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설교모음

사랑이 하는 일과 사랑이 하지 않는 일

작성자황성재|작성시간15.05.17|조회수95 목록 댓글 0

사랑이 하는 것들과 사랑이 하지 않는 것들

2015, 5, 17

행4 : 32-37

본문의 말씀은 최초로 예루살렘에 세워진 교회의 모습입니다.

성도들은 사도들의 지도 아래 한 마음 한 뜻이 되고, 서로 재물을 필요에 따라 나누고 자기 물건을 조금 이라도 자기 것이라고 하는 이가 없는 사랑의 공동체를 이룬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믿는 자에게 요한복음 13장 34-35절에서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하셨습니다.

초대교회가 주의 계명대로 이렇게 서로 사랑하는 사랑의 공동체를 이룬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2절에 “믿는 무리가 한마음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했습니다.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이 강림하실 때 이를 본 사람들 3000명이 예루살렘 교회에 더해졌고, 그 다음 베드로와 요한 사도가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치료함으로 이를 본 사람들이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5000명이 더 해졌습니다.

이렇게 해서 예루살렘 교회는 단 기간에 성도가 갑자기 무려 8000명이나 되는 대형 교회가 된 것입니다.

성도가 8000명이나 되는 교회가 그것도 짧은 기간에 대형 교회가 된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이 모두가 한마음 한 뜻이 되었다는 것은 그들이 믿음의 확신과 큰 은혜 가운데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첫 째 교회는 예루살렘교회처럼 주 안에서 한마음 한 뜻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우리 주님의 몸이고 우리는 그의 지체들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머리되시는 우리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언제나 한마음 한 뜻이 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2장 2-4절까지의 말씀에서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했습니다.

교회는 반드시 이러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서로 의견이 달라 분쟁이 생기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한 교회 안에서 어떤 일을 할 때 일군 된 분들이 의견이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자기 의견을 말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다툼이 생길정도로 자기 의견을 주장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한 교회 안에서 무슨 일로 다툼이 생기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는 서로 겸손해야 합니다.

상대 의견이 크게 잘 못된 것이 아니라면 서로 양보하는 편이 훨씬 더 좋습니다.

교회의 일은 가장 좋은 방법이나 탁월한 의견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이들은 무슨 일에든지 한 마음 한 뜻으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사랑의 교회가 분쟁에 휘말려 있는 것을 볼 때 참 안타깝습니다.

내용을 들어보면 마귀가 틈타 있어 분쟁하고 있는 것은 단 번에 알 수 있습니다.

 

중요한 문제는 자기 주장을 내 세우지 말아야할 뿐 아니라 교회 안에서는 형제를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4장 10절에 보면 “네가 어찌하여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의 이 말씀을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반드시 우리 마음에 정리해 두어야할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형제가 판단 받을 행동을 했으니까 판단하는 것이고, 형제가 업신여길 짓을 했으니까 업신여기는 것이 아니냐고 할지 모릅니다.

그 말이 맞습니다.

형제가 판단 받을 행동을 했고, 업신여길 짓을 했기 때문에 판단하고 업신여기는 것일 것입니다.

 

그러나 형제를 판단하지 말라하시는 말씀과, 형제를 용납하고 용서하라 하시는 말씀과, 형제를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마태복음 6장 14-15절에 “너희가 사람의 잘 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 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 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 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하셨습니다.

18장 35절에도 주께서 정확히 같은 뜻을 반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 7절 우리 주님은 산상수훈에서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긍휼이 여김을 받을 것이요,”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으로부터 긍휼이 여김 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형제를 먼저 긍휼이 여겨야 합니다.

주기도문에서도 우리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짓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하고 고백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모두 연약한 존재로 하나님께 긍휼이 여김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고 죄 용서함을 받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형제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틀림없이 자기 주제를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형제를 판단해서는 안 되고 그 판단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형제에 대한 판단은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그리고 보다 적극적으로 형제을 사랑해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전서 1장 22절에서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영혼은 진리를 순종함으로 깨끗하게 됩니다.

진리를 순종함으로 깨끗하게 된 그 영혼으로 형제를 뜨겁게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한 교회 안에서 형제에 대한 사랑은 특별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요한일서 4장 12절에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온 세상 모든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예수 믿는 형제에 대한 사랑입니다.

특별히 한 교회 안에 있는 형제에 대한 사랑의 실천이 우선입니다.

교회는 주님의 몸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지체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형제를 사랑하고 섬기는 것을 주님을 섬기는 것으로 받아들이십니다.

우리 안에 계시는 주님의 사랑은 소외되고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형제를 섬김으로 나타나는 사랑입니다.

100%로 그러하십니다.

우리가 죄인 되었고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계시면 100% 가난한 형제를 섬기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안에 계시는 주님이 형제를 사랑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도 우리 안에서 형제를 사랑하시는 그 주님의 사랑에 힘써 동조해야 합니다.

 

20년도 더 된 애기인데 처형이 음성 어딘가에 가 있는 남편이 오래 동안 소식이 없어서 애기를 업고 찾아 나섰습니다.

그 동안 정확한 거처를 알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식도 전하지 못하고 또 찾아가지도 못했습니다.

할 수 없이 처형이 애기업고 형님을 찾아 나선 것입니다.

서울 가서 김서방 찾는 식으로 이 사람 저 사람 찾아다니며 묻는 중에 시장에서 포목상을 하는 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잠시 쉬면서 그분과 이야기를 하다가 그분이 교회 다니는 것 같아서 처형도 교회 다닌다고 했습니다.

처형이 교회 나가는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 자기가 나서서 찾아보겠다고 하더랍니다.

타지 사람이 이렇게 막연한 말만 가지고 더욱이 애기 없고 다니면서는 찾기 어려울 것이라고 하면서 자기 가게를 이웃 사람에게 맡기고 그분이 발 벗고 나서서 한 나절을 이리 저리 찾아다니며 남편이 있는 곳을 찾아 주었다고 합니다.

처형이 내게 하는 말이 생명 부지의 사람이 내가 교회 다닌다는 한 마디 말에 가게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한 나절을 이리 저리 수소문해서 돌아다니면서 찾아 주었다고 믿음의 형제에 대한 사랑에 감동을 해서 내게 말했습니다.

나도 그 말에 감동을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이 예수 믿는 형제라면 그가 타지 사람이든 외국 사람이든 우리 모두 이 포목점 주인처럼 사랑을 베풀어야 옳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그 안에 계시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의 장입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 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우리에게 사랑이 없으면 하나님을 아는 모든 지식도 믿음도 섬김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주의 모든 계명보다 우선 되는 첫 째 계명으로 사랑의 계명을 지키라고 하십니다.

사랑의 계명은 성경의 모든 계명보다도 우선 되는 계명임을 여러분도 알아차렸을 것입니다.

요한 사도는 요한일서 3장 14절에서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이 말씀을 통하여 사랑의 계명이 얼마나 중요한 계명임을 이해하셨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의 정의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의 정의를 말한다면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나니.”하시는 요한복음 15장 13절 말씀이나, 혹은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해서 화목제물로 그의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이라 하시는 요한일서 4장 10절 말씀일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사랑이 아닌 것 15가지와 사랑이 하는 일 몇 가지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서로 자랑했습니다.

그들은 악한 행위를 하고도 교만했습니다.

형제에 대해 용납할 마음이 없어서 서로 법정에 고발했습니다.

자기 유익을 구하고 그들 서로 끼리끼리 어울리는 사람들만 교제했습니다.

무례히 형제를 대했습니다.

주의 만찬에 형제를 배려하지 않았고 자기들끼리만 좋은 음식을 먹으며 가난한 형제들을 부끄럽게 했습니다.

그들은 시기와 질투를 했습니다.

그들은 서로 은사를 비교했고, 어떤 은사는 별 가치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은 견디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진실로 사랑하는 이들에게 이렇게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사랑은 시기하거나 질투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자랑하거나 뻐기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교만하거나 우쭐대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무례히 행하거나 상처를 주지 않는 다고 했습니다.

자기 유익을 구하거나 아집은 내 세우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사랑은 성내거나 쉽게 짜증내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원한을 품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사랑은 상대의 불행을 기뻐하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랑은 온유하며 친절하다고 했습니다.

사랑은 진리의 승리를 기뻐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사랑이 하는 것들입니다.

 

두 번째는 초대교회에서는 물건을 서로 통용했다고 했습니다.

초대교회에서는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고 하는 이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들 중에는 가난한 사람이 없었으니 이는 밭이 있는 사람은 밭을 팔아서 그 돈을 사도들 앞에 가져다 놓았고, 집이 있는 사람들은 집을 팔아서 그 돈을 사도들 앞에 가져다놓았다고 했습니다.

그 중에 특별한 예로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바나바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 밭은 팔아서 그 값을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다고 했습니다.

사도들은 그 재물을 평등하게 나눈 것이 아니라,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 나누어 주었다고 했습니다.

 

한 교회 안에서 끼니가 없어 밥을 먹지 못하는 주리고 있는 형제가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바나바처럼 자기에게는 밭이 있어요.

그것을 팔면 그 사람들의 밥을 먹게 할 수 있어요,

그래서 바나바는 밭을 팔아서 사도의 발 앞에 가져왔을 것입니다.

사랑은 이 처럼 형제의 궁핍함을 자기의 궁핍한 것처럼 생각하게 합니다.

자기의 다음을 생각해서 자기의 것을 남에게 줄 수 없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다음날을 생각하는 사람은 형제에게 은혜를 베풀 수 없습니다.

요한일서 3장 17절에 요한 사도는 말하기를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참된 믿음을 가졌다면 우리가 영생을 얻은 하나님의 자녀라면 형제의 어려움에 이런 사랑을 나타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살아 있을 때 큰 사고 한 번 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옥합을 깨트린 마리아처럼 우리 자신을 주님 앞에서 깨트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도 주께서 기뻐하시는 일에 우리 자신을 크게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정신이 온전할 때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형제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형제에게 이런 사랑을 나타낸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물질적으로도 크게 갚아 주실 뿐 아니라, 영적으로도 큰 진보를 나타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주님께 드리는 헌신과 형제에 대한 사랑을 마땅히 나타내야할 때에 나타내지 못한다면 사망의 세력이 우리 안에서 더욱 굳세게 자리 잡고 죄가 왕 노릇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초대시대에 전 세계적으로 가뭄이 들어서 예루살렘 교회에 큰 고난을 겪게 되었습니다.

사도들은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성도들의 문제로 여러 나라에 흩어져 있는 교회들이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구제헌금을 하도록 종용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여러 나라에 있는 교회들에게 구제 헌금을 하라고 권했습니다.

그 예로 고린도후서 8장 전체를 할애해서 고린도교회에게 헌금할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마게도냐 교회들의 궁핍한 가운데서도 풍족한 헌금을 한 것을 예로 들면서 헌금하라고 권합니다.

마게도냐에는 교회는 빌립보교회 데살로니가교회 그리고 베뢰아교회가 있었습니다.

그 교회들은 지극히 가난한 교회들이요, 환난의 많은 시련을 당하는 교회들이지만 그러는 중에서도 넘치는 기쁨으로 헌금을 했고 또 극심한 가난 가운데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했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에 대해서 “그들은 힘대로 했을 뿐만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이 은혜에 참여했다.” 고 했습니다.

그들은 먼저 자신을 주님께 드리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 헌금에 참여했다고 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일에 그리고 형제를 돕는 일에 힘대로 할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해 본 일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서 사도는 고린도교회 성도에게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간절함을 가지고 말하노니 너희도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사랑을 헌금을 통하여 증명하라.”고 했습니다.

너희 믿음이 참 되면 그 참된 믿음을 헌금으로 나타내라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도서 3장에서도 그레데 교회에서 사역하는 디도에게 서신을 보내 그레데 교회의 성도들에게 헌금하도록 하여 그들로 하여금 이 선한 열매를 맺게 하라고 권했습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가 유대인들의 핍박과 물질의 궁핍함으로 인하여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지만 오히려 이로 인하여 여러 교회들이 힘을 다하여 헌금하도록 하여 주 안에서 형제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었고, 사도 바울의 말씀처럼 여러 교회의 성도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열매를 많이 맺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세 번째는 초대교회가 주 안에서 한마음 한 뜻이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주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33절에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나는 복음의 중심 내용 세 가지를 여러 모양으로 말씀드렸습니다.

복음의 세 가지 중심 내용은 그 증거가 분명하고 확실하여 그 증거를 찾고자하는 사람이 있다면 누구나 쉽게 그 증거들을 찾을 수 있고 또 확신을 갖기에 충분한 증거들입니다.

희미한 증거들이 아니요, 불충분한 증거들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 자기는 스스로 믿는 다고 생각하지만 확신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어느 시대나 그래 왔습니다.

그들 안에 성령이 계시는 것을 전혀 알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복음을 들어서 알고 있는 것으로 스스로 믿는다고 생각하며 만족하고 있지만 살아계신 주님과 실제적인 교제를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청교도들은 이들을 잠정적인 믿음의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거짓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내가 이제까지 목사로서 지켜 본 바로는 마음을 다하여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찾고 살아계신 주님에 대한 증거를 찾는 이들이 믿음에 이르지 못한 경우는 없었습니다.

이들이 잠정적인 믿음을 갖고 있는 것은 주님을 마음을 다해서 찾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중생한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또는 성령을 선물로 받은 믿음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확실히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깨닫게 되고 그 신성을 통해서 예수님의 대속의 십자가를 볼 때 죄 사함의 확신을 얻는 것이요, 성령을 선물로 받는 것입니다.

아멘.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