피워놓고 떡도 굽고 고기도 구워 아침조반을 나눠먹었습니다.

제자들이 어찌 이 날을 잊겠습니까?

세상에서 이보다 더 아름달운 일도 없을 것이고, 이 보다 더 귀한 시간도 없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모시고 제자들이 아침 조반을 갈릴리 새벽바다에서 먹을 수 있었던 것은 하늘에서나 있을법한 일입니다.

사도바울이 다메섹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그가 죽는 날까지 결코 잊지 못했던 것처럼, 여기 있는 일곱 제자들도 부활하신 주님을 모시고 갈릴리 새벽바다에서 떡도 굽고 고기도 구워 나눠먹은 일은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이 세상에 나와 복음을 전하면서 어떤 고난을 당하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환난과 고통중에도 낙심하지 아니하고, 죽음의 위기가 와도 담대하게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죽어도 부활하신 주님처럼 새 몸을 입을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담대하게 부활의 주님을 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부활의 생명이 그렇게 중요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몸은 우리처럼 육신입니까? 아니면 영혼입니까?

이전에 예수님은 분명히 사람이셨습니다. 분명히 육신을 가지셨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주님은 이제는 육신과는 다른 몸입니다.

누가복음 24장 39절 ‘내 손과 발을 보는 고로 나인 줄을 알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나는 있느니라’

요한복음 20장 19절에 보면 문들이 닫혔는데 닫힌 문을 뚫고 들어오십니다. 가운데 서서 평안할지어다 하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26절에는 여드레 후에 도마도 있는데 닫힌 문으로 통과해서 들어오십니다. 그러시면서 너희들 가운데 평안이 있을지어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 몸은 무슨 몸입니까?

주님의 몸이 살과 뼈가 없다면 닫힌 문을 통해 들어오는 게 이해가 가지만, 살도 있고 뼈도 있는 분이 어떻게 닫힌 문을 통해 들어오느냐 이 말입니다. 이해가 안 갑니다.

만약 살도 없고 뼈도 없다면 그것을 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살도 있고 뼈도 있는데 닫힌 문을 통해 들어오셨습니다. 그분은 사람들이 만질 수도 있는 몸이시고, 사람들과 먹고 대화할 수도 있는 몸이었습니다. 그리고 금방 여기 있다가 사라지기도 하는 몸을 가지신 것입니다. 이 몸을 신령한 몸이라고 합니다.

주님은 예수 믿는 우리에게 이 신령한 몸을 약속하셨고 이 신령한 몸을 제자들에게 보이시고 이 신령한 부활한 몸을 온 세상에 나가서 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예수님은 새 인류의 조상이 되시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되시는 분이라고 들으셨을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9절, 예수님은 많은 형제들 중 맏아들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이 일어날 것이라는 말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0절 ‘예수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리니 그는 주님은 머리시고 첫 열매가 되시느니라.’

그 후에 많은 열매가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1-22절,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열매가 되시고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으로 살게 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첫 열매, 머리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곧 예수님이 새 인류의 조상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고린도전서 15:40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명이 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먼저는 신령한 사람이 아니요 육의 사람이요 다음은 신령한 사람이라 하늘에 속한 사람이요

아담은 땅에서 났으니 땅에 속한 자요, 둘째 사람 아담은 하늘에서 났으니 하늘에 속한 자라 말씀하시면서 첫 사람 아담이 모든 인류의 육에 속한 사람의 조상이 된 것처럼, 마지막 아담 둘째 아담은 영에 속한 사람,  신령한 몸을 가진 사람의 조상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가 새 인류의 조상이 된다는 말씀을 강조한 내용입니다.


에베소서 1장 10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골로새서 1장 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예수님이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모든 것이나 통일해 새 인류의 왕이 되는 그 날은 예수님이 재림해 오시는 그 날입니다.

재림해 오실 때 부활의 몸을 가진 사람만이 그 분을 모시고 영원한 세계에 들어가 사는 것입니다. 그 분을 왕으로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세상에 오셔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 분을 믿고 순종해 사는 사람들입니다.

사람이 육에 속하면 그 분이 부활하셨다는 것까지는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령한 몸을 덧입기를 위해서 자기 목숨을 드리며 살지는 못 합니다.

결정적인 복음은 부활의 몸을 소망하고 신령한 몸을 덧입기 위해 자기 목숨을 드리며 사는 것입니다.

다 믿는다하지만 육에 속한 사람은 자기 생명은 드리지 못 합니다. 그 차이입니다.

영에 속한 사람은 항상 자기를 하나님께 드리고 삽니다.

앉아서 육의 생각이 들어오면 바로 쫒아냅니다.


육에 속한 믿음에서 영에 속한 믿음으로 넘어가는 과정의 가장 중요한 관문이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확신을 갖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자 이성적인 믿음, 육에 속한 믿음은 무너집니다.

그리고 부활의 신앙이 중심이 됩니다.

부활의 신앙을 중심해서 하나님 말씀도 듣고 부활의 신앙을 중심으로 자기를 드리기도 하고 부활의 신앙을 중심으로 자기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 헌신하며 삽니다. 부활을 바라보며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 믿음은 땅에 있는 게 아니라 하늘에 있습니다.


사도바울을 보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사람이 완전히 바뀝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자 광야로 들어가 3년 동안 하나님과 교제를 하며 광야에서 홀로 살며 성경을 보았습니다. 이전과는 완전히 다르게 성경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오시되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그 대속의 십자가를 지고 부활하시고 오셔서 새 몸을 약속하셨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부활하신 것을 보면서 성경을 보고, 부활의 신앙을 통해서 율법도 새롭게 깨닫습니다.

이전에 그는 구약성경에 정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도바울이 부활하신 주님을 통해서 성경을 완전히 다르게 봅니다.   

부활은 우리가 영의 눈을 갖게 하고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을 알게 합니다. 부활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게 하고 영에 속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합니다.

주님은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하나님께 속하였다면 내 말을 들으려니와 너희가 하나님께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 말을 듣지 못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부활의 생명은 제자들에게만 필요한 게 아니라 바로 우리들에게 필요합니다.

육신의 눈으로 성경을 보는 것과 부활하신 주님을 통해 영의 눈으로 말씀을 보는 것은 다릅니다.

영의 눈으로 보는 말씀이 내게 생명으로 말씀이 들어오고 나로 생명을 덧입게 합니다.

육신은 아무리 성경을 밝히 깨닫는다할지라도 그것은 그림일뿐입니다.

영의 눈으로 깨달으면 이것은 실제이기 때문에 그 문을 열고 들어갑니다.

이 말씀은 영의 문이고 영의 실제입니다. 내가 순종함으로 영의 문으로 들어가서 영적인 것을 찾고 경험합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은 제자들에게 부활의 신앙을 심어줌으로 세상에 나가 그들의 목숨도 아끼지 않고 복음을 전하길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신앙을 만난 그들은 육신의 몸을 하나님말씀에 드리고 순종함으로 부활의 몸을 입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 육신의 몸을 아끼지 않습니다.

우리 신앙이 거기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자기 몸을, 세상 재물을, 처자를, 부모를 못 버리는 것은 아직 육신의 신앙에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난 첫째 목적은 부활의 신앙을 심어주기 위함입니다.

둘째 목적은 실추된 사도의 권위를 베드로에게 세워주기 위함입니다.

셋째는 요한에 대한 다른 제자들의 오해를 해소하기 위해 나타나신 것입니다.


주님이 베드로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하고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그런 베드로에게 주님은 ‘내 양을 치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똑같이 세 번 묻고 세 번 답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여러분도 알다시피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 부인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가야바의 집 뜰에서 예수님이 심문 받을 때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습니다. 나는 주님을 모른다 나는 그와 관계없다고 맹세하며 부인했습니다.

맹세하고 부인하고 나서 어찌 제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어찌 나가서 말씀을 전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주님이 부활하셔서 베드로를 만나 주셔야 했던 것입니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물으시고 내가 주를 사랑하시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하는 대답을 들으시고 내 양을 치라는 약속을 받으십니다.

꼭 이 일만을 위해서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고 베드로에게 물으신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다른 목적이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19장 29절,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나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리지 못하면 영생을 얻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아주 무서운 말씀입니다. 듣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세상 누구도 형제나 자매나 자식이나 부모나 자기 목숨까지도 자기 재능이나 명예 모든 것을 주를 위해 버리지 아니하면 영생을 얻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세상 사람이 누가 이렇게 살 수 있습니까? 세상 사람 아무도 그럴 사람 없습니다.

부활의 신앙을 가진 사람만이 이렇게 살 수 있습니다. 오직 부활의 신앙을 가진 사람만이 모든 것을 버리고 그렇게 살게 됩니다. 부활의 신앙을 가진 사람은 그 안에 성령이 계셔서 성령이 그렇게 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육신을 버리고 순종하길 눈물을 흘리며 간절히 원하기 때문에 자기 생명도 자식도 부모도 예수님보다 더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사람의 이성과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안에 성령이 들어가시면 육신을 버리고 오직 주를 위해서 그 길을 가기를 원합니다. 남이 보기에는 고난의 길인데 그에게는 즐겁고 기쁜 길입니다. 하나님이 손잡아주시고 날마다 하나님을 경험하는 길입니다.


신앙생활에는 함정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짝퉁이 많습니다. 귀하면 귀할수록 짝퉁이 많습니다. 신앙도 그렇습니다.

사람은 다 자신을 위해 살고자 합니다. 자기 처자식을 위해 살고자 하고 자기 목적과 뜻을 위해, 자기 재물을 위해 살고자 합니다. 이것을 알기 때문에 교회에서 육신을 격려해주고 육신을 세워주고 육신에 힘을 주고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게 하라고 권하는 교회들이 허다합니다.

이들을 그 교회에서 끌어낼 방도가 없습니다. 거기서 신앙생활을 잘 하면서 기쁘고 즐겁고 항상 힘을 주고 격려해주는 말을 듣기 때문에 절대 끌어내지 못합니다.

그런 교회에서는 육신적으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하는 말은 전하지 않습니다.

우리 신앙생활은 거듭나야 합니다. 중생해야 합니다. 그래야 천국갑니다. 그런데 이 말은 강조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신앙의 중심이 그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거듭나야 성령이 들어오시고 성령이 들어와야 하나님 뜻대로 산다고 했습니다.

누가 뭐래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 사는 사람이 그가 그리스도인입니다. 누가 짝퉁이니 뭐니 아무리 말해도 진짜 신앙인은 순종해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려면 자기를 버려야 합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을 부인하지 못하면 순종의 길을 가지 못 합니다.

여러분도 진실된 신앙생활하시길 바랍니다.


거듭나려면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이 기도 없이는 절대로 거듭나지 못 합니다.

하나님은 찾는 그 사람에게 자기를 나타내 보여주시고 기도하는 그 사람에게 길을 보여주십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런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자에게 영적인 눈을 열어주시고 거듭나게 하시고 성령을 주십니다.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지 않겠느냐.’

주님의 약속입니다.

육신의 생명은 마귀의 생명이기 때문에 육신의 생명을 가지고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만이 그를 하나님나라로 인도합니다. 그가 주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18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늙어서 잡혀가서 순교하리라는 말씀입니다.

베드로는 로마에 가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여지없이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19절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20절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께서 사항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님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더라.’

21절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만찬석에 주님 품에 안겨 있던 사람은 요한입니다.

주님이 베드로는 순교해죽을 것이다 말씀하시자 요한은 어찌 되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22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

주님이 재림해 오실 때까지 요한을 살아있는 그대로 놔둔다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요한은 죽지 않고 주님이 재림해 오시는 그 날까지 그대로 살아있을 것이라고 주님이 말씀하셨다고 전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주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너는 그에 일에 상관하지 말라 하시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요한은 벌써 죽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아직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주의 말씀은 믿을 수 없는 말씀이 되고 주의 말씀은 진리가 되지 못합니다.

우리가  목숨을 드려서 헌신할 말씀이 되못 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거짓되고 믿을 만한 말씀이 되지 못합니다.

그렇게 되면 주님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이루신  구원의 전 과정, 구원의 말씀이 다 무너지게 됩니다.

그럼으로 사도 요한은 불가피하게 주님이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은 요한이 주님이 오실 때 까지 살아있을 것이라고 말씀이 하신 것이 아니라고 해명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불가피하게 21절을 추신으로 기록한 것입니다.


주님은 부활하신 몸으로 다시 오셔서 베드로의 죄를 완전히 용서해주시고 베드로에게 완전한 사랑을 나타내 주시고 내 양을 치라고 부탁하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죽기까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였고 그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습니다.

사도요한은 마지막 24절 ‘이 일들을 증언하고 이 일들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

요한은 주님을 참으로 사랑한 제자였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자기를 말할 때 참으로 사랑하는 제자라고 했습니다.

주님도 요한을 참으로 사랑했습니다.

요한은 그의 기록은 다 참되다고 했습니다.

요한의 기록이 참된 것을 알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25절,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요한복음은 AD80-90년 사이에 쓰여진 책입니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이 쓰인 다음에  맨 나중에 기록된 책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는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확실하게 기록된 것들은 제외시키고 빠진 것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주님이 하신 말씀을 중심으로 기록한 책입니다.

요한이 요한복음을 기록하면서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과, 예수는 그리스도임을 알게 하기 위해서 기록했다고 했습니다.

그럼으로 거짓되게 기록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고 마음에 있는 것을 그대로 기록한 것입니다.

요한복음을 보면서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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