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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의 회심

작성자황성재|작성시간15.10.18|조회수245 목록 댓글 0

 

사도 바울의 회심

2015, 10, 18

행 9 ; 1 - 9

본문은 사도 바울의 회심에 대한 기록입니다.

사도 바울의 회심 사건은 본문과 22장 그리고 26장 사도행전에서만 세 번 같은 내용을 기록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과 같은 회심은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는 이 후 교회사에서 다시 볼 수 없는 아주 특별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처럼 회심한 사람은 기독교 역사에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회심한 이후 그 생명을 바쳐 복음을 전 세계에 전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 기독교 역사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초대교회 시대에 사단이 복음을 변질 시키려고 온갖 책략을 다하고 끝없이 계속해서 도전해 왔지만 사도 바울이 있어 이를 저지하고 지켜 왔기에 오늘날과 같은 순전한 복음을 우리가 갖게 되었으며, 그가 이 복음을 전 세계에 전파했기에 동 서양에서 이 복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신약성경 27권 중에서 사도 바울의 서신이 13권으로 거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도 그가 기독교에 미친 영향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서신을 통해서 복음을 넓고도 높고 깊은 이해를 갖게 되었고, 특별히 대속의 십자가의 복음에 대한 깊고도 충분하고도 확실한 이해를 갖게 되었고 성령님을 알게 하는데 우리들에게 큰 빛을 비추어 주었고 결정적인 안내자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빛 가운데 만나는 기록을 통해서 나사렛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그분은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빛 가운데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신 것을 잘 나타내 주신 사건입니다.

나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을 만나시고 부르시는 것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확신과, 그분이 하나님이시라는 확신과, 예수께서 대속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은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 죄 사함과 새 생명을 주기 위해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라는 것을 확실히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회심하는 경로를 그대로 따라 가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 삼으시는 그 크고 무한하신 은혜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사도 바울이 회심하기 전에 이름은 사울이었습니다.

사울이라는 청년은 당시 유대인들이 그러했듯이 예수 믿는 자들을 이단으로 생각했습니다.

예수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크게 욕되게 하는 자들로 결코 용납해서는 안 되는 이단으로 다 잡아 감옥에 넣으려고 했습니다.

그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충성스러운 종 스데반 집사의 무고한 피를 흘리고도 분이 풀리지 않아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미쳐 날 뛰는 피에 굶주린 짐승처럼 그리스도인을 죽이려 했고, 교회를 아주 말살하려 했습니다.

그가 교회의 원수요 복음의 원수로 야수처럼 미쳐 날 뛸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를 부르심으로 그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만드신 사건입니다.

사나운 이리가 양으로 변하였을 뿐 아니라, 사단의 종이 하나님의 큰 목자로 변하는 데에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손길이 그를 붙잡으셨고 그 때 사울은 예수는 그리스도이심을 분명히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1절과 2절을 보시겠습니다.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 오려 함이라.”

여러분은 유대인들이 스데반 집사를 돌로 쳐 죽이는 사건과 함께 예루살렘교회에 큰 박해가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그 박해로 인해 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은 온 유대와 인근 여러 나라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다메섹 성에도 예수 믿는 성도 상당한 수가 박해를 피해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를 아는 사울은 자청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공문을 청하여 권세를 받아 다메섹성의 여러 회당에 가서 예수 믿는 자들은 남녀를 막론하고 잡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데려 오려고 다메섹 성을 향해 갔던 것입니다.

전쟁 중에도 여자들은 살해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남자든 여자든 닥치는 대로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 감옥에 넣고, 그들을 파멸 시키고 아주 말살시키려는 것이 그의 의도 였습니다.

사울은 오직 그것만이 하나님께 충성된 자의 마땅히 행할 일이라고 스스로 그렇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나도 그의 열정을 조금은 이해를 합니다.

나도 이단을 보면 피가 거꾸로 서는 것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중앙일보 지난 14일자 신문에 기재된 내용인데 프란치스코 교황이 동성애자를 포용하고 용납한다는 그의 발언에 보수성향의 추기경 13명이 비판의 서한을 교황에게 보냈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습니다.

교황은 사랑과 사랑의 실천에 대해서 크게 강조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역대 어느 교황보다도 전 세계인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는 인물입니다.

그리고 그는 종교적으로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세계적인 매우 큰 영향력을 가진 인물입니다.

이러한 그가 동성애자를 포용하고 용납한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이는 성경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행위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 9절과 디모데전서 1장 10절에 동성애자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성경에 동성애자는 지옥의 형벌을 면치 못할 자로 규정하고 있는데, 그가 참된 하나님의 종이라면 성경을 부인하고 동성애자를 포용하고 용납한다는 선언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가 무슨 권세로 성경의 권위를 넘어서 동성애자를 포용한다는 선언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천주교에서 교황 다음의 직위로 추기경이 있습니다.

추기경은 전 세계에 270명이 있습니다.

추기경 270명 중에 겨우 13명만 이를 반대하는 서한을 보내고 나머지 257명의 추기경들은 교황의 말대로 동성애자를 포용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입니까?

천주교의 규정에 의하면 교황의 선언에 반기를 드는 것은 파면을 각오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을 부인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저들이 정말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성경을 부인하는 교황의 말에 파면 아니라 그 이상을 당한다 해도 단호하게 반대하고 나서야 하지 않겠습니까?

추기경은 각 나라에서 존경을 받는 자로 그 나라에서 큰 영향을 가진 사람들인데 교황이 동성애자를 포용한다고 선언해도 그를 반대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심각한 문제는 덩달아 기독교도 동성애자를 포용하는 교회가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성경 말씀을 부인하는 교회들을 보면 피가 거꾸로 솟는 분을 느낍니다.


3절과 4절을 보시겠습니다.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에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 지라 땅에 엎드려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사울이라는 청년은 미쳐 날 뛰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그를 부르신 것은 그 중심은 하나님에 대한 충성된 자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사울이 다메섹을 향하여 가게 하시고 그가 그 성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그를 부르셨다는 것은 주께서 주의 일을 실천하시는데 있어 가장 좋은 정확한 순간을 택하시어 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막 이리가 양의 우리에 들어가서 양들을 포악스럽게 물어뜯기 전에 그 이리의 아가리를 꼭 다물게 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울이 다메섹 성에 들어가서 공포에 떠는 주의 양들을 포악스럽게 끌어내서 과격하게 체포하기 전에 그가 성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주께서 그를 불러 주 앞에 무릎을 꿇게 하셨던 것입니다.


사울 일행이 다메섹 성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갑자기 대낮 정오의 빛 보다 더 강한 빛이 홀연히 하늘로부터 사울의 일행을 둘러 비추었습니다.

그 때 사울 일행은 땅에 엎드러졌습니다.

그 빛은 홀연히 하늘에서 그들만을 둘러 비추는 빛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열왕기상 8장 10-11절을 보면 솔로몬이 칠년 동안 성전건축을 완공하고 성전 봉헌식을 할 때 “여호와의 성전에 구름이 가득하여 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말미암아 능히 서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하였더라.”하는 기록이 있습니다.

사울 일행도 하늘에서 둘러 비추는 그 빛 가운데 서 있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도 요한도 같은 경험을 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주님이 이 땅에 계실 때 날마다 주와 함께 동행한 제자였고, 주께서 부활하셨을 때에도 친히 본 사도였고, 또 주께서 하늘로 올라가실 때에도 머리를 들어서 주께서 그의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바라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한 사도가 요한계시록 1장 17절에서 주께서 그 앞에 나타나실 때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다니엘도 같은 체험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니엘 10장 8절에 다니엘이 주님의 환상을 볼 때 “내 몸에 힘이 빠졌고 나의 아름다운 빛이 변하여 썩은 듯하였고 나의 힘이 다 없어졌으니.”라고 했습니다.

사울도 역시 주의 영광에 압도 되어 요한처럼 죽은 자처럼 되었고 다니엘처럼 온 몸에 힘이 다 빠져 그의 아름다운 빛이 변하여 썩은 자처럼 되어 엎드려져 있었을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대면하게 되면 그 영광에 압도될 수밖에 없고 썩은 자처럼 될 수밖에 없습니다.


땅에 엎드려져 있는 사울에게 말씀하시는 이가 있었습니다.

“땅에 엎드려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사울이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나이까?” 하고 물었습니다.

하늘에서 나는 음성이 있어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하시었습니다.

그 때 사울은 그분이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 동안 그는 하나님을 대적하여 악한 짓을 해 왔던 것입니다.

자기가 그토록 박해해 왔던 나사렛 예수가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구주로 오신 분이시오, 그분이 하나님 그분이심을 그 순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사단은 빛으로 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직 빛 가운데 오시는 분은 하나님 한 분 뿐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늘에서 정오의 빛 더 강한 빛으로 홀연히 사울 일행을 둘러 비추신 그 빛과 사울과 그 일행이 함께 하늘에서 들려오는 그 음성을 듣는 것은 사울이 지금 환상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는 사울이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 미친 듯이 포악스럽게 대하며 멸하려고 했던 그를 친히 빛 가운데 불러서 만나 주시고 회심시켜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내가 죄인 중에 괴수요 죄인 중의 죄인이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가 회심하고 변하여 주의 사도로 복음을 전할 때 그가 이전에 예수 그리스도의 원수로 행하며, 극렬하게 대적했던 대로 유대인들이 이제 그를 향하여 심히 대적해 오고 방해해 오는 것을 회개하는 마음으로 인내하며 주의 충성스러운 종으로 복음을 세상 끝까지 전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고린도전서 11장 23-27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진술하고 있습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많이 하고 매도 수 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40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학고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춥고 헐벗었노라.”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말하기를 “이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것이 있으니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여러분 우리도 주님으로부터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을 받고 주의 제자들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교회에 대한 바울 사도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갖기 바랍니다.

우리도 사도들처럼 볶음을 전하는 것을 가장 큰 목적으로 삼아야 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주님께서 우리가 전도하는 일을 가장 중요한 일로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멸망에서 구원을 받고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을 얻었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영원한 멸망에서 구원을 받고 하나님 나라의 생명을 얻은 말할 수 없이 하나님의 큰 은혜를 입었으면서도 입을 다물고 그 은혜를 전하지 않는다면 사도 바울은 우리 영혼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주의 명령을 따라 이 복음을 전할 때 주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주께서 지신 그 십자가를 분담하는 자로 여기시며, 이제도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확실하게 약속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를 위해 오늘날 우리가 복음을 으로 전하다 받는 모든 고통을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 받으시는 고통을 우리가 나누어지는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만을 위해서 사는 것은 주님 앞에 부끄러운 것 아닙니까?

골로새서 1장 24절에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하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주의 몸된 교회를 위해서 주님의 남은 고통을 우리 몸에 채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여기 기록된 하나님을 대적하던 사울이 하나님의 사도가 된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부르심이요,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사울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은 천성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교만과 반역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적인 문제로 하나님의 부르심이 없다면 우리는 주께로 돌아올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천성적으로 하늘에 대해서는 소경이요, 지극히 어리석을 뿐 아니라 사악하고 불의한 존재로 하나님의 지혜와 의에 참여할 수 없는 자들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사울을 다메섹 도상에서 불러서 그분의 종으로 삼으신 것처럼 그분의 자비하심과 은혜를 우리를 불러 주셨기 때문에 복음을 듣고 우리의 교만을 꺾고 하나님 나라의 지혜와 의와 생명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여기 사울처럼 주께서 우리를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우리를 불러 주시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천성적으로 하나님께 돌아올 수 없는 악인들이요, 어리석은 자들이요, 불의한 자들입니다.


6절과 7절을 보시겠습니다.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

사울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기록이 22장에도 있다고 말씀드렸지요.

그곳에는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을 보면서도 나에게 말씀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말씀과 22장의 말씀을 종합해 보면 사울의 일행은 그들을 둘러 비추는 빛은 보면서도 그들에게 들리는 소리가 무슨 소리인지 누가 그들에게 말하는 것인지 그것을 알지 못해서 어리둥절하며 서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들에 대한 기록은 이달이 사울이 주님을 만나는 증인들이기 때문에 여기에 기록된 것입니다.

사울과 함께했던 그 사람들은 주의 음성을 듣지 못했으나 사울은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시는 말씀을 토씨 하나 놓치지 않고 분명하게 주의 음성을 들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주의 부르심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회심하여 믿는 자가 되었다는 기록이 성경에 없습니다.

사울 혼자서만 주의 부르심을 받았고, 주의 음성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그런 일은 있습니다.

같은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도 누구는 주의 음성을 듣고 또 누구는 듣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의 음성을 들은 자는 크게 변하고 새 생명을 얻게 됩니다.

요한복음 5장 25절에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하셨습니다.

주의 음성을 듣는 자라면 그 때가 언제이든 그 자리가 어디이든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8절과 9절을 보겠습니다.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흘 동안을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사울은 혼자서 일어날 수 없을 정도로 탈진 상태였고, 그의 시력까지 잃게 되어 눈은 떴지만 앞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의 눈에 비늘 같은 것이 덮여 눈먼 상태가 사흘간이나 계속되었습니다.

그는 다메섹 성으로 들어가서 사흘 동안이나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고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사울에게 나타나시어 그를 사도로 부르신 사건은 주님이 부활하시어 하늘로 올라가신지 30년 후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부활하신 우리 주님이 빛 가운데 사울에게 나타나신 사건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첫 째는 우리 주님은 살아계시며 하늘에 계시며 그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주께서 하늘에서 빛 가운데 나타나시어 사울을 사도로 부르시며 그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부탁하신 것은 복음에 기록된 말씀대로 믿는 자들은 영원한 생명의 부활로 나타나고 죄인들에게는 영원한 사망으로 심판을 받는다는 것을 확증하여 주신 사건이기도 합니다.

주께서 하늘에서 빛 가운데 하신 말씀은 영원히 변치 않는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그 빛이 증명해 주는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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